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두산으로 려행(1).
용 문 교
국경절 련휴를 맞은 우리 부부는 어디로 려행을 떠날가 고민하였다. 문화관광으로 중국 5백년의 숭엄한 력사를 자랑하는 북경으로 갈가? 아니면 천년의 력사가 묻혀있는 서안으로 가볼가? 아니면 일사천리로 내닫는 현대 중국의 발전면모를 세상에 내보이는 상해로나 가볼가? 그렇지 않으면 대자연관광으로 수려하기로 세상에 이름 높은 황산이나 가볼가? 아니면 절승경개로 소문난 화산이나 가볼가?..... 헌데 요즘은 한창 국경절 련휴일을 맞아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판이니 잠자리도 얻기가 쉽지 않을것이고 더구나 너나 없이 자가용을 몰고 갈터인데 가는길이 무사할지가 근심스럽다. 더우기 안전의식이 결핍한 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몰려 가는 판에 끼여들어 시글벅적하다가 그 무슨 의외 사고가 없으리라는것도 장담할수가 없다. 결국 북경이나 상해나 서안같은 곳은 대충 다녀와서 다시 갈 멋도 없을것 같고 황산이나 화산같은곳은 일후 공가에서 갈 기회가 있으니 그만두자는데 합의되였다. 사실 더욱 중요한 리유는 무엇무엇해도 첫째는 돈 주머니가 넉넉치 못한것이요 둘째는 한생을 시골같은 편벽한 곳에서 안주하며 사슬에 매인 강아지처럼 살아온 우리의 의식이였다. 그래서 궁상스러운 제모습을 스스로 감추고 듣기 좋게 둘러부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데는 이래저래 좋지 않으니 자가용으로 자지방의 아름다운 산천을 찾아 한때를 즐기는것이 상책이라고 자아 위안하였다는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것이다. 그래서 국경절 이튿날은 결혼 기념일을 경축한답시고 두만강연안을 따라 단 둘만의 하루 려행을 하였고 4일에는 처형네 부부간을 동반하여 안도현 이도진 내두산 마을을 찾아 가기로 하였다.
내두산으로 가기로 작정한데는 또 다른 하나의 리유가 있었다. 내두산은 백두산 아래 첫동네라는 깊은 시골인데다 나의 동서간으로 되는 형님되는 이가 40년전 동북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첫 교원생애를 시작한곳이 바로 안도현 이도진 내두산이였기 때문이였다. 한번 장백림해속에 잠겨 사는 우리 민족의 현재 생활모습도 볼겸 형님되는 분의 옛추억도 불러줄겸 아무튼 말로만 들어온 심심산속에 우리 민족만 산다는 내두산으로 가기로 프로그램을 짜놓고 내외가 정년퇴직하고 할일없이 한가하게 집에서 세월을 보내는 처형부부간에 알렸더니 무등 기뻐하였다.
자가용 려행이라 준비물이란 장시간 운전의 피로를 풀기 위해 뜨거운 커피를 려행용 보온컵에 넣은것이 전부였다. 가벼운 몸으로 아침 7시반에 룡정을 떠나 차는 화룡시를 바라고 달렸다. 비암산 고개를 넘어서 70리 평강벌의 설레이는 벼파도를 바라며 달리는 마음은 알수 없는 흥분에 내내 잠겨 있었다. 평강벌 복판지대에서 태여나 20여년 이곳에서 잔뼈를 키워온 나는 이 평강벌을 보기만 하면 언제나 흘러간 동년의 많은 이야기들이 머리에 떠오르며 감개무량함을 금치못하군한다. 물참봉이 되여 해란강물에서 반두로 고기 잡던 이야기, 어린시절 봄이면 생산대의 사원들과 함께 모내기를 하고 가을이면 벼가을을 하고 밤이면 땀벌창이 되여 벼하지를 무지던 이야기, 겨울이면 동네 애들이 조직되여 손발구를 끌고 다니며 비료를 모으던 일, 사춘기에 들어서며 저녁이면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고 노래도 부르며 이성에 대한 신비감에 마음이 부풀고 들뜨던 이야기…아무튼 나의 어린시절 꿈이 자라고 고생속에서도 그 시대 아이들에게만 있었던 잊지못할 재미나는 이야기들이 어지러이 뛰논 발자국처럼 무수히 묻힌 고장이다.
