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열 시인>>
<<양해열 시인의 양력>>
* 전남 순천에서 출생.
* 2006년 《애지》신인상 <미늘〉外 4편이 당선되어 등단.
* 201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시조) 당선.
* 시집으로 『영산수궁가』(지혜, 2011) <고수>와 공저시집 [공중사리탑] [나비, 봄을 짜다] [이카루스의 날개]등. 이 있음.
* 2011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 2019. 12. 별세
<<양해열 시인의 대표 시>>
위험한 초대/양해열
1.
따로국밥을 먹고 있는데 날아든 청첩장
이혼식에 초대합니다. 부디 참석하시어 새로이 출발하려는 두 사람
축하해주십...
2.
청춘이 매장된 무덤을 위한 레퀴엠이 흐르고
파뿌리 송송 머리에 인 남녀
무대 위로 오르자
얼떨결에 꼬리 긴 박수를 마음으로 내리친 망치질에
결혼반지는 깨지고
몇 캐럿 부러운 시선들 샹들리에로 튄다
빛나는 졸업식 시원섭섭한 꽃다발 같은
안개꽃 부케를 바닥에 팽개치는
아리따운 신부
흩어진 별을 주우러 뛰쳐나가는
예비신부들...
3.
옆방 아내로부터 엽서가 왔다
문틈 사이로
나는 저 마음을 며칠째 뜯지 못하고
뿔로 방문을 밀고 밀고 있다
SNS 시인/양해열
현대판 만가(輓歌)를 쓰는 아침이다
포도송이처럼 복제된 말, 말들이 모니터에 찍혀온다 그 언어의 소굴에서 나는 와인을 들이켜고 어디, 만들어진 신(神)*은
이단교도 눈빛처럼 교활하게 빛난다
둥근 입을 열지 않으면 다수의 세상은 검은색의 한 국적으로 죽을 것이다, 입 안이 검었던 이들을 모두 저승으로 갔다, 잘
난 송곳니만이 진화되어 하늘에 꽂혀 새로운 창세기를 쓸 것이다,
그런 시를 노래를 사랑했다 당신, 그래서 나는 기록되고 저장되는 과일이지만 그러므로 아직 익지는 않았다
죽은 바보 나는, 첫 수음을 거친, 열나흘을 갓 지낸, 열닷새가 생의 첫날인 싱싱한 말의 배아, 누군가의 말을 따라가는 팔로
워(follower), 14진법 짧은 메시지를 모아 긴 경전을 만드는 말의 추종자, 하지만 다수의 엄격한 교주 위에 선 혼자인 이단교
도
내 생의 트위터는 무척 단조로웠다 이런 자유로운 죽음의 형식 위에 해가 뜨면 좀처럼 낮이 오질 않는다
내 시인의 지구도 질려간다 극점으로 몸을 피하고 지축을 거꾸로 돌려야 할 때 당신, 새로이 생겨난 신(神)의 발견은 토네
이도 급 특종 아닐까,
아직 살아 있는 자가 신(神)인 것이다 당신의 축가(祝歌)로 불리는 내 죽음의 곡소리는 왜 이리 즐거울까, 문자의 무덤에서
향기가 나지만 죽은 나의 온몸은 가렵다 아무도 눈물 흘리지 않았으니 흙 속의 비문도 썩지 않을 것이다
혁명을 일으키기 좋은 모드로 밤이 왔다 포도송이처럼 뭉쳤다가 터져버릴까 당신, 나는 또 한 컵 즙으로 주저앉을 것인가
일어설 것인가
시(詩)는 내일 아침에 벌써 죽었다,
*만들어진 神: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한살이/양해열
지하철 2호선은 뽕잎을 먹고 살지
오늘도 미스터 뽕(奉)은 퇴근해서 한 잔 걸치고 서울의 뽕잎 같은 녹색 순환선
잠실역에 오르지 신천 종합운동장 삼성...... 여섯 정거장 까닥까닥 졸다가 누런빛 누에고치 3호선으로 바꿔 타고 다시 두 정거장, 번데기역 나방역 거쳐 샐러리맨 종착지 잠원역에 내리지 하루에 한살이씩 누에처럼 살지
소주에 취한 손잡이가 흔들릴 때마다 스포츠서울 얹힌 저 시렁에나 누웠으면...... 여배우 빵빵한 엉덩이 젖가슴이 출렁거리는 섶 위에서 물컹한 몸집 꽉 조이는 괄약근을 열어젖히고 무르고 시퍼런 똥이나 실컷 누었으면.....
뽕잎에 뚫린 구멍 같은 역들을 세며 코쿤족을 꿈꾸며 첫잠 두잠 석잠을 자지
강남역 스쳐갈 땐 손바닥 두툼한 복부인을 만나 악수도 하고...... 땅 속 찬바람이 가야금을 타는 교대(법원 검찰청)역 환승계단 오르내릴 땐 초등학교 여선생님께 쓰다만 편지도 부치고...... 아닌 밤중에 봉창 열듯 괄호를 젖히고 (판검사가 못 되다니!) 괄호를 닫고 회초리 치시던 아버님께, 못난 자식 용서하십쇼! 비몽사몽간에 넙죽 큰절도 올리고......
