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과 경찰은 급이 다르다?. 시쳇말로 클래스가 다르다? 검사는 어려운 사법고시를 통과한 집단이다. 이 집단이 보기엔 경찰은 이 급에 미치지 못한다. 경찰대학을 나온 경찰과 그렇지 않은 경찰은 급이 다르다. 우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가끔 급이 다르다는 기준을 제시할 때가 있다. 문제는 우리가 제시하는 기준은 보편적 기준일 수 없다. 나 자신이나 특정 집단이 제시하는 기준은 나 혹은 그들만의 기준일 뿐이다. 나이 든 사람의 기준으로 젊은 사람을 평가할 경우, 그 기준은 꼰대의 기준이 된다. 반면 젊은 사람의 기준으로 나이 든 사람을 평가할 경우 자칫 노인 폄훼의 기준이 될 수 있다
한자 급(級) 자는 糸(가는 실 사) 자와 及(미칠 급) 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及 자는 사람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級 자의 갑골문을 보면 糸 자가 아닌 阜(언덕 부) 자에 及 자가 결합한 형태였다. 마치 사람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과 같다. 이후 〈소전〉에서는 阜 자가 糸 자로 바뀌지만, 갑골문에 나온 대로라면, 級 자가 사람이 계단을 오르는 모습에서 ‘등급’이나 ‘층계’라는 뜻을 갖게 됐음을 알 수 있다.
눈은 세상을 보는 창이다. 그런데 이 창에 또 하나의 창인 안경을 끼고 본다. 만약 노랑 안경으로 세상을 보면 모두 황달병 환자로 보인다. 빨간 안경으로 보면 모두 불난 집에 들어앉아 있다. 그렇다고 세상이 다른 건 아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의식하든 안 하든, 나는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 서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 선입견은 말 그대로 먼저 입장을 세우고 보는 것이다. 중립화는 선입견을 괄호 쳐 두고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이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판단을 잠시 중단하는 것이다. 이게 에포케이다. 세상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조치이다. 타자의 존재 자체가 있는 그대로 나에게 드러나게 하는 조치이다.
그러나 아무리 선입견을 벗어던지려고 해도 나의 판단의 근저에는 그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판단 이전의 선입견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걸 ‘선(先)판단’이라 한다. 선판단은 사물을 이해하기 위한 토대이다. 그래서 선(先)이해라고도 할 수 있다. 동일한 정치 현실을 바라보더라도 자신의 선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개인으로는 개성이나 신분, 취미나 성의 구별 등등이다. 아무리 중립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리고 항상 나의 입장에서 볼 수밖에 없다. 진화론자의 눈으로 창조론을 이해할 수 없다. 창조와 진화는 전혀 다른 선입견으로 쌍을 바라보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에 어떤 공통분모도 없다. 공통분모로 약분할 수 없는 것은 불가공약성(incommensurability)이라 한다.
세상에는 아무리 공통분모로 약분하려 해도 불가능한 일들이 많다. 서로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관점을 존중하는 일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서로 다른 지평이다. 그렇기에 대화를 통해 지평을 융합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수밖에 없다. 장수한 철학자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2022)는 서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두 개의 지평을 융합하는 과정을 해석이라 한다. 여기엔 겸손도 인내도 때론 용기도 필요하다. 해석(interpretation)은 단순한 번역(translation)이 아니다. 두 지평 ‘사이’(inter)를 읽는 것이 해석이다. 해석은 기존의 지평을 근거로 새로운 지평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지평 융합은 하나의 지평이 다른 지평으로 흡수되거나 단순히 겹쳐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지평임을 인정하면서 그 다름을 넘어 새로운 지평으로 합의해 가는 것이다.
나의 입장과 다른 입장에서 생기는 차이는 나와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 흔하게 틀리게 사용하는 게 ‘다르다’와 ‘틀리다’이다. 우린 종종 나와 생각이 ‘틀린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 틀린다고 하는 이유는 내 생각이 옳다는 전제에서 그렇다. 그러나 한발 물러나 생각하면 내 생각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르기에 존중해야 한다. 이게 이상적 대화의 첫째 조건이다. 오늘따라 고등학교 동기 단톡방이 뜨겁다. 역사논쟁은 뜨거울수록 좋다. 그것 역시 새로운 지평으로 이르는 도정이다. 다만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혼탁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상호 인정이 대화의 첫 걸음이다.
타자를 급이 다른 존재로 보는 그 잣대를 내려놓아야 한다. 존재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고 절대적이다. 존재라는 사건 자체는 놀라운 사건이다. 그 누구도 나의 존재를 대체할 수 없다. 소유로 존재를 저울질해서는 안 된다. 그만큼 존재는 나와 타자를 공정하게 평가하는 기준이다. 타자의 존재에 귀를 기울이는 겸손이 필요하고, 타자의 존재를 경시하는 어떤 일에도 과감하게 대응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존재 자체에서 풍겨오는 향기를 그리워해야 한다.
우린 존재가 아닌 존재자에 귀를 기울이는 데 익숙하다. 그가 무엇을 하는 존재자이고, 어떤 직업을 가진 존재자이고, 얼마나 권력을 가진 존재자인지에 관심이 많다. 그러다 보면 존재는 존재자에 가려 드러나지 않는다. 존재가 경시된다. 타자의 존재를 경시하는 것보다 더 비윤리적인 것은 없다.
철학은 타자의 존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로부터 들여오는 진리의 소리를 듣고 거기에 응답하는 것이다. 진리의 거처는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이다. 탁월한 언어를 무기로 그 존재의 진리를 지키는 파수꾼이 바로 시인이다. 존재의 소리는 물리적 언어로는 들을 수 없다. 존재의 언어는 대상적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는 것이 철학이다. 사실 존재 자체는 향기도 소리도 색도 없다. 그래서 더 세심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온통 세상은 존재 망각의 비극적 역사로 빠져든다.
첫댓글 _((()))_ _((()))_ _((()))_
이데올로기, 종교, 정치 이야기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곧 극한 감정으로 비화될 수 있음을 경험했습니다.
좀더 낮은 자세로 상대의 말을 경청할 수 있기를~
고맙습니다.
소유냐 존재냐?
에릭 프롬의 책들 중 하나이다.
자본주의 물질주의 경쟁주의에서는 소유를 추구한다. 소유가 몸에 배여 있다.
사는 것이 소유의 과정이라 여긴다.
사회문화 제도 관습도 등달아 그렇다.
더 많이 가지고자 하고, 더 빨리 더 높이 가려고 함이
머리속을 온통 채운다.
중생심으로 사니 당연한 일.
물질의 유무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을 등급매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자신이 덜 가졌다고 패배 소외 자격지심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또한 남을 물질때문에 괜히 비난 차별 무시해서도 안된다
물질소유정도를 잣대로 매기면 곤란.
어린왕자에 어른들은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수치로 평가한다
안타까운 일..
사람마다 보는 시야가 다르다. 눈이 다르다.
객관화가 필요
자기는 주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존재인지
어떤 안경을 끼고 있는지
고정관념 선입견은 또한 어떠한지도 잘 파악해야 한다
왜 그리 해야 하나?
진리 실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보아야한다.
정견 정사유
잘못 보는 것은 진리를 벗어나 고통을 만들어 낸다.
옳게 보고 옳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행함은
결국 자신을 더 진실되고 참되게 하고, 편안 행복하게 만들고 남과 세상을 사랑하게 한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행복하세요.
@후설 별 말씀을 .. 좋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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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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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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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