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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돌아온 이(李) 하사/ 全長 80장
이원우
육군 하사 제대‧ 전(前) 26사단홍보대사 및 안보강사‧ 대한가수협회 회원‧ 유튜브 <돌아온 이하사> 대표,
국제PEN한국본부이사‧ 한국소설가협회이사‧ 한국수필가협회이사‧ 한국가톨릭문인협회이사 역임
소설집 『연적의 딸 살아 있다』 등 6권 · 수필집 『열아홉 과부의 스물아홉 딸』 등 15권 ‧ 기타 3권 등.
KNN문화대상 ‧ 화쟁포럼문화 대상(소설) · 경기PEN문학대상 ‧ 부산PEN문학대상 ‧ 한국전쟁문학상 · 경기문학인문학대상‧ 부산수필대상 ‧ 표암문학대상‧ 『문예시대』문학대상· 부산북구문학대상 ‧ 허균문학상 등
사나흘 동안 끙끙 앓았다. 온몸에 열이 오르고, 구석 구석마다 통증이 파고들어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난 심한 현기증에 시달렸다.
하지만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내색할 수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면서, 남을 속인다는 게 정말 힘들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래 마치 컨디션이 최고로 좋기라도 한 듯, 짐짓 큰 소리로 떠들기도 했다. 이런저런 우스갯소리도 쏟아 내었고.
그러다가 노래도 평소보다 더 열심히 불렀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아내가 한몫 거들었다. 아내는 마치 내가 큰일이라도 한 듯, 평소보다 더 나를 이래저래 응원해 준 것이다. 아내는 박장(拍掌)에다 대소(大笑)를 연거푸 보태는 게 아닌가?
난 그러는 아내가 한없이 고마워, 하릴없는 사람처럼 누웠다가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 두드리는 짓도 계속했다. 다음 케이블 방송 혹은 내 유튜브 녹화(錄畫)를 위해 Do not forsake me oh my darling(High Noon 주제가) 연습에 주력하는 척도 했고…. 일부러 어색한 미소도 지어 보이려니 힘들기는 했다. 이윽고 가볍게 차려입은 채 밖으로 나와 보니, 의식하지도 않았던 혼잣말이 입에서 새어 나오는 게 아닌가!
“이건 정상이 아니다. 진작에 고백하고 응급실에 실려 갔다 왔으면 모두가 편했으련만, 쯧쯧. 하기야 그랬다면 한바탕 큰 소란을 겪었겠지.”
한참 그렇게 걷다가 길가의 카페에 들어가 앉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억지로 고소(苦笑)를 날렸다. 한데 문득 그 옛날 노인 학생들 앞에서 예사롭게 던지던 말이 생각났다.
“모래밭에 혀를 박고 있어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좋습니데이.”
대개 호호백발 할머니들인 그들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손뼉을 치며 깔깔대었지. 상당수는 비녀를 꽂고 있었으며 그들 중 1/3이 한글을 몰랐다. 오늘 같은 염천에도 스무 평 교실에 120명 안팎이 들어앉아 옴짝달싹조차 못 하던 그들이었다.
또다시 난 착각에 빠질 수밖에. 이어서 튀어나오는 이 말은 남이 들으면 이해하기 힘들리라.
“그리워서 어떻게 배기냐?”
자문(自問)에 대한 자답(自答)이 입 안에서 맴돌다가 가볍게 새어 나온다. 아니 차라리 신음에 가깝다고 하자. 이어지는 내 말에 이승과 저승의 묘한 함수 관계가 몰래 탑승한 느낌이다.
“그들의 독특한 체취! 언젠가는 맡게 되겠지.”
아무튼 다시 살아 숨 쉬다니 좋긴 하다. ‘저승과 이승’의 함수를 묘하게 잘 표현한 말이다 싶어 고개를 계속해서 끄덕였다. 옆자리에서 노트북으로 부지런히 어떤 작업을 하던 젊은이가, 그런 나를 흘낏 바라다보더니 이상한 노인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하나 난 그런 주위의 시선 따위에 아랑곳없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신음(呻吟)까지 자연히 터져 나온다.
