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삼불행(士三不幸)
선비(사람)에게는 세 가지 불행(불행 길)이 있다는 말이다.
士 : 선비사(士/0)
三 : 석 삼(一/2)
不 : 아니 불(一/3)
幸 : 행복 행(干/5)
송나라 시대의 대학자였던 정자(程子, 程伊川)의 말이다. 정자는 "선비에게는 세 가지 불행이 있는데, 첫째 불행은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관대작이 되는 것이고, 둘째 불행은 부모의 세도를 등에 업고 고관이 되어 영화를 누리는 것이고, 셋째 불행은 재주가 남달리 비상하여 겁 없이 문장을 써 갈기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어떤 이유이든 젊은 날에 일찍 성공을 거둔 사람은 불행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왜 불행해질 수 있는가? 젊은 날에 일찍 성공하면 겸허함과 근면함을 잃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의 시기와 지탄을 받고 각종 사건 사고 등 문제에 휘말릴 가능성이 커 자신을 수렁으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삶을 종신(終身)토록 지키기 어렵다. 그러면 불행해진다. 정자의 이 말은 사람은 평생토록 겸허함과 근면함을 잃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도 통하는 말이다. 지나치게 이른 나이에 성공, 부모의 덕에 의한 성공 등이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1. 이른 나이에 성공하였으나
김호중은 우울한 학창 시절을 보냈으나 타고난 재주인 노래 실력이 뛰어났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건달처럼 살았으나 영화 '파파로티'의 실제 인물이 되어 세간의 화제를 모았고 그 흥행을 디딤돌 삼아 독일 유학을 다녀왔다. 사람들은 그를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공한 사람, 개과천선(改過遷善)한 사람 등 다양한 모습으로 화제에 올렸다.
특히, TV 조선에서 시행한 미스터 트롯 경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다시 세간의 화제가 되었고 팬들이 급증했다. 그는 곳곳에서 콘서트를 하면서 돌풍을 불러 일으켰고 빠른 시간에 돈을 많이 벌면서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최근 음주운전과 뺑소니 사건의 거짓 진술 등으로 수사를 받다가 결국 구속되었다. 그는 '진실하게 행동하지 못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으나 그는 사람들을 실망시켰고, 과거 행적은 다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그것은 순전히 겸허한 자기 관리에 충실하지 못한 오만해진 탓이기도 하다.
조국의 딸 조민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금수저였다. 그녀는 이른 나이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서울대 법학 교수였으며, 어머니는 동양대 교수였다. 특히 아버지는 문재인 정권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이 되면서 대한민국의 정계에서 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난 후 어떻게 평가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의 일로 아버지 조국은 법무부 장관의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그는 특히 각종 입시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과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어머니는 딸 조민의 입시 비리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는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의 아버지 조국 역시 지금도 재판 중에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녀는 부산대 의전원 입학이 취소되었고 실습 중이었지만 의사면허까지 취소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최순실의 딸 정유라 사건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서 공정을 벗어난 일의 대명사처럼 회자되고 있으며 결국은 앞길이 왜곡되어 있다. 이번 제22대 총선에서 아버지 조국은 명예 회복을 부르짖으며 정당을 만들어 비례대표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 여기에는 특히 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선거법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게 된 것이다.
그는 계속 자기와 부인, 딸의 무혐의를 주장하며 검찰의 무리한 기소 탓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딸 조민은 정치적으로 일부 극렬 지지자들이 있지만(사실 역사상으로도 정치적 지지와 그의 도덕성과 법적 정당성의 관계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정치적 지지자가 많다고 해서 그가 법적으로 무죄하다는 것은 별개인 경우가 많았다) 이미 세간에 부모의 세도를 등에 업고 출세하려다 넘어진 사람으로 낙인되어 있다. 이 또한 자기의 힘과 덕성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지 않고 부모의 세도(힘과 권능)를 등에 업고 출세하면 불행해진다는 정이천의 경고와 통한다.
한때 세간에 화제의 인물이었던 빅뱅의 멤버 승리는 성공한 사업가로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그는 30대 이전에 이미 가수로서의 성공을 넘어 사업가로서의 성공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시끄럽게 하였던 '버닝썬 게이트'의 핵심 인물로 기소되어 2022년 1월 국방부 고등군사법원 항소심 공판에서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성매매 알선, 성매매),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 촬영), 식품위생법 위반, 업무상 횡령, 특정경제범죄 가중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횡령), 특수 폭행 교사 등 9개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으면서 그의 명성은 무너져 내렸고 불명예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최근 빅뱅은 다시 모이기로 하였으나 승리는 이제 거기에 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재주로 사업을 확장해 가며 성공 가도를 달렸으나 신중하지 못하고 방법이 정당하지 못하여 자기를 스스로 수렁으로 몰아 넣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례가 있겠으나 이들은 모두 최근에 이른 나이에 성공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으나 겸허함과 근면함, 그리고 도덕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탓에 수렁으로 빠져든 사례라 할 수 있다.