잠원역에 내려서는 필라멘트 끊어진 가로등을 붙잡고 긴 한숨을 쉬지
내 삶은 도대체 어디로 자동이체 되는 구름일까? 절레절레 고개 흔들며 실타래를 풀고,...... 단칸방에 들어가서 주름 잡힌 번데기 잠을 자고...... 새벽녘엔 나방처럼 깨어 싯누런 오줌을 누고.....
뭐,
먼지 나게 짝짓기나 하겠지 그러다가
짧은 날개로 파닥파닥, 알 수 없는 바닥이나 치겠지
이브의 탄생/양해열
주문자생산방식으로 만들어진 여자가 배달되었어 꼬리뼈가 없어서 혼외정사 쪽으로 진화하지 않을 X, 내가 조립하는 건 예쁘고 싱싱한 이브
부위별로 잘 포장된 늘씬한 팔 다리에 빵빵한 엉덩이와 가슴, 곱고 하얀 피부
오래 방치할 수 없는 향기로운 주검아 미끈한 골반 라인으로 발리 해변의 시원한 바람을 불러주렴 촉촉한 너에게 입력된 주인의 지위에 관한 내 코드는 하나 뿐인 남편이자 왕, 절대 수정되지 않을 걸!
생물학적 여자의 불량 인자를 제거하고 태양의 새콤한 감성을 주입한 이십대 중반 마이 원더풀 이브! 자위용 인형이 아니야 내가 출근하고 나면 베란다 흔들의자에 앉아 햇빛을 들이마시고 즐거운 여자로 매일 적당하게 구어지지 푸른 동공의 태양광충전식에 감성지수 100%
하지만 며칠 비라도 내리면 네게도 사사로운 감정이 생겨나겠지 새벽 취중의 젖은 눈꺼풀에 내 다리 네 다리 합이 여섯 다리 너털웃음 매다는 건 시간문제겠지
그러니 너에겐 하룻밤치의 백치미만을 허용할 수밖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 무중력의 땅에서나 쓰는 마약이라니까! 아, 재수 없어 신화 속 이브의 젖꼭지 빗방울이 떨어지는군
비트겐슈타인 교수의 고별 강연/양해열
ㅡ열역학 4법칙과 추천사를 중심으로
한 시절 잘 놀다가 오늘 나는, 신(神)이 내린 직장 대학 강단을 떠납니다
두 갈래로 벌어진 역사라는 나뭇가지에 매어 늘인 동아줄을 붙잡고 밑싣개를 깔고 앉아보세요 산천을 벗 삼아 앞뒤로 왔다 갔다 몸을 움직이며 그네, 를 타고 놀다가
그네, 는 너희들의 왕이다, 라는 작금의 명제에게 말을 걸어보세요 나는 바람 먹고 좀먹은 허공에 걸린 그네, 를 알고 있다, 는 표현을 사용하는 무어(G. E. Moore)에게 나무 그늘 아래 향단에게
비릿한 바람과 썩어가는 밧줄과 나뭇가지로부터 당신들이 느낀 것들은 과연 정당한가? 물어보세요 땅바닥에 떨어져 허리가 부러지고 무한퇴행에 빠진 세 평도 되지 않는 아버지 어머니들의 까칠한 하늘빛이 검은 이유를, 그 비루먹은 사실(史實)이 말하는 개뿔 같은 소리가 왜 함성으로 바뀌지 않는지를
오늘은 지지발판과 축, 그 전체를 그네, 라고 그려보겠어요 그네, 세계의 그림
그네, 를 타는 놈들에게 있어 그네, 는 왕이에요 그 왕권은 신에게서 위임 받았다고 우기지요 그래서 그네, 왕은 세계와 왕권의 시초가 같은 것이라고 교육받으며 자란 못된 신의 시녀(侍女)일 수도 있어요
왕 재수 없고 개 재미없어 열 받는 요즘, 어떤 예쁜 놈 하나가 당신들의 원수라고 해서 또 다른 예쁜 놈들 중 임의의 어떤 놈 하나가 당신들의 원수가 될 수는 없어요 물론 그네, 라는 존재는 오랜 세월 좀을 먹고 소멸될 수도 새 바람을 먹고 창조될 수도 있고요
새로 발견된 열역학 4법칙
사람이라는 자연은 곧잘 역반응을 일으키지요 몸이 차갑다가도 분에 넘치면 이렇게 펄펄 끓지요 바람아 불어라 그네, 를 밀어버려라! 나무처럼 하늘처럼 함께 증발하고 싶구나! 하면서......
고수/양해열
1.1에서 2.9 사이의 난이도로 입수하는 비오리,
공중에서 세 바퀴 반을 굴러
산 그림자가 놀라지 않게 물풀이 다치지 않게 날개 접고 다리 뒤로 뻗어 몸의 곡선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방금 사선으로 잠수한 비오리,
강물의 속살을 뜯어 물면서 푸우, 쏟아낸 하늘 몇 모금 구시렁구시렁 살아나 수면 위로 피어오르더니
꽃, 꽃, 꽃, 물꽃을 딛고
피라미가 비오리 혀, 독설을 물고 훨훨 타는 갈밭 위로 붉은 노을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든 찰나
아, 공중사리탑
그가 낡은 처마 끝으로 갔다
고난도의 다비식, 전광판도 기록하지 못했다
인간의 설계도/양해열
-게놈지도1
1.
