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순례 시인>>
<<함순례 시인의 양력>>
* 1966년생.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출생.
* 한남대 영문학과 졸업
* 1993년 《시와 사회》로 등단.
* 2005년 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을 받음.
* 2006년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 선정
* 2014년 제9회 한남문인상 수상
* 2018년 대전작가회의 회장
* 2019년 제18회 아름다운 작가상 수상
* 시집으로 『뜨거운 발』, 『혹시나』, 『나는 당신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울컥』이 있음.
*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작가마당》 편집위원, '애지시선' 기획위원.
* 작은 詩앗 채송화 동인
<<함순례 시인의 대표 시>>
뜨거운 발/함순례
어스름 할머니민박 외진 방에 든다
방파제에서 그물 깁던 오십줄의 사내
지금쯤 어느 속정 깊은 여인네와
바짓가랑이 갯내 털어내고 있을까
저마다 제 등껍질 챙겨가고 난 뒤
어항의 물비늘만 혼자 반짝인다
이곳까지 따라붙은 그리움의 물살들
밤새 창턱에 매달려 아우성친다
사랑이 저런 것일까 벼랑 차고 바윗살 핥아
제 살 불려가는 시린 슬픔일까
몸이 자랄 때마다
맨발로 차가운 바다를 헤매야 하는 소라게야
울지 말아라 쓸쓸해하지 말아라
게잠으로 누워 옆걸음 치며 돌아가야 할
누더기 등껍질 촘촘 기워간다
물 밀려간 자리 흰 거품 걷어내며
기어 나오는,
소라게의 발이 뜨겁다
꼴림에 대하여/함순례
개구리 울음소리 와글와글 여름밤을 끌고 간다
한 번 하고 싶어 저리 야단들인데
푸른 기운 쌓이는 들녘에 점점 붉은 등불 켜진다
내가 꼴린다는 말 할 때마다
사내들은 가시내가 참, 혀를 찬다
꼴림은 떨림이고 싹이 튼다는 것
무언가 하고 싶어진다는 것
빈 하늘에 기러기를 날려보내는 일
마음속 냉기 당당하게 풀면서
한 발 내딛는 것
개구리 울음소리 저릿저릿 메마른 마음 훑고 간다
물오른 아카시아 꽃잎들
붉은 달빛 안으로 가득 들어앉는다
꼴린다, 화르르 풍요로워지는 초여름 밤
마흔을 기다렸다/함순례
산허리에 구름이 몰려 있다
알 수 없지만
내가 가고 있으니 구름이 오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빗속에서 바라보는 구름은
고등어처럼 푸릇했으나 파닥거리지는 않는다
추녀에 매달려 울던 빗방울들이
호흡을 가다듬는 저녁 다섯 시
점점 켜지는 불빛들 바라보며 묘하게
마음 편안하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어느 시인의 말에
방점을 찍는다 그 옆에 사랑은 세숫비누 같아서
닳고 닳아지면 뭉치고 뭉쳐
빨래비누로 쓰는 것이다,라고 적어놓는다
저 구름을 인생이라 치면
죽지 않고 반을 건너왔으니
열길 사람 속으로 흘러들 수 있겠다,고 쓴다
마흔, 잘 오셨다
숲/함순례
오래된 편지를 읽습니다 당신에게로 갔다가 우리 속에 놓여진 편지 당신을 만나
즐겁다, 쓰여있군요 행복해요, 라고도요
가까이 있으면 자랄 수 없다는 듯 간격을 두고 발끝 세운 나무들처럼 큰 바람이
