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 그날의 숨결을 찾아서<2>
<2024년 3월 2일>
삼일운동, 그날의 숨결을 찾아서<1>에 이어, 그 후의 일정 사진입니다.
◀ 서대문독립공원 삼일독립선언기념탑에서 ~~~. ▶
덕수궁 뒤안길
이 길은 회화나무 잔치.
어쩌다 자기 몸통을, 내장까지 송두리째 다 내어주고 ~~~.
덕수궁 뒤안길을 나오면 영국대사관 후문, 조금만 걸으면 덕수궁길과 만난다.
좌측은 작년에 공사가 끝난 돈덕전(좌측 첨탑 지붕이 조금 보이네) ,우측은 미 대사관저.
우리는 [고종의 길]을 이용, 러시아(아라사) 공사관 터로 향한다. 고종의 참담한 심정을 헤아리며 ~~~.
*** 1895년 명성왕후를 잃고, 미국 공사관으로의 파천이 실패로 끝나고, 두번째 시도한 아관파천(1896. 2. 11. ~ 1897. 2. 25.)
걷는 방향 우측으론 여전히 공사 중.
언덕에 올라 뒤돌아 본다. 우측은 덕수궁 돈덕전 지붕, 좌측은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빈터에 공사는 언제나 끝이 나려나, 몇 년째 그대로인 듯.
정동근린공원, 1차 휴식, *** 언덕 위에 러시아공사관이 있었다.
수년 간 공사 끝에 마침내 멋진 모습을 드러낸 러시아공사관 전망탑, 625때 파괴된 공사관 건물의 복원 계획은없단다.
고종의 아관파천 당시 아라사공사관 모습, *** '1973년 전망탑을 복구하였다'라고 적혀 있지만 최근 수년 동안 보강 공사.
네델란드, 노르웨이, 뉴질랜드 대사관, 예나 지금이나 이 부근은 외국 공관들 밀집.
이화여자고등학교(중구 정동) 우측은 백주년기념관, 좌측은 심슨기념관, 안쪽이 이화여고.
***대통령이 참석한 105주년 삼일절 기념식은 더 안쪽, 그러니까 정동길이 아닌 통일로4길 쪽 순화동에 있는 [서울 유관순기념관]
심슨기념관 뒤쪽에 [유관순우물]이 있으며, 지난 3월 1일 유관순 동상 헌화예배가 있었다고 한다.
1919년 3월, 만세운동 당시, 이화학당 고등부 1학년이던 유관순 열사(당시 17세), 탑골공원을 출발한 시위 행렬의 만세 소리,
그 함성에 교문을 나서는데, 혹여 어린 학생들이 다칠세라 온몸으로 교문을 막아서는 외국인 선생님들,
기어이 갈려면 나를 밟고 가라며, 선생님들도 결사적으로 말리니, 유관순 포함 5명이 담을 넘어 시위 대열에 합류.
1886년 미국 선교사 스크랜톤 여사가 세운 조선 최초의 여학교., 1887년 고종은 배꽃처럼 순결하고 아름답고
또 향기로운 열매 맺으라는 뜻으로 [이화학당]이란 이름 하사.
유관순(1902. 12. 16.~1920. 9. 28.)은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 입학, 고등과 1학년 때인 1919년 3월 만세운동에 참가,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 시위에서 일경에 체포, 학교 요청으로 방면, 일제는 학교 휴교령(3/10), 3/13 고향 병천으로 내려가
4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 눈앞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차례로 잃고, 모두 19명이 일경의 총칼에 참혹하게 숨진다.
1심에서 징역 5년형, 2심에서 3년형, 1920년 4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결혼 특사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으나,
1920년 3월 1일 서대문형무소 내 [삼일운동 1주년 만세운동]을 주도한 일로 받은 무자비한 고문 휴유증으로 인해
만기출소를 며칠 앞둔 1920년 9월 28일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한다.
삼일만세운동을 설득하가나 주도할 때, 또 재판과정이나 수형생활 중,어린 나이임에도 어찌 그리 당당하고 의연할 수 있었을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울분과 함께 눈물이 난다.
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으로 간다.
'밝을 명'은 明과 眀을 같이 쓰기도 하지만, 요즈음은 중국에서도 '眀' 字는 잘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빨간색은 체결 찬성, 파란색은 반대, 노란색은 반대후 적극 협조. 빨간색의 다섯 명이 을사오적.
***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은 '을사년스럽다'에서 나온 말이라니, 더이상 무슨 말을 보태리요.
[수령 568년의 회화나무], 2003년 캐나다대사관 신축 당시 나무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뿌리의 위치를 감안하여 건물설계를
도로 안쪽으로 휘어지게 변경하는 등 카나다 측의 적극적인 배려로 활기롭게 생장하고 있다. 캐나다의 나무 사랑에 감읍!!!
사대문 중 아예 훼손되어 버린 돈의문(서대문), 위치는 강북삼성병원과 연결되는 이 언덕에 있었다는데 ~~~.
*** 敦義門은 1915년 도로 확장 핑계로 철거, 애석한 일이다.
*** 오행사상(인의예지신)에 따라 仁(흥인지문, 동대문), 義(돈의문, 서대문), 禮(숭례문, 남대문) 智(숙정문, 북대문 --- 肅靖門은
처음 肅淸門에서 중종 때 숙정문으로 개명. 淸은 물(水), 즉 智와 관련(知者樂水)된다. 혹자는 소지문(昭智門) 얘기도 한다.
참고로, 숙종 때 탕춘대성에 홍지문(弘智門)을 두어 오행(인의예지신)을 완성했다고도 한다.
인의예지는 각각 동서남북, 木金火水, 春秋夏冬과 대응되며, 보신각이 가운데(중앙) '信'과 대응.