선암사 대웅전 지붕해체공사를 하다 천정칸막이 금강송 판자에 쓰인 바다 해(海) 자와 물 수(水) 자를 보았지요 웬 바닷물? 살고 있는 여기가 화엄(華嚴)의 바다라는 뜻이다! 원주스님은 까까머리에 알밤 먹이고 사흘을 굶겼지요 그때 뱃속에 새겨진 해도(海圖)가 내 삶의 짜디짠 지도였을까요 나는 잘게 쪼개져서 무언가로부터 끊임없이 해독되어 왔어요 몇 개이고 어디일까요 나는? 아직은 모르겠어요
2.
게놈? 꽃게가 슬퍼할 일이 아니에요 바다 속에 앉아 K(54세, 한국인)의 유전자 도면을 읽었지요 엄지손가락에서 빼낸 그의 피 한 방울 속으로 들어가 알파벳과 아라비아숫자를 타고 갈 데까지 가보았어요 한데, 디엔에이란 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티민 네 가지 염기(鹽基)로 빚어진, 결국 간장이더군요 30억 개의 K를 이제 다 알겠어요 그가 이런 이야기도 하더군요 간장 속에는 콩이 있고 햇볕이 있고 쏟아지는 비와 내리치는 천둥벼락이 있다고
그러니 사람도 마찬가지, 시커먼 놈 하얀 놈 누런 놈, 급한 놈 느려터진 놈, 짠 놈 싱거운 놈, 열 많은 놈 차가운 놈, 제각각 태어났다고허나, 원한다면 바꿀 수 있으니 그려진 그대로 살 필요는 없다고 어허, 팔자소관은 어디에도 없는 거라고
3.
그래요 남 몰래 눈물 흘리고 땀 흘려 나(我)를 키워 가면 자신의 설계도도 바꿀 수 있지 않겠나요 눈부신 과학문명 때문에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는 저 전설의 대륙도 다시 끌어올릴 수 있지 않겠나요
페이스 온/양해열
영혼도 외모를 따지는 세상
망자는 염습이 끝나도 바로 관에 들어 갈 수 없다
on과 off 사이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 얼굴을 그려 넣고 있다
고비마다 표정 바꾸며 살아온 변검사變瞼士의 마지막을
고개 한번 숙였다 쳐들 때마다
한 꺼풀씩 뜯겨 옆구리로 사라진
수백 수천 장 가면으로
맹수를 쫓고 부잣집 담장을 넘었겠지
잔잔한 볼웃음과 눈빛
삼베 끈을 풀고 사체가 곧 일어설 것 같다
불끈 솟는 내 귀면鬼面의 꽃들도
미래 속으로 한 장씩 감기다
멈칫,
저런!
화사하게 피겠다
*변검(變瞼): 눈 깜짝할 사이에 가면이 바뀌는 중국 전통 가면술.
비트겐슈타인 교수의 고별 강연-열역학 4법칙과 추천사를 중심으로/양해열
한 시절 잘 놀다가 오늘 나는, 신(神)이 내린 직장 대학 강단을 떠납니다
두 갈래로 벌어진 역사라는 나뭇가지에 매어 늘인 동아줄을 붙잡고 밑싣개를 깔고 앉아보세요
산천을 벗 삼아 앞뒤로 왔다 갔다 몸을 움직이며 그네, 를 타고 놀다가
그네, 는 너희들의 왕이다, 라는 작금의 명제에게 말을 걸어보세요 나는 바람 먹고 좀먹은 허
공에 걸린 그네, 를 알고 있다, 는 표현을 사용하는 무어(G. E. Moore)에게 나무 그늘 아래 향단에게
비릿한 바람과 썩어가는 밧줄과 나뭇가지로부터 당신들이 느낀 것들은 과연 정당한가? 물어
보세요 땅바닥에 떨어져 허리가 부러지고 무한퇴행에 빠진 세 평도 되지 않는 아버지 어머니들
의 까칠한 하늘빛이 검은 이유를, 그 비루먹은 사실(史實)이 말하는 개뿔 같은 소리가 왜 함성으
로 바뀌지 않는지를
오늘은 지지발판과 축, 그 전체를 그네, 라고 그려보겠어요 그네, 세계의 그림
그네, 를 타는 놈들에게 있어 그네, 는 왕이에요 그 왕권은 신에게서 위임 받았다고 우기지요
그래서 그네, 왕은 세계와 왕권의 시초가 같은 것이라고 교육받으며 자란 못된 신의 시녀(侍女)
일 수도 있어요
왕 재수 없고 개 재미없어 열 받는 요즘, 어떤 예쁜 놈 하나가 당신들의 원수라고 해서 또 다른
예쁜 놈들 중 임의의 어떤 놈 하나가 당신들의 원수가 될 수는 없어요 물론 그네, 라는 존재는
오랜 세월 좀을 먹고 소멸될 수도 새 바람을 먹고 창조될 수도 있고요
새로 발견된 열역학 4법칙
사람이라는 자연은 곧잘 역반응을 일으키지요 몸이 차갑다가도 분에 넘치면 이렇게 펄펄 끓지
요 바람아 불어라 그네, 를 밀어버려라! 나무처럼 하늘처럼 함께 증발하고 싶구나! 하면
서......