젊은 나이에 성공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은덕을 받아 성공하는 것 또한 얼마나 좋은가? 재주가 뛰어나 이른 나이에 성공하는 일 또한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배경으로 성공하든지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공하여야 하며 특히 중요한 것은 성공 이후에도 늘 겸허함과 근면함, 나아가 도덕적 정당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 성공은 무너지게 되어 있다.
중국 송나라 시대의 대학자였던 정자(程子, 程伊川)가 이른 나이에 성공하면 불행해진다고 하면서 사삼불행(士三不幸)을 역설하였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리라.
2. 정자(程子)가 말하는 사삼불행(士三不幸)과 역사 속의 사례
정자(程子, 程伊川)는 중국 송나라 시대의 도학을 세운 대학자였다. 그의 본명은 이천(伊川)이며 정호(程頤)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에게는 명도(明道)라는 형이 있었는데 그들은 연년생이었다. 그의 형 또한 대단한 학자였다. 그들은 하남(河南, 현재의 허난성에 속함)에서 출생하였다.
동생 정이천이 성리학의 원류라면 형(兄) 정명도는 양명학 원류이다. 우리나라에는 성리학이 대세를 이루었으므로 정이천이 더 알려져 있으며, 일반적으로 정자(程子)라 하면 정이천(程伊川)을 일컫는다.
정이천은 형이상학적인 사유를 하면서도 실천을 중시하여 거경궁리(居敬窮理: 마음을 純一하게 하여 오로지 자기의 본래 성에 순응하는 것에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한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사사 물물에 근거하여 이(理)를 궁구하여 지(知)를 명확히 한다)를 설파하였다.
지금 우리나라에 알려진 사서삼경(四書三經)의 주해서를 남긴 남송의 성리학자 주자(朱子,朱熹)는 이천을 스승으로 받들며 이천의 사상을 탐구하고 발전시켜 중화의 으뜸 가는 학자가 되었다. 그래서 주자(朱子)의 사서삼경(四書三經) 주해서를 보면 정자(程子)의 말을 많이 인용한다. 이러한 정이천은 공자를 스승으로 받들면서 늘 자기 정진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정자는 입버릇처럼 사삼불행(士三不幸)을 강조하면서 선비는 매사에 삼갈 것을 주문하였다고 전한다. 그가 말한 사삼불행(士三不幸)은 선비에게는 세 가지 불행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 불행은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관대작이 되는 것이고, 둘째 불행은 부모의 세도를 등에 업고 고관이 되어 영화를 누리는 것이고, 셋째 불행은 재주가 남달리 비상하여 겁 없이 문장을 써 갈기는 사람이라 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것 자체가 불행이라기보다는 불행으로 들어가는 문이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니 그 문으로 들어가지 말아햐 한다.
여기서 士(사: 선비)는 옛날에는 글을 읽으며 과거를 통해 입신출세(立身出世)를 꿈꾸는 사람부터 이미 입신출세한 사람 나아가 평생 글을 읽으며 사는 사람을 통칭하여 일컫는다. 옛날에는 신분 사회였던 지라 士(사: 선비)와 民(민: 백성)을 구분하기도 하였다. 民(민)은 양민을 일컫는다. 하나를 더하면 人(인)과 民(민)을 구분하기도 하였다. 대체로 人(인)은 선비(士)를 일컫지만 民(민)은 일반 백성을 일컬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평등 사회이며 모든 사람에게 학문과 입신출세의 기회가 주어졌으므로 세상 모든 사람을 선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
정자는 평생 학문을 하면서 선비가 불행에 빠지는 경우를 분석해 본 결과 크게 나누어 세 가지 경우가 주를 이룬다고 하였다. 첫째가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관대작이 되는 것이었다. 젊은 나이에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고관이 되면 처음에는 몸을 조신하게 하고 매사에 신중하다가 날이 갈수록 혈기와 능력만 믿고 날뛰기 쉽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소중한 겸허를 잃고 자기의 철학과 신념 이론만 강조하는 것이 마치 망아지 날뛰듯 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정쟁에 휘말려 결국은 탄핵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 조선 역사에서 김굉필과 조광조의 사례에서 그 예를 찾아보자. 조선 성종 때 김종직의 수제자였던 한훤당 김굉필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학문에 몸을 담았으나 밤낮으로 학문에 매진하여 김종직의 수제자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고속 승진하여 사헌부 감찰을 거쳐 1497년 형조좌랑이 되었으나 7개월 만에 사직상소를 내고 물러났다. 그의 스승 김종직은 사림파의 시효로서 외롭게 관직에 올랐으나 당시 훈구세력의 아성 속에서 적절하게 현실과 타협하면서 자기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해 나갔다.