돌이켜보자. 여태껏 말이다. 늘 자중자애(自重自愛)하라는 충고를 건네고 이승을 떠난 어느 교수(시인)의 유언(?)마저, 무지막지하기만 한 나는 잊기 일쑤였지 않았나? 40대 이후 나의 일상은 죽음을 화두로 여겨야 할 만큼 처절한 몸부림으로 점철되었다. 그게 지나친 표현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문학을 한답시고 설쳐대 왔고 지금도 그러지만, ‘가치 있는 체험의 기록’ 그 정의(定意) 자체가 아리송하게 느껴진다. 아니 에르노의 설파를 억지로 붙잡는다. 나는 내가 경험하지 않은 걸 소설로 쓴 적이 없다는…. 이 순간 수십 년 세월을 되돌아볼 여유를 갖는 것도 아니 에르노의 덕분이다. 그래 거기 또 침잠되어 보자.
스무 살에 교사로 임용된 나는 정말 우여곡절을 겪을 대로 겪다가, 교감을 거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장 경력을 마지막으로 정년 퇴임했다. 총 경력 42년임을 전제해 놓고 본다. 교육에 열정을 갖고 거기에 전념했다 쳐도 내 능력으로써 징계 한 번 안 받고 옷을 벗는다는 자체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까운 기적 같은 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20년 동안 계속해 온 ‘토요일 오후마다의 무료 노인 대학’은 무수한 일화를 탄생시키기고도 남았다. 그 동기가 불순(?)하고 단순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아무튼 시종(始終)이 나의 일상을 좌지우지했다. 아니 모든 일거수일투족의 초점이 거기에 맞춰져 있었다. 내가 아직 그걸 ‘현재진행형’이라 우기는 것도, 단순한 물리적 연장선상이라 폄훼할 수 없는 까닭이다? 모르겠다. 천천히 한 번 풀어보기나 하자.
80년대 초반,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에 우후죽순처럼 생겼던 노인학교의 장(長)은 사회적으로 저명인사로 예우받을 수 있었다. 나도 그 시류에 편승했으니, 초등학교 교사 주제에 가관이었던 셈이라 하자. 노인학교만 제대로 운영하면 구청장 정도를 꿰차는 게 예사였던 시절이었다.
노래라면 어떤 장르에서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던 나는, 그 ‘수요자’ 노인들 앞에서 민요라는 카드를 내밀어 거기에 뛰어든 거다. 그러면서 보낸 세월에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으니, 그동안에 생성(生成)된 일화를 책으로 묶어도 대여섯 권은 넘으리라.
대표적인 예 몇 개. 우선 군부대 6‧25 기념식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육군 향토사단과 공군 전투비행단에서 거행된….
특히 후자(後者)의 경우는 평생 그 감격이 잊히지 않는다. 김영* 장군의 배려가 워낙 파격적이어서 그런다. 당일 참석한 구의회 의장이나 다른 기관장들의 예(例)를 들어 보자. 단장은 그들에게 지휘대 위에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았다. 한데 단장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신과 내가 나란히 앉도록 좌석을 배치한 거다. 단장이 왼쪽, 내가 오른쪽…. 얼른 보니 내 옆과 뒤로도 영관 및 위관 장교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너무나 황감한 나머지 단장에게 물었다.
“단장님, 이거 좌불안석(座不安席)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교장 선생님이기도 하고 노인 대학장님 아니십니까? 저기 도열(堵列)해 선 장병들과 어린이들에겐 하나의 메시지가 될 겁니다.”
“…….”
내친김에 적는다, 내가 인연을 맺은 네 분 공군부대 단장들로부터 받은 지원을 받았다. 말이 민군의 유대 강화지, 실제는 전적으로 노인학교에서 공군부대에 폐를 끼친 결과로만 남았다. 걸핏하면 무슨 큰 의로운 일이나 하는 것처럼 ‘생색’으로 포장하고, 나는 단장들에게 수시로 부탁 편지를 내었다. 글씨는 어느 정도 쓰는 편이라 그걸 받은 상대는 정말 최선을 다해 도와주더라
특히 차량(장병 출퇴근 차량) 지원은 거의 전폭적이었다. 동남아 여행을 떠나는 노인 학생들-연(延) 5개국, 3회, 매 4박 5일, 총 188명이다-들을 공항까지 실어 준 게, 영원히 잊히지 않을 감동이다. 귀국 후엔 또 역(逆)으로 노인 학생들을 모셔 주었다. 헤드라이트를 켠 백차 등이 선도하는 가운데였으니 학생들은 얼마나 신이 났겠는가? 그러니 단장들은 한결같이 노인 학생들을 부모처럼 섬겼다고 한들 틀린 말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몇백 권의 양서를 모아 부대 도서관에 보내 준 것, 공참총장에게 붓으로 쓴 편지를 보내 그들의 미담을 알리면서 격려를 부탁한 것, 초등학교장과 노인 대학장의 직명에다 내 이름을 적고 ‘직인’을 찍어 그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한 것 등등이 고작이다. 아 참, 언론 기관에도 연락했고, 보도 자료를 미리 준비한 것 등등도 들먹일까?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 단장은 당장에 무언가를 반대급부로 되돌려 주는 일을 했다. 대형 선풍기를 두 대 사서 보내 준 것은 약과다. 120명 노인 학생을 초청하여 그들에게 부대 식당에서 점심을 대접한 것은 창군 이래 처음이었을 거다. 노인학교 학예회 등에 참석, 축사하고 애창곡을 선보이기도 했다. 행사장 내빈석에 나란히 앉아 국회의원이며 교육위원회 의장, 구청장 등 기관장, 유네스코 부산협회 임원들과 환담하는 모습!
