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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 48,17-19>
17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18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19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16-19>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19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마태 11,16-17)
이 비유의 뜻은 명료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의 선포'(마르 1,4; 루카 3,3)에도 회개의 가슴을 치지 않고,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복음의 선포'(마태 4,23; 9,35)에도 기뻐 춤추지 않는 세대를 말해줍니다.
혹 우리도 뉘우침의 눈물도 복음의 기쁨도 없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 무지와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이 없다고 투덜거리거나 바닥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 뿌리에는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완고함’이란 사실을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목이 뻣뻣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합니다.
사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아픔입니다.
결국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됩니다.
사랑이 거부당한 아픔입니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하신 일은 십자가에 달리시어 자신을 ‘깨뜨려’ 찢고 나누어 건네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예수님의 그 피와 살을 먹고 자신도 ‘부서져’ 쪼개고 나누어져 다른 이에게 건네주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 벌리시는 일은 우리를 ‘깨뜨리는’ 일이요, 진정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가 ‘부서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살아 있으며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영께서 오시어 벌리시는 일은 우리와의 교제와 친교로 진리를 깨닫게 하고 새롭게 하여, 변화와 성화로 주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성령께 응답한다면,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추었던 것처럼 우리도 춤추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과 영을 제 마음에 들게 맞추기보다 제가 꺾이고 부서져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마태 11,17)
주님!
제 마음이 무디어져 있습니다.
아니, 빛보다 어둠에 치우쳐 있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제가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가슴은 가시에 찔리셨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이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울고, 함께 웃게 하소서!
완고함의 벽을 헐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장단에>
오늘 주님께서는 짧은 비유를 드시는데, 당신 세대가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 같다고 하십니다.
당신 세대가 아이들처럼 미성숙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떻게 미성숙하냐 하면, 자기가 반주해주는 대로 춤추지 않고 장송곡을 연주해도 같이 애도하지 않는다고 서로를 탓합니다.
우리말로 바꾸면 나의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면서 정작 자기는 남의 장단에 춤추지 않는 완전히 자기 중심의 미성숙이지요.
그런데 이런 미성숙도 있습니다.
남의 장단에 놀아나고 아무 장단에 춤추는 미성숙입니다.
이런 미성숙도 또 있습니다.
남의 장단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 아예 어느 장단에도 꿈쩍 않는. 이는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못하고 어느 것에도 공감하지 못하며 완전히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이고 혼자 웅크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미성숙이 있습니다.
미성숙 1: 내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는 자기 중심의 미성숙.
미성숙 2: 아무 장단에나 놀아나는 줏대 없는 미성숙.
미성숙 3: 어느 장단에도 꿈쩍 않는 경직되고 자폐적인 미성숙.
그러므로 우리가 성숙한 사람이란 나의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지도, 남의 장단에 내가 놀아나지도 않으며, 아무 장단에나 춤추지 않지만, 어느 장단에는 춤추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성숙한 사람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출까요?
사랑의 장단에는 춤을 추고, 신앙적으로는 하느님 장단에는 춤을 춥니다.
자기 사랑, 이웃 사랑, 하느님 사랑에 어긋나는 장단에는 놀아나지 않고, 사랑의 장단에는 어울려서 춤추고 신명 나게 춤을 춥니다.
쓸데없는 말이나 남을 해치거나 흉보는 말은 듣지 않고, 하소연과 도움이나 동감을 얻으려는 말은 귀담아들으며, 하느님의 말씀은 경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그런데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은 요한의 말도 듣지 않고 주님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요한은 굶는다고 비난하고, 주님은 먹는다고 비난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거부하면 그 사람의 어떤 말도 거부하기 마련이지요.
반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면 하느님의 계명을 들을 것이고, 그 사람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함께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이 대림 시기에 귀담아들어야겠습니다.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1코린 9장)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로마 12장)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복음적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 앉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고 말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 뜻대로 하자고 우기는 세상을 말해줍니다.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 틀렸다고 하며 상대에게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어찌 제대로 통하겠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면 하하거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덜대는 세상에서 누구의 비위를 맞추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요즈음 소위 정치지도자들이 하는 일은 하느님 마음에 드실까요?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하느님 앞에 당당해야 합니다.
