공존
유태리
정말 강렬한 기억이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할거없이 뒹굴뒹굴 거리다 보니 내가 필리핀을 다녀왔다는 사실이 애매모호한 꿈처럼 느껴진다. 분명 우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치고받고 싸우고 또 다 같이 놀면서 차츰 서로에게 녹아들어 갔는데 집에 돌아와서 혼자 지내니까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아직 에세이에 쓸 만한 것이 남아 있을까봐 페어웰 파티랑 필리핀에서의 기말 주간에 쓰지 않고 미루고 미루다가 비로소 집에 와서 쓰기 시작한 건데 오히려 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큰일났다.
우리 반은 각자의 강한 개성이 잘 드러나는 만큼 필리핀을 가는 것에 대해서도 꽤 호불호가 갈렸다. 나는 그냥 필리핀에 빨리 가고 싶어하는 편이었다. 딱히 구체적인 기대나 목표는 없었지만 여태까지 선배들에게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더 안달이 났다. 큰 걱정도 없었고 또 큰 기대도 없이 필리핀에 도착 했을 때, 훅 들어오는 열기와 지프니에서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와 이제 시작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또 3일이 지나고 ‘와 3일이 3개월 같아’ 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었다. 발렌시아 투어, 두마게티 투어, 수업이 시작하고 몇 주가 빠르게 지나가니 홈스테이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
솔직하게 말해 보자면 홈스테이를 하는 ‘동안’에는 집에 있기가 너무 싫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하고 바로 같이 지내야 하고, 16기나 샘들은 자주 볼 수가 없고, 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들은 우리에게 너무 잘해 주어서 불만이 고개를 들어도 자꾸 집어넣어야 하고....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어색함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도 친절히 대해주는 가족의 모습들에 나도 본능적으로 홈스테이 가족들과 똑같이 행동하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뮤랄 페인팅 하면서 16기하고 만났다가 헤어지는 시간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9일이 모두 지나고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을 때는 내가 이전에 느꼈던 것과는 반대로 우리 언덕 위 경치 좋은 작은 집에 조금만 더 머물고 싶어졌다. 홈스테이 페어웰 파티와 작별인사도 나누고 분위기를 잡아서 그런 건가도 싶었지만 아쉽다고 서로 끌어안고 우는 가족들과 친구들을 봤을 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이후에 잠보앙기타를 방문했을 때나 마지막 만남인 페어웰 파티에서 다 같이 포옹하고 울고 인사할 때도 너무 반가웠고 또 너무 아쉬웠다. 진짜 가족만큼 투머치 친밀한 관계가 아니지만 이제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나도 모르게 더 밖으로 드러내게 되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다시 수업을 시작하고 주말에 할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필리핀 이동학습 페어웰파티 공연준비, 개인 프로젝트와 수업 마무리를 하면서 애들하고 협력해야 하는 일이 훨씬 많아졌다. 필리핀에 있었던 모든 시간동안 그랬지만 우리는 더 많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던 어느 주말, 애들이 대부분 나가고 나와 나윤이만 학교에 남아 수영을 했을 때 나윤이가 말했다. ‘필리핀에서는 진짜 바쁨과 여유가 공존하는 것 같아.’
나는 그 말에 깊이 공감했다. 바쁘게 기말을 살아가다가도 어느 주말에는 여유롭게 수영이나 하고 있고. 그렇게 가끔 생기는 짬에 의지하면서 한 달을 버텨낸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근데..
마지막 무비 나이트가 끝났을 때,
후회없는 무대를 만들자며 파이팅을 외쳤을 때,
매일같이 런을 돌리고 그 무대가 페어웰 파티에 올라갔을 때,
홈스테이 가족들과의 마지막 만남이 끝났을 때,
패트릭 샘이 한 명씩 불러 비밀이라며 키링을 하나씩 손에 쥐어주실 때,
스승의 은혜 노래를 몰라서 Remember Me를 부르기로 하고 연습할 때,
필리핀 샘들이 한 명씩 나와서 얼굴이 새빨개지고 눈물이 맺히면서 작별의 말을 전할 때,
한 명씩 샘들과 포옹하며 울고 또 웃기를 반복하는 것을 함께할 때, 그리고.......
떠나는 배와 버스에 탔을 때.
필리핀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거의 다 끝나갈 때도 몰랐던 걸 끝이 이미 찾아온 때에야 비로소 알아버렸다. 이렇게 끝나니까 떠나기 싫은 마음이 있는 건 아닌지, 진짜 여기에 더 머문다면 다시 집에 가고 싶어지지는 않을지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다 집어치우고 그럴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너무 슬펐다. 필리핀으로 떠날 때 걱정이 많았던 친구들이나 집에 가고 싶어하던 친구들도 나와 별 다를 거 없이 그 시간만큼은 아쉬워하고 있었을 거다. 그만큼 우리가 필리핀에서의 104일 동안 함께 공존하면서 서로를 부드럽게 깎아 주었다는 사실을 이제 와서야 느끼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깔리까산에 방문해야겠다 반드시.....! 아 근데 진짜 패트릭 샘 너무 보고싶다 어떡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