마침내 어느 단장은 내가 교장으로 근무하는 학교의 체육 시설의 페인트 도색 및 제초 작업, 옹벽(擁壁)에 벽화 그리기 등까지를 도맡아 해 주었다. 스승의 날 1일 교사로 5년 동안에 연(延) 수십 명을 보내 준 것도 단장들이었다.
그래서인가? 그로부터 20년이 훨씬 넘었지만, 육군 출신인 내가 ‘공군가’를 공군 현역보다 더 정확하게 부를 수 있다. 거짓말 같지만, 이런 장담도 덧보탠다. 노인 학생들도 ‘공군가’는 부를 줄 알았다는…. 하니 왜 이런 허풍을 내가 왜 떨지 않을 수 있으랴!
“공군 예비역 장군(將軍)들과 ‘공군가’를 목청에 실으면 내가 더 정확하게 부른다. 그중에는 함참의장이나 참모총장 출신도 있다. 나는 ‘육군가’, ‘해군가’ ‘해병대가’도 다 소화하고 있지만, 4대 군가 중에서 ‘공군가’를 으뜸으로 여긴다.”
이어서 속사포처럼 튀어나오는 말이다. 예비역 부사관으로서 4대 군가를 혼자서 메들리로 군가를 부르는 대회가 있다면 내가 나간다. 압도적인 점수 차로 우승할 자신이 있다!
내 소리가 점점 커진다.
“떼놓은 당상! 그걸 수밖에 없는 게 군가 성악병은 하사가 못 되어 제대하니, 나처럼 군가에 미친 예비역 부사관이 상대적으로 극소수이니까. 게다가 평생 노래와 함께 살아온 나 아니던가, 마치 미치기라도 한 듯이 말이야. 성악병이 부사관(전문하사)으로 제대할 수 있지만, 그들의 일천(日淺)한 경험으론 나를 따를 수 없음은 명약관화하다!“
그 모든 걸 기록으로 남기면 읽는 이들이 혀를 내두르리라. 존재할 수 없는 기적으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쓴 논픽션 『이 몸이 죽어 학이나 되어』를 책으로 묶어 내고 B 신문사에 대강당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더니, 대다수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으더라. 대만에 노인 학생들과 첫 외국 여행을 할 때까지 이야기를 쓴 거다. 영사관 직원이 만류하던 모습이며 사후(귀국 후) 그곳 아동문학가의 한탄 소리를 간접으로 듣던 기억은 지금도 내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특히 아동문학가의 그 전언은 국경을 넘은 질책이었다.
”당신의 주장, ‘분단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위한 민요 부르기’를 위해 3개 공영방송국과 절충해 뒀는데, 까닭 없이 펑크를 냈으니 내 체면이 뭐가 됩니까? PD들에게 사과하세요.“
어찌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에 상응하는 사과 글을 방송국 담당 PD에 보낼 수밖에. 논픽션 표사(表辭)에도 약간 언급했고…. 그로 말미암아 주선해 줬던, 그동안 그토록 친하게 지냈던 부산 아동문학가 태두 S 선생과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졌다가 근래 회복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불가사의 혹은 수수께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게, 노인학교 역사 21년 동안의 외형상의 무탈(無頉) 기록이다. 그토록 나라 밖까지 강행군이 이어지고 국내에서는 매년 두 번씩의 소풍 혹은 야유회를 갔고, 가끔 별도로 2박 3일의 여행을 다녔는데-참여 인원 연(延) 8천여 명-, 누구도 큰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는 점!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이다. 하기야 대만으로 떠나다가 김포 공항으로 나가면서 어느 여학생이 바리케이드에 걸려 넘어져 오른쪽 팔목에 골절상을 입었다. ‘옥(玉)의 티’라 하자. 그게 유일(唯一)하다.
