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19. 2:58 PM
거리 : 6.9 km
소요 시간 : 3h 1m 28s
이동 시간 : 2h 49m 11s
휴식 시간 : 12m 17s
평균 속도 : 2.4 km/h
총 획득고도 : 289 m
최고점 : 8 m
난이도 : 보통
하노이 (Hà Nội/ 河內 Hanoi) 6세기경부터 홍강 삼각주의 중심 도시로 성장.
리왕조, 쩐왕조, 전레왕조 등 베트남 역대 왕조의 수도.
1887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식민지 시대에 행정청을 두어 행정의 중심으로 삼음
제2차 세계대전으로 무력한 시기에 일본군이 진주하여 1940년부터 45년까지 프랑스와 공동통치.
1945년 3월 일본군이 어용정권을 세워 프랑스로부터 비엣남을 독립 시킴,
1945년 일본 패망 후 다시 비엣남을 통치하려는 프랑스를 상대로 비엣민이 독립전쟁 함
1954년 프랑스 철수 후 북 베트남의 수도, 1976년 통일 후에 베트남의 수도가 되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도시. 2010년에 정도 1,00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행사 함.
타낭-비엣젯항공-하노이 도보여행
1월19일(금) 맑음; 타낭 뉴부티크호텔 조식
오늘은 비엣젯항공으로 비엣남 마지막 여행지인 하노이( 河內)로 간다
10시55분 출발이니 9시까지는 공항에 도착해야한다. 7시 호텔조식이 생각 밖에 훌륭하여 배불리 먹어 두다.
풀로리다 동포와 함께 식사하게 되었다. 전화번호를 교환하다.
이번엔 남쪽 Tran Thi Ly bridge를 건너서 공항까지 걸어보기로하다. 약 6 KM 거리다.
걷다가 문제가 힘들면 우버택시를 호출하기로하다
아침의 미케비치 ; Trần Thị Lý 교를 건너기 위해 미케비치 남쪽으로 산책하듯 걷다.
타낭 미케비치의 파도를 눈에 담아두다
벌써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나와 있었다. 중국관광객이 주를 이루고 한국관광팀도 보였다.
역시 짧은 시간에 많이 보아야 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팀들이다
Trần Thị Lý교로 가는 길에 있는 보수중인 시멘트 부처상을 향하여 합장한 여인.
그녀의 간절한 모습이 애처럽게 보였다. 무슨 안타까운 사정이 있을까?
비엣젯항공사는 저가항공사이지만 그 칼러가 강렬하여 창구 찾는데 도움이 된다.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이용한다.
약 2.5 KM를 걸어 Trần Thị Lý교에 도착하니 진입로가 복잡해 보였다.
그래서 우버를 호출하였더니 10분만에 도착하다 공항까지 6만 동이다
이번에 한국에서 하듯이 "풀리즈 타낭 에어포트"라고만 하다
공항에는 다양한 국적의 여행객들. 수속도 빨리하여 여유있게 1번 탑승구에 도착하다.
1번 창구 대기석에서 있어던 에피소드
탑승 개시 방송을 하자 옆에 있던 중국 아가씨가 급히 일어나 줄에 서다.
떠난 자리에 2십만동 지폐가 두장 떨어져 있었다. 돈을 들고 찾아가 전해 주었더니 "씨에씨에"를 연발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돌아오니 의자 밑에 5만동짜리가 또 보였다. 다시 갖다 주었더니 어쩔 줄을 몰라하며 또 씨에시에를 연발했다.
기분이 좋아졌다.
타낭 공항버스 승차 대기 ; 저가 항공의 공통점 하나가 버스를 타고 가서 탑승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공항 투어를 한다고 생각을 하면 감사할 수 있다.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공항 버스타기
20분 늦은 11시15분에 출발하여 12시35분 하노이에 도착하다. 저가항공을 타려면 늦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밖으로 나오니 택시 호객꾼이 많았다. 외면하고 버스정류장을 찾았다.
건너편에 시내버스들이 보여 그리로 가려는데 여자 안내원이 '리무진. 남버 에잇 식스. 쓰리 한드래드(3만동)"라며
우편의 버스를 가리킨다. 경유지가 많은 시내버스보다는 빠를 것 같아서 승차하다.
숫자는 보이지 않으나 시내로 가는 것은 분명했다.
기사에게 구글지도에서 숙소가 있는 하노이역을 가리켰더니 "오케이"라고 한다. 아내가 마음이 놓이는 눈치다.