일렁일 때나 사르락 손 내미는 이파리처럼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곁눈질로 골똘했지요 이따금 새들에게 눈 맞추는건 헛김나는 일이어서 나는 그만
아득해져 혼자 말갛게 익어가는 산감이 되었더랬지요
그런데 묘목을 심은 첫 자리 뱀처럼 얽혀 있는 우리의 뿌리를 만납니다 나의 밑둥
썩은 감꼭지 핥고 있는 이가 바람이려니 했더니 당신이었군요
벌거숭이 산길에 가위눌리는 일도 끝이지 싶네, 내게로 온, 오늘 문득 층층이 허물
벗은 골짜기 따라 우거진 숲을 읽습니다
잠자리/함순례
매미 소리 물고 잠자리 날아든다
장맛비에 물러터진 복숭아처럼 꼭지 잃은 말들이 썩어가는 동안 3억 년
이상 아름다운 비행 멈추지 않은 널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교정지와 출판사와 제본소 오가는 사이 뜨거운 햇살과 내통한 듯 비틀거리던
기억이 난다 짧은 그늘 비껴 걸으며 눈빛 붉어지고 입안에 단내 풍겨나왔다
그 때마다 깨물던 밥풀과자 날린다
여름 물가에서 차례차례 껍질 벗고 오늘 아침 창가에 투명한 그물 펼치는 잠자리떼,
내 발목에도 말랑한 피가 도는 것이다
지금 난 겹눈 훔쳐 달고 검붉은 자루 속 빠져 나오는 중이다
사랑방/함순례
울 아부지 서른, 울 엄니 스물 셋 꽃아씨, 아부지 투덕한 살집만
믿고 신접살림 차렸다는디, 기둥 세우고, 짚과 흙 찰박찰박
벽 다져, 오로지 두 양반 손으로 집칸 올렸다는디, 부쳐먹을
땅뙈기가 없는 기라
내사 남아도는 게 힘이여 붉은 동빛 박지르며 집을 나서면, 이윽이윽
해가 지고, 어둠별 묻히고야 삽작을 밀고 들어섰다는디, 한 해 두 해
불어나는 전답, 울 엄니 아부지 얼굴만 봐도 배가 불렀다는디......
늘어나는 것이 어디 그뿐이랴 울 엄니 이태가 멀다 실제 배가 불렀다는디,
갈이질에, 새끼들 가동질에, 하루 해가 지는지 가는지 하 정신 없었다는디,
울 아부지 저녁밥 안치는 엄니 그대로 부엌바닥에 자빠뜨린 거라
그 징헌 꽃이 셋째 딸년 나였더란다 첫국밥 수저질이 느슨할밖에......
임자 암 걱정 말어 울 아부지 구렛나룻 쓰윽 훑었다는디,
스무날을 넘기자 사랑방 올린다고 밤새 불을 써 놓고 퉁탕퉁탕 엄니 잠을
깨웠드란다 모름지기 사내 자슥 셋은 되야혀 그때 되믄 계집애들이랑
분별하여 방을 줘야 않겄어!
그렇게 맨몸으로 생을 일궜던 울 아부지, 성 안 차는 아들 두 놈 부려놓고
이젠 여기 없네.
뺨/함순례
내 친구 윤태자, 언젠가 그녀의 뺨을 갈겼다 내 궁색한 자취방에서 한 일 년 식객노릇을 했는데 새벽별만
바라보아도 배터지게 슬펐던 그 시절, 우리는 불어터진 라면발처럼 톡톡 끊어지기도 하고 가지런히 단추를
채우기도 하면서 세상에 대한 서슬 푸른 적의를 키우기도 했다
내가 직장으로 야간대학으로 돌아치는 동안에도 밤고양이처럼 웅크려 있기 일쑤였던 태자가 경찰시험에
붙은 날, 그날 밤 나는 태자의 뺨을 철썩, 올려붙였다 “가시나! 민중의 지팡이 노릇 똑바로 햇!" 그때는 임수경이
평양축전에 참가한 즈음이었는데, 그녀와 외양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나조차 아예 짬새 똥파리쯤으로나
여긴 경찰이 아니꼬와 괜한 화풀이 한 것이다 그 밤의 손꽃,
결혼하고 하나 둘 새끼 낳고 이제 헐렁한 나이, 모처럼 한 방에 눕는다 태자가 말한다 수많은 민원인 속에서
