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률,「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중에서
현아였다. 옷차림과 몸피는 예전과 다르지만 얼굴은 거의 스무 해 전 여고생 때의 청순하던 소녀 모습 그대로인 현아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현아가 슬며시 손을 빼더니 탁자 위의 누런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내 현아는 봉투 속에서 공책을 한 권 꺼낸 뒤 다짜고짜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공책을 받아든 뒤 겉표지를 펼쳤다. 속표지에 검정 만년필 글씨로 ‘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을 내 사랑하는 현아에게 바친다’라고 씌어 있고, 그 아래에는 날짜와 내 이름이 휘갈겨져 있었다.
“아!”
나는 짧은 신음만 내뱉은 채 공책을 뒤적여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해 겨울의 찬바람이 가슴을 뚫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눈을 피해 남몰래 시를 썼다. (……)
‘시를 모르고 어떻게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시는 바로 인생이고, 인생은 바로 시야. 난 기어코 인생을 모르는 사람들의 영혼을 쓰다듬어줄 시를 쓸 거야. 단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쓰다듬어줄 수 있는 시를 쓸 거야!’
현아는 같은 반 친구가 하숙하고 있는 집의 주인 딸이었다. (……) 나는 현아네 집에 갔다 오기만 하면 열병을 앓았다. 현아를 만난 날이면 현아를 만난 느낌이 좋아서 그랬고, 현아를 만나지 못한 날이면 애가 타서 그랬다. 좋은 느낌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고, 애가 탄 느낌은 어떻게든 현아에게 전달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때부터 나는 연애 감정보다 더 소중한 감정은 이 지상에 없는 거라고 여기며 열심히 연애시를 써갈겼다.(……) 시가 공책의 마지막 장까지 채워진 날, 나는 하루 내내 방구석에 처박혀 공책 표지를 나름대로 멋지게 꾸미고 공책 속지 여백에 간단한 그림도 그려 넣었다. 그야말로 이 세상에 한 권뿐인 수제품 시집을 만든 것이다. 그런 뒤 현아에게 주기 위하여 자취방을 나섰다.(……)
친구가 현아 방 쪽을 향해 가볍게 턱짓을 한 뒤 나를 슬쩍 훑어보았다.
“현아는 집에 없는가 봐.”
내가 누구를 보러 왔는지 다 안다는 투였다. 나는 내 마음을 친구한테 들킨 것만 같아 또 얼굴이 화끈거렸다. (……)
“현아 없어도 돼. 그 대신 이것 좀 전해주라…….”
내가 품에서 수제품 시집을 꺼내 친구 앞으로 내밀자 친구는 그걸 받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현아에게서 아무런 반응을 못 받은 나는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현아네 집 쪽을 바라보며 얼마나 절망했는지 모른다.(……) 내 딴에는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시를 써서 주었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현아에 대한 원망이 치솟을 대로 치솟아서 그랬는지 모른다. (……) 시 나부랭이 같은 건 다시 쓰지 않으리라! 시도 밉고 여자도 밉고, 나아가 세상이 다 미웠다.(……)
“그 동안 나 미워했지요?”(……)
“많이 미웠을 거예요…….”(……)
현아가 더듬거렸다.
“음, 남편이 죽었어요.”
“어!”
나는 외마디 소리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현아 남편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남편이 죽고 나서야 이 시집이 나한테 전해진 거예요.”
“뭐라구?”(……)
“미안해요. 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을 이제야 돌려드리게 되어서. 그때 받았으면 바로 돌려드렸을 텐데……. 시집 속의 말들이 스무 해 동안이나 갇혀 있느라 무척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돌려드리려고…….”
아, 그런데, 무엇이, 아니 누가 20년 동안 갇혀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공책을 다시 현아 쪽으로 슬며시 내밀었다. 그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 둔 뒤엔 처음으로 이는 어지럼증을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
“이건 현아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소용없는 시야. 여기 들어 있는 시는 현아한테만 쓰인 것이거든. 현아 남편이 된 그 친구가 그걸 알았기 때문에 나한테 다시 되돌려주지도 못하고 없애버리지도 못한 거야. 그러니 시를 쓴 나도 주인이 아니야. 그럼 이만…….”
나는 영문을 모른 채 공책을 받아든 뒤 겉표지를 펼쳤다. 속표지에 검정 만년필 글씨로 ‘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을 내 사랑하는 현아에게 바친다’라고 씌어 있고, 그 아래에는 날짜와 내 이름이 휘갈겨져 있었다.
“아!”