내 뜻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입니다.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하지만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정의와 공정을 내세우는 이들이 참으로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요즘 나라의 혼돈상태를 보십시오.
서로 남 탓만 하고 있잖습니까?
사람들은 아주 엄격한 속죄의 생활을 하였던 요한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버림받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거리끼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는 너무 세속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굽어서 이것도 저것도 좋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는 것이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비위를 맞출 이유도 없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나 요한의 시대나 마음이 굽어있는 이상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여전합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눈을 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누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봐 줄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
참 신앙인은 세상이 아무리 흔들어도 동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삶이 복음적인 삶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루카 11,34-3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서 1장 18절에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주시기 바랍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말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볼 눈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 3,16)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세례자 요한과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꼭 먼저 지녀야 하는 이것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에 꿈쩍도 하지 않는 세대를 비판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마태 11,17)
왜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을까요?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원하려면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원하게 만드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마태 11,19)
사람들은 지혜가 없기에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말하고 아드님께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가고 그분의 말씀에 흔들리고 춤을 추고 곡도 하기 위해서는 ‘지혜’를 갖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것과 같습니다.
영화 <킹덤>(2019)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가 배경입니다.
꿈도 희망도 없던 노예 ‘신’은 진나라의 천하대장군을 직접 마주하고는 꿈을 꾸게 됩니다.
바로 자신도 대장군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노예 신분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신은 꿈을 꾸게 됩니다.
저도 죄의 신분에서 벗어나 하느님 자녀가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커다란 자기와의 싸움을 전제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만나는 것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삶입니다.
죄와 싸우려면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을 각성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림을 그리려면 흰 도화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있으려면 우리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정신이 맑아집니다.
배부를 때는 정신이 혼미합니다.
어떤 것도 그릴 수 없는 상태입니다.
배고플 때는 정신이 맑습니다.
그러면 그림을 그릴 준비가 된 것입니다.
배고플 때는 밥 생각밖에 안 나기에 정신이 맑은 것입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와서는 죄와 싸웠습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잠을 잘 때도 딱딱한 판자 위에서 자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킹덤>에서도 그는 이룰 수 없는 꿈을 위해 쉼 없이 자기와의 싸움에 돌입합니다.
다들 헛된 꿈을 꾸며 고생하는 신을 어리석게 봅니다.
유다인들이 요한의 삶을 보며 어리석게 보는 것과 같습니다.
저도 처음엔 왜 단식하고 금주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꿈을 꾸는 이들이 필연적으로 하는 고생입니다.
지혜를 지닌 이들은 세례자 요한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킹덤>에서 신도 깨닫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노비의 신분은 벗을 수 없음을.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줄 당시에 쫓기고 있었던 왕을 만납니다.
그는 그 왕이 왕권을 회복하게 도와줍니다.
결국 신분을 올려줄 대상을 만나야 대장군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숨을 바쳐 왕을 위해 싸우고 왕이 왕권을 회복하자 그는 대장군의 지위를 받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꿈도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왕권 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고서는 이뤄질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까지 알아야 지혜입니다.
그리고 지혜는 그렇게 죄에서 벗어난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얻게 되는 것으로 그 옳음이 증명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이겨보려고 스트레스 주는 것은 그저 흰 도화지를 준비하는 것뿐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결국 죄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욕망이 사라져야 죄를 이길 수 있는데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으니 그런 욕망이 솟아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즐기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가 이뤄 놓는 일입니다.
지혜는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도 만나게 해 주지만 그리스도도 만나게 해 줍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죄를 이기려는 자는 육체를 절제하다가 결국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지혜란 바로 죄를 이기기 위해 육체를 절제하려 하게 만드는 믿음입니다.
곧 죄를 이겨야만 행복할 수 있음을 혹은 내가 힘든 이유는 죄를 짓기 때문임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로운 이들과 어울리는 이는 지혜로워지고 우둔한 자들과 사귀는 자는 해를 입는다.”
(잠언 13,20)
우리는 당연히 죄와 싸워야 함을 알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죄 안 짓고 어떻게 사느냐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자들이 단식하고 절제할 때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고 또 신자들이 먹고 마실 때는 어떻게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흥청대느냐고 말합니다.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를 이겨야 행복할 수 있다는 지혜가 있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런 하느님이 너무 좋습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다양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보이셨습니다.
