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6월 16일(화) 8시에 두 대의 버스로 안양문화원을 출발한 답사팀은 11:30에 국립전주박물관에 도착하여 박물관 관람을 하고 전주한옥마을에 있는 경기전으로 갔습니다.
* 점심(전주비빔밥)을 먹고 휴식시간에 전주감영(全州監營)의 남문(南門)인 풍남문을 둘러보았습니다.
풍남문(豊南門, 보물 제308호)은 조선시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싼 성곽(城廓)의 남쪽 출입문입니다.
전주부성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출입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 문만 남아있습니다.
보물 제308호 풍남문 표석
풍남문은 적의 침입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甕城)을 설치하고 서쪽 일부를 열어두었습니다.
[풍남(豊南)]이란 [풍패(豊沛)]의 남쪽이란 뜻이며, [풍패]는 중국 한(漢)나라 고조 유방이 태어난 곳으로, 조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그 곳에 비유한 것입니다.
성(城) 안쪽에서 보면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란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풍남문에서 길을 건너면 한옥마을의 입구인 태조로(太祖路)로 이어집니다.
태조로를 들어가면 북쪽방향에 경기전이 보입니다.
경기전 안내도와 안내문
19세기에 제작된 완산부지도를 보면 풍남문의 동쪽(점선 확대 부분)에 경기전이 위치합니다.
경기전(慶基殿)은 전주에 건립한 태조 진전(眞殿: 어진을 모신 처소)으로 조선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 왕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을 모신 곳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태조 진전으로는 경기전이 유일합니다.
'경기(慶基)'는 조선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런 터라는 의미입니다.
정문 앞에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경기전 하마비에는,
지차개하마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雜人毋得入)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는 '지위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내리고,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라는 뜻입니다.
암, 수 두 마리의 사자가 직사각형 받침돌에 세운 비석 몸체를 등으로 떠받치고 있는 보기 드문 형태로 경기전을 수호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매표소 앞에 태조의 진전(眞殿)을 모신 어진박물관은 공사로 인하여 휴관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경기전의 정문(正門)인 외삼문(外三門)
정문의 문 위에는 나쁜 액운의 침입을 예방하는 홍살을 설치하였고 정문 안쪽에도 홍살문을 설치 하였습니다.
두 분의 문화해설사님들이 1호차와 2호차로 나누어서 해설을 해주셨습니다.
원장님이 전주문화원에 감사 인사를 전하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신성한 공간임을 나타내는 붉은 기둥의 홍살문을 세웠습니다.
홍살문은 하나의 기둥으로 되어 있어서 양쪽에 초석(礎石)을 세워서 고정시켰습니다.
경기전(慶基殿)의 뜻과 역사를 설명하는 해설사님과 경청하는 원장님
두번째 문인 중문(中門)
중문 안쪽으로 경기전의 정전(正殿)의 마지막 문이 보입니다.
중문에서 서쪽 방향은 경기전의 제사(祭祀)를 맡아보는 하급관리들이 머무는 수복청(守僕廳) 영역입니다.
동쪽 방향은 대밭이 무성하고 안쪽에 전주사고(全州史庫) 영역입니다.
세번째 문인 정전(正殿)의 전문(前門)으로 들어갑니다.
경기전(慶基殿) 정전(正殿)은 보물 제1578호로 지정되었으나 2019년에 국보와 보물의 번호 제도가 폐지되어서 이제는 그냥 보물(寶物)입니다.
경기전 정전은 조선왕조(1392~1910)를 개국한 태조(1335~1408, 재위 1392~1398)의 어진(御眞)을 봉안한 곳입니다.
정전(正殿)은 가운데 제례(祭禮)를 위한 공간과 양쪽의 익랑(翼廊)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정자각(丁字閣)으로 이루어진 제례공간의 'ㅡ'자로 된 뒷쪽은 어진을 모시는 정청(正廳)이고 'ㅣ'자로 된 앞쪽에서 제례를 모시는 공간입니다.
가운데 정청 안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태조의 어진은 평상시 집무복인 익선관(翼蟬冠)과 곤룡포(袞龍袍) 차림의 전신상(全身像) 입니다.