그 제자 김굉필은 성리학적 이상과 이념을 당장 정치에 접목하여 개혁을 이루어야 하는데 스승은 그렇지 못하니 못마땅 하였다. 그는 스승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김종직과 김굉필은 서로 사이가 벌어졌다. 뒷날 연산군이 집권하고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각되어 연산군에 의해 선비들이 도륙된 무오사화 때 김종직은 부관참시 되었다. 이때 김굉필은 평안도 희천(熙川)으로 유배되었다. 1504년(연산군 10년) 다시 갑자사화가 발생하자 다시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0월 7일 철물시(鐵物市)에서 효수하라는 명이 내려져 유배지에서 효수당했다.
그는 어디서나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의로운 죽음을 맞이하겠다며 지조를 지켰다. 뒷날 성리학자들에 의해 성리학적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조를 지킨 선비로 추앙되기도 했으나 정치적 유연성은 부족했던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정암 조광조는 조선 사회에서 젊은 나이에 세상에 널리 알려진 대학자였다. 그는 한훤당 김굉필의 수제자로 알려져 있다. 조광조는 김굉필이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을 때 그 지방관 조원강의 아들이었다. 조원강은 아들 조광조를 김굉필에게 부탁했고 김굉필의 문하에서 조광조의 학문은 일취월장하였다. 김굉필을 만나 수학하면서 예의와 의리를 중시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기개를 길렀으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공자, 주자 그리고 포은 정몽주를 인생이 모델로 여겼다. 뒤에 유숭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유학 특히 성리학을 기본 철학 사상으로 받아들여 성리학적 정치사상의 세계를 열 것을 주장하며 몸소 실천하였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그를 성리학적 도학(道學)의 시조로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 사회는 연산군의 폭정에 못 이겨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반정의 주축 세력들과 중종은 정치 쇄신을 내세우며 무너진 왕도정치의 세상을 세울 것을 주장했다. 그때 시행된 성균관 알성시에서 당당한 실력으로 써낸 답안에 중종은 감동했다.
이를 계기로 1515년(중종 10년) 8월 성균관 전적을 거쳐 1515년 11월 사간원 정언, 1516년(중종 11년) 3월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곧바로 수찬이 되었으며, 그해 5월 검토관으로 경연에 참여하였다가 그해 11월 이조와 예조의 천거로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이 되었다. 1517년 8월 전한이 되었고, 그해 12월 직제학이 되었으며 과거 급제 후 30개월도 되지 않아 당상관으로 파격 승진하였다.
이렇게 고속 승진을 거듭하고 영향력이 확대되자 황해도 관찰사 윤세호는 그에게 아부하여 대사헌에 오르기도 했다. 조광조는 의견이 곧고 옳고 그름을 철저히 가렸으며 특히 유학의 도학정치 이념을 철저히 주장하며 구현하려 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공경하기도 하였고 두려워 하기도 하였다.
이어 1518년 1월 시경관을 거쳐 홍문관 부제학, 경연 참찬관이 되었고, 5월 승정원 부승지가 되었으며, 이후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그리고 1518년 11월 대사헌에 오르고 세자부빈객(世子副賓客)을 겸했다. 조광조가 이렇게 파격적인 고속 승진을 한데에는 당시 중종의 개혁 정치의 뜻과 맞아떨어졌으며 매사에 강직하고 옳고 그름을 가렸으며 왕도정치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뜻을 펼치며 현실정치를 바로잡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조광조는 거침없이 중종에게 상소를 올리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특히 당시 누구도 감히 꺼내지 못했던 소격서 철폐를 끝까지 주장하여 관철했다. 소격서는 해와 달과 별을 나타내는 상청, 태청, 옥청에 제사 지내는 일을 하는 기관이었다. 그는 오로지 유교적 도학 정치 이념의 현실 구현에 매진했다.
