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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10,9-18>
형제 여러분,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4,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안드레아는 공관복음에 따르면,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 마태 4,19)가 되리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형인 베드로와 함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특히 마르코복음에서는 열병으로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는 장면에서 등장하며(마르 1,29-30), 예수님께서 성전 파괴를 예언하셨을 때에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느냐며 궁금해 하기도 합니다(마르 13,3-4).
요한복음에서는 그가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께서 부르신 첫 번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요한 1,35-40).
그리고 형인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소개하고,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요한 1,40-42).
또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에는 한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드렸고(요한 6,8-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는 예수님을 만나 뵈러 온 그리스인들을 예수님께 소개하기도 합니다(요한 12,20-22).
한편, 초기의 동방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 사도는 '맨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의 ‘프로포클레토스’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흑해 주변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리스의 아카이아 지역인 ‘파트라이’에서 순교하였는데,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안드레아의 성화나 성상에는 X자 형의 십자가와 함께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 스코틀랜드의 국기에 새겨진 X자는 그 나라의 수호성인인 안드레아를 상징합니다.
그의 유해는 베드로 대성전에 모셔져 오다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서 그리스 정교와의 화해의 표시로 그의 순교지인 ‘파트라이’에 모셔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라고 말씀하시고 안드레아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마태 4,20)
그런데 고기를 낚는 어부와 사람을 낚는 어부는 어떻게 다를까?
그것은 고기를 낚는 어부는 살아있는 고기를 죽이기 위해 잡아들인다면,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죄로 죽은 영혼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잡아들이는 것입니다.
또 고기를 낚는 어부는 고기를 골라서 낚아 올리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고기가 좋든 나쁘든, 곧 전교 대상이 선하든 악하든 간에 낚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기를 낚는 어부는 자신의 그물을 치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성령의 그물을 칩니다.
곧 자신의 방식으로 그물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가라는 데로 가며, 그물을 던지라는 쪽으로 던지며, 그분이 명령하는 방식으로 그물을 치는 데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해타산의 머뭇거림이 전혀 없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온전한 응답이 요구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안드레아 사도가 예수님께서 머무르는 곳에서 밤을 묵어가며 양성 받았듯이, 먼저 그분과 함께 머물며 그분 안에서 양성을 받는 제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마태 4,18)
주님!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소서
내가 만든 그물이 아니라 성령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위험하더라도 깊은 곳, 당신이 원하신 곳에 그물을 치게 하소서.
자신의 먹이로가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한 사랑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제 입맛에 맞는 것만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모두를 거두어들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 중매쟁이>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지만 안드레아 사도는 제게 구약의 아론과 같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론이 형제간이면서 영도자 모세를 조용히 보필했던 것처럼 안드레아도 사도들의 대표인 형을 조용히 보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도단 안에서 역학관계입니다.
안드레아는 형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과 함께 주님의 첫 제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중요한 사건 때, 그러니까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 타볼산 변모 때, 그리고 겟세마니에서 주님께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실 때, 다른 세 사도는 주님과 함께였지만, 안드레아는 거기에 끼지 못했습니다.
공관복음에서 안드레아는 이렇듯 중요한 역할에서 벗어나 있음은 물론, 많이 등장하지도 않았고 요한복음에서도 많이 등장하는 편은 아닙니다.
이런 역학관계 안에서 안드레아는 열등감을 느낀다거나 소외감을 느껴 주님께는 반감을, 세 사도에게는 시기 질투의 감정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이럴 수도 있었음에도 안드레아는 그러지 않았음을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안드레아는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모두 영적 중매쟁이의 역할입니다.
형 베드로와 함께 주님의 첫 제자가 될 때 주님을 먼저 따라가 본 것은 안드레아였고, 주님 계신 곳을 보고 와서는 베드로를 주님과 연결해 줍니다.
다른 두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 소년이 가지고 있는 오병이어를 주님께 연결하고, 그리스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러 왔을 때 연결한 것은 안드레아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살아계실 때나 돌아가신 후에도 안드레아는 앞에 나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형을 주님께 인도하고 옆에서 도왔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안드레아는 메시아를 열렬히 기다리던 구도자였고, 메시아를 만났을 때는 그분을 자기만 독점하지 않고 형과 다른 제자들과 나누는 영적 사랑의 소유자였고 중매쟁이였습니다.
