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근무처 사람들에게 서울 집 값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근무처는 1984년도 내가 들어갈 때만해도 한국에너지연구소란 간판을 달고 있었다. 그곳에 시험을 보았지만 나 역시도 근무처 분야가 원자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다만 내 전공이 에너지와 밀접한 기계공학으로서 세분하여 열 유체 쪽이기 때문 응시를 했을 뿐이다. 그 무렵 핵공학과가 있는 학교는 우리나라에 3군데 밖에는 없던 때이니 의당 누구든 원자력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 원자력을 해서는 공학도로서는 앞길이 탄탄하다고 생각을 할 수 없는 때였다.
그런데 들어가서 보니 내 근무처는 예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원자력 연구·개발을 통한 학술의 진보와 에너지 확보 및 원자력 이용의 촉진을 목적으로 설립된 한국 최초의 원자력 연구기관으로써 1959년 2월 3일 대통령 직속 원자력원 산하에 설립되었으니 국가 연구기관으로서는 거의 선두에 서 있는 중요 국책기관이었다. 알다시피 1959년도라 하면 이승만 대통령의 시절이다. "한국 같은 자원 빈국은 사람의 머리에서 캐내는 에너지를 개발해야한다. 이를 위해 인재부터 양성해야한다"
6.25로 인하여 초토화된 한국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외국어 능력과 평소 친분이 있던 유엔군 사령관 등을 통하여 원자력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원자력에너지에 대해 홍보를 하러 다니던 미국의 워커 리 시슬러박사로부터 바로 이 말을 듣게 된다. 이승만대통령은 충격을 받았다. 곧 바로 이 대통령은 1965년 미국과 한미원자력협정을 맺고 미국 아르곤원자력연구소로 127명의 엘리트를 선발하여 유학을 보낸다. 그 뒤 대통령은 일사천리로 계획을 진행하여 원자력원을 만들고 원자력연구소를 만들었다.
1958년 우리나라 처음 연구용원자로가 도입되는데 진행 중 정권이 바뀌어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았지만 박 대통령 또한 원자력에너지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한국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마크 2다. 현재의 원자력발전소에 있는 원자로의 출력이 1,000MW 급인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작은 출력이지만 연구용 원자로의 경우 발전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출력 자체는 낮았지만 연구용으로써는 충분하였고 그 원자로가 바로 한국 원자력 발전의 시작이었다.
여기서 알아 둘 것이 있다. ‘한미 원자력협정’ 한국이 원자력기술을 도입함에 있어서 미국과 1956년에 맺은 협정인데 정식 명칭은 원자력의 비군사적 사용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 간의 협력을 위한 협정이라고 해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이 협정을 맺음으로써 원자력을 도입함에 있어 미국이 도와주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비군사적 사용에 동의하면서 기술을 빌려주는 형식의 협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협정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다. 우라늄의 농축과 재처리를 하려면 미국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이 조항이 현재 걸림돌이 되고 있다. 우라늄 농축을 통하여 핵무기를 생산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연구에 있어서도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제약이 많은 게 사실이다. 요즘 북한에 맞서 대두되는 핵잠수함, 핵잠수함은 이론적으로 1년 이상 잠항(潛航)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가공할 전력이다. 우리의 경우엔 무엇보다 북한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위협에 맞서는 전력 확보가 필요하다.