기상천외의 사실 하나를 들먹일 차례다.
제자 중에 굿을 할 정도의 무당이 넷이 있었다. 그중에서 일자무식(一字無識), 제 이름 석 자를 제대로 쓸 줄도 모르는 학생이 제일 용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관상까지 잘 보았는데, 아흔 살이 넘은 동료들의 수명을 잘 알아맞힘으로써 나를 감탄에 빠지게 했으니,
”한(韓) 언니는 백열여섯 살까지 살낍니더. 구(具) 언니는 백 살 되면 돌아가시곘고예. 권(權) 오빠와 양(梁) 언니는 구십일곱 살까지네예.“
워낙 진지한 표정의 학생에게 정말이냐고 되물으려 했으나, 그 전에 학생은 내게 말했다. 자기 말을 믿으라고. 한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네 노인 학생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그때’가 되니 학생의 예언대로 저승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특히 한(韓) 학생은 지방 신문 지면을 크게 크게 장식하고 열반에 들었으니, 학생의 예언이 섬뜩하리만큼 폐부를 찌른다.
학생은 우리 집에 자주 찾아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날 학생이 뿌리에서 지렁이가 몇 마리 떨어져 내리는 상추를 한 줌 쥐고, 우리 집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거다. 학생이 딸하고 사는데, 다른 가족은 없다는 것쯤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관리하던 ‘생활기록부’에 그 정도는 적혀 있었으니까. 학생은 방안에 들어와서 이런저런 간섭(?)도 했다.
내가 예순 살을 넘겨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학생은 여든에다 셋을 더했고. 만면에 웃음을 짓고 우리 집에 찾아왔다. 예의 그 상추 묶음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학생은 대뜸 ‘노랫가락’을 한 곡 뽑았으니 놀랄밖에. 무량수각 집을 짓고 만수무강의 현판 달아/ 삼신산 불로초를 여기저기에 심어 놓고/북당의 학발양친을 모셔다가 인년익수
한글 한 자도 모르는 학생이 ‘무량수전(無量壽殿)’이며 ‘학발양친(鶴髮兩親)’을 알 턱이 없다. 하물며 연년익수(年年益壽)이랴! 내가 감탄사를 연발했더니 학생은 더욱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노랫가락’은 점쟁이들의 민요입니더. 내가 장담합니데이, 선상님은 백 살까지 사십니더.”
라고 하는 게 아닌가? 장수한다는데 기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믿기지 않아 당황해하고 있으려니 학생은 그런 내가 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 학생이 우리 집에 와서 하는 말.
”선상님, 학교 어린이가 하나 죽어 선상님도 병원 신세를 자주 지지예? 얼굴이 많이 상했습니데이. 그래서 할마시들이 모이면 이야기하는 기라예. 우리 선상님 그러다가 죽겠다고 예.“
‘할마시’라 불리는 학생들은 그렇게 내 걱정을 했지만, 학생은 호통을 쳤다고 했다. 자기가 보기에 우선은 선생님이 건강이 많이 그르쳐졌어도, 한 십 년 지나 노인학교로부터도 벗어나고 초등학교장 정년퇴임도 하면 모든 병이 나아 장수(長壽)한다고 말이다. 그런 점괘(占卦)가 나온다는 것! 학생은 교실에서 그런다고 했다.
”내 말 잘 들어주소이. 시간 문제지 선생님은 다시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됩니데이. 노인학교보다 더 정을 들일 수 있는…. “
나는 커피가 너무 식은 것 같아 따끈한 것으로 한 잔 더 시켰다. 아르바이트 학생은 언제나처럼 이내 미소를 짓고 주문대로 따랐다. 나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죽음의 고비를 수십 번 넘기다가 겨우 여든을 넘기기 무섭게 현충원에서 저승으로 떠날 뻔했다? 아무리 수천 명의 노인 학생들이 거기서 내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한들 말이다. 나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어쩌면 살 만큼 살았고, 이쯤에서 내가 삶을 마감한다 해도 그렇게 아쉬워할 사람도 없을 터인데, 쯧쯧. 하기야 근래 내가 그 노인 학생들을 만나는 꿈을 자주 꾼다. 물론 내가 숨을 거둔 뒤의 시제(時制)다.
나는 취재 수첩을 꺼내 들어 탁자 위에 얹었다. 그리고 메모를 시작한다.