그리고 소년의 오병이어나 그리스 사람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소년의 오병이어를 주님 앞에 가지고 왔을 때 그는 이것이 그 수많은 사람에게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소년과 함께 주님께 가지고 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인간적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만 주님께는 소용이 있음을 알고 소중히 여긴 그입니다.
작은 자를 내치지 않고 끌어안고, 작은 것을 무시하지 않고, 주님께서 겨자씨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능성을 보고 소중히 여긴 겁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자기가 맡은 역할이 작은 역할이지만, 영적인 중매의 중요한 역할을 잘 수행하고, 인간적으로 보면 무시할 수도 있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주님께서 소중히 쓰시도록 연결한 그의 영적인 사랑을 본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따름으로써 얻게 되리라>
축일을 맞이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사도의 삶을 잘 살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른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꺼이 따름으로써 큰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온전히 따르려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고 마침내 버림으로써 주님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익숙해진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안주하지 않고 도전할 때 새로운 것을 얻게 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단지 마음과 행동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이사 43,18)
도전할 때 새 일을 만날 수 있고 또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시몬 베드로와 형제지간입니다.
특별히 요한과 길을 걷다가 예수님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하며 형에게 말하고, 예수님께 자신의 형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소개하였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요한6,8-9)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간 사람도 안드레아입니다.
그는 혼자만 메시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삶의 쇄신과 회개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안드레아는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삶의 자리에서 우리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며 “따라 오너라” 하십니다.
따르고 안 따르고는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에게는 새 삶이 열려있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그물이나 배, 아니면 가족일지라도 단호하게 버리고 주님 안에 머물면 그 모든 것이 주님의 것으로 넘치도록 채워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따라야겠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일상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끊임없이 대립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에 따라서 주님의 제자가 되기도 하고 세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버릴 것은 확실히 버릴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청합니다.
그리고 안드레아가 형에게 자기가 만난 주님을 알렸듯이 주님의 체험을 전해야 합니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무엇보다도 행실로써 전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름으로써 믿음을 견고케 할 수 있듯이 믿음이 약한 이들이 우리를 보고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큰 나무는 잘 부러지지 않고 큰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으며 깊은 샘물은 마르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모인답니다.
예수님이 크신 분이셨듯이, 우리 모두가 큰사람 되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창조자만이 사랑할 수 있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는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지만 형 베드로와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일과 사람을 잡는 일과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물고기를 잡으며 그냥 살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이 곧 나의 존엄성, 혹은 나의 가치를 증명합니다.
우리에게 사람이 물고기가 아닌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다 존중받고 싶습니다.
귀하게 여겨지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정말 인간은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존엄할까요?
당연히 그렇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누가 보장해줄 수 있을까요?
적어도 나라는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역사상 어느 나라가 국민을 존엄하게 보았을까요?
2022년 10월 28일 금요일 밤 10시에 방송된 KBS1 TV ‘시사직격’이란 프로에서 ‘3천 달러의 삶 – 해외 입양 잔혹사’라는 내용이 방영되었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입양은 우리나라에서 부모를 찾을 수 없고 우리나라에서 입양되지 않는 아이들을 외국에서 찾아와서 아이들을 살펴보고 데려가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난 60년간 약 25만 명의 아동이 마치 물건처럼 외국으로 팔려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냥 70~80년대는 특별히 더 나라에서 달러가 필요했고 입양기관도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경찰서에 길을 잃어 맡겨지는 아이들은 부모를 찾을 기회도 주지 않고 거의 해외로 입양을 보냈다고 합니다.
마치 현재 인터넷 쇼핑하듯 외국인들은 서류상으로 아이들을 입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팔려 간 아이들의 존엄성은 이미 포기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에 최근 어린 시절 해외로 입양된 한인 입양인들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모여들었습니다.
