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술이 발달하기 전, 시대에 느꼈던 예스러운 감성을 아날로그(analogue) 감성이라 합니다. 인류의 혁명이라 하며 등장한 디지털 기술, 현재의 디지털까지 변천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회로소자(진공관) 시대 - 트랜지스터( TR시대 ) - 직접회로(IC) 시대 - 고밀도 직접회로(LSI) - 초고밀도 직접회로 (VLSI), 참 괄목합니다. 전기적인 신호나 정보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형태에 따라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구분합니다. 아날로그는 연속되는 값으로 형태를 표현하는 정보이고 디지털은 정보를 숫자로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로 미세한 차이 때 정확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날로그입니다. 일반적으로 아날로그는 구시대 산물이고 디지털은 새로운 시대라 구분합니다. 우리들이 음악이란 소리를 전달하는 방식이 레코드, 또는 카세트테이프를 아날로그라 한다면 CD는 디지털방식입니다. 아날로그는 자연의 상태에서 정보를 전달함으로 잡음이 들어가는 반면 디지털은 숫자로 변환시켜 전달함으로 미세한 소리까지 전달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디지털은 디지털대로 부작용이 따르는 면도 있습니다. 단점을 보안하려는 목적에서 옛 감성을 재발견하려 다시 아날로그를 환기시키는 경우가 요즈음 들어 많습니다.
특히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아무래도 사진영역 같습니다. 필름을 인화하여 현상하는 방식에서 화소수의 압축으로 밀도를 높여 화질을 개선시키고 사진보관방식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앨범에 차곡차곡 정리하던 방식에서 메모리에 보관하는 방법은 과히 혁명적입니다. 개인적을 갖고 있는 앨범이 늘 심리적 부담을 느끼면서도 동안 방치하고 있었으나 이젠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판단에 산막에 작업실을 만들어 놓고 아날로그 사진을 마이크로 랜즈로 촬영하여 년대별로 메모리화 시켜 보관하여 자식들에게 넘겨주려고 합니다. 또 하나는 만들어 놓은 가족들의 이야기 블로그에 전부 글과 함께 저장해 놓으면 아이들과 공유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앨범을 정리하면서 잊고 살았던 이야기들이 되새김되고 잔잔하게 다가오며 스스로 회상의 시간에 물들어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추억이라 느끼며 마주 보는 낡은 사진 한 장 한 장에는 소중했던 나의 과거들이 묻어납니다. 다들 엊그제 같은 이야기가 같은데 때로는 억겁의 세월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사진을 살피며 지금의 내가 아닌 더욱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도 서리고 또한 긍정에 만족도 있으며 반대로 덮고 지우고 싶은 이야기들도 동시 떠오르는 감정의 혼재는 어쩔 수 없는 개인의 삶의 흔적 같습니다. 그런들 지금에 와서 부질없는 사념에 불과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새삼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은 많습니다. 하나의 인연 때문에 형성된 사랑과 우정에 속에서 화석처럼 굳어져 있는 아름다운 추억은 봄에 새 생명이 돋아나듯 소중한 행복으로 이어졌던 당시의 하루히루가 꿈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도 합니다. 글로 작성된 추억보다 단 한 장의 사진이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는 추억은 더욱더 강렬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사진이 지닌 위력이지요. 사진을 한문으로 적어보면 寫眞이 됩니다. 틀림없는 진실이지요. 그래도 남겨야 하는 사진은 공과 사가 구분되어 결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깃든 사진 중 개인기록 사진을 결국 볼 수 있는 사람은 혈연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보존의 가치는 이를 바탕으로 하는 중입니다.
이 범주를 벗어난 사진들은 나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것 임으로 한 줄의 이야기 끝으로 재로 만들어 먼지로 되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랑과 우정의 순수한 감정은 나의 심연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들은 당시 무지갯빛 꿈과 같은 일이 현실이 된 듯한 일이었습니다.
소중한 초상권을 의식하여 사진을 그림으로 전환시켜 올렸습니다. 교지작업을 돕다 처음 알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인편을 통해 소개되어 처음대면하는 날 그날 화창한 봄이 시작되는 날이었습니다. 약 한 시간 동안 일정과 자료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10일 후 1차 자료를 모아 가편집을 한 후 다시 20일 동안 보완 작업을 하여 그 자료들을 엄선하여 편집본을 만들고 상세한 교정 후 인쇄소로 넘기는 것으로 약속을 잡고 헤어졌습니다. 헤어져 돌아오는 날 자꾸 상대의 얼굴이 잊히지 않고 잔상이 그대로 마음에 쌓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앞으로 10일이 아주 멀게 느껴지며 나만의 손목시계만 정지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약속된 10일을 기다리며 주변 지인들에게 교지를 얻어 세심하게 살피며 더 좋은 아이디어를 끝없이 발굴하며 한 점도 흠이 없이 도우려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서로의 노력 덕분에 일정대로 아무 탈 없이 교지는 발행되고 교지 한 권과 모제과점 빵을 선물로 받은 후 헤어지는 날 후일 다른 약속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상대의 주소와 나의 주소를 교환해 두었습니다. 당시 전화를 이용하여 상대방에게 전화를 건다는 것은 참 어려웠습니다. 상대방의 부모님이 받으면 많이 부담 가던 시기였습니다. 오히려 몇 줄 적어 보내는 편지가 편했던 시기였습니다. 밀봉해서 보내면 이 또한 검 열이 염려되어 오픈된 엽서를 이용하는 속편 했습니다.