그의 개혁 정치와 타협하지 않는 정치적 행위는 한동안 중종의 뜻과 일치되어 중종의 강력한 비호 아래 진행되었으나 젊은 정치인인 조광조의 급진적이고 개혁적인 정치 노선에 시간이 지나면서 반대파들이 늘어나고 그의 개혁 정치 방법에 대한 논란이 일었고, 경연에서도 매사에 왕에게 바른 소리를 하는 조광조에게 중종은 점차 피로감을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는 중종과 조광조의 뜻이 달랐다. 중종은 훈구 권신 세력을 약화시키고 연산군 때 무너진 도의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조광조는 사림 위주의 유학적 도학 정치 구현이 목적이었다. 이런 괴리 사이에서 중종의 조광조에 대한 피로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조광조를 시기했던 훈구세력은 뭉쳐 조광조를 음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후궁들과 공모하여 궁궐 나뭇잎에 꿀을 발라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씨를 쓰게 하고 벌레가 파먹게 하여 조광조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구실을 만들어 탄핵했다. 조광조의 반대 세력인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은 조광조가 당파를 조직하여 구신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뒤집어 놓았으며 장차 나라를 가지려 하니 그 죄를 밝혀 달라고 주청하였다.
이에 조광조와 조광조 일파는 모두 하옥되었다. 조광조는 왕을 알현하여 직접 해명할 것을 간곡히 원했으나 중종은 듣지 않고 전남 화순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중종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렇게 젊은 개혁 정치가의 생애는 마감되었다.
조광조의 이런 고속 승진과 개혁 정치에 대해서는 뒷날도 논란이 많다. 조광조 사후에 많은 문인이 그의 학문과 인격을 존경했으며 따랐다. 그리고 조광조의 도학 정치의 사상은 조선 후기까지 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가 만약 젊은 나이에 그토록 빠르게 고속 승진을 하지 않고 산전수전을 겪으며 서서히 승진하고 정치 개혁에 노력하였다면 그의 운명과 조선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의 학문과 인격은 두고두고 예찬 되어 왔으나 그가 개혁 정치에 실패하고 단명한 것은 개혁 정치 탓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지나치게 빠른 고속 승진과 중종의 지나칠 정도의 신임이 그를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전진만 하게 하는 정치적 오만을 키웠을 수도 있다.
뒷날 조광조의 학통을 이은 율곡 이이 선생은 조광조를 논하는 글에서 그의 급진적인 개혁 정치를 아쉬워하면서 개혁은 점진적으로 민의를 받들면서 해야 한다고 했다. 어쨌든 나는 조광조는 정이천이 말하는 사삼불행(士三不幸)의 사례에 속한다고 본다.
유명한 김삿갓의 주인공 김병연은 알려진 대로 글재주가 남달리 뛰어났다. 그는 20대 초반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했고 특히 시문에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방랑 생활을 하면서 써서 남긴 수많은 그의 시문(詩文)이 또한 그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삶의 발목을 잡았다.
영월의 한 촌락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김병연은 늘 공부에 매진하였다. 20대 초반 갓 장가를 가고 난 후 홀어머니는 글재주가 뛰어난 아들의 문장 솜씨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영월 고을에서 하는 백일장에 나가볼 것을 권했다. 김병연은 여기에 나가게 되었다.
그때의 시제가 '정가산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 보라(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였다. 시 시제에 대해 김병연은 정가산의 충절은 하늘에 감흥(感興)할 정도로 깊은 것이니 만천하가 본받아야 할 것임을 절묘한 시의 구절로 써 내려갔다.
그리고 역도인 홍경래를 정벌하러 갔다가 홍경래에게 항복한 김익순은 중국 한나라 때 흉노정벌에 나섰다가 흉노에게 항복한 이릉 장군에 빗대어 만고의 비열한 역적이니 천 번 죽어도 마땅하다며 비판하는 장문의 글을 지었다. 김병연은 단숨에 장문의 시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 장원을 하였다. 시 감독관들도 김병연의 시문에 감동하였다.
김병연은 당당히 장원을 하고 주막에서 술을 한잔하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앞에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쁨은 커녕 눈물을 흘리며 돌아앉았다. 김병연은 그 사연을 캐 물었다. 어머니는 가문에 얽힌 깊은 사연을 눈물로 말했다. 김병연이 바로 김익순의 직계 후손이며 자신이 난도질하듯 비판한 김익순이 바로 자기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제까지 산골 마을로 이사 다닌 이유 또한 역적의 죄를 쓴 후손으로 남의 눈을 피해 다녔음을 말해 주었다.