덴마크를 주축으로 미국, 벨기에 등 여러 국가에서 모인 이들은 자신의 해외 입양 과정에서 강압, 뇌물, 문서 위조 등의 불법 입양 양상이 나타났다고 주장하며, 인권 침해와 국가 개입 여부의 진실을 밝혀줄 것을 촉구했습니다.
고아가 아닌 데도 외화를 벌어들인다는 명목으로 문서를 위조하여 3천 불을 받고 보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인신매매이고 그 이상의 범죄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른바 ‘우편 배송 아기’라 불리는 이 대리 입양 시스템이 한국의 해외 입양률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양부모의 입양 적격성 심사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입양 아동을 폭력, 학대 등의 위험에 노출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나라는 전 세계 아동 수출국 최상위 국가입니다.
다시 말해 아이들의 인권을 가장 무시하는 나라입니다.
물론 입양을 가서 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하지만 사진만 보고 서류 한 장으로 물건처럼 아이를 사 온 부모가 아이의 인권을 존중해줄까요?
방송에서 1984년 초등학교 6학년 때 프랑스로 입양된 김유리 씨가 나왔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성폭력의 노예로 성장해야 했습니다.
부모를 고발하고 올해 초 입양서류를 확인하던 중, 자신이 호적상 ‘고아’로 기재되어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친부모의 이름과 한국에서의 삶을 모두 기억하기 충분한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유리 씨가 받은 입양서류 속 친부모의 이름은 모두 ‘무명’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부모의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 잠시 보육원에 아이들을 맡겼던 것인데, 보육원은 그런 아이들까지도 다 고아로 서류를 위조해서 팔아버린 것입니다.
해외 입양률이 정점을 찍은 1980년대에는 출생아 중 1%가 넘는 아동이 해외로 입양되었고, 이는 일종의 민간 외교 정책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다 돈 때문이었습니다.
김유리 씨는 아예 성적 욕구를 풀려고 자신을 입양하려고 한 양부와 이를 묵인한 양모에게 자신을 성적 노예로 넘겨버린 나라와 입양기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건 아동 인신매매라고 봅니다.
그 사람이 입양 수수료를 낸 목적은 아이를 물건처럼 사서 자기 성적인 욕구를 푸는, 아이가 그런 물건이 되는 것을 바랐다고 생각합니다.”
자, 이제 다시 생각해봅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존엄합니까?
당연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존엄성은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을까요?
자기를 존엄하게 여겨주는 대상 안에 속해 있어야 존엄합니다.
만약 돈을 좋아하는 나라나 성적인 욕구에 빠진 양부에게 맡겨지면 그 존엄성은 짓밟힙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엄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을 존엄하게 보아주는 대상은 그 창조자 뿐입니다.
인간에게는 부모입니다.
왜냐하면 자녀에게 자신의 살과 피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기에 자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부모는 자녀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종교도 우리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아닌 물고기로 볼 수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어렸을 때 길을 잃어 남의 집살이를 하던 10년간 학교도 가지 못하고 종처럼 일하면서 존엄성을 잃었습니다.
일하며 매도 수없이 맞았고 일한 값도 한 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존엄성을 짓밟은 그 집이 아주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습니다.
천주교를 믿는다고 사람을 존엄하게 대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이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사람도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냥 어쩌다 그물에 잡힌 물고기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물고기 대신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만이 우리 존엄성을 보장해주실 수 있는 분이란 뜻입니다.
세상 누구에게 의존해도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만든 적이 없습니다.
만든 사람만이 그 만든 것을 귀하게 여길 줄 압니다.
그 존엄성을 지켜줄 수 있는 것입니다.
진화론은 좀처럼 이런 인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화론을 믿을수록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할 수 없는 나라가 됩니다.
생존, 곧 돈에만 집중하며 인간이 죽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자기 이익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런 곳입니다.
우리는 우리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나를 만든 분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려는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창조자이심을 눈치채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를 생존을 위해 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이웃을 살게 하는 창조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창조자가 되라고 하신다면 우리도 창조자의 자녀란 뜻입니다.
