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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낫한 스님의 저서 ‘기도 Prayer :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지키는 힘’ 서적의 부록 ‘열린 종교를 지향하는 틱낫한 스님의 주기도문 해설’을 올립니다. 불교승려인 틱낫한 스님이 천주교, 기독교의 기도문을 해설한 진귀한 내용이니 재밋게 읽어보세요. ^^
< 주기도문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여기서 '하늘에'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세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존재하지만, 지상의 피조물과 동일하지 않다. 마치 물과 물결이 서로를 포함하면서도 완전히 같을 순 없듯이 말이다. 그는 궁극적 실체이며, 우리는 어떤 이름으로도 그를 정의하거나 묘사할 수 없다. 우리는 그를 갓(God, 영어)이라 부를 수도 있고 쥬(Dieu, 프랑스어)나 뚜옹 데(Thuong De, 베트남어), 알라(Allah, 이슬람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이름 중 정확한 것은 없다. 나는 신을 '궁극적 차원의 위대한 실체'라고 표현한다. 그 어떤 이름도 궁극적 차원의 실체를 그대로 묘사할 수는 없다.
신은 인간 사회에서 영화배우나 대통령처럼 유명해질 필요가 없다. 그는 다른 이보다 유명해지길 원치 않는다. 따라서 그의 이름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논평할 필요는 없다. 궁극적 차원의 위대한 실체와 접하기 위해선 그 이름을 넘어서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신의 거룩한 본성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말할 수 있는 도道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말로 설명된 신은 진정한 신이 아니다. 또한, 이름 붙여진 신은 진정한 신이 아니다. 그의 실체는 모든 언어와 이름을 넘어선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나라kingdom'는 하나님 아버지가 거하는 나라이다. 이는 그리스어 '바실레이아basileia'에서 온 것인데, 이 단어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영토, 땅인 '왕국realm'을 뜻한다. 이는 상징적인 관점에서 온 것이다. 두 번째는 '고귀한royal'이다. 이는 왕국의 성질, 즉 '왕국다움kingdomness'을 뜻한다. 그 왕국은 행복, 영원성, 평화와 기쁨이라는 본질을 지닌다. 세 번째는 지배 행위를 뜻하는 '통치reign'이다. 통치는 '행위'에 속하므로 역사적 차원을 의미한다. 이 역사적 차원은 태어남과 죽음이 있는 세계이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이 있는 이 현상 세계 안에 궁극의 세계인 '니르바나(열반涅槃)'를 가져올 수 있다. 이것은 '행위'를 통해 가능하다. 즉 '기도'라는 행위를 통해 역사적 차원 안에서 궁극적 세계를 살 수 있다. 태어남과 죽음이 없는 궁극적 차원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기도하면, 이 땅은 하나님의 나라로 변한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라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평화, 기쁨, 행복의 본성을 지니고 살아간다.
우리가 궁극적인 차원을 역사적인 차원으로 불러오면, 동시에 두 차원에서 살게 될 것이다. 역사적인 세계 안에 살면서도 궁극적인 차원을 접할 수 있다. 우리가 걷기 명상을 하거나 마음 챙김 안에서 식사를 즐거이 하는 것은 현상 세계 안에 니르바나를 불러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며 성체聖體를 받는 것도 역사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 행위들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원하는 열망을 향해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한 선승에게 제자가 물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찾기 위해선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러자 선승이 대답했다. "우리는 생멸의 한가운데인 이곳에서 불생불멸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물결 안에서 물을 찾아야 한다. 현상 세계 안에서 불생불멸, 행복, 견실함, 자유와 같은 본성을 찾아야 한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는 우리가 기도할 때 품어야 할 가장 숭고한 열망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이 구절에 대해서는 프랑스어 문장을 보는 것이 좋다. "Donnez-nous aujour'hui notre pain de ce jour," 여기서 'notre pain de ce jour'란 '매일'의 양식이 아니라 단지 '오늘'의 양식을 뜻한다. 우리는 내일이나 모레, 다음 달이나 내년을 위한 양식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 단지 오늘의 음식만 먹으면 된다. 즉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깊이 살아야 한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욕망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을 소홀히 여겨선 안 된다.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많은 걱정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는 욕망 때문에 항상 물건을 쌓아놓으려 한다. 그러나 삶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내일을 위한 준비에만 신경 쓴다면, 지금 이 순간의 경이로움을 잊고 말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 존재하는 듯 순간을 더욱 깊이 살아야 한다.
우리에겐 이미 오늘 행복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나와 주변의 모든 것이 행복의 근원이 된다.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그 모든 것을 사용할 수가 있다. 그러니 미리 모아놓거나 쌓아둘 필요가 없다. 즉 탐욕스러울 필요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삶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랄 필요도 없다. 몇 년, 몇 백 년을 더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깊이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한순간이라도 제대로 깨어 있는 삶을 살면, 그것으로 우리에게 충분하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여기서 '죄'란 우리가 사랑하는 이에게 저지른 실수들이다. 지금껏 우리는 무언가 잘못된 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그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다른 이를 고통스럽게 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진 무거운 죄이다. 어떻게 하면 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우리를 용서하길 원한다면, 우리 역시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 당시 그들은 어떤 행동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충분한 마음 챙김과 이해, 사랑을 품지 못한 채 행동했다. 우리는 그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을 향한 분노를 놓아버려야 한다.