그로부터 그는 조상을 볼 면목이 없는 만고의 불효자식이 되었음을 한탄하며 고뇌의 날을 보내다가 집을 떠나 방랑의 인생길을 걷게 되었다. 뛰어난 글재주로 겁 없이 써 내려간 글 때문이었다. 이 또한 사삼불행(士三不幸)의 사례가 되리라
3. 사삼불행(士三不幸)의 교훈
정이천이 말하는 사삼불행(士三不幸)의 교훈은 무엇일까? 첫째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관대작이 되는 것은 불행의 지름길이란 말은 맞는 말일까? 정말 젊어서는 출세하지 말라는 것일까? 결코 아닐 것이다. 젊어서 출세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좌우를 돌아볼 줄 알며 매사에 신중하여야 한다. 특히 오만해지거나 근면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젊은 나이에 성공을 거두면 오만해지기 쉬우며 근면함을 잃기 쉽다.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기 쉽고 학문과 수양을 게을리하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사치와 향락에 빠지기도 쉽다. 그래서 한 경고의 말일 것이다. 젊어서 출세하더라도 서서히 시간을 두고 온갖 경험을 쌓으면서 고위직으로 오르는 것이 정상적일 것이다. 그래야 그가 하는 일도 성숙미가 있고 세상에 두루 통할 것이다. 또한 늘 자기 정진의 공부에 매진하여야 할 것이다.
정이천은 또 젊은 날에 함부로 책을 써서 자랑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 또한 설익은 지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어 오만에 빠지기 쉽고 그것에 얽매여 학문의 다양성과 깊이를 해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퇴계 이황 선생에게 이런 일화가 전한다. 그는 젊은 날에 이기론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 그가 나이 들어 보니 그 책이 잘못되고 천박한 곳이 많았다. 퇴계는 풍기 군수로 있을 때 곳곳에 흩어진 자기의 책을 모아 불태워 버렸다. 그러면서 퇴계는 잘못된 견해와 지식은 세상을 해롭게 할 수 있다고 했다 한다.
둘째, 부모의 세도를 등에 업고 고관이 되어 영화를 누리는 것은 불행이다. 그런 사람은 방법상으로도 정당하지 못한 일이라 세상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 당사자 또한 세상 살아가는 자세와 지혜가 결핍되었기에 오만방자하게 되기 쉽다. 그는 근면과 성실을 잃고 사치와 방탕에 빠지기 쉽다.
부모의 세도를 등에 업고 관직에 오르는 것만 아니라 부모의 부(富)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는 자도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3대를 가는 부자가 드물다는 말은 그와 비견하여 이르는 말이다. 부잣집 아들에게는 학문적 지혜와 자기 수양과 근면함과 성실함이 길러지지 않고 오만함만 성장하여 결국은 사치와 향락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파락호(破落戶)는 그렇게 나오게 된다.
셋째, 젊은 날에 글재주가 뛰어나도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삿갓은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글재주가 매우 뛰어났다. 그러나 그 뛰어난 글재주로 자기 할아버지를 도륙질하였다. 그것을 안 김삿갓은 조상 뵐 면목이 없음을 깨닫고 평생을 회개하며 방랑길에 올랐다.
그의 인생이 행복했을지 불행했을지 그것은 그 당사자의 주관적인 문제지만 일반적으로 그는 평생 죄인으로 살아간 것이다. 지금도 SNS를 포함한 곳곳에 쓴 글이 문제가 되어 자신의 성장에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다. 재주가 남달리 비상하여도 겁 없이 문장을 써 갈기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정이천이 말한 사삼불행(士三不幸)에서 강조하는 숨은 지혜가 있다. 첫째는 세상을 살면서 또 학문을 하면서 늘 겸허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성취와 업적은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야 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근면함과 성실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는 매사에 신중하여야 하며 부드러움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요즈음 사는 사람들도 사삼불행(士三不幸)에서 말하는 지혜를 새겼으면 좋겠다.