복음을 전해 영혼을 구원하여 하느님 자녀로 만드는 일은 우리가 하느님께 속하였다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내가 존엄한 존재라는 인식은 내가 창조자의 일을 할 때 더욱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여자들을 사랑할 때는 ‘한 여자도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하는 존재’라는 자존감이 떨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창조자의 협력자’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스스로도 이렇게 큰 자존감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느끼는 자존감이고 그 사람이 갖는 존엄성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자기를 피조물이라 여기는 한 우리를 존엄하게 보아주지 않습니다.
나도 하느님과 같은 창조자가 되었음을 믿지 않는 한 모든 인간을 물고기로 봅니다.
자신을 창조자의 자녀라 믿는 이들만 창조자의 존엄성에 참여하고 창조자 답게 사람을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니 자신이 창조자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창조자로서 창조자와 함께 사랑할 뿐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사도들은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느닷없이 부르심을 받고 갑자기 제자가 된 사람들이 아니라, 메시아 강생을 갈망하면서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믿게 된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부르심을 받기를) 소망하면서 준비하고 있다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 기꺼이 응답한 사람들입니다(요한 1,35-42).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도로 뽑으신 일은 그들 자신들도 원하던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첫 만남’과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일’ 사이에는 적어도 몇 달의 간격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몇 달은 제자들 쪽에서는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는 기간이었을 것이고, 예수님 쪽에서는 그들이 사도가 될 만한 사람들인지를 지켜보는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1) “나를 따라오너라.”
이 말씀은 “나의 제자가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곧 예수님의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제자’ 라는 말이 ‘신자’ 라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신앙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은 스승님이신 분이면서 동시에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세속에서는 제자가 스승보다 더 뛰어난 학자가 될 수도 있고, 실제로 스승을 능가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신앙인의 관계에서는 신앙인은 예수님보다 앞설 수도 없고, 예수님보다 위에 설 수도 없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만’ 따라가야 합니다.
“나를 따라오너라.”는 “나만 따라오너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3-17)
예수님의 제자이면서 신자인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실천하면서 예수님의 뒤만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보다 앞서거나 위에 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적이 없는 것을, 즉 자기 생각이나 어디 다른 데에서 얻어 들은 말을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위에 두는 것입니다.
(책 좀 읽었다는 사람들이 흔히 그런 잘못된 일을 합니다.)
만일에 신앙인이 그런 일을 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신앙인이 아닌 것이고, ‘이단’이 되거나 ‘다른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고, 유일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오직 예수님에게서만 옵니다.
바로 그런 문제 때문에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을 꾸짖은 일이 있습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
(2코린 11,3-4)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말하고 그런 것을 따르는 일은 사탄의 간계에 속아 넘어가는 일입니다.
2)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이 말씀은 “너희는 이제까지는 물고기나 잡아서 먹고사는 어부의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도의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낚는다.’ 라는 말은 표현만 보면 좋은 말이 아닌데, 여기서는 제자로 삼으려고 하시는 사람들의 직업이 어부였기 때문에 사용하신 표현일 뿐입니다.
뜻은 ‘구원한다.’입니다.
사실 사도들 자신들도 ‘물속에’ 있다가 예수님에 의해서 ‘물 밖으로’ 인도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것은 자신들이 받은 은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선교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활동은 우리가 받은 은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봉사활동입니다.
그 활동을 할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또는 구원의 길을 걷고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만들겠다’ 라는 말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말입니다.
이 말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요한 15,16ㄱ)
일은 주님께서 하시고, 제자들은(신앙인들은) 주님을 도와드리는 보조자, 또는 협력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활동의 결과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수행하고, 결과는 주님께 맡겨 드리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우리의 노력을) 보시면서 우리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나를 따라 오너라” -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따르는 삶>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안드레아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사내다움’ 또는 ‘용기’를 뜻합니다.
형 베드로와는 달리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이 부활해 승천한 뒤에는 그리스 지방으로 전교 여행을 갔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가서 제자인 사도 스타키스를 초대 주교로 임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안드레아를 초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보고 있습니다.