차는 어느덧 어린 시절꿈과 이야기를 원판처럼 뒤로 돌리며 40여분 달려 화룡서북쪽 산마루에 올라섰다. 여기로부터는 안도현 경내를 바라고 내내 산속에 뻗은 화룡-송강선 신작를 달리게 되였다.. 이 10여년 동안 산은 의연히 봄 여름은 무성한 푸르름을 자랑하다가 시월이면 어김없이 붉게 타기 시작하는 그 산이지만 그 기슭을 따라 잘 포장된 도로는 한해가 다르게 고속으로 변하는 고향 산천에 대한 긍지감과 좋은 시대를 만난 기쁨을 아름차게 안겨준다. 그 긍지감과 기쁨속에서도 나를 더욱 감개무량하게 하는것은 와룡 갑산을 지나 량켠에 아름드리 홍송 백송과 잡관목이 우거진 산속를 가르고 서서히 로야령을 바라고 치닫는 선봉지대의 도로였다. 1972년도 내가 열여덟살나던 해 우리 학교(팔가자진중)에서는 근공검학의 기발을 들고 바로 지금 달리고 있는 이 구간의 도로건설공사를 맡았다. 4월초 이른 봄 산골자기 얼음이 채 풀리지 않았는데 우리는 이불짐을 꿍져 메고 이 두메 산골에 들어와 나무를 찍고 잔서리를 베여내고 개울가에 주숙할 숙소를 지었다. 그리고 피나무를 절통하여 자그마한 밀차를 만들어 가지고 길닦이 공정을 벌이였다. 당시 열여덟살 어린나이 학생들이 나무그루를 쳐내고 바위돌을 까부시고 높은곳의 흙은 파서 낮은곳을 메우는 아름찬 토역을 40일간이나 해낼수 있었다는것이 지금 생각해도 자랑스럽고 가슴벅찬 일이였다. 더우기 잊을수 없는것은 내가 그때 학교 청년단총지 학생서기직무를 맏고 있은 믿음직한 학생이라서 그랬던지 매사에 침착하다고 생각해서 그랬던지 학교지도부에서는 총무주임과 학생3명으로 구성된 남포소조에 나를 조장으로 배치하였다. 남포로 아름드리 나무뿌리를 날려보내고 움직일수 없는 바위를 까부시는 일은 실로 어린 나이에 위험한 일이였지만 또 재미있기도 한 일이였다. 처음에는 남포심지에 불을 붙이고 쉬익-하고 파란 연기를 내뿜으면 연기나는 작탄을 안은듯 심장이 화들짝 놀라 뛰고 천방지축 정신없이 뛰여서는 멀리 커다란 나무뒤에 숨군 했다. 그러나 차츰 작업에 익숙해지고 숙련되니 나중에는 한번에 대여섯방씩 불을 달고도 태연하게 대피할수 있었다. 우리는 다른 학생들이 토방작업을 할때 남포를 터치울 구멍들을 뚫었고 토방작업을 하던 사생이 모두 점심 혹은 저녁 퇴근하면 우리는 남포를 재워넣고 터치웠다. 아무리 아름드리 나무그루라해도 남포약 한개반정도 넣으면 단방에 그 나무그루를 하늘로 날려 보냈고 아무리 큰 바위라해도 남포화약 한개만 돌위에 놓고 (비행기 남포라 함) 터치워 버리면 산산쪼각이나군 했다. 실로 위험하면서도 통캐한 일이였다. 나는 그때 남포약투입량과 남포방향공제 그리고 남포심지로 남포심지에 불을 다는 방법들을 배웠던것이다.
어찌 그뿐이랴. 어느 휴식일 한동네서 한 학급을 다니는 먼 친척되는 녀학생 아무개가 남학생 주숙지에 와서 나를 찾아왔다. 은근한 웃음어린 눈길로 나를 보면서 하방간부집 딸 리ㅁ화가 녀학생들 숙소에 왔는데 가보지 않으련하고 물었다. 리ㅇ화란 연길시정부에서 사업하던 아버지를 따라 우리 소대에 내려와서 우리와 앞뒤집에서 살던 아래학년 녀자애였다. 시내에서 와서 그런지 성격이 활달하고 인물체격이 좋아 남학생들의 시선을 많이 끌고 있던 애였다. 그때 일년전에 그애는 아버지를 따라 와룡제철소에 왔는데 그가 전학한 와룡중학교에서도 우리처럼 길닦기에 나왔던것이다. 나는 리ㅁ화가 왔다는 말을 듣고 갈라진지 일년이 넘는 그애를 많이 보고 싶었다. 그 때 그 친척되는 녀자애가 와서 소식을 전한것은 얼마간 내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정작 많은 애들앞에서 그애를 만나 어떻게 인사하고 무슨 말을 했으면 좋을지 궁리가 나지 않았고 더우기 마을에 함께 있을때 많은 남자애들이 놀림조로 늘 그애와 나를 한쌍으로 몰아부쳐놓고 놀려주던 일이 생각나서 감히 만나러 가지 못하고 말았다. 이성에 대해서는 얼마나 담이 작고 나약했던 나였던가. 리ㅁ화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나는 그때 그를 만나보지 못한것을 오래동안 후회하고 있었다. 한창 사춘기에 들떠 있던 그 시절 그 그리움과 애틋한 추억은 지금도 마음의 터전에서 파랗게 시들줄 모른다…..