싸이(Psy)/양해열
1.
빌보드차트가 위협하자 주먹을 내민 그의 파워에 관한 얘기다 세상의 전광판들은 회로 속
다이오드와 빛을 뜯어 먹게 되었다 덜 괴롭게 죽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2020년 유엔사무총장 후보를 보라
오바마는 한반도를 정복할만한 군사력은 가지고 있지만 싸이를 주저앉힐 무기는 개발하지
못했다 차 한 잔 같이 마시는데 2억 원을 받은 팀 쿡이 조만간 세상에서 가장 좋은 컴퓨터를
내놓겠습니다, 말하자 기자들은 ‘그’보다 강합니까? 물었다 팀 쿡은 즉시 애플에서 사임했다
오마르 알 바시르를 퇴출시키기 위해 그가 수단을 방문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바시르는 즉각
화성으로 망명했다 이제 세계는 평화롭다
2.
오 악마의 목구멍, 가여운 이과수여! 지금은 그가 세계에서 가장 큰 폭포이다 그는 시계를
차지 않는다 그가 시각을 정할 뿐이다 그가 뉴욕에서 재채기를 하면 일본 열도는 쓰나미에 시
달린다 그는
스위치를 off로 누르고 어두워지기 전에 이불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팔굽혀펴기를 할 때 스
스로를 움직이지 않는다 지구가 내려갔다 올라갔다 할 뿐이다 그는
이미 화성에 다녀왔다 그래서 그 행성에 외계생명의 흔적이 없는 것이다
지구온난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감기에 걸려 태양열을 조금 올렸을 뿐이다 아이들은 눈
위에다가 오줌으로 자기 이름을 쓰는 장난을 하곤 한다 그는 콘크리트 위에다가 할 수 있다
그는 무한까지 세어보았다 그것도 두 번이나. 지구는 그가 춤추기 때문에 돌아간다 그는 커피
원두를 이빨로 갈아 전 세계로 판매할 것이다 그는 0으로 숫자를 나눌 수 있다
3.
진화론 따윈 없다 그가 살려준 생물만이 존재할 뿐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종교를 바꿨다
‘그’다 그는 무리수 파이의 마지막 자릿수이다 그가 모든 것을 끝낸다
레즈비언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를 만나지 못한 여자들일 뿐이다
신은 세계를 창조하는데 6일을 보내고 좀 쉰 다음에 그를 만드느라 수년을 보냈다 그리고
신이 말씀하시길...... 당장 튀어라! 그가 오고 있어! 출애굽기 어디쯤에 적혀 있다
그는 눈을 뜨고 재채기할 수 있다 그는 양파를 울게 한다
4.
그가 말춤을 추기 전까진 지구는 평평했다
나는 싸이다 물론 너도 싸이다 우린 싸이다
* 위 시 중 일부는 인터넷에 떠도는 유머를 인용했음을 밝힌다.
재수 없는 날의 오후/양해열
-게놈지도5
14시, 게놈지도를 훑어본 보험설계사는 청약서에 ×표를 쳤다 붉은 십자가가 기울자 우울증이 심해졌다 탈모가 일어나고 비곗살이 많아지고 시력이 나빠질 게 뻔하단다 우성인자를 복제하지 않고 자연 임신을 선택한 엄마가 오늘따라 더 밉다 왜 유전학자를 안 믿고 하느님을 믿었나요?
또 취직에 실패했다 인사부장은 근로계약서를 화면에서 지웠다 진짜 이력서는 내 핏속에 있었다 1년 안에 조증에 걸릴 확률 50%, 상사 폭행 60% 집중력 상실 70%……양극성장애를 관장하는 내 11번 염색체, 빌빌 꼬인 불멸의 코일 탓이다 15시 정각의 비행기가 3초씩이나 연착했을 때부터 조짐이 안 좋았다
16시, 게놈지도를 위조하려던 극악무도한 놈과 유전자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오늘도 불신검문에 걸렸다 세상에나, 제 몸의 설계도를 바꾸려는 놈이 또 있다니! 귓불이 따가운 건 둘째 치고 요즘은 피 한 방울도 아깝다 유진 머로우* 피도 이제 몇 팩 남지 않았다
맞선 본 17시는 차라리 치욕이었다 공부 못하는 유전자를 가졌다며 비너스처럼 못생긴 여자에게 퇴짜 맞았다 요즘도 아이를 낳으려는 여자가 있다니! 텅 빈 동물원에나 보낼 인간, 아냐 아직까지 그 여자, 사타구니에 캐스터네츠를 붙이고 있는 지도 몰라
* 영화 ‘가타카’에 나오는 우성인자를 가진 주인공 이름에서 따옴.