성 안드레아는 어부, 생선장수, 밧줄 만드는 사람, 그리스, 스코틀랜드,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수호성인이며, 러시아 최고 훈장 이름이 사도 성 안드레아 훈장입니다.
스코틀랜드의 국기도 파란 바탕에 흰색의 X자형 십자가를 사용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가 순교한 곳은 그리스 아카이아 지역의 파트라라고 하며, X자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했기에 X자 십자가를 ‘성 안드레아 십자가’로 부릅니다.
안드레아가 X자형 십자가를 선택한 까닭은 그리스어로 X는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글자였기 때문입니다.
안드레아가 형장에 끌려갔을 때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높이 쳐들면서, “오, 영광의 십자가여! 너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나를 부르시는가! 속히 나를 이 세상에서 끌어올려 주님의 곁으로 가게 해다오.”하며 기쁨에 넘치는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인을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상에는 십자가를 든 모습이 많습니다.
참 인상적인 성 안드레아 사도입니다.
스승 예수님의 감화가 얼마나 컸으며 또 얼마나 주님을 일편단심 사랑하고 따랐는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새삼 성소는 순전히 주님 주도하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어부인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 던지는 것을 보시자 즉시 이들을 제자로 부르시니 첫눈에 반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이들의 성실함과 내적 갈망을 한눈에 알아 채신 것 같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어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데오와 함께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시자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심지어는 아버지까지 버려두고 떠날 정도이니 이들의 내적 갈망이 얼마나 컸던지 짐작이 갑니다.
이제 이들 삶에는 획기적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따를 주님이 이들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것입니다.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인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을 만나지 못해, 목표없이, 방향없이, 중심없이, 의미없이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이런 성소는 우연일까요?
아닙니다.
이들의 갈망에 응답해 주님께서 이들을 부르신 것이니 섭리의 은총입니다.
우리의 성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우연이 아니라 주님께서 은총으로 불러주신 섭리의 결과입니다.
만약 부름받지 않았다면?
가정법의 질문은 부질없는 질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의 삶이 중요합니다.
끝까지 부르심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두 번의 부르심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한결같이 주님을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지금까지 잘 살았어도 앞으로 잘 못 산다면 헛일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보시는 주님이 아니라 현재를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내외적으로 불편하고 불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말 그대로 순교적 삶입니다.
제 좌우명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고백시도 이런 삶에 대한 다짐을 표현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34년 동안 요셉수도원에 정주하다 보니 참 감동적이 사례도 많이 목격합니다.
자기 뜻과는 무관한 질병도 많기에 전혀 예상치 못한 병고중에도 믿음으로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들이 참 눈물겹습니다.
어느 암투병중인 자매는 날마다 오후 2-4시 사이 수도원 성당에 와서 조배를 드리곤 하며, 또 한 분 자매 역시 암투병에 믿음으로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건강하게 활동했던 분들인데 참 예측 불가능한 삶같습니다.
또 한 자매 역시 한결같은 믿음으로 사셨던 분인데 수술 후 어제 보낸 메시지입니다.
“수술은 잘 받았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토,일 빼고 30번 받습니다.
이상없이 잘 받을 수 있도록 기도부탁드립니다.
듣고 걷고 말하고 볼 수 있음에 성모님 통하여 예수성심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저를 보살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평상시 한결같이 믿음생활을 충실히 하였기에 이런 곤궁한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참 장하고 아름답습니다.
제1독서 로마서 바오로의 말씀입니다.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원망, 절망, 실망은 금물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소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심기일전 어떤 상황이든 주님을 받들어 부르며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 이에 맞갖는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치유의 구원도 뒤따를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못해도 제 삶의 자리에서 삶 자체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 역시 아름답습니다.
주님은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한결같이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축복하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십자가의 길'을 시종여일 기쁘게 항구히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복음의 부르심 기사는 참 담백합니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간결한 언어로 이어집니다.
부르시는 분이나 부르심 받는 이들의 심리 묘사도 부연 설명도 없이 착착 진행됩니다.
너무 간결해 건조해 보이지만 덕분에 모호함 없이 명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다가"
(마태 4,18)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혼자셨네요.