당시 라디오 방송국마다 음악신청을 엽서로 받던 시기라 엽서는 좋은 소통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볼 수 있는 지면이라 일관되게 절제된 글을 함축적으로 보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이 좋았습니다. 당시 임국희 아나운서가 진행한 프로에 음악 신청엽서를 띄우며 동시에 LS에게 그 내용을 적어 보내면 간략한 글을 만들어 보냈습니다. 근 한 달을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며 이룬 결과 좋아 다행입니다. 축하의 의미로 음악을 신청했습니다. 얼핏 그 노래를 좋아한다는 기억이 좋아 선곡했습니다. 시그널 음악이 퍼지며 선곡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곡은 바로 Nat King Cole의 Monarisa였습니다. 며칠 후 똑같은 방식의 엽서를 받게 됩니다. 방송국만 다를 뿐 같은 음악프로였습니다. LS의 신청곡은 같은 가수가 부른 LOVE였습니다. 엽서에는 삼각산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 설경 사진을 오려 붙인 후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자연으로부터 받는 거친 것들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인간의 거친 것은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이 또한 한 달여 동안 같이 작업을 하면서 취미와 관련하여 나누었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낫킹콜 LP판을 당시 미 8군에서 군 생활을 하시던 큰 형님을 통해 구하고 형님께서 사서 보내주신 성우전자 전축을 이용하여 반복적으로 듣고 마침내 애창곡으로 만들게 됩니다. 러브라는 곡도 익히고 그 당시 낫킹콜의 음악을 섭렵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L, is for the way you look at me
O, is for the only one i see
V, is very, extraordinary
E, is even more than anyone that you adore
사랑은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방법
사랑은 내가 보는 유일한 사람
사랑은 매우 놀랍고
사랑은 숭배하는 누구보다도 더 내가 사랑하는 것
And love is all that i can give, to you
Love, is more than just a game , for two
Two , in love can make it
Take my heart, and please dont't break it
Love, was made for me and you
그리고 사랑은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전부입니다
사랑은 둘을 위한 단순한 게임 그 이상입니다.
둘, 사랑에 빠져 있으면 해낼 수 있어 내 마음을 가져가세요,
부디 부서지지 마세요 사랑은 나와 당신을 위해 만들어졌죠
가슴을 졸이며 다이얼을 맞추고 음악 프로를 청취하려 온 신경을 곤두 세우고 책상에 앉아 트랜지스터 바라보다 혹시 다이얼이 제대로 잡혀있는지 수없이 반복 확인 하기도 하였습니다. 꼭 기다리는 방송을 놓치면 죽을 것만 같은 사투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녀의 LOVE라는 곡의 신청은 나를 너무 복잡하게 하면서도 아름다운 미래의 꿈속으로 유도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님과 막내딸이 아이 일곱을 낳고 고생한다고 주거를 옮겨 오셔서 집안 청소와 바느질과 세탁물 정리를 도와주신 외할머니를 제외하고는 여성이 없는 가정에서 자라 여성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 보니 사랑이란 제목을 선택한 심리를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렴풋이 금줄과 은못으로(金蓮銀釘)으로 묶인 것 같은 마음 조각들이 홀연하게 떠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엽서를 받고 LOVE라는 단어를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피천득의 인연과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였습니다. 소장하고 있는 한국현대문학 전집에서 강신재 권역의 소설 중에서 1960년 사상계에 발표된 젊은 느티나무 다시 찾아내어 읽고 또 읽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감정을 살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피천득의 인연이란 수필을 통해 인연은 어떻게 사랑으로 진행되어 가는지 알기 위하여 선택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랑을 이야기한 국내외 단편집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동문학가 부부의 이야기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수원 어린이 최순애는 1925년 11월 12살 때 오빠생각의 시가 방정환 선생이 발행하는 어린이 잡지에 입상됩니다. 다음 해에는 14살 이원수 어린이의 고향의 봄이 입상하고요. 이 시를 읽은 최순애는 이원수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하면서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우며 얼굴도 모른 채 결혼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는 오빠생각은 박태준 선생이 작곡을 하고 이원수의 시는 홍난파 선생이 작곡하여 지금까지도 애창되는 국민의 노래가 됩니다. 두 사람은 서로 처음 만나기 위하여 최순애 고향인 수원역에서 만나기로 하였지만 이원수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지역형을 받아 나오지 못합니다. 이에 부모 님은 다른 혼처 자리를 마련하고 시집을 보내려 하였지만 딸 최순애는 고집을 꺽지 않고 부모를 설득하여 결국 이원수와 결혼하여 서로 아동문학가로 생활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모습에 감명을 받으며 사랑의 깊이를 배워 나갔습니다.