사실적으로 그린 태조는 키가 크고 몸이 곧바르며 귀가 아주 컸다고 합니다.
전주(全州)는 태조의 본향으로 그 선대들이 살았던 곳입니다.
이를 기념해 1410년(태종 10)에 태조의 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으며,
1872년(고종 9) 구본이 낡아 조중묵을 비롯해 10인의 화사가 새로 모사해 경기전에 모셨습니다.
구본은 땅에 묻고 새로 그린 진본은 어진박물관(御眞博物館)에 보관하고 이곳에 전시한 어진은 모사본(模寫本)입니다.
'정(丁)'자 모양의 제례공간
행랑(行廊)에서 경기전 설명을 하는 해설사님
나무로 지은 경기전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벽사(辟邪)의 뜻을 지닌 두 가지의 장치를 하였습니다.
마당 앞에는 지붕을 타고 내려오는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자기의 무서운 얼굴을 보고 도망가도록 물을 채운 '드므'를 6개 설치하였고,
지붕의 합각면 풍판(風板)에는 물 속에 사는 거북 두 마리를 새겼습니다.
정전(正殿)을 나와서 동쪽의 협문(夾門)으로 나가면 전주사고(全州史庫) 영역입니다.
협문에서 뒤로 돌아보면 경기전의 정전이 보입니다.
사고(史庫) 앞에는 'S'자 모양의 백년 된 청매(靑昧, 꽃잎은 흰색이지만 꽃받침이 청색인 매화)가 자라고 있습니다.
사고 앞에는 또한 <조선왕조실록보전기적비(朝鮮王朝實錄保全紀積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전주사고(全州史庫)의 모습
전주사고는 1439년(세종 21)에 설치되었습니다.
여기에 실록을 비롯한 국가 중요서적을 보관 하였습니다.
현존건물은 1991년에 새로 건립한 것으로 내부에는 전주사고의 역사에 관한 전시물과 조선왕조실록(複製本)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실록(實錄)이 습기로부터 손상되지 않도록 1층은 누각으로 지었고,
2층에는 실록각(實錄閣)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사고 맞은편 협문으로 나가면 조선 제8대 예종(睿宗)의 태실(胎室)과 비(碑)가 있는데, 우리는 사고 내부를 둘러봅니다.
사고(史庫) 내부를 둘러보고 계시는 원장님
실록청(實錄廳)에서 실록편찬(實錄編纂)을 하고 있는 모습
세초연(洗草宴) 세초하는 모습
전주사고(全州史庫)
임진왜란과 실록의 보존(피난)
세계기록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의 사관과 사초
사고의 변천사
조선전기에는 네 곳(한양, 충주, 성주, 전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주 외의 세 사고는 모두 불탔고,
조선후기에는 전주사고를 필사한 다섯 곳(정족산, 태백산, 오대산, 적상산, 묘향산)에서 보관하였으나 현재 정족산(프랑스→서울대 규장각), 태백산(부산 국가기록원), 오대산(일본→국립고궁박물관), 적상산(김일성종합대학) 사고본이 남아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과학적인 보관방법
정종, 태종실록 모사본
대밭 사이로난 협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갑니다.
서쪽에는 경기전의 제사를 맡아보는 수복청(守僕廳)과 전사청(典祀廳) 영역입니다.
고사목(枯死木) 그루터기도 남아 있습니다.
# 무더위 속에서 진행된 문화원장님과 함께한 전주 경기전 역사탐방은 조선 건국과 조선왕조실록의 한 장면을 보는 뜻깊은 행사였습니다.
# 참고자료
[경기전-전주시]
[조선왕조실록-나무위키]
[그리고, 전주시 문화해설사의 해설]
첫댓글 강호인선생님 덕분에 전주 경기전 와유합니다. 신풍루의 풍과 전주성 풍남문의 풍, 전주객사 풍패지관의 풍이 모두 정조임금의 꿈과 연결되리라봅니다.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탐방에도 선생님을 뵐 줄 알았는데 함께하지 못하셨군요.
교육시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