5월 말쯤 되었을 즈음 나는 가족들에게 현충일에 가야 하는 까닭을 몇 번이나 설명했다. 아니 ‘까닭’이 아니라 당위성이라는 게 좋겠다. 하여튼 몇 번이나 실패한 ‘현충일 노래’며 ‘6‧25 노래’ 녹화는 반드시 해야 했고, 옛 사단장의 유택 앞에 새로 만든 감사패를 놓아드리고 ‘사단가(師團歌)’를 부르는 모습도 영상에 담아야만 했다.
나는 자처해 온 지 오래다, ‘현충원 전속 가수’라고 말이다. 이어진 앞뒤 정황이 ‘공인’의 성격을 띠고 있다 치자.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번 기회에 매듭지어야 할 일이었는 것, 결코 강변이 아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다. 당일 집을 나서려는데, 강아지가 지난밤 비닐 뭉치를 삼킨 탓에 낮 동안 수술해야 한단다. 아내 혼자 뒷바라지를 할 수 없지 않은가? 나는 현충원행을 포기할 수밖에. 다시 열흘쯤 지났다. 그날을 D-데이로 잡고 집을 나설 계획이었는데, 새벽부터 아내와 딸이 하는 말이다.
“오늘 낮 서울 기온이 35도를 웃돈다고 해요. 게다가 현충원엔 관목(灌木)조차 없고 끝없이 이어진 잔디는 열기를 흡수하지 못할 거 아니에요? 큰일 날 일이니 다시 미루도록 하세요.”
나는 그 만류를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인터넷 신문 기자와 열두 시에 현충원 입구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어길 수가 없어서다. 다시 연기한다면 그가 화를 낼 것이 명약관화하다.그래서 나는 군복과 군화, 군모(베레모)를 착용했다. 그런 뒤 몇 가지 참고 자료며 감사패가 든 쇼핑백을 들고 나섰다. 행여나 뭐가 잘못되나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하는 가운데….
서둘렀던 때문인가? 열한 시 조금 넘어 동작역에 도착했다. 지하도를 걸어가는 도중 안면 있는 아주머니가 파는 꽃다발을 세 개 샀다. 3만 원, 현충원 안 매점보다는 훨씬 싸서 나는 아주머니와 자주 ‘거래’한다. 뜻밖에도 아주머니는 누구누구 것이냐며 묻는다. 나는 대답했다. 채명신 장군과 문중섭 사단장, 박순유 중령 유택을 참배할 계획이라고.
휴게실에 들어갔더니, 여느 때와는 달리 그 안이 붐비지 않는다. 얼핏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혼잣말로 바꾸어 나지막이 흘렸다. 아, 역시 오늘 날씨가 워낙 더워서 그렇구나!
선객(先客)은 딱 둘뿐이었다. 갓 결혼한 듯한 젊은 내외가 창가에 자리 잡고 있었던 거다. 그들에게 목례(目禮) 비슷한 걸 던진 건, ‘싱거운 동네’ 반장 비슷한 내 정체성(?)의 발로다. 아니 그렇게만 폄하(貶下)해서는 안 되겠지, 난 현충원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모든 이는 생사를 떠나서 내 전우라는 생각에 젖은 지 오래 아니던가?
나 또한 구석에 자리 잡았다. 한데 약속한 기자가 반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난 동향인(同鄕人)이긴 하지만 생면부지인 B 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그가 근처에 살고 있어서 행여 오늘 현충원에 들를 수 있을는지 타진해 본 거다. 전우의 부모님 내외분이 현충원 내의 위패만 모신 공간에서 영면에 들어 있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이윽고 도착했다. 모기 드물게 그는 해군 출신이다.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이라 군에 안 가도 되는데, 고집하여 입대했었다는 거다. 같은 밀양시 출신 L 제독을 아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해군 출신 전우와는 너무 교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 까닭으로 그에게 특별한 애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해서 열 살이나 아래인 그를 깍듯이 대했고 그도 나를 말씨부터 선배로 대접했다. 아버지의 유해를 못 찾았다는 사연은 가슴을 저몄다. 둘은 마치 십년지기라도 되는 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말고.
한데 기자로부터는 감감무소식이 아닌가? 신호를 보냈는데도 반응이 없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에 중령 계급장을 단 장교와 그보다 나이가 약간 많아 보이는 초로의 남자가 들어왔다. 내 괴팍한 성격이 또 발동했으니 그 둘에게 손을 들어 알은 체를 한 거다. 무척이나 반가워서다. 미심쩍은 표정을 짓던 둘도 이내 그걸 풀고 반색을 했다. 내가 입은 군복 덕분이겠지. 초로의 남자와 명함을 주고받았는데 국립유해발굴단의 팀장이 아닌가. 나는 얼떨결에 오래전 예편한 Y 단장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직접 모셨으니 그럴 수밖에 없단다. 나는 당장 Y 단장(예비역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나서 스마트폰을 팀장에게 건네 주었다.