※ 조의제문(弔義帝文) :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자 영남학파의 종조였던 김종직이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하여 지은 글로, 후에 무오사화의 빌미가 되었다. 조선 성종 때의 학자 김종직(金宗直)이 중국 초(楚)나라의 항우(項羽)가 의제(義帝, 초나라 희왕)를 죽여 폐위시킨 사건에 대해 의제의 죽음을 조위하여 쓴 글로,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을 빗대어 지은 글이었다. 이것은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端宗)을 의제에 비유함으로써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였다. 또 세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예종, 성종, 연산군 등은 왕권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세조의 왕위 찬탈에 참가한 훈구대신들 역시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이극돈· 유자광 등의 훈구대신들은 김종직이 죽은 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이 조의제문을 빌미로 1498년 연산군을 부추겨 사림파에게 보복을 가하는데, 이것이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 이로 인해 김일손을 비롯한 많은 김종직의 문인들이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파직되었으며, 김종직은 대역죄의 명목으로 관을 부수어 시신을 베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 士(선비 사)는 ❶회의문자로 하나(一)를 배우면 열(十)을 깨우치는 사람이라는 데서 선비를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士자는 '선비'나 '관리', '사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士자는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고대 무기의 일종을 그린 것이다. 士자는 BC 2,000년경인 오제(五帝)시대에는 감옥을 지키는 형관을 뜻했고, 금문에서는 형관들이 지니고 다니던 큰 도끼를 말했다. 그러니 士자는 본래 휴대가 간편한 고대 무기를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학문을 닦는 사람을 '선비'라고 하지만 고대에는 무관(武官)을 뜻했던 것이다. 士자에 아직도 '관리'나 '군사', '사내'와 같은 뜻이 남아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士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선비'나 '관리', '남자'라는 뜻을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士(사)는 (1)장기에 있어서 궁을 지키기 위하여 궁밭에 붙이는 두 개의 말 (2)중국 주(周)나라 때 사민(四民)의 위이며 대부(大夫)의 밑에 처해 있던 신분 등의 뜻으로 ①선비(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 ②관리(官吏), 벼슬아치 ③사내, 남자(男子) ④군사(軍士), 병사(兵士) ⑤일, 직무(職務) ⑥칭호(稱號)나 직업의 이름에 붙이는 말 ⑦군인(軍人)의 계급 ⑧벼슬의 이름 ⑨벼슬하다 ⑩일삼다, 종사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선비 유(儒), 선비 언(彦)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장수 장(將), 백성 민(民)이다. 용례로는 병사를 지휘하는 무관을 사관(士官), 선비의 아내 또는 남자와 여자를 사녀(士女), 선비의 힘 또는 병사의 힘을 사력(士力), 장교가 아닌 모든 졸병을 사병(士兵), 병사의 대오를 사오(士伍), 학식이 있되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를 사인(士人), 군사를 사졸(士卒), 군사의 기세 또는 선비의 기개를 사기(士氣), 선비로서 응당 지켜야 할 도의를 사도(士道), 선비들 사이의 논의를 사론(士論), 선비와 서민 또는 양반 계급의 사람을 사민(士民), 일반 백성을 사서(士庶), 선비의 풍습을 사습(士習), 문벌이 좋은 집안 또는 그 자손을 사족(士族), 학문을 연구하고 덕을 닦는 선비의 무리를 사류(士類), 군사와 말을 사마(士馬), 선비의 기풍을 사풍(士風), 양반을 일반 평민에 대하여 일컫는 말을 사대부(士大夫), 사회적 지위가 있으며 덕행이 높고 학문에 통달한 사람을 사군자(士君子), 교육이나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을 인사(人士), 하사관 아래의 군인을 병사(兵士), 절의가 있는 선비를 지사(志士),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성심껏 장렬하게 싸운 사람을 열사(烈士), 의리와 지조를 굳게 지키는 사람을 의사(義士), 기개와 골격이 굳센 사람을 장사(壯士), 세상을 피하여 조용히 살고 있는 선비를 은사(隱士), 학덕이 있고 행실이 선비처럼 어진 여자를 여사(女士), 의욕이나 자신감이 충만하여 굽힐 줄 모르는 씩씩한 기세를 떨쳐 일으킴을 일컫는 말을 사기진작(士氣振作),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음을 일컫는 말을 사기충천(士氣衝天), 그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둘도 없다는 뜻으로 매우 뛰어난 인재를 이르는 말을 국사무쌍(國士無雙), 수양이 깊어 말이 없는 사람 또는 말주변이 없어서 의사 표시를 잘못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무언거사(無言居士), 백금을 받은 용사라는 뜻으로 매우 큰 공을 세운 용사를 이르는 말을 백금지사(百金之士), 산림에 묻혀 사는 군자를 두고 이르는 말을 산림지사(山林之士), 세속밖에 홀로 우뚝한 훌륭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특립지사(特立之士), 궤변을 농하여 국가를 위태로운 지경에 몰아넣는 인물을 일컫는 말을 경위지사(傾危之士), 보잘것없는 선비 또는 식견이 얕은 완고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일개지사(一介之士), 나라의 앞일을 걱정하는 기개가 높고 포부가 큰 사람을 일컫는 말을 우국지사(憂國之士), 세상일을 근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우세지사(憂世之士), 좋은 일에 뜻을 가진 선비를 일컫는 말을 유지인사(有志人士), 무슨 일이든지 한마디씩 참견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 사람 또는 말참견을 썩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일언거사(一言居士), 조그마한 덕행이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일절지사(一節之士),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을 편하게 할 큰 뜻을 품은 사람을 일컫는 말을 지사인인(志士仁人), 바위 굴속의 선비라는 뜻으로 속세를 떠나 깊은 산 속에 숨어사는 선비를 이르는 말을 암혈지사(巖穴之士),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될 사람을 보필하여 대업을 성취시키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좌명지사(佐命之士), 항우와 같이 힘이 센 사람이라는 뜻으로 힘이 몹시 세거나 의지가 굳은 사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항우장사(項羽壯士) 등에 쓰인다.