[경교장] 영화의 힘이 무섭다. 건국전쟁을 두번이나 본 이후라 그냥 외관만 보고 돌아나왔다.
*** 건국전쟁 영화에 소개된 중국 특사 劉馭萬과 金九와의 대담록 내용이 쉽게 잊혀지질 않아서 ~~~.
저절로 술맛이 날 듯한 골목.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할 듯하기도 하고 ~~~.
한양도성
[홍난파 가옥]. 한국 최초의 가곡을 누구는 봉선화(홍난파 곡 1920년, 김형준 시 1925년),
누구는 박태준 곡(1922년), 이은상 시(1922년)의 思友(동무생각)라고 주장한다.
*** 최초의 가곡은 1922년 작곡한 동무생각, 1920년 작곡한 봉선화는 바이올린곡, 봉선화 가곡은 1925년으로 정리하자.
월암근린공원에서 2차 휴식
[능라밥상] 탈북여성 제1호 박사, 이애란님은 보험설계사로 대한민국에 성공적 정착 후, 이화여대 식품영양학과 박사학위 취득.
북한요리 전문 [능라밥상]을 종로3가역 부근 피맛골에서 운영해 오다가 2021년 10월 이곳으로 확장 이전.
권율 도원수 집터의 은행나무(수령 460여년)
딜쿠샤(DILKUSHA 기쁜 마음)는 앨버트 테일러와 메리 테일러 부부가 살던 집으로 1923년 착공, 1924년 준공,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살았으며 그 뒤 매입한 사람(조경규)의 재산이 국가에 귀속, 국가소유가 된다.
오랜 기간 방치되어 12 세대, 많을 때는 18 세대까지 살기도 하며 딜쿠샤 건물은 내부가 많이 훼손, 본모습을 잃게 된다.
1919년 2월 28일 태어난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의 의뢰(2005년)로 김익상 교수가 이 집을 찾아내어 세상에 알려진다.
2017년 서울시는 딜쿠샤를 등록문화재(제687호)로 등록, 딜쿠샤의 복원 공사 후, 2021년 3월 개관.
*** 앨버트 테일러는 1919년 3.1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사업가 겸
미국연합통신(Associated Press)의 임시 특파원으로 3.1독립운동, 일제에 의한 제암리 학살사건의 진상 등을 취재 보도.
*** 2006년 브루스 부부는 딸과 함께 방문, 2015년 브루스 死後, 딸 제니퍼가 테일러 가문의 자료를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
*** 사전 예약제로 운영하다가, 자유관람으로 변경.(관람료 무료)
*** 앨버트 테일러, 그는 3.1독립운동을 세계만방에 전할 수 있었는지, 그의 아들 브루스가 1919년 2월 28일 출생,
그 부인이 입원 출산한 세브란스병원, 그녀의 병실 침대 밑에 독립선언서가 우연히 숨겨지고 이를 입수하여,
기사와 함께 그의 동생을 통하여 몰래 동경으로 전달하는데 성공하여, 뉴욕타임지에 기사화, 전 세계가 알게 된다.
마치 한편의 드라마 같다. 그는 1897년 한국에 입국, 아버지(조지 테일러)를 도와 광산과 상회를 운영하였으며,
그는 지금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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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독립공원]
서재필 박사 동상
3.1독립운동기념탑
가족회원으로의 등업 회원 축하.
[삼일독립선언서 전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영천시장 공사로 인하여 독립문역 3번출구 [동영숯불갈비집]에서 즐거운 오찬.
그리고 젊은이 취향의 찻집에서 행복을 더하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수고가 많으셧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울에 살면서도 그냥 지나치는 장소들을 알뜰히 걸었습니다
작년에는 볼수 없었던 딜쿠샤 내부를 볼수있어서 좋았구요
외관보다 내부는 정말 당시의 호화주택이었던것 같애요
사진과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재작년이었던가, 딜쿠샤 2층 창가에서 노란 은행잎을 바라보며
문득 茶 한잔 마셨으면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벽난로 그리고 자수 병풍에, 조선 고가구 위엔 반듯하게 놓인 청자 항아리 ~~~,
역시 영국 귀족 가문 출신 안주인 메리의 은은한 향기가 곳곳에 묻어나는 듯 했답니다.
감사합니다.
완벽한 후기입니다. 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우리나라 상훈제도에 워낙 문외한이라
본문에 썼다가 지워버린 내용 하나.
1919년 3월 1일 2천만 동포의 절절한 외침을
독립선언서 전문과 함께 오롯이 세계 만방에 전달한
그런 크나큰 일을 해낸 앨버트 테일러.
일제의 눈을 피해 동생의 구두 속에 숨겨 어렵사리 동경까지 전달한 그 일이
작은 일이 아닐진데,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가보면
독립유공자 표지 하나 없이 쓸쓸합니다.
외국인이면서도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한 외국인을
우리 스스로 진심으로 예우하지 않으면 ~~~.
서울국립현충원에 모셔진 스코필드(건국훈장) 묘 앞에 서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양화진에서도 베델(건국훈장 대통령장), 헐버트(건국훈장) 묘역 앞에 세워진
'독립유공자' 표지판이 우리의 가슴을 훈훈하게 합니다.
그런데, 앨버트 테일러 묘역을 참배하면서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꼈답니다.
공적이 작고 적어서 인지, 뭔가 다른 문제가 있는 지는 몰라도,
지난 [딜쿠샤] 복원 때에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 제니퍼 테일러의 유물 기증이 있었다는데
앨버트 테일러에 대한 상훈 추서가 그리 힘든 일도 아닐텐데~~~,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얘기가 실없이 길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