차는 18세의 감미로운 추억을 함께 싣고 어느덧 선봉을 지나 단풍든 산발을 굽이굽이 돌아 로야령(老爷岭)으로 달렸다.
2012.10.5
첫댓글 자가용을 몰고서 옛추억이 묻어있는 곳들을 찾아 여행 하는것이
그 어떤 여행보다 더 의미가 있을거라 느껴 집니다.
젊음의 꿈을 익혔던 고장들을 질주 하면서 추억의 보따리를 풀어 헤치신 용문교님
감회가 깊었으리라 짐작 됩니다.
용문교님의 젊은시절의 에피소드 즐감하고 하회를 기다립니다.
못난 글을 즐감하였다니 고맙습니다. 오늘 유수천 등산 즐겁기를 바랍니다.
국경절휴가를 자가용을 몰고 18세나이에 생활해오던 일터도 바라보며 잼있는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내두산여행이였네요.
용문교님은 군대처럼 담도 크고 민첩하네요.남포약을 폭파할줄도 알고 동년배들중에서도 위망도 높고요.사춘기의 심리도
아주 실감나게 묘사하였네요. 그때 그 시절에 남자와 여자애가 좀 친근하게 보여도 애들이 막 놀려주는 일도 있던데요 ㅎㅎ
잼있는 추억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면서 하회가 궁굼하게 하네요 ㅎㅎ 다음글 기대할게요 .즐거운 시간이였습니다,이밤 즐거운 밤이 되세요!!
촛불님. 칭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사실상 남자나이 18세면 세상을 알때이지요...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아무것도 몰랐을거라고 생각되는것이겠지요...감사합니다....
욤문교부부님은 참말로 랑만적인 려행을 즐겼군요. 덤으로 첫사랑이랄가 하는 애틋한 추억보 밟으면서 ㅎㅎ 부럽습니다. 하회를 기다리게 되는근요.
가을바다님.. 감사합니다. 님의 재치있는 글에 비하면 너무 메마른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못난 글에 댓글주신 님 감사합니다.
아무런 가식없이 님의 현재의 생활현실을
그대로 표현한 소박하고 감칠맛나는
글을 잘 보고 다녀갑니다~
몸뻬입은 님. 오늘은 왜서 갑자기 엄숙해졋네요... 못난 글 잘 보았다니 감사합니다....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국경절 자가용 려행 넘 좋았을것 같습니다 .려행이란 생활의 활력소 부어주고 마음을 젊게 하죠 .전 칠보산 려행 다녀왔는데 너무나 좋았습니다.감칠맛 나는 글 잘 읽고 갑니다 .
솔향님처럼 천하 명승지를 다 찾아 다니며 려행하는데 비하면 보잘것 없는 동네 돌이에 불과하지요.... 다녀가시며 주신 댓글 감사합니다
국경절 련후일의 의미깊던 려행을 조리있게 엮어서 재밋게 감상하였습니다.
좋은 글에 잡념 흩어지고 잘 지내다가 공짜로 선물가득 싣고 감니다.
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세요!!
옥반지1님.다녀가시며 놓고 가신 댓글 감사합니다...
심지에 불달고 남포터치우는 일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아무튼 청춘시절이고 침착한 성격이니 님이 멋지게 해냈겠지만 지금시대의 젊은이들 해낼수 있겠는가 생각해봅니다.
님이 범을 잡았던 시절의 이야기 잘 듣고 갑니다.
하회기다리면서...
푸른 하늘님.. 범을 잡은것이 아니라 고양이도 못 잡았지요... 어린시절 이야기는 오늘 돌이켜보면 아름다운것만 남은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
내두산이라는 심심산골에 아직도 우리 민족이 모여살고 있는 동네가 있어요 ?
언제 고향 가면 한번 찾아가보고 싶네요
2편을 기대합니다 ㅋㅋㅋ
청도-람천님.. 고향이 연변 어디지요... 내두산 이름도 못들어 보셨어요...아주 아주 깊은 산골 마을 백두산에서 내려다 보면 두 젖무덤같은 산이 있어 내두산이라고 했답니다....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내두산에 감재 검실검실하구 갈기나서 맛좋아요.솟돌도 많구요 .이전에 감자 사로 갔다 왔거던요 .