엽서를 받고 음악을 청취한 후 많은 변화가 뒤 따르게 됩니다. 마음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공간이 생겨나고 그 공간에 조금씩 상상의 나래를 발판으로 하나 둘 이성에 대한 알음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스스로 성장통을 겪으며 사춘기 끝 무렵과 사실 맞물리게 됩니다. 큰 사고를 당하여 근 1년을 가슴아래 부분을 깁스를 한채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병상에서 보냈고 이 영향으로 신심은 초라하게 긴 시간 동안 보내야 했습니다. 재활의 시간을 보낸 후 겨우 일어서서 보행을 하게 됩니다. 이 당시 유급의 조치를 우려하는 사정이 생겼지만 형들의 도움과 친구들이 보내주는 필기노트에 의지하여 긴 터널을 빠져나와 상급학교 진학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암울했던 병상에서의 체험 영향으로 마음 한 구석에는 혹시 재발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憂慮)가 늘 따라다녔습니다. 이때 즈음 산 아래로 이사를 하게 되고 자연의 그늘 아래에서 사유(思惟) 즉 생각하고 궁리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 시기 산을 찾아 오르기 시작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한국산악회에서 시행했던 산악강습회에 참여하며 등산이란 걷는 것이라는 기본적 범주에서 벗어나 암벽, 설산 등반과 함께 산을 찾아 옮겨 가는 원정등반도 시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섬 여행 계획을 잡아 부원들과 백령도부터 시작하여 울릉도, 거제도, 흑산도, 홍도, 제주도까지 보폭을 넓혀나가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은 내면에 자리 잡은 사고 후에 생긴 열등감의 반응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에 대한 가치와 목적에 대하여 점점 골몰하게 됩니다. 청춘의 시기에 응당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지만 타인들과 비교할 때 좀 심한 편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혜안의 빛을 준 사람들은 헤르만 헷세와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와 생활론과 자살론으로 유명한 쇼펜하우어도 일말의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최남선이 1908년 소년지에 발표한 신체시로서 소년의 시대적 각성과 의지를 표방한 해에게서 소년에게로의 시를 유난히 사랑했던 나는 청춘 예찬론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청춘이 아름답다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도 청춘이기에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나 청춘의 속에는 아름다움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갈등과 번뇌도 산적해 있었습니다. 나의 청춘은 더욱더 그런 한 것들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고뇌하지만 심리적 갈등은 적극적으로 바르게 직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에 대한 원동력은 산을 오르며 몸소 실천하며 배운 극복을 통한 절제와 통찰이 빗어낸 인내심이 아니었는가 합니다.
음악 엽서를 통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한 후 기말고사에 쫓겨 허둥대며 시간을 소진한 후 여름절기가 본격적으로 될 무렵 도봉산 오봉자락에서 암벽등반 강습회 참가를 위하여 파고다 공원 옆 골목 안에 있던 한국산악회를 찾아 가 선생님들에게 참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당시 회장님은 이은상 선생님이셨습니다. 참 열정적으로 산악회를 이끄셨습니다. 강습회 페난트와 배지를 주셔서 참가 당시 키슬링 전면에 패넌트는 붙이고 배지는 티롤 모자 달고 참석하였습니다. 강습회를 마치고 전국 섬투어에 나서게 됩니다. 첫 번째 방문 섬이 백령도였습니다. 이때 떠나면서 LS에게 이 소식을 몇 자 적어 엽서를 보냅니다.
나의 시간은 늘 쏜 화살입니다 학업에 성취등은? 궁금한 게 많습니다. 백령도 탐방 후 섬 이야기 나누려 하는데 어떨지? 그리고 섬 탐방 일정을 적어 두었습니다. 4박 5일 일정으로 계획된 백령도, 서울역에서 집결 열차 편으로 인천도착 연안부두에서 승선 후 여러 섬을 경유 백령도에 닺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탐방 두무진에서 본 바다동물, 해금강의 절경과 해당화와 백령초, 융기해안선, 인당수가 바라 보이는 언덕, 비행장으로 사용되던 사곶 해안선, 서해 바다에서 뜨는 일출, 개신교가 찾아온 교회당, 숙소에서 가장 먼 곳은 군부대에서 제공한 차량에 동승하였지만 대부분 걸어서 다녔습니다. 해당화와 백년초 등 몇 수 채집하여 식물도감에 화선지로 곱게 싸서 넣어 두었습니다. 육지에서 볼 수 없었던 섬이 지닌 자연의 모습에 많은 감동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귀경 후 받은 엽서에는 1안과 2안으로 나누어 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었습니다. 1안을 선택하여 종로서점에서 만났습니다. 다녀와 식물도감 책갈피에 넣어둔 백령초를 꺼내 화방으로 가 압화 액자를 만들어 갖고 나갔습니다. 섬 여행을 다녀온 기념물로 준비한 것입니다.