노이바이공항에서 홍강(sông Hồng)의 Tan Bridge를 건너 하노이역으로 가는 분위기가
인천공항에서 인천대교를 건너 시내로 들어가는 분위기와 흡사하다
숙소;HANOI VIEW 2 HOTEL-NGO SI LIEN(19.000원)
비엣남은 호텔과 모텔 구분이 없는 것 같다. 장급여관보다 못한 것 같아도 모두 호텔로 소개되고 있다.
복잡한 벼룩시장 안에 있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들어가니 수고하였다는 듯 반갑게 맞아 주어 기분이 좋았다.
13시45분 입실하여 1시간 휴식하다. 3층 숙소는 그 값에 맞게 단순하고 좁았으나 깔금한 편이라 만족스러웠다.
창문이 이웃주택 지붕으로나 있어서 전망은 없으나 조용하였다.
숙소; 하노이 뷰 호텔
벼룩시장
오후 4시: 문묘 입구에 있는 하마비(下馬碑) 우리나라 향교 입구에 있는 것과는 규모와 모습이 많이 다르다.
여기에 꽃을 바친 사람은 하마비의 의미를 알고 그랬을까?
숙소에서 가까운 문묘-국자감공원. 1070년 세운 공자의 사당인 문묘(Văn Miếu, 文廟)
1076년 유학자를 양성하는 비엣남 최초의 대학인(국자감)이 세워졌다.
시기가 고려의 국자감(국학)과 비슷한 것 같아서 친밀감이 더해지다. 다국적의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한국 관광팀들도 여럿 보여서 따라 다니면서 가이드의 설명을 엿들었다.
팀들이 떠난 후 구석구석 살펴보고 인증샷을 찍다.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과 함께 공자의 교훈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면만 보아도 비엣남은 친근한 국가다.
문묘문(文廟);공자의 사후 추존된 명칭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의 약자
꾹뜨잠공원(國子監公園) 문묘의 정문. 좌측 문은 문관 우측 문은 무관 중앙은 왕의 문이다.
이젠 모든 관광객은 왕의 문으로 드나든다.
불교가 국교이던 시기인 베트남 리(Lý) 왕조 리 탄 똥(Lý Thánh Tông) 왕은 유교를 받아들이고
1070년 공자를 모시기 위한 문묘를 세우고, 1076년 왕족 자제의 교육을 위해 비엣남 최초의 대학인 국자감을 설립 했다.
불교국가 고려의 6대 임금 성종 11년(993년) 에 유교적 교육기관인 국자감을 세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비엣남과 한국이 문화적으로는 결코 먼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다.
1805년에 건축된 규문각(Khuê Văn Các, 奎文閣)
중국황제가 하사한 문서들을 보관하던 곳. 즉시 규장각이 연상되다.
공자의 교훈을 익히면 별처럼 빛날 것이라는 뜻이다. 비엣남 10만동 지폐에 있는 그 문이다.
천광정(天光井) 건너 대성문(大城門)
대성문:대성전 출입문 비엣남 국기 좌편에 있는 깃발은 장원급제를 알리는 깃발인가?
천광정(天光井); 하늘 빛은 담는 연못. 낮엔 해 밤엔 달별
청광정 좌우의 과거시험 합격자 이름을 새긴 진사비(晉祠碑)
거북이 등 위에 세운 82개의 비석에 1442년~1779년 사이 116회의 시험에서 합격한 2313명의 이름이 새겨 있다.
거북이의 머리가 들려느냐와 숙였느냐한 각도가 성적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허참
손 대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는데도 거북등에 지폐를 놓고 머리에 손을 얹고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천광정과 규문각 배경 졸업사진
전통 아오자이를 입은 학 생들에게 아내가 함께 찍어도 되는냐고 물으니 환영이란다.
그러나 수집움이 많은 아내는 사양한다. 차라리 내가 낄걸 ㅎㅎㅎ
대성문을 넘으면 대성전(大成殿)의 마당
대성전지붕 마루에 승천하려는 듯한 용 두마리가 보인다. 가까이서 보면 용이 아니라 이무기 같다.
용은 중국 황제의 상징인데 한창 여러 면으로 중국의 지배(?).받던 시대에 용을 장식할 수 없었을 것인데.
문묘:만세사표인 공자를 명패를 두고 제사하는 곳
문묘(文廟)의 문은 공자(孔子), 묘(廟)는 무덤이 아니라 위패(신위). 곧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
공자묘(孔子廟)라고도 부름
중앙의 공자 좌우에는 사성(四聖) 즉 맹자와 증자, 안회와 자사가 있어 함께 제사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좌우엔 거북이 등에 서있는 학(봉황)의 동상. 학과 거북 동상의 여기저기가 노랗다.
손바닥으로 부비면서 소원을 비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동안에도 남녀노소가 그렇게 하고 있었다.