영산수궁가/양해열
멋진 새 이야기 한 토막 허겄는디 시방 내 심정이 외악사내키로 금줄 친 장독 속 짠장거튼지라
두서없이 따댁이드라도 맘을 허뿍 열고 눈구녕 똑바로 뜨고 들으럈다
새가 나온다 새가 끼대나온다
두루미도 오리도 아닌 놈 나온다
눈은 껌헌 안경테 두른 벌건 유리알이요
주댕이는 밥숟가락이라.
따복따복 챙겨 묵기 힘든 세상
아예 놋숟구락 두 개를 우알로 처억 포개서
조댕이 끝에 떠억 매달았으니 희귀허고 말고.
이름허여 저어 묵는 새요 자칭,
별호는 동서합일(東西合一)에 자(字)는 좌우(左右)당간이라.
고개를 요리 홰딱 저리 홰딱
홰딱 홰딱 홰딱홰딱
갯꼬랑 한 줄기 겉물 속물을 다 헝클고
재앙시롭게 끼대나오는 꼴 가관이로다
온통 숭게투성이 저 조동아리 보아라
딱 조중동이로고.
못된 심보 좀 보아라
역대 간 큰 도독놈들이로고.
과연 천연기념물이로다
허니 저놈 못된 행투가지가 어찌 미움을 사지 않았을 것이며, 어찌 멸종위기에 내몰리지 않았으리요
한번은 황천 앞까지 갔었겄다 돌아오지 않는 강 앞에서 염라대왕 호통 치시길,
네 이놈 우왕좌왕허지 말렸다
고개 똑바로 쳐들고 살렸다
모가지 내 놓아라!
모가지 내 놓그라!
얼이 반 종재기나 빠진 저놈, 눈치를 굼실굼실 몽구리더니 옆굴탱이 개배에서 모가지를 척 꺼내놓으며
이내 피눈물을 뿌리는지라, 사연이 궁금허신 염라대왕 곧, 비서실장 경호실장 정보원장 합참의장 보안사
령관을 불러 모아 소곤소곤 수군수군 속닥속닥 쏘삭쏘삭 회의에 회의를 거듭허더니,
야야, 살았을 적 심성이 참 고왔었구나
뒤로 돌아! 그냥 가불어!
모가지 싸게 붙이고 배삐 내빼그라!
그리허여 기사회생, 60년 만에 순천만으로 돌아오는디
(워따, 갈 때는 뽀르르 가드라도 돌아올 땐 되게 먼 곳이 황천인 모냥이요 잉, 이 땅에 무슨 변고가 있어
다시 오는 가 본디, 우연치곤 참 요상허요 안 그랴도 밤마다 촛불로 광우병 꼬시르고 쥐 수염 태우느라
솔찬히 시끌사끌헌 판국에 말이요)
어허이!
오래전 그 참헌 사연 한번 들어보겄다
그러니께 지금으로부터 딱 한 갑자 전, 무자년 그때여 따수운 봄날이렸다 고갯짓 오살나게 감픈 새깽이
저어새가 큐우리 큐리 울었쌈시롱, 보짱 좋은 아부지한테 첫 물질을 배우는디,
악아 붓대로 콕콕 찍어댈 것 없다
논또랑에 살던 드랭이를 용(龍)으로 키워낸
순천만 갯꼬랑 저 큰 물음표
아, 막고 품진 못헐지라도
휘휘 내젓기라도 해야 대장부 아니겄냐
흙탕물에 묵잣것 있고 밁헌 물엔 씨도 없다
좌우우좌 사정없이 후적거려 보그라 허벌나게 저어불어라,
허나, 귓구녕에 담아두기는커녕 갈대밭에 되대허니 누웠다가 자떼바떼 앙겄다가
실렁실렁 놀악질이나 다발로 허겄다 함 들어볼작시면,
진자리에 행감치고 모른 자리 건너뛰고
비가 오면 점잔빼고 날이 개면 발 삿대질.
얕은 물은 씨게 젓고 짚은 물은 살망살망.
게구멍에 에헴허고 깔대밭에 물똥 싸고
농게 다리 머리 꽂아 도나캐나 멋 부리고
짱둥이 날개 눈썹 붙여 뻘 속으로 날자씨고
퉁퉁마디 뚝 분질러 꺼꾸로 꽂아두고
칠면초 낯바닥에 허버버벅 뻘칠허여
애고 애고 재밌는 거 빠꿈살이 한답씨고.
짝 다리 짚은 두루미 발 걸어 자빠뜨리고
와온(臥溫) 가선 서 있고 화포(花浦) 가면 누워 있고
한피짝5)에 앙거서요 씰룩대는 논병아리
방뎅이나 홀짜꿍 혓바닥을 낼름낼름
아닌 말로 히야까시 옳은 말로 연애질에
흐린 물속 세월 좀 묵냐 네월이 잘 가드냐
낯짝 비친 거울둠벙 고개 박고 도리도리.
고로코롬 살살 저으면 영리헌 것들 다 내빼고 니 고개만 아픈 벱여,
아부지가 큰 밥주걱으로 거럭거럭 소리치며, 목델미를 밀었다 땡겼다 들깡달깡 어르고 방애야방애야
달래도 밥 빌어 뎁혀 묵을 어린놈의 새깽이가
애비 말은 타지 않고 지가 무슨 물 무서운
鶴이라도 된다는 듯 엥개엥개 꼿발딛고!