핵잠수함은 수중 킬체인(Kill Chain) 핵심 요소로서 북한 잠수함에 대응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SLBM을 탑재한 북한 잠수함 전력을 출항 단계에서부터 효과적으로 봉쇄하고, 봉쇄에 실패할 경우엔 추적을 통해 격침하기까지 장시간 은밀한 작전이 가능한 핵잠수함의 능력은 절대적이다. 현재 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디젤 잠수함은 모두 14척. 항해 중에는 3~4일에 한 번씩 수면 위로 부상해야 한다. 산소를 공급받아야 디젤 엔진을 돌릴 수 있어서다. 핵잠수함은 우라늄의 핵분열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아 1년 이상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아도 된다. 디젤 잠수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미국, 영국, 프랑스와 같은 해군 대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던 디젤 잠수함을 모두 폐기하고 핵잠수함으로 대체한 이유는 그만큼 핵잠수함의 은밀성과 장시간 작전능력 등 전략적 효과가 컸기 때문이다. 여기에 핵전쟁을 억제하는 SLBM 탑재가 가능해지면서 그 중요성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핵잠수함을 건조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첫 번째가 기술 수준이며, 둘째는 핵연료의 안정적 확보다. 기술문제는 큰 장애가 안 된다. 올해 발표된 국방중기계획에는 3000t급 잠수함이 독자설계를 거쳐 2018년 진수를 목표로 건조 중이라고 언급됐다.
문제는 핵연료의 안정적 확보다. 강대국이 핵잠수함에 원자로를 탑재할 때 주장했던 것처럼 원자력을 함정의 추진 체에만 국한하는 방안에 대해 많은 검토가 있었다. 즉 프랑스의 루비급 잠수함처럼 20% 미만으로 농축한 우라늄을 사용해 국제 법에 저촉되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는 묘안이 그 해법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우라늄의 군사적 전용을 금지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한·미원자력협정 벽을 어떻게 뛰어넘느냐 하는 것이다.현행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안은 4년 동안의 줄다리기 끝에 지난 2015년 11월 25일 발효돼 시행중이다. 이 신 협정으로 우리가 보유한 시설 내에서는 자율적인 시험이 가능해져 원자력 연구개발의 자율성이 확보됐다. 한미 상호협의에 의해 20% 미만의 저준위 농축우라늄은 평화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핵연료의 연구와 개발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다. 한미원자력협정 제13조 ‘폭발 또는 군사적 적용금지’ 조항 때문이다. 이 조항은 다음과 같다.
< “이 협정에 따라 이전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및 구성품과 이 협정에 따라 이전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또는 구성품에 이용되었거나 이러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또는 구성품의 이용을 통하여 생산된 모든 핵물질, 감속재 물질, 또는 부산 물질은 핵무기 또는 어떠한 핵폭발 장치, 어떠한 핵폭발 장치의 연구 또는 개발이나 어떠한 군사적 목적을 위해서도 이용되지 아니한다.”>
일각에서는 핵무기 개발이 아닌 잠수함의 에너지원으로만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을 잘 설득하면 핵추진잠수함 개발이 가능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지금 현 정부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해서 이를 암중모색하는 게 아닌가 하는 뉴스가 간간이 흘러나오는 게 사실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선견지명을 바탕으로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실과시간에 제 3의 불로 또 다른 산업혁명이 라고 배운 원자력을 아주 오래전에 깨치기 시작했으며 이후 1972년도 고리발전소가 지어지기 시작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 연구소는 1973년 한국원자력연구소로 개편되었다가 2007년 3월 한국원자력연구원으로 개칭이 되었고 원전 기술의 국산화와 국내 원전 기술의 수출산업화에 기여해왔을 뿐 아니라 연구용원자로 수출(요르단)까지도 이루어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실로 엉뚱한 발상이라 할 때 아닌 원전 발전 중단 운운이 나오는 지금처럼 왜 원자력에 굴곡이 없었겠는가. 내가 들어올 떄 연구소 이름은 분명 에너지연구소였다. 이는 참 안타깝고 속상한 이야기인데 우리가 바로 국력을 바로 알아야 한다 싶어 전하려 한다. 내가 대전역서 내려 시험을 치러 갈 때 택시기사들은 에너지연구소를 가자고 하면 거의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되묻는 말이 ‘핵 공단 말하는 것이죠.’ 였다. 분명 에너지 연구소란 간판을 걸쳤는데 사람들은 다들 핵 공단이라고 말을 했다.