그러구러 한 시가 넘었다. 그제야 기자가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게 아닌가! 부아가 낫지만, 그에게 일언반구도 항변할 수 없었다. 나는 ‘을(乙)’의 입장이고, 그는 ‘갑(甲)’의 위치에 선 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이다. 여차 직하면 그는 되돌아서 나갈 만한 친구다.
나는 애써 반갑다는 얼굴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B 향우와 인사도 시켰고…. 한데 기자도 별로 반색을 보이지 않는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나는 짐작하고 그의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어중간한 시간이라 점심은 녹화를 마치고 하기로 하고, 다시 커피 한 잔씩을 시켜 마셨다. 에어컨이 켜져 있지만, 휴게실 안도 후텁지근했다.
30분쯤 지나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기자의 짐이 만만찮아서 땀이 비오듯 쏟아져 내린다. 그 정도라면 내 엄살이 심하다는 걸 감안(勘案)해도, 수은주가 38도쯤 오르내리라 짐작했다. 2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현충문(懸忠門)이 있다. 워낙 많이 드나들던 곳이라 그 앞에서 애국가 4절까지를 녹화하리라 맘먹었는데, 뜻밖에도 둘이 완강히(?) 반대하는 게 아닌가? 위병들이 제지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는 게 이유였다. 나는 자신이 있었는데…. 나는 그만 버럭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오히려 여기가 좋은데, 쯧쯧. 하는 수 없지 뭐. 옮깁시다.”
그래도 끝내 생략해야 할 말이 있었다. 당신 둘이 이 순간만은 마음에 안 들어!
여느 때처럼 채명신 장군 묘역부터 들렀다. 꽃다발 하나는 놓고 거수경례를 올려붙이니, 생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분이지만 내가 노병으로서 할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수십 번 참배라, 낯섦은 느끼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기자는 연신 투덜대었다.
하기야 기자만 나무랄 일이 아니다. 나는 오래만 부르면 되지만 기자는 장비 설치, 촬영 등을 해내야 하니까. 게다가 립싱크(Lip sync)-즉 가수의 입 모양과 음성을 일치시키는 것-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要)하다고 하지 않던가?
어렵사리 애국가 4절까지 부르는 영상을 녹화했다. 무선 이어폰이 자꾸 귀에서 빠져 떨어지는 바람에 수도 없이 곤욕을 치렀다. 그러는 중 어느 성당에서 온 듯한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려 바로 위 묘역에 있는 듯한 유택을 찾아 걸어 올라갔다. 그들 외는 아무도 못 만났으니, 그 시간대의 그곳 날씨-체감 온도 40도?-를 새삼 들먹일 필요가 없겠지.
다음으로 우리는 ‘6‧25 노래’ 녹화에 매달렸다. 기력이 점점 빠진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미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활동하는 전우들과의 약속들 저버린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몇 군데 단체 카톡 방에다 예고한 것보다 보름 남짓 늦은 ‘현충원에서의 녹화’, 다시 미룰 수는 없다는 강박 관념이 나를 휘감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한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빈맥(頻脈)의 증상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스마트폰으로 측정을 해보니 1분에 120회, 이쪽저쪽! 나는 느꼈다. 신음 소릴 뱉었다. 아, 오랫동안 괜찮았던 공황장애가 오는구나 싶어, 비상용으로 갖고 다니던 우황청심원을 한 병 몰래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인데놀이라는 성분이 비슷한 알약도 동시에 털어 넣었고.
그래도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애써 괜찮은 척하고서는 마이크를 잡았다. 이어폰을 꽂고 기자가 시키는 대로 ‘6 ‧ 25 노래’를 목청에 싣는다. 한데 워낙 이래저래 심신이 지친 탓인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3절 가사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몇 번 NG를 내도 마찬가지…. 나는 그 시점에서 결심한다. 2절까지로 끝내기로. 속이 상했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설상가상’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다음 순간 나는 체험하였다. 도무지 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어지러워서 말이다. 휴게실에서 나올 때, 생수 한 병도 챙겨 나오지 못한 게 결정적인 실수임을 깨닫고 후회했다. 하지만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게다가 말이다. 엉뚱한 말이 ‘갑’ 즉 기자의 입에서 튀어나왔으니 자기 준비 소홀로 배터리가 다 소모되었다는 게 아닌가? 내가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두 군데는 더 참배해야 하는데…. 지척에 있는 박순유 중령 묘역에서 ‘현충일 노래’를, 장군 묘역에서 ‘문중섭 사단장’에게 감사패를 증정하고 ‘사단가’를 불러야 한다! 남은 꽃다발 두 개를 내가 들고 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더니 B 향우마저 넌지시 권하는(?) 눈치다. 내친김에 국가 원수 묘역까지 한번 들러보라고…. 너무나 뜻밖의 말에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결단코 그럴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내가 중얼거리듯 한 혼잣말이다.