지금도 여전히 그 뺨 얼얼하다고…… 내 친구 윤태자! 누가 뭐래도 늠름한 민중의 지팡이다
어느새 고단히 잠든 태자의 뺨을 쓸어본다 내 뺨, 온통 얼얼하다
함순례기/함순례
그러니까, 술래라 부른 적 있다 기일게 수울래 부르면 달빛 강변에서 강강수울래 춤추는 듯, 좀 짧게 부르면
술래야술래야 머리카락 보일라 숨은 동무들 찾느라 해거름 길어졌다 해례야 달례야 부르는 벗들도 있다
벗들에게 빛 같은 존재가 되라는 의미겠는데 온몸 붉어지는 호명이다 함수라고도, 수레라고도, 순네라고도,
첩첩산골 가시내가 되었다 미소가 둥글어졌다 글냄새 물씬 나는 필명도 잠깐 생각했지만 지금 나는 태앗적
이름으로 돌아와 있다 들판을 한없이 걸어야 하는 순례에 서 있다 충북 보은군 회북면 용촌리 백삼십육번지
일천구백육십육년 일월 스무여드레 그 하늘에 다시 예를 갖춰야겠다 슬픈 낙타 발굽 소리와 모래바람의
숨통을 열어봐야겠다 순례야 순례야 삼보일배, 다시 돌아와야 하는 그 길엔 철없는 가시나무들이 촘촘했다
신도여인숙/함순례
남들 다 내 같지 않제 걱실걱실한 뱃사람들 상대하기가 좀 에려운 기라 고만 둬뿔라 몇 번을 맘 묵어도 쪼매
두고 보제 했던기 이날이라카이 지금사 일 놔뿔기도 궁시럽고마 뱃사람들 월 세방으로 나 돌리뿐 기라 그라도
한 밤만 재와주소, 및칠 굶었는데 밥 좀 주소, 하믄 맴이 아퍼가 재와주고 믹인 사람, 빛도 없는 밤에 디리닥쳐가
날마새마 홀랑 도망간 넘들 쌨다 우째다가 방세 줄라꼬 다시 온 넘은 한 분도 못 봐가 속이도 속아주고 함시로
사람이 독해지제 아 이것? 예전 꽁치잡이배 그물에 쓰던 기라 열쇠가 하 쪼매니께 안경집만한 여어 다
잡아매놓으이 십상 좋다 주무이 뿔룩해징께 아참 하고 놓고 가는 기라, 여는 낯 씻는 데고 저 끝짝이 볼일 보는 데라
영화배우도 여그 많이들 왔제 요샌 시인이라는 작자들도 더러 찾아오더만, 근디 시인이 대체 뭐하는 사람잉가?
시악시는 알어?
고양이 집사/함순례
저녁이면 마당으로 들어서는 길고양이가 있다
하루 일 마치고 퇴근한 가장처럼
대추나무 밑에 앉아 느긋한 얼굴로 식구들을 쳐다본다
호랑이무늬 연한 갈빛이 곱기도 한 고양이
표정도 유순하고 귀여운 녀석
누군가는 먹이를 주면 절대로 안 된다고 하고
누군가는 먹이를 주면 친구도 될 수 있으리라 말한다
고기 냄새 풍기며 저녁을 차려 먹는 날이면
고양이가 야외 테이블 가까이 다가와 우리의 입 쳐다보기도 한다
기대하는 눈빛과 망설이는 눈빛이 마주치면
고양이는 몇 번씩이나 눈을 감았다가 뜬다
빈집일 때가 많은 하마실 하얀 집
내가 항상 이 집을 지키고 있어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한 간절한 눈빛
어쩌면 이 집은 오래도록 제 집이었는지도 모른다
밤마다 길거리 생활에 지친 몸 누이며
적막한 집안에 온기를 들이는 고양이
큰 소리로 쫓아도 고양이는 쉬이 물러서지 않는다
녀석의 이름을 당글당글 여문, 대추라고 불러주어야겠다
투명한 고요/함순례
카약을 탄 사내가 투명한 고요의 중심부로 노를 저어 가는 동안
호숫가 비탈에서는 머위들이 쌉싸름한 향기를 밀어 올렸다
살아가는 거여, 푸르고 따듯한 손바닥을 열어 그늘을 감싸고 있었다
물결도 덩달아 잎잎들 추어올리며 쟁쟁쟁 피어났다
기와 불사/함순례
나의 기도가 저 높은
지붕 위나 담장에 올려져
고요히 피어오를 줄 알았더니
산사 뒤란 샘가에서
물받이로 쓰이고 있네.