당일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가 여행경비에서 남은 돈으로 미당 서정주의 시집을 한 권 사두었습니다. 압화와 함께 선물하려고 준비한 것입니다. 겨울방학, 또는 여름방학 때만 되면 방학 초반에 알바를 하여 여행경비를 모아 두는 것이 나의 관례였습니다. 백령도 여행 경비도 어머니께서 30% 도와주셨고 70%는 아르바이트비로 충당하였습니다. 알바 현장에서 일을 종료 후 받는 노동비는 약속된 금액보다 늘 주인이나 감독께서 후하게 쳐주셨습니다. 신분이 학생이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는 학생증 하나만으로도 취식이 가능한 시대였습니다. 약속시간에 맞춰 정확하게 온 LS,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다가섰습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습니다. 까맣게 탄 얼굴이 건강하게 보여 좋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봄 꽃밭에 서 있을 때 이슬비 따라 피어오르는 꽃향기가 그녀에게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의 용모는 첫인상처럼 한결같았습니다. 만남에서 헤어질 때까지 보여주는 모든 것 나에게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가정을 꾸려 살며 2세들에게 엄마는 지혜를 알려 주고 아빠는 용기를 가르쳐 주는 주는 것이라는 책 속의 이야기처럼 그녀는 지혜가 넘쳐나는 여인이었습니다.
이날 이후 인연은 새로운 방향으로 항해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며 많은 시간을 동행이란 속도에 맞춰 나갔습니다. 함께 있다는 것 만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한 번은 문명의 그늘을 걸으며 영화, 연극을 즐겨 찾고 음악 공연을 보고 미술등 각종 전시와 우리 고유의 문화를 탐방하기도 하며 꿈같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전혀 갈등은 없었습니다. 또 다른 시간은 함께 자연을 찾는 일이 이어져 나갔습니다.
8월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만남에 공간이 생겼습니다. LS는 개인적으로 학원을 통해 익혀야 할 공부가 있어 그 학업에 정진할 시간이 필요하였고 나는 하계원정등반으로 설악산 종주 산행을 다녀와야 했습니다. 당시 강원도로 떠나는 버스 출발지는 현 동대문구청이 있는 동마장 터미널이었습니다. 이곳에는 당시 강원도 전방에서 근무하는 군인들로 넘쳐나던 곳이었으며 경동시장과 청량리 시장 마장동과 관련된 축산물 도축과 유통 등으로 지방에서 올라온 많은 사람들이 왕래가 잦다 보니 여인숙, 식당이 성시를 이루던 곳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여인숙 방을 잡아 놓고 개인장비든 공동장비 등 이곳에 집결시켜 놓고 떠나기 전 이곳에 모여 분야별로 식량, 막영, 장비, 의료, 기록 등 담당을 정한 후 짐을 꾸려 첫차를 타고 떠나도 홍천에 도착하는 시간이 점심때였고 설악동에 도착하면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외길 동행이 많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다녀와서 등반보고회와 장비를 정비해 두어야 하기 때문에 9월까지는 정신없이 지내야 하였습니다.
당시 설악동에 도착하여 양폭산장으로 출발하기 전 찍은 본부 임원들 사진입니다. 좌에서 세 번째가 저입니다. 다른 대원들은 서북주능을 오르기 위하여 남교리 십이선녀탕에서 오르는 팀과 용대리 백담사를 경유하여 봉정암을 오른 후 소청으로 오르는 팀으로 나누어 중청 캠프사이드에서 합류하기로 한 것입니다. 한 명의 낙오도 없이 원정등반을 마치고 귀가한 날 책상 위에는 엽서가 두 장 도착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사히 돌아오기를 염원한다는 이야기와 아무래도 12월 말 까지는 학원에서 받는 교육에 치중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적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시간을 내어 만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도 적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학사일정도 무사히 끝내고 한라산 동계 등반 계획을 수립하고 재가를 받은 후 자일과 스크루 하켄 등 장비를 구매하기 위하여 동대문을 경유하여 남대문 시장에 있던 설악산장 들러 장비를 구매 후 소포 또는 배달해 달라고 요청할 목적으로 주소를 적어 놓고 대원들과 명동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신세계 백화점을 지나 걸어갈 무렵 뒤 따라오던 후배가 형! 어느 여인이 형을 불러 달라고 하네요 한다. 돌아서 서 보니 그녀가 서 있었습니다. 백화점에서 나오다 지나가는 나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내 주위에 여러 사람들이 있어 접근할 수 없어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간을 낼 수 없냐고 물어왔습니다. 너무 뜻밖에 일이라 기뻐지만 선약이 있어 망설였습니다. 일단 같이 걷자고 하였습니다. 일행을 뒤따라 가면서 같이 걸었습니다. 