되똥되똥 오리야 똑바로 걸으렸다
뒈질 듯이 악을 쓰고 지랄 옘병 간을 치고!
(허, 똥 묻은 놈이 재 묻은 놈 나무랜다고 아 누군 되똥거리고 싶었겄소? 쬐끔 쉬었다 갑시다 얘 고수야
이놈아 물 좀 다오 아, 싸게싸게 안 주고 뭣허고 자빠졌냐!
우리도 얼마 전에 그랬던 적이 있었지라, 햇볕정책, 에 히읗 자(字)만 나오면 뭘 몽땅 퍼준다고 눈깔을
까제끼고 우리부터 배부르고 보자, 보수 보수, 악을 쓴께 잠시 쩔뚝거렸을 때가 있었지라
그래도 그때가 봄날이었소 일장춘몽에 과거지사가 되지 않도록 모도덜 정신들 차리고 마음의 창을
다시 열어야 안 쓰겄소? 그건 그렇고 또 갑시다)
애기가 날넘어갖고 도통 말을 듣지 않든 것이럈다
제 깜냥에는 황금빛 주둥이숟가락을 세상 중심에 떡 올려놓고, 며감지 사타구니 날갯죽지에 으지쟎게
붙어있는 황청백적흑색을 오방색(五方色)이라 부르고, 검고 뻬딱한 발목땡이로 쓰다듬으며 변화무쌍한
음양오행의 엇조를 읊는 것인디
돌고 도는 봄여름가을겨울 다 내 몸속에 있소이다
청룡백호주작현무 나로 인한 사신(四神) 아니겄소
뻘바닥에 사는 미물들이여
오늘은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 그대들과 상생(相生)이요
내일은 목극토 토극수 수극화, 그대들과 상극(相剋)이니
힘알테기 없는 종속과목강문계, 운명의 쌍곡선이
내 주둥이에 달렸소이다
커갈수록, 시건방진 소리에 초를 찌끌든 것이럈다
요런 느자구없는 꼬라지 좀 보소 환장허겄네,
횃병 도진 즈그 아부지 하루는, 힘 파이고 김이 빠질 대로 다 빠져서
허다허다 안되면 굶는 게 상수다 상수.
허나, 요것만큼은 꼭 지켜야 쓴다
하루 두 번 개펄 눈꺼풀에 심 돋는 끝날물 오면
좌우로 휘휘 내젓지 말고
울어쌓는 바다, 허연 밥물만 생키고
고개 끄덕끄덕허그라
그때 잠깐이 개펄에 사는 산목숨들
몱헌 눈으로 큰 하늘을 쳐다보는 때이니
하늘에 적을 두고도 뻘땅 뒤져묵고 사는 우리네 도리니라,
요러고는 붕(鵬)이 되야 남명(南冥)으로 갔다는 것인디
(아닌 게 아니라 뒤져묵어도 엔간히 뒤져묵어야제 몇 천억씩 포대기로 망태기로 포크레인으로 다발다발
몽땅몽땅 싸그리 꿀떡, 요러다가 몇 놈은 골로 안 갑디여)
아, 그때도 똘레똘레 해코지를 다발로 허더란만!
허나 배고프면 철든다고, 타고난 고갯짓으로 똘망똘망 물 반 고기 반 순천만에서 아무려면 당그레질허는
목구녕 하나쯤이야 개붓허게 못 건사했을까 공작(孔雀)도 날거미 묵고 산다고 했는디, 그럭저럭 한세월
처묵고는 살았것제
아, 그런디그란디 요짝 동네에 요상헌 날들이 먹창구름에 우레 몰려오듯 우그르르 와그르르 떼구르르
왔든 것이럈다
여수 신월동 14연대 기차 타고 순천 오른 며칠 후, 주력부대는 이미 깊은 산으로 떠나고 없는
무주공산에, 토벌대들이 하늘 땅 바다로 입체작전을 펴며 미친 개떼가 되야 들이닥치는디
계엄령을 내리고 계엄령을 내리고
외통수를 보자 외통수를 꼭 보자
광양 벌교 구례를 야무지게 틀어막고
여수 쫑포 앞 바다에 군함 띄워서
독 안에 든 쥐새끼 쥐새끼들을 만들고
카빈소총 에망소총 장갑차에 박격포
57mm대전차포 헬리콥터 따발총
조총 새총 말총 눈총 모조리 동원해서
농사꾼 장사꾼 어부 학생 아짐씨
아자씨 할매 할배 여자 남자 애기 메기
구별 없이 싹쓸이 따콩 따콩 따다콩
따다다다 따다다다 따닷따닷 따따따따 쾅쾅 우르쾅 우르르쾅 우르우르쾅쾅쾅쾅
쏴대고 지져대고 퍼붓고 불 지르고-,
인심 좋은 순천(順天)은 역천(逆天)되고
산고수려(山高水麗) 여수(麗水)는 오수(汚水)에 악수(惡水)가 되었겄다
허나, 요것은 새 발의 피요 모기 발에 워커요
우익교향곡(曲)의 보드라운 서곡이었겄다
가담자 색출이라는 즉흥환상곡(哭)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또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끝도 갓도 없이 죽어간다
빨치산 아지트로 등짐 져다주고 아이고 나 살았다! 부리나케 내려온 놈.
