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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불타는 강둑에 바닷고기가 거슬러 온다고 지인이 귀뜸을 했다. 누구나 아는 흔한 소식이어도 그런 말들은 언제나 날 들뜨게 한다.
올해는 소문으로만 듣던 그 고기를 볼 수 있을까요
올해 고기 맛은 보셨어요
올해 만이 아니고 전 그 고기를 평생 본 적도 없습니다. 넙죽 대답하는 폼새는 지인의 동정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가시가 많아 가시처럼 걸리는 사람에게 남과 나누지 못하는 사람에게 일부러 선물한단 그 고기를 지인은 친형에게 얻었다며 두 마리를 준다고 했다늦게까지 가게를 여니 일끝나고 들러도 된다는 말에 퇴근 길에 서둘러 들린 곳은 처음 가보는 시애틀 변두리 조용한 길가에 있었다. 누가 봐도 거기에 한국사람이 그 가게를 한다고는 믿지 않을 정도로 멀쩡한 미국 가게였다한국 사람이 주인이어도 미국에 있고 미국 사람들이 손님이니 미국 가게이겠지 왜 당연한 걸 새삼스러워할까?
나도 미국 직장에서 영어로 말하며 그럭저럭 미국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어렸을 때 나는 얼굴이 검은 편이고 머리가 노란데다 파마까지 해서 동네사람들에게 놀림받을까봐 아빠가 걱정할 정도였다. 그때엔 내가 미국 사람들을 상대하며 미국땅에서 살고 있으리라곤 상상하지 않았지만 어디 삶이 예측대로만 되던가. 더군다나 앞일에 대한 계획을 꼼꼼히 세우며 살아본 적이 없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더욱더 모든 것이 예측불허이리라.
처음 와보죠 처음인 데도, 잘 찾아왔네요.
와 물건이 진짜 많네요 신기한 게 많이 있어요. 이건 뭔가요?
뱀이나 용의 형상을 닮은 이상한 실험실용 플라스크 같은 것은 담배를 피울 때 쓴다고 했다. 옷도 있고 복권을 비롯한 각종 생활용품 잡화가 비뚤비뚤한 주인의 손글씨로 잔뜩 들어찬 지인의 그로서리 가게는 허술한 겉보기와 달리 안은 그래도 깔끔했다. 좀 서있다 보니 구조도 친숙하고 편안한 느낌마저 줄 정도였다. 어느 곳이든 익숙해지면 그냥 그곳이 편해지고 별다른 생각이 없어지며 푸근해지지 않는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냉장고며, 선반에 진열된 잡화를 보니 처음이 아니고 몇 번을 와 본 곳처럼 낯설지가 않았다.
지인과 몇 마디를 나누다 보니 허름한 미국 가게로만 보였던 겉보기와 달리 어느새 친숙한 한국인 주인이 있는 가게 안의 모습에 나는 완벽하게 적응을 해가고 있었다.
사실 지난 번 그 일이 있고 나서 마음이 참 많이 힘들었어요. 한 석달 정도요. 사람들한테 실망도 하고 이제 자리에도 일에도 미련이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네…. 지인의 말이 의미하는 게 무언지 짐작이 갈 듯하다.
이건 모과주고 2년 숙성한 거예요 향이 좋아요.
이건 복분자, 야생 딸기주고요. 크렌베리주는 올해 처음 담아봤는 데 내년에도 담가야할 것 같아요.
물고기와 직접 담근 술, 그리고 너무 많이 샀다는 감자까지 나누어 싸주며 지인은 마중을 해 주었다.
집에 가서 고향생각 하며 한잔하세요.
물고기와 함께 싸준 네 종류의 과일주, 일어사주(一魚四酒)를 종이 박스에 받아 들고 집으로 왔다. 고향…마음 속으로는 계속 한 마디에 생각이 멈추어 있었다. 고향… 전 고향이 없는데요…
고향이란 말을 들은 지가 한참이어서 그런지 그 말이 문득 낯설었다. 내가 살아온 많은 곳 중에서 고향이란 주제에 맞는 어떤 곳을 떠올려야 적당한 지 분간되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나에게 정작 어떤 고향이 있는 걸까?
철들기도 전에 동생일로 마음을 다쳐 살던 곳을 등진 부모를 따라 억지로 떠나게 된 곳, 내가 태어나서 열살까지 살던 곳이 고향일까? 그후에 전학을 와서 뿌리내리게 된 나에겐 햇수로 가장 오래 산 서울이 고향일까? 아니면 뜻하지 않게 이제는 서울만큼 오래 살아가고 있는 미국땅의 한 구석, 이곳을 고향이라 해야 할까. 갑자기 독일말로 ‘Heimat(고향)’이라 책상에 써 놓고 입시준비를 하며 대학생이 되어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어릴 때 살던 탄광촌 마을이 떠올랐다. 나는 왜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그곳을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일까? 왜 이제는 그곳을 고향이라 부르지 않는 걸까?
지인이 머리 떼고 내장 빼고 말끔히 손질해 준 맛이 몹시도 궁금한 물고기를 냉장고에 넣은 후 덩그런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모과주는 연한 보리차 같은 빛이었다. 독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 또 향이 좋다는 말에 궁금해서 한 모금 입안에 머금었다. 미뢰에 후 욱 감겨 퍼지는 향이 오래 전에 큰댁에서 마셨던 인삼주 랑 비슷했다. 큰 아버지께서 ‘야가 술을 잘 마시네?’ 하시던 말씀이 한 모금 마신 술의 향 따라 귓전에 들리는 것 같았다. 과연 옛 생각이 나긴 나는구나. 그러고 보니 모과주가 어쩐지 고향과 어울리는 맛인 것 같기도 하다. 그동안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살았던 모든 기억들이 고향이란 이름으로 되살아 나고 있었다.
중앙대학교 약학대학 학사졸업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원 석사 졸업
플로리다 주립대 문헌정보학과 석사 졸업
아이다호 주립대 약학대학원 박사 졸업
2010년 라디오 한국 ‘아름다운 공감 서적’ 독후감 공모전 수상
2014년 뿌리문학 신인상 수상
2015년 시애틀 N 코리아 에세이 수상
2020년 황순원 문학제 디카시 공모전 수상
2021년 시애틀 한국일보 코로나팬데믹 수기 공모전 수상
2023년 뿌리문학 디카시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