”천하없어도 나는 국가 어떤 국가 원수의 묘역에도 갈 수 없어요. 내가 무슨 공인도, 유명인사도 아닌 처지에 그건 어불성설이지요. 노무현 대통령의 생전이며 사후에 온갖 인연을 맺었어도 봉하 마을엔 안 들렀어요. 부엉이바위 위에는 수도 없이 올라가 봤지만….“
노무현 대통령과 얽히고설킨 인연을 조금 밝히고 나자, B 향우는 뜻밖에 강한 저항(?)에라도 부딪힌 듯했다. 조금은 당황한 기색을 보인 거다. 그는 귀가했다. 기자에게 던지는 내 말.
”그래 사단장은 다음으로 미루더라도 들르더라도 박순유 중령 유택엔 오늘 아니면 의미가 없어요. 현충일이 지난 지 열사흘인데, 전에도 어떤 장군 묘역에서 ‘현충일 노래’를 부르면서 강조했던 일이 있어. 전 국민에게 강조한다면서…. ‘현충일 노래‘ 만은 1년 내내 우리가 불러야 한다고 말이야. 선배인 L 중령이 녹화한 건데, 영상이 사라져 버렸잖아?“
”선배님, 제 체력이 한계가 왔어요. 오늘 선배님보다 더 컨디션이 안 좋습니다.“
”…….“
”게다가 말씀드린 대로 배터리가 방전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어? 내 스마트폰으로 라이브 녹화를 하지.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 읊는다고 했잖아? 내가 스마트폰에서 ‘현충일 노래 MR’을 찾아 맞춰 부를 테니….”
이미 그때쯤에 둘 다 거의 조추검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말이다. 박순유 중령의 유택을 묘지 번호로 찾는 것도, 서울서 김 서방 찾는 것만큼이나 힘들어 갈팡질팡할 수밖에. 내가 다시 안내실까지 내려가야만 했다, 한참이나 걸어서. 거기 봉사하는 ‘보람이’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안내해 주어서 겨우 고인의 묘소 앞에 설 수 있었다.
눈시울이 젖었다. 오랫동안 만나고(?) 싶었던 전우여서다. 부산 살 때 노인회 노인학교에서 가끔 그의 부인과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고, 현 정무직 공무원인 그의 아들이 국회의원으로 있을 즈음 겪은 애증의 역사가 있어서였으리라.
어쨌거나 그 와중에 너무나 결정적 실수를 저질렀으니 갈증을 해소할 물을 구하지 못한 것! 몇 모금 마실 것은 안내실에 있어도 병째 마실 물은 없었던 탓이다.
그야말로 억지 녹화를 했다. ‘현충일 노래’는 1절뿐이고 내가 곡 전체를 다 외고 있었으므로 한 번 시도로 성공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쯤에서 사단장 묘소 참배는 아무리 강행군을 해도 불가하다는 결론을 둘이서 내리고 있었다. 드디어 녹화 일정을 끝났다. 이제 휴게실로 실컷 물이나 마시고 벤치에 비스듬히 앉아 땀을 식힌 뒤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싶어서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게다가 우황청심환의 약효가 떨어졌는지 맥박이 100회를 상회하는 게 아닌가?
위기에 전우애가 생기는지 둘은 비로소 어깨동무하다시피 하여 발길을 돌렸다. 한데 목이 타고 어지럽다. 손으로 훔쳐보니 이마에 소금 알갱이 같은 게 묻어난다. 특히 난 군복이 온통 땀에 젖어 물에 빠진 생쥐가 따로 없다.
가까스로 휴게실 가까이 왔다. 한데 그런 가운데서도 어디 누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가까운 데 60대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양해를 얻고 소파에 잠시 누우려는데 남자가 하는 말이다.
“아, 일사병 아닙니까? 119에 연락해야겠습니다.”