세상에나, 조랑조랑
맑은 물소리에 씻기며
계곡으로, 마을로 낮게
흘러가고 있네.
거룩한 악수/함순례
주차할 곳을 찾아 헤매는 옆집 손님에게
집 앞 빈자리 흔쾌히 내어주시는 예수
향방이 서툰 뭍것들의 손목 잡으시고
마음까지 낚아채시는
제주 탑동마을에서 만난 예수
저마다 빗장 치느라 바쁠 때
홀로 병든 지구를 업고 가는 주름진 예수
일곱 살, 우주(宇宙)/함순례
바람이 들썩이는 호숫가
비닐돗자리 손에 든 아이가
풀밭으로 걸어간다
신발 벗어 한 귀퉁이 두 귀퉁이
메고 온 가방 벗어 세 귀퉁이
마지막 귀퉁이에 제 몸 내려놓는다
삼라만상을
돗자리에 전부 모셨다
술병 무덤/함순례
남김없이 증발했네
좋을 때 마시자, 차 트렁크에 남몰래 찔러주던
처음 손길도 지워졌네
반백년 흐르도록 지울 수 없는 육탈의 혈흔을 생각하자면
함부로 뚜껑을 열지 못한 것
병목에 인쇄되어 비뚤어진 태극기
대한의 아들딸로 태어나 길이 보전하지 못한
대한(大恨)의 목숨들에게 고수레,
차 트렁크 어둠 속에서
구겨진 신문과 우산과 슬리퍼 속에서
무던히도 흔들리며 애달펐을
오래된 병(病)을 묻었네
일년 가까이 지그시 제 속을 비워낸
한라산, 그 뜨거운 바람도 울컥하여
마당가에 쭈그려 앉아 가만
가만히 술병을 묻었네
담양(潭陽)/함순례
길을 냈네
나는 왜 누가 내놓은 길만 따라왔는지
내가 이 겨울 산골에 들어온 건
사랑을 놓치고 사랑에 서러워서였네
무덤이나 농지에서 끝나버리는 길
능선 너머로 잇대어 보고도 싶었네
죽어서 가는 곳은 무덤뿐 아니니
사람이 밥심만으로 살아지는 것 더욱 아니니
나의 무기는 일심 깡다구였네
거친 나무 걷어내고 덤불가지 쳐내며
적막강산에 구부러진 두 손 내밀 때마다
바람이 붉게 붉게 울었네
몸집 큰 산꿩은 팽팽한 봉인을 풀고는
늑골에 고여있던 그늘을 베어물고 사라졌네
햇살 한 평
햇살 두 평
숲 가운데 오솔길이 구불구불한 등뼈 드러내며 삼삼했네
누구와 이 길을 걸을까
따순 볕이 가슴까지 차올랐네
하, 담양이었네
인(印)/함순례
달맞이 고개 넘어 바다로 가는 길
도로변에서 ‘한국시’를 보았다
간판이다
그 끝엔 ‘한국시인’ 좀 작으나
핏빛 노을 같은 붉은 낙관까지 찍어 놓았다
나른하게 고여 있던 자동차 안 일순 술렁거린다
위대한 한국시인이 살고 있는 집?
봄 들판이 휙휙 지나간다
‘시’자만 봐도 ‘시인’ 소리만 들어도
속엣 것 수만 길이 꿈틀거리는
아무도 모르게 품에 넣고 다니다가
무덤 속에 누워서도 야금야금 꺼내먹을 수 있는
문장 하나
잘 익은 시 한 편
울컥, 뜨거워지는데
누군가 에잇 국숫집이잖아, 찬물을 끼얹는다
아뿔싸! 되돌아갈 수 없는
제 살 파먹는 눈물바다
푸릇한 이 길도 도장이다
아직도 고백중/함순례
...