나는 짧은 신음만 내뱉은 채 공책을 뒤적여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해 겨울의 찬바람이 가슴을 뚫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눈을 피해 남몰래 시를 썼다. (……)
‘시를 모르고 어떻게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시는 바로 인생이고, 인생은 바로 시야. 난 기어코 인생을 모르는 사람들의 영혼을 쓰다듬어줄 시를 쓸 거야. 단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쓰다듬어줄 수 있는 시를 쓸 거야!’
현아는 같은 반 친구가 하숙하고 있는 집의 주인 딸이었다. (……) 나는 현아네 집에 갔다 오기만 하면 열병을 앓았다. 현아를 만난 날이면 현아를 만난 느낌이 좋아서 그랬고, 현아를 만나지 못한 날이면 애가 타서 그랬다. 좋은 느낌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고, 애가 탄 느낌은 어떻게든 현아에게 전달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때부터 나는 연애 감정보다 더 소중한 감정은 이 지상에 없는 거라고 여기며 열심히 연애시를 써갈겼다.(……) 시가 공책의 마지막 장까지 채워진 날, 나는 하루 내내 방구석에 처박혀 공책 표지를 나름대로 멋지게 꾸미고 공책 속지 여백에 간단한 그림도 그려 넣었다. 그야말로 이 세상에 한 권뿐인 수제품 시집을 만든 것이다. 그런 뒤 현아에게 주기 위하여 자취방을 나섰다.(……)
친구가 현아 방 쪽을 향해 가볍게 턱짓을 한 뒤 나를 슬쩍 훑어보았다.
“현아는 집에 없는가 봐.”
내가 누구를 보러 왔는지 다 안다는 투였다. 나는 내 마음을 친구한테 들킨 것만 같아 또 얼굴이 화끈거렸다. (……)
“현아 없어도 돼. 그 대신 이것 좀 전해주라…….”
내가 품에서 수제품 시집을 꺼내 친구 앞으로 내밀자 친구는 그걸 받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현아에게서 아무런 반응을 못 받은 나는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현아네 집 쪽을 바라보며 얼마나 절망했는지 모른다.(……) 내 딴에는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시를 써서 주었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현아에 대한 원망이 치솟을 대로 치솟아서 그랬는지 모른다. (……) 시 나부랭이 같은 건 다시 쓰지 않으리라! 시도 밉고 여자도 밉고, 나아가 세상이 다 미웠다.(……)
“그 동안 나 미워했지요?”(……)
“많이 미웠을 거예요…….”(……)
현아가 더듬거렸다.
“음, 남편이 죽었어요.”
“어!”
나는 외마디 소리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현아 남편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남편이 죽고 나서야 이 시집이 나한테 전해진 거예요.”
“뭐라구?”(……)
“미안해요. 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을 이제야 돌려드리게 되어서. 그때 받았으면 바로 돌려드렸을 텐데……. 시집 속의 말들이 스무 해 동안이나 갇혀 있느라 무척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돌려드리려고…….”
아, 그런데, 무엇이, 아니 누가 20년 동안 갇혀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공책을 다시 현아 쪽으로 슬며시 내밀었다. 그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 둔 뒤엔 처음으로 이는 어지럼증을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
“이건 현아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소용없는 시야. 여기 들어 있는 시는 현아한테만 쓰인 것이거든. 현아 남편이 된 그 친구가 그걸 알았기 때문에 나한테 다시 되돌려주지도 못하고 없애버리지도 못한 거야. 그러니 시를 쓴 나도 주인이 아니야.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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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한두 번은 ‘비의’라는 낱말을 찾아 사전을 들추게 됩니다. ‘비의’ 앞에는 ‘삶(생)’이라는 낱말이 앞서 있습니다. 삶의 비의, 생의 비의. 미처 헤아릴 수 없어 막막하고 쓸쓸한 생을 드러내는 비의(悲意)로 써야 할지, 쉬 드러내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은밀한 생을 얘기하는 비의(秘義)로 해야 할지 당황합니다. 실상 ‘삶의 비의’는 감정을 동반한 예민한 말로,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구체적 사연이나 정황들이 사실 두 갈래의 의미를 두루 입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일테면 소설 속 세 사람의 사연이 그렇잖습니까. 첫사랑에게 열렬한 연애시를 바치고 나서 절망의 먼 길을 돌아온 사내가 20년 만에 맞닥뜨리는 첫사랑의 풍경. 여자는 어떤가요? 남편이 죽고 20년 만에 별안간 확인하게 되는 두 남자의 사랑과 상실감. 아내에게 갈 노트를 몰래 품고 살다가 죽고 나서야 심부름을 완성하는 또 한 사내의 고독. 노트 한 권에 옭힌 세 사람의 사연에 닿으면 생에 대해 부풀어 오르며 멀어지는 이 감정들을 어느 낱말로 붙들어야 할지 막막해집니다.
문학집배원 전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