1978년 쯤 박대통령은 미국의 카터 대통령에게 고분고분 하지 않았다. 우리도 핵폭탄을 만들려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산 밑에 자리 잡은 위치는 박대통령이 구상하는 바를 실현시키기에는 아주 적합했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의 작가 김진명의 글이 마냥 허구만은 아니다. 이희소박사는 사실과 다르지만 당시 핵과학자가 몰려들었던 것도 사실이고 암호명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로 시작한 박 대통령의 핵무기 비밀 개발 프로젝트도 허구가 아니다. 프로젝트 자체는 10.26사건으로 박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무산되었으며 결국 당초 의도와는 달리 불란서 차관을 들여와 폐기물처리시설, 조사후 시험시설이라는 것을 짓고 말았다. 그러니까 핵 공단으로 뭔가 야심찬 결실을 기대했었지만 끝내 여의치 않았으며 근무처는 원자력이라든지 핵이라는 말을 못 쓰고 에너지 연구소라는 간판을 달아야만 했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 연구소는 생긴지 60년이 다되는 연구소로 본소는 태릉 근처 공릉동에 지금 원자력병원과 한 식구로 같이 있었다. 내가 들어간 무렵 당시 대전은 제2연구소란 별칭을 사용했었는데 1986년도 대덕이전사업이 시행되면서 그 부지를 600억원에 한전에 넘기고 모두 이전을 하였다. 지금 그 부지는 한전소속으로 땅값이 무려 1조원이 넘는다고 했고 그곳에 있던 트리가마크 2 원자로는 제염해체를 해 시설이 모두 사라졌다. 그러니까 그 무렵부터 대거 대전으로 내려올 때 그들의 집단 거주지는 바로 잠실아파트였다. 자식들 교육문제로 처음은 주말부부로 출퇴근을 자청했지만 5년도 못 넘기고 집 정리를 다 끝내고 대전사람이 되었던 것인데 그게 그들로서는 가슴 치는 일이 되고 만 것이다.
그때 만해도 잠실 주공이나 대전의 아파트는 별반 가격차가 없었다. 지금은 굳이 말을 해서 무엇하는가. 그 세대들이 퇴직을 했지만 감히 서울로 올라갈 생각을 못한다. 사실 대부분 명문 출신들인 그들이고 대개는 서울 출신들이지만 힘빠지고 돈 없는 지금으로선 가망없는 현실이다, 1989년도에 내려온 한국과학원도 마찬가지다. 그때 만해도 우수과학자니 유치과학자니 하여 집도 공짜로 기거하다시피 했는데 교수자리도 마다하고 서울을 떠난 선택이 그리 클 줄은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는가. 지금은 대전에서 거의 대부분 산다. 손주들 뒷바라지 한다면 기껏 북으로 진출한 사람들이 수원 아니면 송탄 양평 아니면 광주쯤이다. 그러기에 내 근무처 출신들에게 서울 집 이야기는 큰 실례이고 금물인 것이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말이 있다. 대전이 바로 그렇다. 1993년 엑스포가 개최되고 대전의 강산은 두어 번 정도 변했다싶다. 대전의 중심 지역이 둔산으로 완전히 옮겨갔으며 과거 공군 경비행기 활주로에 불과 했던 둔산을 중심으로 한 서부권이 급속도로 발전을 하며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그 바람에 아무리 육성책을 발표해도 도청소재지 주변인 구도심권인 은행동 선화동은 파리 날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예외도 있다. 서울 잠실은 강산이 족히 세 네 번은 바뀌었을 구닥다리 신세일 것인데 그런데 재개발인 요즘 이 시점에서도 잠실은 불패 신화를 여전히 이끌고 있다. 똑같은 나잇살이라 해도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는 이 얄궂은 세상.사람은 태어나 서울로 가야한다는 말이 진리임을 왜 진작 몰랐는지 그게 한스러울 것이다. 그러니까 핵과학자들은 시골 찾아 우리나라를 원자력 강국 5위로 만들어 놓았지만 정작 퇴직 후의 자신을 챙기지 못한 일 밖에 모른 헛똑똑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