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회화성의 매력 – 김광균의 「추일서정」
네이버블로그/ 현대시도 쉬워요 -김광균의 추일서정- 해석과 해설
∇ 언어들의 들끓음 속에서
고등학생 시절은 들끓는 말의 성찬이자 오솔길이었다. 닥치는 대로 읽었다. 외딴 말들도 열심히 찾아나섰다. 그때 자주 중얼거렸던 이런 말도 있었다.
이별은 미(美)의 창조(創造)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 없는 황금과 밤의 올(絲)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임이어,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한용운, 「이별은 미의 창조」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과 「알 수 없어요」가 내 비밀 노트에 베껴둔 말이라면 이 시는 내 방 벽에 붙여둔 시였다. 수시로 들여다보며, 이별의 슬픔과 고통의 신념을 어렴풋이 생각하곤 했다. 그 신념은 초극 또는 변증법적인 지양과 이어져 있으며, 그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희망에 닿아있다. 그러므로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생성의 길을 보여준다. 이별은 관계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낙관으로 삶의 기운이 새워지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시를 쓰려는 내게 얼마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던가.
한편으로는 이런 말도 자주 중얼거렸다.
그러면 갑시다, 그대와 나.
수술대 위에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저녁하늘이 펼쳐질 때
―T. S. 엘리엇, 「J. 알프렛 프로프록의 연가」 부분
엘리엇 특유의 서사 구조 속에서 발견하는 이런 단절된 풍경들의 묘사들에 나는 흠뻑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초기 시는 물론 「황무지」의 “난로 빛을 받아, 빗질한 그네의 머리는/ 불의 점들처럼 흩어져 달아올라/ 말(言 )이 되려다간 무서우리만치 조용해지곤 했다”(「채스놀이」 중에서) 같은 ‘기이한’ 말들을 외고 다녔다.
∇ 묘사의 시선
그런 가운데서 내가 가장 애송했고 의미 있게 수용한 시로 김광균의 「추일서정」(1940년 『인문평론』에 발표)을 꼽는다. 김광균의 시 가운데서 가장 널리 알려진 시의 하나다. 이른바 한국 모더니즘과 이미지즘 계열의 본보기로 자주 들어올려지는 작품이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는 첫 구절부터 나를 설레게 했다. 이어서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포프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세로팡지로 만든 구름” 같은 독특한 묘사이면서 정확한 비유로 여겨지는 말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의 시 「와사등」과 「설야」도 이런 멋진 비유들로 올이 짜여져 있다.
특히 김광균은 “시는 회화이다”라는 모더니즘과 이미지즘의 관점에 맞는 시 세계를 우리 문학에 처음으로 수용한 점에서 관심을 끌었지만, 도시적 삶의 풍경을 서경적으로 드러내는 그 시선에도 세상 눈길이 갔다.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철책이라는 인공물과 자연인 바람의 관계 위에 펼쳐진 인공물로 비유된 자연인 구름의 묘사는 얼마나 신선하게 여겨졌던가.
작위적인 묘사 위주여서, 이른바 사물이나 풍경의 본질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데는 이르지 못하고 소재주의에 함몰된 아쉬움은 있다는 일부의 지적을 받기는 하지만, 당시 한국시에서는 생소했던 도시 삶의 모습을 이 정도나마 독창적인 비유로 드러냈다는 데서 그 충격이 더 크게 내게 다가왔던 듯하다. 나는 이 시를 역시 내 책상 위의 벽에 붙여놓고는 시를 생각할 때마다 들여다보며 그 말들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륜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프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편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균, 「추일서정」 전문
< ‘그 시를 읽고 나는 시인에 되었네, 내 영혼을 뒤흔든 41편의 시(이종민, 모악, 2021.)’에서 옮겨 적음. (2024. 3.13. 화룡이) >
첫댓글 김광균은 “시는 회화이다”
시는 글로 그리는 그림이다
로마시대 부터 나온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시를 퇴고할 때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가
따져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터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