내려온 놈의 아부지 엄마 각시 동생 사돈네 팔촌.
산 손님에게 쇠양치 빼앗긴 놈. 쌀 고구마 보리 꿔준 놈.
그걸 보고도 신고 안헌 놈. 신고했어도 접수 안 된 놈.
흰 지까다비 신은 놈. 군용 빤스 입는 놈.
대가리 빼코 민 놈. 손바닥 맨들헌 놈.
평소에 보기 싫은 놈. 글줄이나 읽어 본 놈.
못생기고 힘없는 놈. 금이빨 박은 놈.
은장도 품은 놈. 뒈져도 찍소리 안헐 놈.
찍소리 허드라도 바로 뒈질 놈. 무슨 죄가 있건 말건
저놈이요! 손가락질당헌 놈.
일타쌍피 싹쓸이 특피 다이아몬드 세 장에
피 석 장 얹히고 새고도리 비고도리
쓰리고 포고 파이브고 배판에 또 흔들고
광박 피박 멍따에 월약 너 홀로 독박
다들 죽었다 디졌다 찍찍찍, 뒈져버려라!
쌔려 죽이고 패 죽이고 찍어 죽이고 쾅쾅 쏴 죽이고, 쑤셔 죽이고 비틀어 죽이고 묻어 죽이고 조곤조곤
쪼사 죽이고
낙장불입이닷!
기왕 내지른 김에, 베고 누르고 찢고 태우고 절이고 지글지글 칙칙 지져 죽이고
비풍초똥팔삼이 웬 말이냐!
우엣놈 아랫놈 순서 없이, 깎고 조이고 끊고 비벼서 쭉 뽑아 우려내고, 양잿물에 훌렁훌렁 헹궈 죽이고
튀기고 얼리고 녹이고 데쳐서 살가죽 벗겨 널어 죽이고
밤일낮장 좋아허시넹!
해가 솟던 달이 뜨건 낮이나 밤이나, 잉잉 울려 죽이고 실실 웃겨 죽이고 찔벅찔벅 건드려 죽이고
이 판은 나가리가 없는 판이다, 종자(種子)도 남기지 말그라!
허, 허, 허, 쇼당도 안 받고
모조리 죽이는디
아 새끼저어새,
저어새새끼 그놈!
시체낟가리 쌓든 풍덕다리 밑이라든가
천하악질 백두산호랑이가 좌익 가담자 색출헌답시고
비 맞은 달구새끼거튼 사람들 모다 꿇어앉히고
시퍼런 니뽄도를 모감지에 들이대고
뒈질래 살래, 살래 뒈질래
타는 지리산골짝으로 마른 백운산자락으로 내뺀
연맹, 여맹, 산군(山軍)패거리 캐묻는
사범학교 핏구뎅이 앞이라든가
(훠이! 훠이! 요것은 80년의 봄, 광주 도청 앞 상황허고 어찌 비슷꼬롬허요 낙지 대가리 번들번들
영리헌께 언능 컨닝구했는갑소, 뭔 구실이 있어야 개 잡듯 때려잡겄는디 껀수는 없고 짓고땡 끗발은
안 서고, 전라도 버전으로 말허자면,
에라 모르겄다, 쩌그 저 전라도 촌놈들 논두렁깡패거튼 놈들 우리는 남이당께! 족보를 확 긁어 파불어라,
비상계엄 내리고 호루라기 밤마다 불어 옴짝달싹 못허게 가둬라, 외지로 소문날라 탱크로 사방팔방 틀어
막고 폭삭 그 자리에 주저앉혀라 잉, 필경 요랬을 것이요
아이고 또 물 한 볼테기 마시고 헙시다 고수 네 이놈, 이 시러베아들놈아 빨랑 물 대령 안허고, 뭔 지랄헌
답시고 앙거만 있냐?
쩌기 저 제주도 선상님은 뭐 좀 알란가 모르겄소마는, 제주도 비는 요새도 사삼사삼 내린담서요 어허,
거 전라도 영암이라 월출산 출신 이쁜 아낙 시인이 그럽디다 헌디, 광주 비는 시방도 오씹팔오씹팔 내리고
여수순천 비는 씹씹구씹씹구 내리요, 요건 싸굴탱이 없는 내 주댕이가 헌 말이요 자자, 또 가봅시다)
아 고놈, 보다보다 못 보겄든지
두 눈 뜨고 도저히 못 보겄든지
허머, 지에미 시벌헐 좆도 아닌 놈들
배창시 확 끄집어서 되야지 꾸정물에 처박고 대가리 쪽박을 깨서 손목에 걸고 갠지 갠지 깨개갱
꽹과리나 칠 놈들
납작자지 달았냐 졸금자지 달았냐 용두질에 비역질도 못헐 놈들
날아가는 새씹이나 올려다보고 마누라 밑엣품 팔아 고위관직 살 놈들
에미 애비 자식에 별눈 뜬 손주도 없느냐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별똥 맞아 뒈질 놈들아-,
나가 그랬소!