은희를 사랑했어요 은희 좀 불러줘 술에 취하면 아직도 사랑의 역주행 중인 광덕 씨, 밤나무 민박에 들어 불 피우고 일각이 지나기 전 대취했다 실제 고속도로에서 역주행하다 경찰에 인계된 일도 있었다는데 그날도 십 년 만에 고향 친구들 만나고 대취하여 돌아오던 길이라 했다
웃을 때는 천상 하회탈 형상이나 까무잡잡한 이마에 굵게 파인 일자 주름 모으면 한 성깔 다부져 보이는 사내, 그가 강력반 형사라고는 차마 말 못하겠다 악착같이 도망가는 놈을 잡으려면 내가 그놈보다 더 악착같으면 되거든요 그런데 은희는 내겐 좀체 떨리지 않는다는 은희는..... 난 누굴 떨리게 할 수 있을까요.....,
사랑에 유배당한 쓸쓸한 짐승이 컹컹 짖으며 제 살 물어뜯는 밤이면 이십 년 지나도록 고백 중인 사랑이 도진다 누구도 못 말리는 깡 촌놈의 사랑
봄날, 라 보떼가 델 아르떼/함순례
꽃을 품고 다니는 사람을 만났어 그러니까 봄비 부슬거
리는 오후,봄이 다가오는 소식에 들른 찻집에서였지 오
래된 축음기와 전축이 찻집 구석구석을 날름거리는, 그
래 봄이 오는 노랠 듣고 또 듣고 있는데 아직은 먼 봄빛
거느리고 그가 들어왔어 양귀비꽃 한 아름 싸안고......,
글쎄 신문지에 둘둘 만 꽃을 본 게 얼마 만이더라 말로만
듣던 꽃을 보는 경이로움일까 유리병에 꽂아놓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있는데 그이 다시 차에 갔다 온 모양 신문
지에 둘둘 만 꽃을 내게 안기네,아네모네! 오늘 참 운수
좋은 날이야 그림을 그린다더니 정작 사람을 품고 다니
는 사람이었어 당신도 기대해도 좋을 거야 노은 은구비
공원 근처 찻집에 가면 전생에 꽃씨 종족이었을 종자 퍼
뜨리는 일에 살짝 이쁘게도 미친 그 여자, 혹 만나실지도
밥 한번 먹자/함순례
네가 차려준 밥상이 아직도 기억에 있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너희 집 앞을 지나다 받았던,
첫 애기 입덧 내내 네가 비벼준 열무비빔밥 간절했어
네 자취방의 아침밥도 잊을 수 없어
내가 차렸다는 어린 날의 밥상들이
이십 년 만에 나간 동창회 자리에 그들먹하니 차려진다
외로우니까 밥을 먹었다
분노와 절망이 바닥을 칠 때도 배가 고팠다
눈물밥을 삼킬 때조차
혀끝을 돌려 맛을 기억했다
밥을 위해 땀을 흘리고
밥을 위해 비겁해지고
밥을 위해 피 흘리며 싸우고
밥을 위해 평화를 기도한 날들
오래된 청동거울 같다
땀을 흘릴 때 누군가 밥을 주었다
비겁해질 때 누군가 고봉밥을 퍼주었다
피 흘리며 싸우고 온 날
휘청거리는 내 손에 쥐어주던 숟가락 있었다
먹어도 물리지 않는 사람의 말
먹고살 만했졌다지만
밥 한번 먹자,는 인사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저쪽 사원/함순례
산길은 무덤을 향하고 있다
산책길을 찾아
이 길 저 길 더듬어보니 그렇다
가격家格에 따라 무덤의 위용과 무덤으로 가는 길도 달랐다
사람은 죽어서도 평등하지 않았다
나의 후생은 사람 두엇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숲길 하나 얻는 것일까
혼자는 외로우니 두런두런 말 섞으며 걸어가면
어떤 슬픔도 측백나무 향처럼 부드러워지겠다
잘 죽기 위해 오늘을 사는 것
허나 저쪽 세상을 나는 모른다
발을 딛지 못하는 허방일까 황홀한 꽃밭일까
나는 저쪽 세상의 색깔을 모른다
양지바를까 짙푸른 미명일까 암흑천지일까
저쪽을 들여다보기에 이쪽은 너무 캄캄하다
그러니 저쪽은 가보지 않은 사원이다