비엣남에선 공자님도 부처님처럼 섬김을 받는 것 같다는 느낌.
도교와 불교를 싫어했던 좌우의 공자님 제자 사성님들이 언짢아 할 것 같다,
규문각의 연못 천광정(天光井)
대성전-마당-삼족정(三足鼎) 세발 달린 솥 :국가. 왕위. 제업을 상징한다는데.
대성전 후문으로 나와서 국자감으로 가는 길; 반야트리
국자감國子監(Quốc Tử Giám) 1076년 리(Lý)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세움,
우리나라의 성균관에 해당되리라
큰북과 큰 종이 있는 작은 전각이 보였다.
주안문(CHU VAN AN) 사당
800여년전, 비엣남이 대월이던 시대에 유학자, 의사, 국자감 교수로서 유교를 비엣남에 뿌리를 내리게 한 인물
마당에는 예술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새치기(?) 친구
예쁜 아오자이로 갈아입고 사진을 찍은 학생들과 카메라맨
우리는 한국인인데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모두 흔쾌히 허락하다.
아내가 옷차림이 어울리지 않아서 그림이 좋아지지 않을 것라며 손사레를 친다
이번엔 내가 가려고 했는데 옆에 있던 저 친구 가 뛰어가서 폼을 잡다.
그들의 시간을 뺏는 것 같아 난 기권하였다.
전시된 예술사진 중의 하나. 한국전쟁 당시 우리 시대 아이들 모습과 비슷하다
하노이 기찻길. 기차가 지나가는 것은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탕룡황성(昇龍皇城)
시간이 남아서 황궁을 보기 위하여 구글지도를 보며 찾아가다.
또 지도에는 도착했다고 표시되는데 매표소 같은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성벽을 돌았다.
마침 한 국 청년 둘을 만나서 매표소를 불으니 자기들 도 찾고 있는 중이란다. 알고 보니 지나왔다.
달랏 기차역 매표소와 같 이 생각치 않은 곳에 들어가서 매표소가 있었다.
1인 3만동 입정권을 사서 들어 갔으나 관광객은 거의 없다 그만큼 볼 것도 없었다.
탕룡황성의 슬픈 이야기
1010년에 레 왕조에 의해 건설, 후대의 황제들에 의해 확장.
1810년에 응우옌 왕조가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베트남의 정치적 중심지.
프랑스 통치 시대에는 통킹 지방의 정청을 두어 행정의 중심지.
19세기 프랑스의 하노이 지배 시기에 황성의 건물들이 대거 철거, 20세기에 남아있 던 건물들이 거의 철거.
21세기에 비로소 발굴과 복원 작업이 시작.
1945년, 일본군이 프랑스군 포로들의 감옥으로 사용
2010년, 탕롱 황성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파란만장의 역사를 갖고 잇는 황성이다. 인생무상 세상만사 무상이다
무슨 의자일까.. 황제가 잠시 쉬던 곳일까
미군 포로 감옥으로 사용되었을 당시를 상상해보다
레닌공원에서 본 하노이 깃발탑
황성에서 나와 레닌 공원에서 휴식 하다. 비엣남군 역사박물관의 하노이 깃발탑이 보이다.
베드민턴 경기를 하는 사람들과 어린아이들에게 소형 자동차를 태워주는 부모들이 많이 보였다.
관광객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레닌공원
베드민턴 경기를 하는 사람들과 어린아이들에게 소형 전기 자동차를 태워 주는 부모들이 많이 보였다.
관광객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소문난 하노이 기찻길
숙소가 하노이 기차역 후문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길을 여러번 건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기차가 지나가는 것은 보지 못했다.
벼룩시장에서 의자와 탁상이 있는 유일한 식당 샤브샤브 집 비엣남의 벼룩시장의 원조 샤브샤브의 맛이 궁금했다
갑은 225천동(1만원). 양은 많았는데, 너무 짜다. 눈치를 챈 주인이 더운 육수물을 갔다주었으나 이도저도 않은 맛이되다.
그러나 표정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먹었다. 입가심을 할 필요가 있었다.
길에 앉아 굴을 파는 할머니가 않스러워 귤 한봉지를 사다. 이게 또 맛이 이상하였다. 끝물이었나보다.
결국 일회용 캔커피와 생수로 입가심을 하고야 입 안이 좀 개운해 졌다.
아침을 배부르게 먹어둔 것이 이때를 위함인 줄로 생각하자면서 서로 위로하였다.
그래도 게획한 여정을 모두 소화했으니 감사하기 충분한 하루였 다.
와이파이는 약하고, 조명은 흐리고, 몸도 곤하여 불로그 쓰는 것도 힘들다. 덕택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