▶️ 三(석 삼)은 ❶지사문자로 弎(삼)은 고자(古字)이다. 세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 젓가락 셋을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셋을 뜻한다. 옛 모양은 같은 길이의 선을 셋 썼지만 나중에 모양을 갖추어서 각각의 길이나 뻗은 모양으로 바꾸었다. ❷상형문자로 三자는 '셋'이나 '세 번', '거듭'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三자는 나무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대나무나 나무막대기를 늘어놓은 방식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三자는 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숫자 3을 뜻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호의를 덥석 받는 것은 중국식 예법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최소한 3번은 거절한 후에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다. 三자가 '자주'나 '거듭'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도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三(삼)은 셋의 뜻으로 ①석, 셋 ②자주 ③거듭 ④세 번 ⑤재삼, 여러 번, 몇 번이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석 삼(叁)이다. 용례로는 세 해의 가을 즉 삼년의 세월을 일컫는 삼추(三秋), 세 개의 바퀴를 삼륜(三輪), 세 번 옮김을 삼천(三遷),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의 세 대를 삼대(三代), 한 해 가운데 셋째 되는 달을 삼월(三月), 스물한 살을 달리 일컫는 말을 삼칠(三七), 세 째 아들을 삼남(三男), 삼사인이나 오륙인이 떼를 지은 모양 또는 여기저기 몇몇씩 흩어져 있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삼삼오오(三三五五), 삼순 곧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다는 말을 삼순구식(三旬九食), 오직 한가지 일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경지를 일컫는 말을 삼매경(三昧境), 유교 도덕의 바탕이 되는 세 가지 강령과 다섯 가지의 인륜을 일컫는 말을 삼강오륜(三綱五倫), 날마다 세 번씩 내 몸을 살핀다는 뜻으로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의 행동을 반성함을 일컫는 말을 삼성오신(三省吾身), 서른 살이 되어 자립한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견식이 일가를 이루어 도덕 상으로 흔들리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삼십이립(三十而立), 사흘 간의 천하라는 뜻으로 권세의 허무를 일컫는 말을 삼일천하(三日天下),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남이 참말로 믿기 쉽다는 말을 삼인성호(三人成虎), 형편이 불리할 때 달아나는 일을 속되게 이르는 말을 삼십육계(三十六計), 하루가 삼 년 같은 생각이라는 뜻으로 몹시 사모하여 기다리는 마음을 이르는 말을 삼추지사(三秋之思), 이러하든 저러하든 모두 옳다고 함을 이르는 말을 삼가재상(三可宰相), 삼 년 간이나 한 번도 날지 않는다는 뜻으로 뒷날에 웅비할 기회를 기다림을 이르는 말을 삼년불비(三年不蜚), 세 칸짜리 초가라는 뜻으로 아주 보잘것 없는 초가를 이르는 말을 삼간초가(三間草家), 봉건시대에 여자가 따라야 했던 세 가지 도리로 어려서는 어버이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좇아야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삼종의탁(三從依托), 키가 석 자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라는 뜻으로 철모르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을 삼척동자(三尺童子), 세 사람이 마치 솥의 발처럼 마주 늘어선 형상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을 삼자정립(三者鼎立), 세 칸에 한 말들이 밖에 안 되는 집이라는 뜻으로 몇 칸 안 되는 오막살이집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간두옥(三間斗屋), 가난한 사람은 농사 짓느라고 여가가 없어 다만 삼동에 학문을 닦는다는 뜻으로 자기를 겸손히 이르는 말을 삼동문사(三冬文史), 삼생을 두고 끊어지지 않을 아름다운 언약 곧 약혼을 이르는 말을 삼생가약(三生佳約), 세 마리의 말을 타고 오는 수령이라는 뜻으로 재물에 욕심이 없는 깨끗한 관리 즉 청백리를 이르는 말을 삼마태수(三馬太守), 세 치의 혀라는 뜻으로 뛰어난 말재주를 이르는 말을 삼촌지설(三寸之舌), 얼굴이 셋 팔이 여섯이라는 뜻으로 혼자서 여러 사람 몫의 일을 함을 이르는 말을 삼면육비(三面六臂), 사귀어 이로운 세 부류의 벗으로서 정직한 사람과 성실한 사람과 견문이 넓은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익지우(三益之友), 세 가지 아래의 예라는 뜻으로 지극한 효성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지지례(三枝之禮), 머리가 셋이요 팔이 여섯이라 함이니 괴상할 정도로 힘이 엄청나게 센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두육비(三頭六臂), 세 번 신중히 생각하고 한 번 조심히 말하는 것을 뜻하는 말을 삼사일언(三思一言) 등에 쓰인다.