회현지하상가를 빠져나와 중앙우체국을 지나 달러골목으로 접어들어 코스모스백화점 끼고 명동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서로의 입장 때문에 약속을 잡지 못하고 지나갈 적마다 종종 길에서 만나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날 약속 장소로 가 악우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 잠시 앉아 인사를 나누도록 하고 잠시 회의를 주재하면서 중요한 안건은 전부 처리한 후 양해를 구하고 둘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제화점 거리를 지나 개성상회가 있는 삼각동을 지나 광교를 넘어섰습니다. 이곳은 관광여행사가 줄 비했습니다. 보신각 앞에 잠시 머뭇거릴 때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미안해 저녁을 자기가 사겠다고 나섰습니다. 좋다고 하자 무과수 제과 부근에 있는 식당으로 안내했습니다. 길 쪽으로 난 창마다 커튼이 여자아이가 양갈래 머리를 땋은 듯 양쪽으로 묶어져 있고 테이블마다 작은 화병마다 꽃 한 송이씩 꽂혀 있었습니다. 꽃은 종류가 다르게 일주일에 한 번씩 갈아 준다고 합니다. 참 인상적인 식당이었습니다. 맑은 국물에 담긴 온면 참 맛있게 먹었습니다. 여름철에는 메밀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동안 서로의 안부를 정리하여 서로 들려준 후 앞으로 서로의 계획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다 안국동 부근에 있는 브람스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2층에 창가에 앉으면 대각선으로 운현궁이 보였습니다. 잔잔한 음악이 좋은 곳입니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날 식사를 하고 자리를 옮긴 브람스 실내 구석에 설치된 공중전화를 이용한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웃으며 집에다 전화를 하여 10시까지 귀가하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면 들떠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부근 외국 영사관에서 무료 영화를 보여주는데 시청하러 가겠냐고 했더니 무척 좋아했습니다. 러닝타임 1시간 25분짜리 영화를 나란히 앉아 시청하고 실내 전등이 들어왔을 때 나도 그랬지만 그녀도 눈물자국을 지우느냐 정신없었습니다. 슬픈 연인들의 이야기가 관객을 울린 것입니다. 영사관 문화관을 빠져나오면서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된 귀가시간까지 한 시간가량 남아 있었습니다. 그녀와 만난 날 집에 까지 데려다준 후 전주에 걸린 가로등 아래에서 시작되는 열개의 계단 앞 대문 안으로 들어가며 손을 흔드는 모습까지 본 후 나의 귀가는 시작되었습니다. 헤어지면서 백령도 다음은 어디를 갈 계획이냐고 묻길래 흑산도와 홍도라고 알려 주었더니 조심스럽게 함께 가고 싶다 하였습니다.
한라산을 가기 위하여 용산역을 떠나는 날 그녀는 열차에서 먹을 간식거리를 들고 배웅하러 왔습니다. 적설기 등반 중 사고가 잇따르는 일이 한라산에 있어 조심하라고 당부의 말을 잊지 않고 배웅해 주었습니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항에 도착한 후 제주항 부근 여관에서 일박 후 관음사로 이동 등반은 관음사에서 시작하여 개미등을 올라 삼각봉 트레파스에 애를 먹었습니다 너무 지쳐 용진각 대피소에서 1박 후 폭설을 뚫고 백록담에 도착 마침 눈이 멈춰 겜프사이드를 만들고 야영하기로 하였습니다. 적설량이 많아 러셀 하느냐 대원들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가뜩이나 개미목, 개미등을 키슬링을 매고 오르느냐 지쳐 용진각에서 1박을 하며 휴식을 취해 피로를 회복하였지만 용진각에서 백록담까지 적설량이 상당하여 럿셀로 전부 녹다운되어 백록담에 도착하자마자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침랑을 펴고 일찍 자리에 들었지만 지독한 냉기에 쉬게 잠을 청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텐트밖으로 귀를 세우고 혹시 눈이 더 오는지 안 오는지 탐색하기 위하여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분화구벽에 쌓여 있는 적설이 눈사태를 일으킬 것 같아 막영 지를 중앙에 설치하였지만 지금 보다 더 눈이 내리면 분화벽을 오르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제 백록담으로 내려서면서 45M 자일 세동을 연결한 후 구상나무 아래에 단단하게 묶어 백록담 아래까지 늘어트려 놓아 유사시 탈줄루 트는 확보된 상태지만 적설이 더 쌓이면 사면길을 오르는 것이 악조건이 될 수 있다는 염려와 냉기가 잠을 설치게 하였지만 시간이 흐르자 백록담 위로 흐르는 제트기류 소리를 자장가 삼이 깊은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한라산 적설기 등반을 다녀 온후 학업 보충과 새롭게 시작한 아르바이트 때문에 새 학기가 시작되고 4월에 들어서서 그녀를 만나게 됩니다. 동안 간간히 긴 편지를 주고받으며 만남에 대한 아쉬움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아르바이트로 작업에 뛰어들어 완성된 마로니에서 그녀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선배 중에 인테리어 사업을 규모 있게 하시는 분이 있어 저를 자주 불러 일을 시키셨습니다. 건축행정일부터 작업공정과 자재구매 등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공사가 벌어진 곳은 명동, 무교동, 북창동, 소공동은 상가 업소용이었다면 주거용 건물은 새로운 주거단지로 각광받던 평창동과 고급주거단지로 유명세를 떨치던 성북동 등이었습니다.