기자는 자신보다 내가 더 위험하다는 걸 알고 그러라고 남자에게 이야기하려는데, 나는 한사코 말렸다. 창피하기 이를 데 없다는 느낌에서였다. 대신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고 누워서 휴식을 취하자고 했다. 30분 정도면 될 거 같았다. 둘은 자신들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기자가 나를 깨웠다. 형님 일어나시지요, 너무 늦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무의식중에 기자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을 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계속 혼란스러운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그만 의식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마는 것 같았는데…. 어쩌다가 다시 염라대왕을 만난 것이다. 한데 나도 여유가 생겼다. 20여 년 전, 페니실린 쇼크로 그 염라대왕을 만난 걸 시작으로 명재경각(命在頃刻)에 이른 게 열 번을 넘겼다. 내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그런지, 그때마다 현실인 듯 환각인 듯 그 양반과의 조우(遭遇)가 그렇게 계속돼왔던 거다. 염라대왕은 말했다.
“무리하면 목이 탈이 나고 그래서 노래를 못 부를 땐, 즉시 소환하기로 한 거 기억하느냐?”
“예, 대왕마마.”
“과유불급이니라. 여든 넘어 현충원에 드나드는 건 좋다마는, 오늘 같은 날 네 노래는 그래서 엉망이었다. 지금 심경이 어떠냐?”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제가 실신해 현충원에서 숨을 거둔다면 그것도 행복한 일이지요.” “저자(者)가 못 하는 말이 없구먼. 아직 널 필요로 하는 군 장병들과 호국 영령들을 어찌하려느냐? 몇 번째인지 나도 기억이 희미하다만, 네게 기회를 다시 주마. 대신 요구 조건이 있다.”
“뭣이온지요?”
“노래 한 곡 만들어라. 내 뜻을 네가 조금 헤아리고, 너희 나라 장병들 삶을 예찬하고 현충원 호국 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내용으로…. 시간은 없으니, 찰나다. 네가 깨어날 때까지 내 앞에서 노랫말도 짓고 곡도 붙여라. 그리고 불러 보기도 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마라’는 『성경』에 365번이나 나오는데, 염라대왕이 그 말을 쓰다니 싶어 우스웠다. 어쨌든 내가 뭐라고 중얼거리니 모르는 가운데서도 노래 같은 게 술술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옆에 그때까지 있던 남자가 깨우는 소릴 어렴풋이 나는 듣고 눈을 떴다.
“할아버지, 잠꼬대하시는군요. 정신 차리세요.”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 앉았다. 고맙다며 인사를 건네는데, 그는 미소를 보였다.
주섬주섬 징을 챙겨서 나섰다. 몸이 가쁘지는 않아도 견딜 만은 하다. 그길로 나는 지하철로 귀가하여 시치미를 뚝 떼고 여태 견뎌온 거다. 물론 아직 컨디션 회복이 멀었다. 하지만 어렴풋이나마 염라대왕 앞에서 창작했던 가사가 생각난다. 곧 곡을 붙이고 노래도 부를 거다.
<돌아온 이 하사>
1절: 일흔 살이 넘어서 귀대한 노병/ 모자와 군복에는 하사 계급장/ 손자뻘 전우들과 어깨동무하고/ 다지고 또 다지니 필승의 신념/ 우리 모두 나라 위해 오늘을 살자
2절: 긴 세월 많은 경험 겪어온 하사/ 장병들 앞에 서서 열변 토하고/ 군가며 진중 가요 힘차게 불러/ 다지고 또 다지니 임전무퇴다/우리 모두 나라 위해 오늘을 살자
3절: 돌아온 이(李) 하사가 따로 하는 일/ 현충원 임들 찾아 고개 숙이고/ 숭고한 넋을 기려 눈물 흘린다/ 이 하사 이 세상 마지막 다짐/ 이 영광 이어가자 백 살까지다!
그 옛날 무당 제자가 내게 백 살은 살 거라는 언질을 준 게 얼핏 떠올랐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중얼거린다. 배터리 방전(放電)이 나를 살렸구나, 이 또한 기적 아니고 무어랴!
이원우
육군 하사 제대‧ 전(前) 26사단홍보대사 및 안보강사‧ 대한가수협회 회원‧ 유튜브 <돌아온 이하사> 대표,
국제PEN한국본부이사‧ 한국소설가협회이사‧ 한국수필가협회이사‧ 한국가톨릭문인협회이사 역임
소설집 『연적의 딸 살아 있다』 등 6권 · 수필집 『열아홉 과부의 스물아홉 딸』 등 15권 ‧ 기타 3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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