나 혼자 그랬소!
뽀르르르 지 발목땡이로 맨 앞줄로 가서는
모가지를 왼쪽으로 쭈욱 내밀고
예씨요 예씨요 예씨요 세상에서 젤로 치기 좋은
길쭉헌 모가지 여깄소
나를 치시오 내 좌경모가지 여깄소!
나가 반동이요, 좌익이요
예예예예예예!
처음 마지막으로 고개를 까딱까딱 끄덕끄덕허더니
시퍼런 칼날에 모가지 뎅강,
콱, 뒈져불더라는 것이럈다
허허, 새가 사람보다 백배 천배 낫고말고.
참헌 구신이 산(生) 사람 똘것
모가지에서 떨어져 나온 밥숟구락도
애먼 목심 몇이라도 더 구헐라고
예, 예, 예예, 예예예, 한참 동안 호딱호딱,
피를 뿜으며 뛰더란만
(여보소 우리가 남이가? 요것도 실은 요때 배워간 것이요 그런디 쪼깨 잘못 써 묵었지라 잉, 아 웃지들
마쇼 여기는 초원복집 밀실이 아닌 확 트인 광장 아니겄소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남이요? 다들 뭣 허고
있다요 속고 또 속아 속창아리 없는 우리랑은.
미친 듯 비 오는 것이 광우(狂牛)가 아니요 옥수청운(玉水靑雲)의 물길이 대운하가 아니요 빙하가
녹아 수면 높아지는 것이 물가상승이 아닌디 말이요)
그리허여 한 갑자 지난 아즉꺼정도 순천만 칠면초(七面草)밭, 가을이 오면 주노초파남보 얼굴을 버리고
핏빛 한가지로 물드는 것이란만
와온 뻘밭이 품어 키운 보름달, 서편 화포포구에 둥실 뜰작시면 나도 꽃이요 니도 꽃이여 서로가 서로의
꽃인 거여 핏빛 칠면초꽃, 단색 무지개를 촛불맨치로 켜들고 꿀렁꿀렁 우는 것이란만
(빛깔 잃고 속 비우고 흔들거리는 갈대에게 허허로운 호기심이나 일어, 어쩌다 순천만에 나긋나긋 생각도
없이 오시는 님들, 아따 화포에 가본께 꽃도 없드마, 요런 말은 허지말드라고요 심장의 피가 꽃으로 끓어
오르는 순천만이랑께요)
새가 날아든다 저어새가 날아든다-
큐리 큐리 큐우리 리리 리 울음 운다
저 건너 병풍석(屛風石)에 마주 꽝꽝 마주 쌔려
헌 부리 깨뜨리고
갈아 끼운 새(新) 부리, 쌍칼 휘두르며
갯고랑 모진 물 베러 온다-
이리로 가며 번뜩 저리로 가며 번뜩
풍진 세상 휘저으러 저어새 날아온다-
큐리 큐리 큐우리 리리 리 에이이이이이어
좌우로 휘저어 구정물 베러 온다
훠이 훠이 잡것들아 물렀거라
저어새 날아든다- 큐!
세월이 하 수상허여 이만 더질더질,
살아 있는 장례식/양해열
고열과 기침이 난무하는 신종인플루엔자의 계절,
살아 있을 때 내 장례식을 치르고 싶었다
움직이는 시신들 영안실로 몰려와 두 번 절하고
부의함에 봉투 넣고 소음 속으로 섞여간다
아케론의 뱃사공 카론에게 건넬 여비가 생기면
3일장은 즐겁다
흰 국화꽃 한 송이 영정사진 옆에 놓고 기도하는 약혼녀
어제 종교를 바꿨으므로 오늘은 울지 않는다
빈 오동나무 관 속에서 시퍼런 번갯불 일고
천둥벼락 치는 소리 들려온다
종이컵에 부딪히는 전생의 내 이야기들
독한 소주 빛으로 방울져 은박매트에 똑똑 떨어진다
땅바닥에 깔린 은하수 속 목동 전갈 물병 사냥개 사수 고래......
이승의 별명들이 별 무리로 흐르더니 별안간
밤하늘로 떠올라 다시 탯자리를 잡는다
자정이 오자 어제의 시신들 죽음의 방을 모두 빠져나가고
죽은 나만이 방명록을 펼쳐들고 운다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과 나타샤와 흰 당나귀, 악의 꽃
선암사 600년 묵은 홍매까지 조문객으로 다 왔는데
작년에 황천 가신 어머니만 오지 않았다
레테의 쇠가죽 북소리 둥둥 목구멍에 차온다
태양의 혼불이 탈 때 보고 싶은 사람 정령이 보인다 했지
해바라기 씨 기름에 무명심지 꽂고 성냥불을 댕긴다
저기, 내가 건너오지 못하도록 꼬박 일 년 째
망각의 강물을 바가지로 퍼내고 있는 어머니
꽃불 흔들며 환하게 웃고 있다
침묵의 옷을 입은 밤하늘의 관객들 눈만 껌벅인다
장례식 도중에 뛰쳐나와 옥상에 서서
밤새도록 쿨럭이며 우는
뜨거운 시신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