주로 내가 배치된 곳은 파인힐과 마로니에를 비롯하여 고급 대형식당도 포함되었습니다. 필선배는 상당히 발이 넓고 교우관계가 좋아 일이 넘쳤습니다. 덕분에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또한 산을 함께 다니는 악우였던 관계로 무척 저를 아껴 주셨습니다. 그녀는 시간이 나면 현장으로 찾아와 구경하며 머물 적에 필선배가 계시면 우리 둘을 근사한 식당으로 함께 가 식사와 함께 술을 마시곤 했었습니다. 그녀는 전혀 술을 먹지 않았습니다 알코올 알레르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가끔 주석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하게 되면 약 1시간 정도 배석하다 내가 동석한 선후배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함께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우리만의 시간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영화관람이나 연극공연을 보는 방법과 스포츠경기 관람이었습니다. 또한 함께 등반을 할 경우도 점점 늘어가기 시작하였는데 자연을 함께 걷다 보면 하루종일 함께 있어 참 행복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Pledging My Love - Emmylou Harris 사랑의 맹세
Forever my darling My love will be true 내 사랑이여 영원히 내 사랑은 진실될 거예요
Always and forever I'll love just you 항상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할 거예요
Just promise me darling Your love in return 약속해 줘요 그대 당신도 사랑을 주실 것임을
May this fire in my soul dear Forever burn 내 영혼의 이 불꽃이 영원히 타오를 것을
My heart's at your command dear To keep, love and to hold 내 마음은 당신 거예요 당신을 지키고, 사랑하고, 끌어줄 겁니다 Making you happy is my desire Keeping you is my goal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게 제 소망이죠 당신을 지키는 게 제 목표죠
My heart's at your command dear To keep, love and to hold 내 마음은 당신 거예요 당신을 지키고, 사랑하고, 끌어줄 겁니다 Making you happy is my desire Keeping you is my goal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게 제 소망이죠 당신을 지키는 게 제 목표죠
I'll forever love you The rest of my days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내 남은 시간 동안
I'll never part from you And your loving ways 당신과 결코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당신의 사랑에서 벗어나지도 않을 거예요
Just promise me darling Your love in return 약속해 줘요 그대 당신도 사랑을 주실 것임을
May this fire in my soul dear Forever burn 내 영혼의 이 불꽃이 영원히 타오를 것을
미국 가수이며 작곡가인 에밀루 해리스(Emmylou Harris)는 포크, 팝, 록, 컨트리 앤드 웨스턴 스타일들의 다양한 음악을 어렵지 않게 편한 감정으로 부른 여자 가수입니다. 대중음악을 과거의 감성으로 불렀고 특히 컨트리 음악을 세련되게 변모시켜 불렀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컨트리 록의 여왕'으로 대중에게 각인시킨 가수입니다. 클럽에서 포크 송을 노래하다가 눈에 띄게 된 이후, 해리스는 플라잉 부리토 브라더 밴드의 이전 멤버였던 그램 파슨스가 발표한 2개의 솔로 앨범에 공단처럼 부드럽고 컨트리 색채를 띤 소프라노를 덧붙이는 여성 보컬로 참여하여. 컨트리 록의 랜드마크로 성장하게 됩니다. 1975년 이 가수를 AFKN을 통해 청취한 후 국내에서 알려지면서 동호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녀와 나는 이 노래를 참 좋아하여 여행 중에 여흥시간이 되어 노래를 부를 기회가 오면 둘이서 많이 부른 노래입니다.
흑산도를 경유하여 홍도를 탐방 후 제주도 한라산 등반계획을 세우고 떠나는 14박 15일의 대장정 원정계획서가 완성되어 회람하고 함께 동행할 대원 모집 공고를 게시하였습니다. 결과 18명의 인원이 신청하였는데 그중에 여성은 기존멤버 3명에 그녀를 포함시켜 한 팀을 이루도록 해 놓았습니다. 막영구도 4인용 여성 전용용으로 준비하였고 각종 잠자리에 필요한 메트레스와 침랑 등은 내가 갖고 있는 여벌의 장비를 준비하여 원정등반 내내 내가 관리하고 키슬링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녀에게는 개인이 필요한 세면구와 여벌옷 등 만 준비시켜 총량이 10kg 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페넌트 제작과 표식기 까지 제작을 끝 낸 후 가톨릭학생 회관을 빌려 짐을 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이기 편한 동선에 위치하여 여러모로 편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5월 축제가 있어 그녀의 학교에 초대되어 갔을 때 7월 계획을 부모님께 알려드렸더니 허락하지 않으셔서 고민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위로하며 한번 겪어야 할 문제였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남학생들도 부모님 허락받기가 어려운데 여학생들은 더더욱 어렵다고 우리가 경험한 사례를 들어주며 추이를 보아 가며 대책을 세우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꼭 가고 싶냐고 하였더니 꼭 따라가겠다고 힘주어 결심을 밝혔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마침 홍대미대 부교수로 있던 분이 필선배의 부인이었기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마침 동행하시는 분이라 설득이 가능할 것이라 느껴졌습니다. 필선배 부부와 우리 둘이 함께 만나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결론은 필선배 부인과 함께 등반대장 신분으로 그녀의 집으로 부모를 찾아뵙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방문하는 날 등반계획서와 학술조사계획 등 과 등반기념 페넌트, 18명의 대원의 단체사진. 과일바구니를 들고 약속된 날 방문하였습니다. 부친께서는 사업차 외유를 떠나셔서 만날 수 없었지만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부교수께서 등반과 학술조사 취지를 설명한 후 안전관리와 함께 일정 전반에 대하여 설명을 내가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여성팀원이 4명으로서 관리와 리더자격은 부교수 자신이 할 것이라는 이야기에 보다 힘을 주어 강조해 두었습니다. 약 1시간 30분가량 인사와 함께 설명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오빠가 대문 밖까지 배웅하며 본인이 적극적으로 가고 싶어 하니 갈 수 있도록 조율하겠다는 약속 하였습니다. 그리고 열흘 후 그녀를 통해 허락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단 안전관리에 유의하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우체국 또는 전화국을 이용하여 장거리 전화를 3일 간격으로 하는 단서도 달았습니다.