가장 우세한 모습의 특징은 아무래도 세상 따뜻하고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겠지요.
뿐만아니라 인정과 측은지심이 철철 흘러넘치는 치유자의 모습도 드러났습니다.
다정다감한 친구의 모습, 관대하고 너그러운 구원자의 모습...
그러나 삐딱한 시선의 소유자들이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눈에 예수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꼴불견이었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오늘 복음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먹보요 술꾼,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신 구세주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그런 칭호를 붙인 적대자들의 배은망덕과 무례함 앞에 입을 다물수 없을 정도입니다.
독성죄도 그런 독성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의 그런 모습이 제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육화강생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멀리 동떨어져 있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산해진미가 차려진 잔칫상 앞에서 결코 체면 차리지 않으셨습니다.
세리 죄인들과 마주 앉아 포도주 잔을 기울이시며 밤늦도록 정담을 나누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정말이지 제 마음을 흐뭇하게 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왕족이나 귀족, 고관대작들과 어울리지 않으시고, 세리와 죄인들, 가장 밑바닥 인생들, 오늘 우리와 같은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신다는 것, 이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인지요.
오늘도 주님께서는 한없이 부당한 나, 죄인 중의 죄인인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당신 거처를 삼으십니다.
우리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며 우리와 일심동체가 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과 은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하느님이 너무 좋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복음서 저자는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할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마태 3,5-6)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는 말은 ‘전 국민’이라는 뜻이 아니라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면, 세례자 요한의 활동은 크게 성공한 것일까?
당시의 실제 상황은 ‘큰 성공’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긴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세례만 받았고,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들의 수는 적었습니다.
그래서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였을 때에 사람들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들었습니다.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마태 4,25)
그랬는데 그 수가 점점 줄다가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하신 뒤에는 대부분 떠나버렸고, 열두 사도와 적은 수의 신자들만 남았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요한 6,66)
이 말에서 ‘제자들’은 사도가 아닌 제자들, 즉 일반 신자들을 뜻합니다.
예수님 승천 때까지 남아 있었던 사람들의 수는 ‘백스무 명 가량’이었다고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사도 1,15).
그 ‘백스무 명’은 남자들의 수입니다.
‘기적의 빵’을 받아먹은 사람들의 수는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습니다(마태 14,21).
그렇게 많았던 사람들이 왜 떠났을까?
12월 9일의 복음 말씀은 그렇게 중간에 떠나버린 사람들과 처음부터 안 믿은 사람들을 모두 겨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마태 11,16-19)
여기서 ‘이 세대’ 라는 말은 ‘안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적대자들’뿐만 아니라 ‘무관심한 자들, 중간에 떠나버린 자들’까지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라는 말씀을 뜻에 따라 다시 풀이하면,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놀이에만 빠져 있는 장터의 아이들과 같다.”입니다.
(그 당시 아이들은 장터에서 혼인식이나 장례식을 흉내 내는 놀이를 하면서 놀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는 “혼인식 놀이를 하자고 불러도 응하지 않고”인데,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는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불러도 응하지 않았다.”인데,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두 말씀을 합해서 생각하면, 당시 사람들은 회개도 싫어했고, 복음도 싫어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의 사람들도 거의 같습니다.
그러면 원하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살던 대로 살게 내버려 두어라.”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돈이나 많이 벌게 해 주라.”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어려운 일들이나 해결해 주라.”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아주 다양한 이유와 핑계가 있습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라는 말씀은 “요한의 엄격한 극기고행의 삶을 보고 ‘저자는 미쳤다.’ 라고 비웃는다.” 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은 “회개라는 것이 그런 극기고행이라면, 나는 회개하기 싫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재미’만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재미없다면서 냉담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세속 생활이 신앙생활보다 더 재미있을 텐데, 그 ‘재미’ 라는 것은 속된 즐거움일 뿐이고, 허무하게 사라질 쾌락일 뿐입니다.
신앙생활은 ‘재미’가 아니라 ‘기쁨’을 추구하는 생활입니다.