오늘은 특히 호숫가를 지나시는 예수님이 '홀로'이셨음이 눈에, 그리고 가슴에 들어왔습니다.
그분은 세례를 받고 성령에 이끌려 들어간 광야에서 목숨을 건 단식 여정을 거치신 뒤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셨지요.
그렇게 얼마간 그분은 혼자셨을 겁니다.
성 삼위 하느님과 일치 안에 계시는 그분께는 홀로이심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인성을 입으셨으나 홀로 충만하고 완전하신 분이니까요.
하지만 그 충만한 사랑을 나누고,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널리 선포하기 위해서 함께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바로 오늘이 그 역사적 순간이지요.
"그들은 어부였다"
(마태 4,18)
예수님께서 어망을 던지고 있는 두 사람을 보십니다.
어부들입니다.
다른 이들, 좀 더 학식 있는 세도가의 전도 유망한 젊은이를 원하셨다면 성전이나 회당 근처에 가셨겠지요.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현장에서 땀흘려 노동하며 일상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특별할 것 없이 일상 안에 움직이는 우리를 '보시고'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마태 4,19)
예수님은 상대방의 일상성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인정하고 존중하십니다.
어부들에게 '힘들게 그러고 살지 말고 다른 일을 하자'고 꾀시는 게 아니라, 어부로서의 자질과 경험을 살려 진짜 어부로 함께 하자고 손을 내미신 겁니다.
언젠가 낚시를 좋아하는 지인에게 "낚시는 운에 달렸는지 기술에 달렸는지" 물은 적이 있습니다.
내심, '물고기가 와야 미끼를 무는 거니까 순전히 운에 달린 게 아닐까' 선입견을 가지고 물은 건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습니다.
운도 필요하지만 결국은 기술이라고요.
다가감, 집중력, 인내, 아주 미세한 움직임도 알아차리는 섬세함과 민감함, 최적의 순간을 포착해 낚아챔, 밀고 당김, 힘 조절...
어부의 일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협력하는 모든 일과 노동에는 나름대로의 영성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걸 발견하면 일상이 새롭고 경이로운 영성의 장이 되고, 간과하고 무시하면 지루하고 피곤한 소모적 일터일 뿐이겠지요.
"그물, 배, 아버지"
(마태 4,20.22)
부르심을 받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곧바로' 버린 목록입니다.
그물은 생계 유지의 직접적 도구이고, 배는 그보다 좀 더 규모 있고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는 운송 수단도 되는데, 둘 다 세상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자기를 성장시키는 데 필요한 자산들입니다.
그리고"아버지는 혈연으로 묶인 일차적 가족관계입니다.
이 모두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세상 원리와 혈연에 집착하는 삶을 초월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지상 원리에 자신을 묶기보다 천상 원리에 속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고요.
당시 한창 노동 중이던 그들이 그 순간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역사 인식을 소홀히 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일 겁니다.
해방자 메시아의 출현과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열망하고 꿈꾸면서 일상에 충실히 몸담고 있던 중이었을 겁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교회의 본질인 선교 사명의 원리를 들려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로마 10,17)
먼저 말씀이 계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로부터 파견되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하느님의 뜻을 말씀과 행동으로 전하십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듣는 이의 귀뿐만 아니라 마음도 울립니다.
가르침과 기적뿐 아니라, 그분의 수난과 죽음까지도 선포의 일환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로마 10,15)
이 선포를 들은 이는 믿게 됩니다.
말씀이신 성자와 그분이 이루신 하느님 나라를 믿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친히 희생되신 구원자 메시아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가 받아들인 말씀이 목 끝까지 차올라 이를 선포하러 달려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 존재로 들은 말씀이 그의 심장에서 타오르기 때문에 그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로마 10,10)
그의 믿음과 고백이 울려퍼지면, 들은 누군가의 귀와 마음에서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가 충실히 채워오던 일상의 자리에서 그 선포를 껴안고 믿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 믿음을 고백하러 또 달려나갈 것입니다.