그녀의 가족을 만나면서 가정에서 풍기는 가풍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엄하면서도 자식들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부모님들의 배려심이 돋보였으며 자식들 역시 부모를 믿고 따르며 순종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아버지의 염격함 속에서도 자식들과 남편사이에서 지헤롭게 처신하며 양쪽에 큰 신뢰를 쌓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감동을 받은 일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서울을 출발 목포로 가는 열차 안에서 그녀는 찹쌀떡과 함께 어머니가 나에게 부탁하는 손편지라면서 읽어 보라고 주었습니다. 봉투에 담긴 것을 보아 그녀는 읽지 못하고 갖고 온 것 같았습니다. 일전 함께 간다는 대학 부교수님과 함께 방문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말과 함께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렇게 멀리 가 본 적이 없는 아이라 많이 걱정된다 하시며 허락한 것이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는 말과 아버지가 해와 출장 중에 결정한 일이라 상당히 부담스럽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담을 덜어주는 일은 모든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긴 뱃길이 특히 걱정된다 하시면서 여자아이가 한라산을 오른다는 것도 염려가 되니 무리하지 말고 여유롭게 안전하게 일정을 잡아 잘 이끌어 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함께하는 팀원들의 구성과 딸아이에 이야기를 듣고 허락하였으니 다시 집까지 데려다 놓으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출발하기 전 예행연습 성격의 치악산 종주 산행을 갔었습니다. 청량리에서 중앙선을 타고 신림에서 내려 철교밑 금대리를 산행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영원산성을 올라 선 후 상원사 갈림길을 지나 남대봉에 섰습니다. 그리고 산맥은 호쾌하게 북으로 끝없이 달려 비로봉에서 치악산의 종주의 정점을 이루고 맥은 다시 매화산으로 달려 홍천까지 이어나갑니다. 곧은재를 지나 입석대 삼거리까지 펼 쳐지는 치악평전은 바람의 영향으로 억새밭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한 명의 낙오도 없이 산행을 무사히 끝내고 청량리역에 도착한 후 해단식을 갖었습니다. 그녀와 난 함께 그녀의 집 근처 중국집에 들러 식사를 함께 하고 귀가하는 모습을 보고 귀가할 수 있었습니다. 종주 길을 잘 걷는 것을 보고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용산역에서 목포까지 완행열차 그리고 다시 목표연안부두에서 흑산도까지 뱃길 쉽지 않은 여로였습니다. 중간 대전역에서 정차 시 냄비가락국수를 시켜 먹는 것으로 요기하고 냄비를 반납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촉박하여 냄비를 들고 여행하다 귀경 중에 다시 돌려주는 것도 경험하게 됩니다. 젊은 혈기가 없었다면 경험하기 쉽지 않은 여로 첫 열차를 이용하여도 결국 흑산도에 도착한 시간은 칠흑 같은 밤이었습니다. 미리 연락하여 흑산도국민학교 측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교실에 입실하여 책상과 집기를 이동시킨 후 빈 교실 3곳을 만들어 중앙에 여성 텐트를 치고 좌우 교실에는 남성들 잠자리를 마련하고 저녁식사를 준비하여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긴 여정의 동선 따라오느냐 심한 여독을 느끼며 잠을 청했습니다. 자리에 눕기 전에 여성용 텐트를 방문하여 덴트 안에서 잠그는 것을 알려 주고 잠자기 전 화장실 다녀오자 하고 교직원용 화장실로 안내하고 기다린 다음 다시 교실까지 동행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만약을 위해 손전등 두 개를 놓고 왔습니다.
다음날 6시에 기상하여 아침식사를 끝내고 8시부터 걸어서 산을 타고 사리로 가 손암 정약전 선생의 유배지와 자산어보를 집필하고 흑산도 제자들을 교육시켰던 사촌서당을 들러 보고 면암 최익현 유배지로 이동하여 살핀 후 다시 숙영지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점심은 아침을 챙긴 후 주먹밥을 만들어 해결했습니다.
