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아버지 영정 앞에
-아버지 돌아가셨다!-
"그래? 많이 힘들겠구나! 이제 가실 때가 되어 마음으로 준비는 했겠지만 마음이 심히..."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친구에게 할 말을 찾아 머리 속을 뒤적거렸다.
"그냥 끊허! 바뻐!"
바쁘겠지! 외딴 곳으로 이사를 가서 먼 곳에 있는 지인들께 연락을 하자니.... 글구
하두 들어 본 형식적 인사는 그말이 그말 일테고...
그 친구는 40여년이 넘은 고향 친구처럼 끈끈한 사회 친구였다.
처음 만날 때부터 부모님과 동생들 모두 다 알고 있던 그런 가까운 사이여서 명절 때 찾아가도 부담이 없는 친구였다. 오히려 '너 명절때 갈데 없으면 우리 집에 오라'고 까지 하였다.
부인과 연애를 하던 청춘시절부터 지금까지 모두 내 기억 속에 있고 늘 부족한 내가 못 챙겨 주어 그렇지 그 친구가 나를 외면한 적은 없었다. 나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적에도 아산에 까지 두 번이나 다녀갔고 그런 이유로 나는 그 친구가 부모님 상을 당하면 그때는 장지까지 따라가겠다고 스스로 약속하였다. 그는 진하고 끈끈하게 만드는 힘으로 나보다 더 내게 관심을 주는 친구였다.
더구나 친구가 맏이인 관계로 이따금 부담없이 들락거리다 보니 형제들이나 가까운 일가들은 내가 거의 다 알게 되었다. 그런 그 친구는 나보다 2살이나 연배였고 연연생인 그의 여동생도 사실 나보다 더 연배였다. 그런데도 사회에서 만났다는 이유로 친구가 될 수 있었고 그 끈질긴 정은 오늘 나를 장례식장에서 밤샘을 하게 하는 내 자신을 보게 되었다.
예전에는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우며 친구들이 함께 있어 주는 것이 가장 큰 위로였다.
행여 상주가 너무 피곤하면 친구들은 내 부모님이라며 정승의 벼슬 같은 상주의 완장을 대신 차고 아들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친구라는 '인간관계'는 좋은 것이었다. <또 예전에는 상주의 끗발도 대단하였다. 상주 복장을 갖춘 상주는 무사통과 내지는 무법자라 칭하여도 될 정도였다.>
친구는 아버님이 일주일을 병원에 계시는 동안 수발을 다 들어 준 관계로 많이 피곤해 있었다. 더구나 예전 같으면 형제가 많은 집안은 밤셈하며 영안실을 지키기에 별 무리가 없었는데....
나이가 들어 피곤해 하고 있는 큰아들인 나의 친구는 돌아가신 아버님의 영정사진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러나 아버님 영정 앞을 비켜서지 못하는 이유는 그동안 뫼시고 있던 정과 또 끊어내리지 못하는 그리움 때문에 못내 피곤함을 물리쳐가며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 같아보였다.
"그 완장 내놔 봐! 내가 차고 있을께!"
12시가 넘으면 문상객은 거의 발길이 끊어지고 장례식장 출입문에도 자정 전에 문상을 마칠 것을 권유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다만 가시는 님이 두 눈을 뜨고 바라보고 계신 영정 사진 앞에서 잠시나마 내 부모님을 향한 '효'릏 대신해 보고 싶은 '지기'가 되고 싶은 맘 때문이었다.
호상이라 그런지 서럽게 통곡하는 일도 없었다.
" 00아! 좀 울어 봐라! 원래 장례식에는 딸들이 서럽게 곡을 해야 보기가 좋단다. 그래야 진짜 부모님 돌아 가신 것 같기도 하구. 또 알아! 그 소리에 보고 싶은 부모님이 가던길 돌아서 다시 눈을 뜨고 다할 수 있는 '효'의 기회를 부여하실지!"
"우리 많이 울었어요. 눈이 부르트도록요!"
'내가 밤샘을 같이 했지만 눈에 눈물자국도 없던 걸!'
아마 마음으로 울었겠지...
그리고 바쁜 일상의 연장 선상에 있는 우리 현대인은 모두 다 바쁘다.
늘 바쁘다는 이유로 심야에는 상주의 의무를 저버리고 눈꺼풀을 닫기도 하였다. 내 부모님 상을 당하였을 때를 생각해 봐도 그랬다. 나는 먼데서 온 탓에 갈곳이 없어 부모님을 지켰지만 다른 누이들은 그냥 집으로 가서 좀 씻고 잔다음 낼 아침에 오겠다고... 상주가 상중에 몸을 씻다니!
어쩌면 이러한 간편함을 지향하는 우리는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문명의 범람 속에서 나에게 삶의 지혜와 풍요로움으로 이끌어 준 선조들의 공덕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에전의 예법대로 해야 되는 거 아냐?"
아버님의 영구를 멀리 나주에 가서 장사를 치루는 것에 대해 지각 있는 큰 사위가 말하였다. 선산이 있는 나주는 예향의 도시이니 그런 발언을 한 것이었다.
예전의 법대로 하려면 까만 양복대신 무명 삼베옷을 걸치고 머리와 허리에 짚으로 엮어 만든 띠를 두르고 부모님 영전에 무릎꿇어 좌정하고 한시도 자리를 비우는 일이 없어야 하거늘...
"그냥 현 시대에 맞게 합시다!"
어느덧 운구를 해야할 시간...
새벽 잠을 구부리고 있다가 밤새 술기운을 안고 있던 나는 토끼 같은 잠을 털며 차에서 겨 나왔다.
가족들 틈에서 나도 내 아버지를 품에 안고 가는 마음으로 운구에 참여했다. 비록 300여 미터의 거리였지만 버스로 운구하고 또 한 번 마지막 가시는 아버님의 체취를 가까이서 느꼈다.
가벼웠다.
잠시 후에는 하늘 오르는 하얀 연기와 더불어 가벼이 극락에 오르시겠지!
그 가벼움...
생전에 계실 때 나의 아버지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천국에 드는 영혼은 그 육신도 깨끗하고 또 죄를 덜어내고 가기에 많이 가볍다!'고...
내 아버지의 신앙심도 그랬지만 지금 친구 아버님의 나와 다른 신앙심도 매우 깊으셨다.
모든 것은 사필귀정 하기에 아마도 그리던 그분의 신앙 안에 평안히 귀향하셨으리라 믿는다.
평소 약간의 고집은 갖고 계셨지만 내가 보아온 사십여 년을 그분은 역정을 내거나 하시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보질 못하였다. 늘 자상하고 인자함. 내가 뵐 때마다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시던 아벼지셨다.
그렇게 그분은 내 아버지로 계셨다
아~ 그리움 두고 가신 아벼님!
다시 뵈옵지 못할 이승의 면전을 거두고 영원의 나라에서 마주 대할 꿈을 그려주고 가신 아버지!
...... 그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빌며 눈물을 대신한 글을 바칩니다.
-하늘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