살면서 우리는 부모, 형제와 자매, 친구들에게 실수를 거듭한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후회하며 이에 대해 용서받길 원한다. 그러려면 먼저 그들의 잘못과 결점을 용서해야 한다. 이것이 일상에서의 수행이며 기도이다. 예수 자신도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살면서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붓다나 보살, 하나님을 불러 도와달라고 한다. 이것이 잘못된 방법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는 인간적일지는 몰라도 생사의 세계를 초월할 만큼 위대하지는 않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나 붓다가 와서 해주기를 바란다. "주님, 제 형이 암에 걸렸습니다. 부디 그를 고쳐주세요." 우리는 이러한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에게 할 일을 요구한다. 마치 하나님이 자신이 할 일을 모르는 양.
가끔 우리는 신과 거래하기도 한다. "부처님, 만일 이것을 제게 주시면 제 머리를 깍겠습니다." "제 소원을 들어주시면, 석 달간 채식을 하겠습니다. "제 자식이 이번 시험에 합격하면 열 개의 사찰에 봉헌하겠습니다."
10년도 더 전에, 나는 내가 아끼는 제자가 이와 비슷한 기도를 하는 것을 들었다. "붓다여, 어떻게 하면 제 스승이 더 오래 살 수 있을까요? 그가 오래 산다면 더 많은 이들이 진리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더없이 선한 마음에서 우러났지만, 이 기도를 깊이 들여다보면 어떤 교환의 개념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자에게는 아직 홀로 설 자신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스승, 즉 나의 죽음은 의지처의 실종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기도에는 스승 없이 완전히 홀로 남겨지고 싶지 않은 약간의 이기심이 들어가 있다.
그렇다고 제자의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등불이 되어줄 스승을 잃는다면 그보다 두렵고 슬픈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사실을 명확히 알기 위해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기도의 내용을 깊이 들여다볼 때, 의식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 신자든 불교도든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든 간에, 보통 우리가 하는 기도에는 신과 거래하려는 경향이 있다. 비록 겉보기에는 좋은 뜻을 지닌 거래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여기서 '시험'이란, 탐욕 ,분노, 슬픔, 의심, 정욕에 대한 시험을 의미한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 시험을 '사탄의 유혹'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오감의 온전치 못한 행위'라고 한다.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가지 감각 작용에 빠져들면 불건전한 유혹에 사로잡히기 쉽다.
또 불교에서는 이러한 유혹을 '고통스런 세 가지 세계'로 묘사하기도 한다. 첫째, 아귀계餓鬼界에는 사랑과 이해에 굶주린 영혼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언제나 허기져 있지만 정작 자신에게 필요한 사랑과 이해가 주어져도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 둘째, 지옥계地獄界는 심신의 고통이 극도로 심한 곳이다. 노여움, 증오, 욕망, 시기 등 온전치 못한 마음으로 흥분할 때, 우리는 지옥에 있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 셋째, 축생계畜生界는 동물적 욕망에 지배당하는 세계이다. 축생계의 사람들은 자신의 본능적 욕망만 따르고, 다른 이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전혀 없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이들 유혹에 쉽게 빠진다. 그러나 우리가 형제, 자매들과 함께 승가 안에 있을 때는 공동체의 에너지가 우리를 보호해준다. 그래서 쉽게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된다. 기도를 입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가 승가 안에서 마음챙김을 할 때, 훨씬 더 견고한 마음을 지녀 유혹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붓다 생전에 그를 의지처로 삼았다. 그래서 "나는 붓다를 의지처로 삼네"를 암송하며 기도했다. '의지처로 삼는다'는 것은 자신을 지켜주는 존재와 깊은 열망을 통해 연결된다는 뜻이다. 비구승, 비구니승, 평신도들이 함께 앉아 기도할 때, 그들은 유혹을 이겨냈을 뿐 아니라 마음챙김의 에너지를 모아 더욱 강하게 하였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고독, 절망의 지옥에서 살아간다. 사랑과 이해, 이상理想에 굶주려 아귀처럼 된 이들도 있다. 서로를 죽이고 훔치거나 강간하면서 지옥을 만들어내는 이들도 있다. 또 동물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타인에 대한 사랑과 이해 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우리는 이 세 가지의 온전치 못한 길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 삶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가야 할지만 분명히 알면 우리의 기도는 더 굳건해질 것이다. 일단 승가에 의지처를 두고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알게 되면 영적인 염원이 강해질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열망이 유혹에서 우리를 구해줄 것이다.
출처 : http://blog.naver.com/rose31252003/221165242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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