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남아있는 가을에 고마워하며
앞 집 사는 동서 내외와 가을이 가기 전에 전라도 여행길에 나섰다.
노인네들 여행에 무슨 특별한 기대가 있겠나마는 걸을 수 있을 때 한 번 이라도 더 돌아다니는게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쩌면 여행을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활력을 찾을 수 있고 여행지의 특색 있는 음식을 먹어 보는 것도 늙은이들이 할 수 있는 체험 학습이 아니겠는가 싶은 생각도 했다.
목적지는 신안군 증도 엘도라도 리조트로 정한다. 우리나라 서남단 이다. 내려가며 전주에서 유명하다는 콩나물 국밥집을 찾는다. 점심 식사 시간이 제법 늦었는데도 식당은 붐빈다. 콩나물 국밥이 무어 그리 대단하랴 싶었는데도 첫 술에 뜬 국물 맛이 요즘 먹방에 자주 나오는 "으~음" 소리가 터져 나오게 한다. 오동통한 콩나물도
"과연 전주 콩나물이네".
식후 문을 나서니 "콩나물 아이스 크림" 플래카드가 펄럭인다. "맛은 보고 가야지? " 하니 옆자리에 앉았던 어느 부인이 "먹지 말아요. 이상해요" 하며 일어선다. 어쩔까? 망설이는데 일행인 듯한 젊은이가 말한다.
"나는 맛있는데 엄마는 괜히 그래" LA에서 왔다는 모자의 조언을 참고로 우리는 아이스크림 하나만 시켜 맛 보기로 한다. 그렇게 싫지도 그렇다고 썩 좋지도 않은 맛에 콩나물 비린내가 약간 풍기는 듯한 맛이다. 전주에 오니 이런 아이스 크림도 있네 싶은 추억이 하나 더 생긴다.
리조트에 체크 인을 하니 식사는 미리 예약을 해야 해서 오늘 식사는 안되니 주변 식당을 소개해 주겠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찾은 곳이 왕바위 식당. 젊은 부부가 영업을 하는듯 싶은데 밑반찬이 제법 간간하게 입맛에 맞는다. 낙지 한 마리면 쓰러졌던 황소도 일으켜 세운다는데 하며 낙지 비빔밥을 시킨다.
이튿날은 그래도 관광지인데 싶어 태평 염전과 소금박물관을 방문한다. 맘모스와 인간의 발달 경로가 소금을 따라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소금가게를 찾는다. 죽염,천일염 함초소금 등 소금 종류도 많은데 가게 문을 나서니 소금 아이스 크림까지 판다. 어제 경험도 있고 해서 소금 아이스 크림은 다음으로 미룬다.
갯벌을 가로 지른 짱둥어 다리로 가서 갯벌 생물들을 관찰한다. 뻐끔뻐끔 숨 쉬 듯 피어오르는 갯벌에 큼지막한 게들이 보인다. 갯벌에 내려앉은 철새 한 마리가 외롭다.
점심은 증도 맛집. 짱둥이네 집이다. 옥호따라 짱둥어탕을 시킨다.
내가 아내에게 짱둥어탕은 추어탕하고 비슷한거야 하며 설명하니 주인여자가 "어디 짱둥어탕에다 추어탕을 비교하느냐" 역정을 낸다. 아마 그만큼 힘들게 잡아 귀하다는 뜻일게다. 어쨌던 서울에서 맛보던 것보다는 국물이 훨씬 진한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다.
"힐링의 땅, 증도" 라니 오후 시간은 해수 찜질을 하기로 한다.
1000m 지하 암반수를 덮힌 해수를 수건에 적셔 몸에 두르고 찜질을 한다. 만병통치이고 노인병에 좋다는데 효능여부야 내가 알 수 없고 선조들이 오랜 세월 해온 찜질이라니 검증된 찜질 방법이 아니랴 싶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테라스에서 일몰의 황홀한 정경을 지켜본다.
붉게 물 들어 가는 서해 바다가 단풍으로 가득한 산하보다 더 고와 보인다.
저녁은 다시 "짱둥이네 집"을 찾는다. 이번에는 낙지 탕탕에 낙지 연포탕을 시킨다. 남편이 직접 잡은 싱싱한 물건만 내놓는다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의 주인 여자가 사설을 떤다. 속으로 잡은건지 사온건지 내가 알게 뭐랴 싶어 옆귀로 흘리며 소주잔을 기울인다. 얼마 만인가?
편한 마음으로 소주 잔을 든게...
아~그런데 입안에서 탕탕 두들겨 자른 낙지란 놈이 입천장에도 혀에도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는다. 아마 주인장이 잡아온 생물 낙지가 분명한가 보다. 파도 소리 들리고 소주 기운이 불콰하게 오른다.
'그래 그 동안 살면서 복잡한 세상사 고민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모두 잊고 서해 낙조나 기억하자.'
산 낙지 덕인가? 숙면을 취하고 일찌거니 눈이 떠진다. 욕실 한 면을 가득 채운 바다를 내려다 보고 선다. 문득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편안한 자세로 희끄무레한 바다를 오랫동안 즐기고 싶은 생각이 든다.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몸을 담근다. 심신을 한껏 이완 시키며 한 줄기 솟아 올라온 해송과 서해를 응시한다.
조용하다. 편안하다. 아무런 생각도 없다. 단지 하늘과 바다 그리고 온 몸을 감싸고 도는 따끈한 물의 감촉만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슬로우 시티 증도를 마음껏 느끼며 향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어 태양이 높이 떠오르며 바다는 검푸른 색깔을 더한다.