세속이 주지 못하는 ‘영원하고 참된 기쁨.’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라는 말씀은 “내가 모든 사람을 만나고 모든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 ‘저자는 시정잡배와 다를 것 없는 죄인이다.’ 라고 비난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 말은 대체로 바리사이들이 했던 말인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같은 편이 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같은 편이 되기는커녕 그들의 위선을 꾸짖는 말씀을 자주 하시자 적대감과 증오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주님 편’에 서려고 하지 않고, 주님이 ‘자기 편’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주님을 ‘하인’으로 삼으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라는 말씀은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모두 아버지 하느님께서 맡기신 임무이고, 요한의 생활방식과 예수님의 활동방식은 아버지께서 정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을 끌어들이는 생활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나의 온 삶을 맞추는 생활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 될 수는 없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참 스승이자 인도자, 구원자이신 주님 - 신뢰와 경청>
어제는 근래 보기 드문 참 평화롭고 포근한 즐겁고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원장수사 부친의 문상차 대구를 방문했던 날이었습니다.
함께 간 도반도 시종일관 시중을 들며 함께 해줬습니다.
방문했던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밝고 평화롭기가 흡사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어둡고 무거운 슬픈 분위기는 전혀 감지할 수 없었습니다.
“아, 참 잘 사셨구나!
선종의 복된 죽음을 맞이하셨구나!”
저절로 나온 고백이었습니다.
영정 사진도 흡사 오늘 날씨처럼 평화롭고 고요해 보였습니다.
떠나면서 함께 연도를 바쳤고 원장수사에게도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파스카의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축제 분위기 같았습니다.
영정 사진에서 본 생전 야고보 아버지의 분위기였습니다.
새삼 선종의 복된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축복이 늘 함께 하길 빕니다!”
30년 동안 함께 했던 수도도반과도 나눈 메시지입니다.
백요셉 수사는 1992년 입회했으니 올해로 함께 하기 만30년입니다.
“극진한 배려와 친절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잘 지내다 오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프란치스코 수사님! 감사드립니다.
조심해서 잘 올라가시고 남은 하루도 주님 안에서 기쁘고 생동감이 넘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마침 잠시 대구에 거주하는 예수성심자매회 회장 자매의 메시지도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15년 이상 한결같이 예수성심자매회를 섬겨온 참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슬기로운 자매입니다.
“신부님, 제가 장례식장에 가니 신부님께서 막 왔다가셨다 하던데 어제 말씀해 주시면 점심이라도 같이 하실 걸 그랬어요.
대구까지 오셨는데 뵙지도 못했네요. 고생하셨어요. 조심해서 올라가셔요!”
상경 도중 열차안에서 책을 보려다 포기했습니다.
참 오랜만에 차창 풍경이 ‘살아 있는 책’처럼 눈에 와닿았기에 차창 밖 풍경의 자연성경책을 내내 관상했습니다.
날씨처럼 평화롭고 고요한 창밖 풍경이었습니다.
서울역에서도 참 좋은 분의 환대로 잠시 저녁식사를 나눴습니다.
참 오랜만의 깨끗하고 정갈한 담백한 식사였습니다.
하여 두루두루 행복했던 하루였습니다.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주님께서 시종일관 어제 하루 함께 해 주셨음을 한밤중 강론을 쓰면서 늦게야 깨닫습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어제 만난 형제자매들이었습니다.
어제 하루 삶의 중심에 참 좋은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살아 계신 주님이 늘 함께 해 주셨던 것입니다.
지금에서야 저절로 나오는 시편 고백입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참으로 늘 신뢰와 경청을 다해야 할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주님이심을 오늘 말씀 묵상을 통해 새삼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 두 말씀에서 주님의 깊은 아쉬움과 좌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수준이 너무나 미달되기 때문입니다.
두 경우 다 우리의 참된 회개를 촉구합니다.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구원자이신 주님께 대한 신뢰와 경청이 턱없이 부족하고 순수와 사랑도 없습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은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의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새삼 주의를 기울여 주님의 말씀을 경청함이 영성생활에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경청할 때 그 놀라운 결과가 참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주님의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우리들에 대한 주님의 깊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도 대동소이합니다.
역시 무감각하고 공감할줄, 반응할 줄 모르는 완고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시공을 초월하여 예나 이제나 늘 상존하는, 참으로 무딜대로 무뎌진 공감 능력을 상실한 세대임을 깨닫습니다.
이들의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 대한 곡해가 그 증거입니다.
두 분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 색안경을 쓰고 심히 왜곡해서 봅니다.