이렇듯 구원의 고리는 파견과 선포와 믿음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일상을 채워가는 가운데 믿고 듣고 파견되고 고백합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세례와 함께 성령의 인장을 받은 우리는 존재 전체로 그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정체성과 실존을 무시하지 않고 함께 끌어안으셨기에, 우리는 온 존재로 주님께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우리의 선포는 온 존재로 이루어집니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화답송)
그러니 말주변이 없다고 숫기가 없다고 움츠러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입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빛, 미소, 손짓, 말투, 움직임, 관심, 기도, 눈물과 한숨에서도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아 주님의 충실한 제자이고 사도인 여러분을 축하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신문 홍보를 위해서 동창신부님이 있는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엘 다녀왔습니다.
신부님의 사제관에 머물면서 조금 놀랐습니다.
2층에 방이 있는데 거실에서 지냈습니다.
거실에 책상과 매트리스를 놓고 지냈습니다.
이유를 묻지는 않았지만 단순한 것을 좋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옷도, 살림살이도 거의 없었습니다.
동양화에 있는 여백처럼 신부님의 사제관은 여백이 많았습니다.
저도 단순하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신부님을 보니 저는 가진 것이 참 많았습니다.
아프리카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내전과 분쟁 그리고 갈등과 분열이 있습니다.
서구 열강이 인위적으로 식민제국주의 시대에 국경을 정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같은 나라에 서로 다른 부족들이 살고 있기에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낮은 민도와 독재정치가 내전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우라늄, 금, 다이아몬드와 같은 광물과 천연가스와 원유의 매장은 축복일 수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강대국들이 개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지역의 반군과 테러리스트들은 이권을 노리면서 폭력을 행사합니다.
광산 개발을 하면서 환경이 오염되고, 생명이 죽어갑니다.
차라리 지하자원과 천연가스와 원유가 없었다면 분쟁과 갈등은 적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부자청년이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부자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살인하지 말고, 거짓증언하지 말고, 남의 재산을 탐내지 마라.’
그러자 부자청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키면서 살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청년을 기특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잘 하였다. 네가 한 가지 더 할 것이 있다. 가진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라라.’
그러자 부자청년은 몹시 슬퍼하면서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부자청년은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아와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안드레아와 베드로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부르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부에게 그물과 배는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삶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동생인 안드레아는 요한의 제자였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고, 형인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아와 베드로를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름이 ‘반석’이라면 안드레아 사도의 이름은 ‘남자다움, 용기’입니다.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들 또한 용기를 가지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가진 것이 많다고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주님의 제자가 못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진 것이 없는 것도 만족할 줄 알면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으면 됩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아이에게 “너는 쓸모없어.”라고 계속 말하면, 아이는 정말로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게도 쓸모없다고 말하면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믿게 된다고 하더군요.
쓸모없다는 말은 어떤 행동에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을 때 듣게 됩니다.
문제는 그 한 번의 일로 쓸모없다고 단정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부분을 보고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잘못입니다.
이 잘못에 누군가의 삶이 나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빠다킹 신부의 맘고생크림케이크’라는 평화방송 프로그램을 하고 있습니다.
촬영은 모두 제가 있는 갑곶성지에서 합니다.
공개 방송이라 누구나 함께 할 수 있지만, 평일 오후의 촬영시간이 부담되는지 또 텔레비전에 자기 얼굴이 나올 수 있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오시는 분이 늘 적습니다.
‘많이 오시면 더 힘내서 할 텐데...’라는 마음만 간절합니다.
그러나 만약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냥 벽보고 강의한다고 생각하자, 적은 수라도 자리를 채워주시는 그분들이 정말 고마운 것입니다.
쓸모없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하느님 영광이 더 확실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 역시 이렇게 신부가 된 것은 하느님의 섭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쓸모없는 것을 쓸모가 있게 주님께서는 만드십니다.
성 안드레아 축일인 오늘, 그의 부르심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의 형 베드로와 함께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목직을 받고 흔쾌히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죽음의 길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안드레아 성인 역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떠올린다면, 세상의 가치는 모두 이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서 주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쓸모없어 보이는 나를 쓸모 있는 것으로 바꾸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부르고 계시는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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