바다로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진다. 옷을 갈아입고 바닷가로 나간다. 울창한 송림이 사람 없는 해수욕장을 지키고 있다. 인적없는 모랫길을 걸으며 들어왔다가는 나가고 나갔다가는 또 들어오는 파도가 한 평생 살아가는 우리네 삶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가끔 할 일도 없어지고 매사에 급할 것도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 탓인지 신안에서 집까지 1000리가 넘는 길을 서둘러 갈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좋은 계절에 산천경계 구경하며 간다면 이 또한 노년의 여유로움을 즐기는게 아니랴 싶다. 더구나 남쪽은 단풍 계절이 늦으니 덕유산 줄기를 완상하며 달리다가 무주에서 일박하고 올라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섬과 섬을 연결한 몇개의 다리를 건너 육지로 향한다. 슬로시티에서는 30km 이하로 달려야 한다. 그러니 마음도 운전도 여유로워지고 눈에 들어오는 것도 다양해진다.
신안 땅은 왜 이리도 붉은지?
거기다 붉은 색도 다 같은 붉은 색이 아니다. 짙은 적갈색에서부터 연분홍 갈색까지 대지를 화려하게 물들여 놓은 듯 싶다. 붉은 대지 위로 양배추 마늘 대파가 대규모로 심어져 있다. 붉은 황토와 어우러지니 색깔이 다양해져 더 화려해 보인다. 워낙 많이 심어서 그런가? 한국사람들 먹거리를 여기서 다 재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함평으로 향한다.
전라도 50여개 지명을 노래로 엮은 호남가는 "함~평 천지"로 시작한다. 아마 너른 들판과 갯벌에서 나는 풍부한 먹거리를 품은 곳이라는 뜻에서 첫 머리에 꼽은거나 아닐는지. 어쨌든 "함평천지 한우"는 한 때는 전국의 소값을 좌지우지 할 정도 였다고 한다. 특히 한우 생고기와 육회 비빔밥은 번성했던 우시장 장날에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함평 장터 앞에 있던 생고기 집이 생각나서 찾아 나선다. 그런데 이런, 세상이 뒤집어졌나? 시골 동네가 빌딩으로 그득하고 납닥했던 시장은 사라지고 번듯한 시장이 떡 하니 들어서 있다. 거기다 육회 비빔밥 테마 거리까지 조성되어 있어 다른 곳을 찾아 온 것만 같다.
물어물어 찾아 들어가니 낮으막하고 허름한 집은 그대로인데 홀도 주방도 크게 넓혀 놓았다. 옛날 할마씨는 보이지 않고 외국인 같은 종업원이 와서 주문을 받는다. 헌데 제대로 말이 통하질 않는다. 그 와중에 버스 관광객들이 들이 닥치니 우리는 뒷전으로 밀린다.
한참만에 한우 생고기와 육회 비빔밥이 나온다. 전에 왔을 때. 고기는 나왔는데 왜 고기 굽는 불은 안주느냐고 했더니 할마씨가 나와서 생고기는 날로 먹는거라며 고기 접시를 들어서 거꾸로 흔드는데 고기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던 기억이 난다.
생고기 한 점을 참기름 양념장에 찍어 먹어본다. 자근자근 씹히는 맛과 달큰한 고기 뒷 맛이 잘 어우러진다. 양념장이 짜지도 맵지도 않고 생고기도 익힌 고기와는 다른 식감과 맛으로 침샘을 자극한다. 배 두둑히 먹고 여자들은 함평시장 먹거리를 둘러보고 남자들은 길가 벤치에 앉아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를 음미한다.
이제는 무주로 갈 차례다. 차가 무겁게 느껴진다. 소금 박물관에서 산 소금 푸대와 곱창돌김 등 지역 특산물 먹거리들이 그득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풍성해진다.
공중이라면 모르지만 이곳 지리는 생소하니 네비가 지시하는대로 무주로 향한다. 곳곳에 새로 건설된 고속도로가 횅하니 뚫렸고 스치는 도시들도 옛날보다 엄청나게 커져 있다. 남장수IC에서 빠져 19번 도로를 탄다. 옛날 사천에서 서울 다닐 때 오가던 길인데 사람 사는 곳은 모두 번듯하게 바뀌어 있다. 허지만 산하는 옛 모습 그대로 의연하게 제 자리를 지키며 나를 반겨주는 듯 하다.
작년에 이어 다시 찾은 무주는 비수기라 그런가 한가하고 조용해서 피곤한 몸을 쉬었다 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덕유산 너머로 붉게 동터오는 아침이 해안가 하고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침에 무주 구천동 어사길을 천천히 걸은 뒤에 작년에 갔던 버섯 전골집을 다시 찾는다. 주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식사를 준비하면서 버섯 종류를 일일이 설명해 준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버섯 종류가 참 많기도 많다. 먼저 날로 먹는 소 간 버섯이 나온다. 생김새나 식감이 소 간하고 같다. 이어 전골에는 팽이버섯, 목이버섯, 능이버섯, 표고버섯, 숫총각버섯, 꽃송이버섯, 노루궁뎅이 버섯 등등 내가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여러 버섯들이 어우러져 끓는다. 전골 끓는 소리를 반주 삼아 찹쌀 막걸리를 기울인다. 그리고 어쩌면 버섯 이름들도 이렇게 생긴 것 하고 딱 들어맞게 지었나 감탄하며 버섯 삼매경에 빠져본다.
가을을 찾아 가을에 떠난 여행. 가을도 아쉬워 그러나? 가을은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는데 나는 아직 남아있는 가을에 고마워 하며 가을을 더 아껴야 할까보다.
길벗 2022.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