이 또한 우리의 부정적 모습입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모두가 영원한 스승이자 인도자, 구원자이신 주님의 말씀을 주의를 기울여 듣지 못한 때문입니다.
새삼 주님을 신뢰하고 겸손히 귀기울여 듣는 경청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분도규칙도 “들어라!”로 시작되며,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외친 말씀도 “들어라!” 였습니다.
하늘에서 끊임없이 내리는 비가 딱딱하게 굳은 대지를 부드럽게 하듯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할 때 마음은 열리고 부드러워집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경청함은 은총의 하늘비와 같습니다.
초겨울에 어울리지 않지만 문득 '봄비'란 제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
- 2005.4
시 쓴 지 17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합니다.
정말 봄비같은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화두처럼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바로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을 뜻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인도자,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왜곡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생애를 통해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이 환히 드러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을 삶의 중심에 스승이자 인도자로, 구원자로 모신 우리 제자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마음 깊이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안타까움이 읽힙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하느님의 안타까움이 읽힙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마태 11,17)
예수님께서 상대방에게 전혀 호응을 해주지 않는 당시 이스라엘 세대의 태도를 장터 아이들 놀이에 비유하십니다.
기쁨에 기쁨으로 슬픔에 슬픔으로 감응하지 않고, 어떤 판이 벌어져도 거부할 태세를 갖춘 모습이지요.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기는 했지만 가급적 자기들 구미에 맞는 존재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벗어나는 듯하면 거짓 예언자나 선동가, 죄인으로 몰아 생명까지 앗아갔습니다.
게다가 이런 일들은 제도의 힘을 빌어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지요.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마태 11,18)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은 친구다"
(마태 11,19)
세례자 요한이 행한 절제와 극기는 거룩한 덕입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포용력과 친화력 역시 아름다운 덕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덕들도 자기 프레임에 갇힌 굳은 마음으로 보면 마귀짓일 뿐이고 방종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일찌감치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 선고를 내린 셈입니다.
제1독서에서도 하느님의 탄식이 들립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이사 48,18)
이스라엘에 축복을 준비하고 계셨던 하느님께 이스라엘의 배반은 뼈아픈 슬픔입니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강물같은 평화,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릴 의로움, 모래알처럼 많은 후손, 길이 기억될 이름"(이사 48,18-19 참조)을 마련하고 기다리셨지만, 이스라엘은 그 기대를 벗어났고 하느님의 축복은 유예 상태로 묶입니다.
사람 마음이 그렇지요.
마음만 먹으면 온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반대로 그 무엇도 발 붙이지 못하게 밀쳐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보다 엄밀히 말해 민중을 움직일 수 있는 정치 종교 기득권층은 어쩌면 자기들 이익에 도움이 될 메시아가 나타날 때까지 이 거부권을 행사하며 하느님을 밀쳐낸 것이지요.
무수한 예언자의 죽음에 이어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까지 제거한 고질적 병폐였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마태 11,19)
예수님의 안타까움은 그러나 탄식으로 끝나지 않고 명쾌한 자기 확신으로 마무리됩니다.
지혜는 말씀이신 성자 예수님이시고, 진리 자체시기에 그르침이 없으시지요.
그분이 세상에서 이루신 사랑의 기적들로 지혜의 옳음이 드러납니다.
이는 거부하기로 작정한 이들에게만 가리워져 있는 선입니다.
예수님은 세대의 약함과 악함에도 흔들리지 않고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이사 48,17)
하느님께서 마음을 다해 피력하신 이 자기 소개는 듣는 이의 마음에 따라 따사로운 위로와 격려가 되기도 하지만, 현세적 성공과 자기본위적 이득을 보장해 줄 메시아가 나타날 때까지 믿음을 보류하고 사랑마저 묶어둔 굳은 마음에게는 스며들지 않겠지요.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묻습니다.
당신을 고대하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준비하신 축복은 그분과 함께 춤추고 그분과 함께 가슴 치며 울 수 있는 촉촉하고 말랑말랑하게 열린 마음 안으로 쏟아질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이 공감 능력입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군에 입대하면 똑같은 훈련을 받지만 능력이나 재능에 따라서 ‘주특기’가 주어집니다.
운전면허가 있거나 재능이 있으면 수송 주특기를 받습니다.