촛불님 말씀 맞아요..내두산 감자는 일품이지요.... 헌데 그날 감자를 파는 사람이 없어서 사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고향이 용정이에요 ㅎㅎ
전에 어렷을때 림해설원 소설에서 내두산이라는 이름 들어본거 같은데요
청도-람천님 고향이 용정이시군요..저 용정고중입니다.
용정고중이라면 이전의 용정2중 맞죠
저의 모교인데요 ㅋㅋ
자가용려행 너무 멋진거 같습니다. 내두산은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안도에 고향을 둔 후배하고 함께 가려고 기획했는데 아직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용문교님의 자가용려행을 통해 지나간 이왕지사를 떠올리여 글에 담은 구수한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내두산에 다녀오고 쓴 고류연산작가의 글도 인상적이였는데 님의 글 하회를 기다립니다.
낙동강님 내두산 려행 언제 한번 조직하지 않을래요...왕복 한 400킬로 될것 같은데....다녀 가신 자취 감사합니다.
연변일보에서 류연산작가의 글을 보고 내두산의 매력을 느꼈었는데 교장님의 글을 보니 내두산이 퍼그나 매력적으로 안겨옵니다. 례행기에 첫사랑 그녀까지 끼워넣으니 이야기가 더 구미를 당기는것 같습니다. 재밋게 일고가면서 하회를 기다리겠습니다.
샛별님... 못난 글 재미 있게 읽었다니 감사합니다.....
내두산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국경절에 가정이 단란하게 여행을 즐기는 모습 너무 인상적이세요.
그리고 옛추억도 떠올리면서 멋진 소설 읽는것만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하회를 기다립니다.
보람찬 일생님. 다녀 가셨군요... 수준없는 글을 치하해주시니 너무 고맙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부동반의 멋진 자가용 여행이였네요. ㅎㅎㅎ
열혈남아의 그때 그시절로도 거슬러가보시고요.
덕분에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보는 시간 가져보았어요. 감사.
무궁화님 감사합니다. 우리 세대에는 대개가 학교시절에 로동을 많이 한 세대이지요. 그만큼 추억도 많이 남아 있구요...다녀가시며 두고 가신 자취 넘 감사합니다.
멋진 여행 잘하셨네요.부부함께 하는 모습에서 용문교님의 행복을 느껴보앗습니다. 영원히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앗싸님...축복에 감사드립니다....
사모님과의 멋진 여행길이 선생님께서 추억속의 여행을 다녀온것처럼 생생합니다
고운글 즐감하고 갑니다 ~~
스카이님 ,,,, 못난 글 즐감하셨다니 감사합니다.
감명깊게 쓰신 려행기를 읽으면서 멋진 드라마 같은 장면들이 펼쳐지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푹 빠져 버렸습니다. 하회를 보려 달려 갑니다.
다녀가셨군요... 늘 고무해주시는 홍엽님 감사합니다.
국경절련휴일 뜻깊은 려행을 하였네요~ 요즘 바빠서 컴에 오를새 없어서 이제야 댓글 답니다. 하회를 보다가 여기로 왔습니다. 지금은 다시 하회 볼러 떠납니다. 감칠맛있게 쓴 글 잘 감상하고 감다.
감사합니다. 설국화님...려행기라 글의 순서가 뒤바뀌여도 상관없습니다. 못난 글에 열심히 댓글주셔서 황송합니다.
저는 국경절을 꼼짝없이 집에서 보냈는데 자가용으로 유람을 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상상하니 넘 부럽네요....요즘 차면허시험을 준비하니 더 부러워요..전에는 그까짓것 하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차를 모시는 분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선생님의 자가용을 따라 려행하다 갑니다.
가시고기님, 차면허시험 쉽지 않지요... 한쪽으로 출근해야 하고 수업을 해야하고 짬시간 내여 차운전배워야 하니 진짜 분망할겁니다.... 이제 차면허따고 자가용으로 고향산천을 달리며 즐겨볼날이 머지 않을겁니다....다녀가시며 놓고 가신 고운 자취 감사합니다.
순수한 맛인가하면 있는 양념은 다 들어간것 같은 선생님의 글발따라 다니고 보니 덕분에 저도 다시한번 사춘기 학생시절에 빠졌다 나왔습니다.
은하수님...사춘기시절로 되돌아가 본다는것이 얼마나 즐겁고 마음 울렁이게 하는지 님의 댓글보니 더욱 그렇네요...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