▶️ 不(아닐 부, 아닐 불)은 ❶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 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不자는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不자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씨앗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不자는 ‘부’나 ‘불’ 두 가지 발음이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不(부/불)는 (1)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2)과거(科擧)를 볼 때 강경과(講經科)의 성적(成績)을 표시하는 등급의 하나.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가지 등급(等級) 가운데 최하등(最下等)으로 불합격(不合格)을 뜻함 (3)활을 쏠 때 살 다섯 대에서 한 대도 맞히지 못한 성적(成績)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아니하다 ③못하다 ④없다 ⑤말라 ⑥아니하냐 ⑦이르지 아니하다 ⑧크다 ⑨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 그리고 ⓐ아니다(불) ⓑ아니하다(불) ⓒ못하다(불) ⓓ없다(불) ⓔ말라(불) ⓕ아니하냐(불) ⓖ이르지 아니하다(불) ⓗ크다(불) ⓘ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불) ⓙ꽃받침, 꽃자루(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옳지 않음 또는 정당하지 아니함을 부정(不正),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속까지 비치게 환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불투명(不透明),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가능(不可能), 적절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부적절(不適切), 부당한 일을 일컫는 말을 부당지사(不當之事),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일컫는 말을 부정부패(不正腐敗), 그 수를 알지 못한다는 말을 부지기수(不知其數),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한다는 말을 부달시변(不達時變) 등에 쓰인다.
▶️ 幸(다행 행)은 ❶회의문자로 夭(요; 일찍 죽다)와 屰(역; 거역하다)의 합자(合字)이다. 일찍 죽는 것을 면함을 좋은 일로 생각하여 다행하다의 뜻으로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幸자는 '다행'이나 '행복'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幸자는 干(방패 간)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방패'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幸자를 보면 양손을 묶는 수갑과 벽에 고정하는 쇠사슬이 그려져 있었다. 수갑은 죄를 지은 사람의 신체를 구속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런데 왜 수갑을 그린 글자가 '다행'이나 '행복'을 뜻하게 된 것일까? 한자는 지배계층이 만든 문자다. 그들로서는 죄를 지은 사람을 잡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幸(행)은 ①다행(多幸), 행복(幸福), 좋은 운(運) ②요행(僥倖), 뜻하지 않은 좋은 운(運) ③거둥(擧動: 임금의 나들이) ④은총(恩寵), 베풀어 준 은혜(恩惠) ⑤오래 사는 일 ⑥다행히, 운좋게 ⑦다행하다, 운이 좋다 ⑧기뻐하다 ⑨임금이 사랑하다, 임금의 사랑을 받다 ⑩바라다, 희망하다 ⑪행복하게 하다 ⑫행복을 주다, 은혜를 베풀다(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주어서 혜택을 받게 하다) ⑬좋아하다, 즐기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복된 좋은 운수로 생활의 만족과 삶의 보람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를 행복(幸福), 행복한 운수나 좋은 운수를 행운(幸運), 사회가 어지럽게 되기를 바람을 행란(幸亂), 재앙이 일어나기를 바람을 행화(幸禍), 서로 사이가 벌어져서 틈이 생기기를 바람을 행흔(幸釁), 행복한 사람을 행인(幸人), 다행을 바람이나 행여나 하여 바람을 행기(幸冀), 운수가 좋음 또는 일이 좋게 됨이나 뜻밖에 잘 됨을 다행(多幸),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하늘이 준 다행을 천행(天幸), 기쁘고 다행함을 희행(喜幸), 감격하고 다행하게 여김을 감행(感幸), 마음에 잊혀지지 아니하는 다행한 일을 경행(耿幸), 더할 수 없이 다행함을 지행(至幸), 남에게 아첨하여 귀염을 받음을 폐행(嬖幸), 다시 더할 수 없이 다행하다는 말을 행막행의(幸莫幸矣), 남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하다는 말을 행재불인(幸災不仁), 남이 재화를 입음을 보고 좋아한다는 말을 행재요화(幸災樂禍), 매우 다행함을 이르는 말을 천만다행(千萬多幸), 부귀 할지라도 검소하여 산간 수풀에서 편히 지내는 것도 다행한 일이라는 말을 임고행즉(林皐幸卽), 다행하여 썩 행복하다는 말을 다행다복(多幸多福), 요행을 노리는 화살은 자주 차질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사행심의 발동으로 하는 일은 성취하기 어려움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사행삭질(射幸數跌), 공교롭게 아주 못된 때를 만남을 이르는 말을 봉시불행(逢時不幸)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