체격 조건이 좋고, 강인하면 헌병 주특기를 받습니다.
사무 능력이 있거나 컴퓨터를 잘 다루면 행정 주특기를 받습니다.
신학교에 다니거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군종 주특기를 받습니다.
그밖에도 의무, 정보, 시설 등의 주특기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필요한 인력이 있는 곳으로 가기도 합니다.
2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배치를 받기도 하고, 부대의 필요에 의해서 배치를 받기도 합니다.
저는 신학교에 다녔기에 군종병이 되었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행정병으로 옮겼습니다.
3년 동안 주로 예비군 담당 행정병으로 지냈습니다.
전방 부대에서 철책 근무를 하는 것도, 후방 부대에서 행정 업무를 하는 것도 제대하는 것과는 큰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군에서 주어지는 주특기도 중요하지만,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지내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같은 날 사제서품을 받았지만 교구의 필요에 의해서 주어지는 사목의 분야가 다양하게 정해집니다.
인재양성 위원회의 선발에 의해서 유학을 가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교구청에서 사목하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사회사목, 경찰사목, 병원사목, 청소년 사목, 복지기관, 선교사목, 교포사목, 빈민사목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부님들은 본당사목을 하게 됩니다.
사제는 순명서약을 하기에 교구의 인사이동에 따라서 당연하게 새로운 임지로 가게 됩니다.
저는 보좌신부로 8년, 본당신부로 8년 있었습니다.
교구청에서 11년 있었습니다.
3년은 캐나다에서 연수를 하였습니다.
1년은 안식년으로 지냈습니다.
어디에서 근무하는가도 중요합니다.
생각해보면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했던 것처럼 사막에 샘이 흘러넘치게 하는 사목도 있고, 사목에 꽃이 피어 향기가 나게 하는 사목도 있습니다.
언제나 감사하고, 늘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제에게는 어디에서 있느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많았습니다.
부족한 제게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있다면, 시기와 질투가 있다면, 어디에 있어도 늘 ‘가시방석’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만 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외면하려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된 밥에 재를 뿌리듯이 공동체를 갈등과 분란으로 몰고 가곤 합니다.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흙 속에서도 꽃이 피듯이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물을 탓하지 말고 내 마음의 바가지를 잘 가꾸어야 합니다.
새는 곳이 있다면 새지 않도록 고쳐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그리고 화답송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위선과 가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면 인생 망친다.”
자기 욕망을 줄이고 자기에게 도움이 될 것을 하면서 살아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 욕망을 완전히 없앤다고 잘 사는 결과를 가져올까요?
어렸을 때 저는 전자오락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용돈이 생기면 전자오락실로 향했고, 돈이 없을 때는 오락실에서 남이 하는 것을 구경했습니다.
그래도 재미있었고 즐거웠습니다.
어느 날, 학교 담임 선생님에게 오락실 간 것이 들통났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 커서 뭐가 되려고 오락실을 다니는 거야?”
지금 커서 신부가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오락이나 게임을 전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어렸을 때 전자오락실 간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디 한 군데에 빠지게 되면 스스로 헤어 나오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순간의 만족이 영원한 만족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생산성 있는 일에 집중하려고 노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면 인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욕망을 모두 버리고 하기 싫은 것만 하면, 재미없는 인생으로 더 망치게 되지 않을까요?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욕망 안에서도 미래의 나를 만들어줄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분명 기쁨과 함께 더 나은 나로의 변화를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욕망은 무조건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원하고, 가장 적절하고,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욕망을 신중하게 선택해서 이를 삶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합니다.
장터에서 노는 아이에 대한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한패는 피리를 불며 잔치 놀이를 하는데, 춤추지 않으면 장단을 맞추지 않습니다.
다른 한패는 곡을 하며 장례 놀이를 하는데, 아무도 가슴을 치며 울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놀이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장례 놀이는 세례자 요한이 외쳤던 회개의 외침이고, 잔치 놀이는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의미합니다.
즉, 슬퍼할 때 슬퍼하고, 기뻐할 때 기뻐해야 하는데, 자기 일에만 집중해서 해야 할 모습에서 정반대의 모습을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삶 전체는 모두 중요합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서 생활한다면, 욕망으로 보이는 나의 즐거움 안에서도 큰 의미를 얻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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