은은한 경배의 자리다, 다만 때가 되면
울지 않고 돌아가는 것
그 길은 만날 수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 뿐이다
맛의 처소/함순례
물메기가 제철이라 했다
촌놈횟집 밥상에 올라온
별다른 양념 없이 구들구들하게 쪄낸 물메기찜
무르고 연한 살성이
처처 맛을 들인 곳간이라는데
너무 착해서 바보 같은 당신
너무 차가운 당신
너무 슬픈 당신
사람의 맛도 무수한 ‘너무’를 넘어서는 일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는 황금의 나라에서
때때로 아무 것도 아닌 당신과 내가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는
부드럽고 찰진 사람의 낯을 간직하기란
얼마나 힘든지
내 이름에 달라붙은 순할 順
이 무구한 업을 시시하다 여기며
독하게 몸을 달궈온 날들이 차마 쓸쓸해졌다
소낙비/ 함순례
빗속에, 빠졌습니다
짙푸른 들녘을 걷는 중이었습니다
바짓가랑이 치고 들어오는 빗줄기
밤송이에서 볏잎에서 땅콩밭에서
마구 펄떡거리는 초록을 탐하며 걸었습니다
우산이 쥐집히거나 우산을 버린
61세의 여자
52세의 여자
49세의 여자
사람의 마을 깊숙이 정자에 들어 두 다리 뻗고 주저앉거나
젖은 치마 걷어 올려 물을 짜내거나
빗물 들이치는 난간에 기대어 길을 점령한 흙탕물에
넋을 놓을 즈음
이럴 땐 말이야
늠름한 시골 총각이 민소매 차림으로 물꼬를 보러 나와야 하는데
그러면 야 이리 와봐 이뻐해줄게 해볼텐데
무서운 여자들입니다
무서운 여자들이 무서워 길은 적막하고
허름하니 웅크린 지붕들은 갇혀 있고
찌질한 놈들은 가라, 우산을 접은 여자들이 세차게 덤벼들고 싶은
싱싱한 놈을 기다리며 야담의 촉수를 높이는 동안
우리의 몰락은 몰락이 아닙니다
소낙비에 기울어진 몸에서도 심장이 파닥거립니다
연락 주세요 단, 된 놈 될 놈만 받습니다
서해 바다 노을 저편/함순례
어린 아이가 바닷물에 흥건히 젖은 채 울고 있다
높은 파도에 휩쓸렸는지 두 눈 꼭 감고 다만 공포를 쥐어짜며 울어 젖히는데
운다는 건
울음 밖으로 이끌어 줄 어떤 손길을 기다리는 것
그래, 울 때는 저리 악착같이 울어야 한다
그러나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할 때 많은 건 눈물을 감출 줄 알아야 어른이라고 배운 때문
어느 새벽 아무리 해도 멈추지 않는 코피가 서러워 천지가 외로웠을 때처럼 이미 나를 지나간 사랑에 떨며 쏟아놓은 통곡처럼
이제는 최선을 다해 울고 싶다
그 붉은 귀를 열고 들어가면 기쁨이나 슬픔 같은 것, 맹감처럼 떫어져서 둥글어져서 고슬고슬 맑은 뿌리 내릴 것만 같아서
시인의 세금을 면세하라 - 함순례
편집장과 시인 사이에 삼천 원이 오락가락한다 시 한 편에
삼만 원 씩 두 편이면 육만 원인데 왜 오만칠천 원이냐
가난한 시인은 원고료 삼천 원의 행방이 순전히 궁금했던
것이고 미안한 편집장은 원천징수 세금을 메워주고 싶었던
것인데, 그 실랑이가 가엾기도 하고 어여쁘기도 했는데,
생각하니 시인에게 세금 물리는 게 가당키나 하냔 말이야
시인만큼 맹목적이고 갸륵한 신앙인이 어디 있겠냐 말이야
제 살 파먹고 피를 말리는 첩첩한 수행자들 낮밤 지독한
슬픔과 연민으로 통성기도 써내려가고 구원 방언 터지며
점점 뜨거워지는 지구별 온몸으로 밀고 가는 종족들,
종교계가 면세라면 시인 원고료도 면세다! 면세하라!
1인 시위라도 벌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