다음날은 배낭기미 해안을 경유하여 북쪽 해안선을 탐방한 후 오후에 흑산도 경유 홍도로 가는 정기선을 타고 홍도에 입도하였습니다. 홍도는 땅콩처럼 동서로 길게 나누어져 있는 섬이라 포구에 내리면 가운데 재를 넘어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넘어가면 자갈밭 해변이 있어 그곳을 야영지로 잡았습니다. 당시에는 물이 부족한 곳이 홍도였습니다. 대신 대부분 집집마다 저장탱크를 만들어 빗물을 받아 사용하였는데 우리들 갬프사이드를 방문한 분교 교장께서 자갈해안 끝 바위굴에 가면 오후 물이 빠질 때 바위 아래 샘에서 물이 나온다는 정보를 주어 기다렸다 수통을 들고 찾아가 보니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올랐습니다. 우리는 다행히도 이 물로 식수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홍도는 정말 작은 섬입니다. 수백 년 된 동백꽃 숲이 있고 천연기념물로 풍란이 유명한 곳인데 무분별하게 채취 반출하여 멸종단계에 이르러 철저하게 단속하고 있었습니다. 제주도 하면 문주란이 유명한 것처럼 홍도는 바람이 날려 다른 나무에 기생하며 자란다 하여 풍란으로 불렀다고 하는 난(蘭)입니다. 제일 높은 산을 깃대봉이라 합니다. 이곳에 올라서면 홍도주변 바다 풍경이 그림처럼 다가옵니다. 그리고 자갈밭 해수욕장 뒤에는 기가 막힌 암장이 있어 인공등반을 하기에 최적의 클랙과 리스가 있어 즐기다 동백숲이나 홍도접안 부두에서 파는 멍게, 해삼, 소라가 있어 넘어갔다 와도 30분이면 충분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두에서 바라보면 경사진 곳에 우체국이 있어 장거리 전화를 부탁하신 것을 놓치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모녀지간 전화 통화 후 늘 나를 바꿔달라 하셔서 덩달아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늘 말씀은 한 결 같으셨습니다. 수고 많다는 이야기와 함께 안전이 최우선이라 하면서 잘 다녀오라는 격려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홍도에서 2박 후 첫배로 목포로 나가 다시 제주항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오후 늦게 도착한 제주항 제주 오현고등학교 교실을 사용하기로 사전 허락을 받아 그리로 이동하여 교실에 텐트를 치고 하루 숙박 후 다음날 일찍 관음사를 경유하여 한라산 등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출발 전 식빵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각자 2개씩 점심용으로 배당하였습니다. 개미등에서 먹을 때 즈음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판초 우의를 쓰고 먹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씩씩하게 걷는 모습이 얼마나 대견한지.... 삼각봉을 지나 용진각 대피소를 지나면서 다들 힘들어하는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힘들어하는 모습이 눈에 잡혔습니다. 다가 가 컨디션 상태를 점검할 때마다 괜찮다고 하며 오를 수 있다고 단호하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우리들이 선택한 관음사 코스는 관음사 - 탐라계곡 - 개미등 - 개미목 - 삼각봉 - 용진각 - 왕관릉 - 백록담으로서 도상거리 8.7KM입니다. 막영구와 식 사류 및 장비의 무게 영향으로 6시간 30분 만에 백록담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용진각에서 왕관릉을 지나 백록담까지 거리는 2.7KM였지만 가장 힘들게 넘어선 코스였습니다. 백록담에 도착하여 우선 텐트 5동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램프를 밝히고 식사를 하여 함께 먹은 후 메트레스를 깔고 앉아 별구경을 하며 지내다 각자 텐트로 가 취침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출을 보기 위하여 동쪽 능선으로 올라 일출을 본 후 분화구 둘레를 측정하고 백록담 부근 식물도 채집하여 종류별로 분류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백록담에서 4일 일정을 소화한 후 영실로 하산 한 후 다시 수로를 따라 도순에 도착하여 1박 후 서귀포로 자리를 옮겨 정방폭포 등 탐방하고 다시 표선을 돌아 성산일출봉을 오른 후 우도로 건너가 하루 묵은 후 함덕 해수욕장으로으로 자리를 옮겨 머물며 장비를 정리하고 입었던 등산복 세탁 또는 말려 정비해 놓고 주변에 있는 만장굴 등등을 탐방하고 제주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산에서 일박 후 경부선 이용하여 용산역으로 귀경하였습니다. 길고 긴 하계원정등반을 사고 없이 무사히 마치게 된 것입니다. 부산을 출발하여 미리 연락하여 용산역에 도착하자 그녀의 오빠가 나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악수를 나누고 그녀는 오빠와 함께 떠나는 것을 배웅하고 나머지 일행들은 용산역 부근 식당으로 몰려 가 식사를 하면서 해단식을 갖고 하계등반 원정보고서 날자를 지정해 주고 그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정한 후 흩어졌습니다. 선배님들께서 주신 수고 많았다는 인사를 받고 배웅한 후 혼자 남게 되자 쓸쓸함이 몰려오면서 동안 긴장했던 일상에서 벗어나자 피곤함이 짓눌러 왔습니다. 귀가하여 목욕 후 이틀 동안 잠만 자고 일어났습니다. 다시 원정등반에 대한 모든 내용을 담당자를 통해 입수하고 정리하여 하계원정 등반 보고서를 작성하여 보고회의를 하기 위하여 회의장소로 나갔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