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명예혁명
이는 총 한 방,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제 왕권을 철저하게 몰락시키고 입헌 군주 제도를 확립시킨 '혁명' 아닌 혁명이었다. 또한 이후 수세기 동안 아무런 내전 없이 정치적 안정을 이루며 영국을 방대한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해 준 혁명이었다. 이는 바로 영국 역사상 그 유명한 '명예혁명'이다.
시기: 1688년
인물: 제임스 2세, 오렌지 공 윌리엄(william of Orage)
찰스 2세의 복귀
올리버 크롬웰이 죽은 뒤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호국경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을 겪지 않고 평화로운 시기에 성장한 리처드는 아버지와 달리 성격이 나약했다. 그의 능력으로는 용맹스럽고 사나운 군대를 장악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군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1659년에 이르러 재직 8개월 만에 호국경직을 사직했다. 영국은 권력 공백 상태에 빠졌다.
정권을 장악하던 군부가 막강한 지도자 없이 우왕좌왕하자 정치는 혼란스러워졌다. 당시 영국의 앞날에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었다. 또다시 한바탕 내전을 치르고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스튜어트 왕조를 다시 일으켜 전제 군주체제로 회귀할 것인지 둘 중의 하나였다. 런던은 혼란에 빠져 있었고 지방 곳곳에서는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자본 계급과 지방 지주들은 불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루빨리 혼란을 잠재우고 자신들의 재산과 권력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강력한 정권이었다. 의회나 군대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없다면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하여 자본 계급과 귀족들은 왕정복고를 꿈꾸며 스튜어트 왕조를 복권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660년 2월에 스코틀랜드에 주둔하던 몽크(Monck) 장군이 장기 의회를 복원시킨다는 이유를 내세워 군대를 이끌고 런던을 점령했다. 사실 몽크 장군은 골수 왕당파였다. 의회파가 세력을 얻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의회파로 위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올리버 크롬웰이 죽고 없자 몽크는 본색을 드러냈다. 왕정복고를 희망하던 몽크 장군은 왕당파 의원이 주축이 된 장기 의회를 소집했다. 장기 의회는 찰스 1세의 아들 찰수의 왕위 계승을 승인하고 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네덜란드에서 머물고 있던 찰스 왕자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는 난폭한 혁명군에게 핍박받은 불쌍한 왕자의 모습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네덜란드의 브레다(Breda)에서 영국 국민에 대한 약속을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 '브레다 선언'으로 찰스 1세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혁명 관계자를 사면하며, 내전 기간에 몰수된 왕당파와 교회의 재산과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의회가 결의한 법률에 따라 신앙의 자유를 인정할 것 등의 내용이 담겨있었다. 브레다 선언은 혁명 기간에 이익을 얻으며 왕정복고를 두려워하던 의회파의 불안감을 없애 주는 데 충분했다. 국민은 앞 다투어 찰스 왕자의 귀국을 호소했다. 그로부터 한 달 수, 찰스 황자가 영국으로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바로 찰스 2세였다. 그동안 크롬웰의 독재 정치에 시달린 영국 국민은 새로운 왕이 영국의 전통적인 질서를 회복시켜 주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들은 온 나라 교회의 종을 울리고 불꽃 축제를 벌이면서 새로운 왕을 열렬히 환영했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찰스 2세는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약속을 뒤엎고 혁명을 일으킨 의회파에 보복을 가하기 시작했다. 올리버 크롬웰의 무덤을 파헤쳐 시긴을 참수시킨 뒤 목을 웨스트민스터 홀의 꼭대기에 걸어놓았으며, 당시 찰스 1세의 처형을 판결한 최고 재판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전원 사형에 처했다. 찰스 2세가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의회파를 상대로 피의 복수를 하는 데서 멈췄다면, 대다수 영국인은 그를 용납하고 이해했을 것이다. 정작 영국 국민을 참을 수 없게 한 것은 찰스 2세의 친 프랑스 정책이었다.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프랑스는 찰스 2세를 국왕에 버금가는 예우를 갖춰 극진히 대우하며 풍족한 생활을 누리도록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왕위 계승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찰스 2세가 프랑스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친 것이 문제였다. 찰스 2세는 1662년 프랑스와 조약을 맺고 과거 크롬웰이 스페인에서 빼앗은 됭케르크를 프랑스에 팔아넘겼다. 연간 무역 흑자가 수십만 파운드에 달아는 중요한 무역항이자 유럽 진출의 거점인데, 국가의 전략적 이익은 전혀 생각지 않고 20만 파운드라는 헐값에 팔아 치운 것이다.
찰스 2세가 의회를 무시하며 독재적인 정치를 펼쳐나가자 의회는 비국교도는 공직을 가질 수 없도록 규정하는 '심사율'과 국왕이 불법적으로 국민을 체포할 수 없도록 규정한 '인신 보호율'을 제정하여 왕의 친가톨릭 전제 정치에 대항했다. 의회는 또 다시 영국 정치의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1685년 찰스 2세가 숨을 거두었다. 당시 그에게는 아들이 여러 명 있었지만 모두 사생아였다. 사생아는 왕위 계승권이 없기에 그의 동생이 쉰둘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바로 제임스 2세였다. 제임스 2세 역시 그의 형과 마찬가지로 혁명가들을ㅇ 끔찍히 증오했다. 그는 아예 한 술 더 떠서 자신이 가톨릭교도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당시 영국 사회는 대부분 신교도로, 가톨릭이 복권되는 것을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톨릭이 복권된다면 16세기 종교혁명으로 일군 성과마저 모조리 물거품이 되어 과거로 돌아갈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제임스 2세는 자신의 종교적 성향이 심각한 정국 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가톨릭 신앙의 자유를 선포하고, 가톨릭 교도들을 정부나 군대 등의 주요 관직에 임용했다. 심지어 궁정에서 공개적으로 가톨릭 미사를 열어 영국 국교회의 반감은 점점 높아만 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임스 2세는 의회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세금을 거둴들이고, 프랑스 수입 상품의 관세를 내렸다. 이 때문에 프랑스 상품이 밀물처럼 들어오면서 영국 상인들은 김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종교, 외교, 경제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국왕과 의회의 갈등은 깊어만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임스 2세의 두 번째 왕비가 아들을 낳자 국왕과 의회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사실 의회는 노쇠한 제임스 2세가 죽고 신교를 믿는 그의 딸 메리 공주나 앤 공주가 왕위를 계승하길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왕자가 태어난 것이다. 왕자의 탄생은 신교도들의 희망을 앗아갔다. 왕자는 왕위 계승 서열 1위로서 가톨릭 교도들에게 둘러싸인 왕실에서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자랄 것이 뻔했다. 의회는 오랜 기간의 내전을 거쳐 어렵사리 이룬 종교 개혁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좌시할 수는 없었다. 이로써 마침내 '명예혁명'이라고 불리는 정변이 시작되었다.
윌리엄의 상륙
1688년에 영국 의회의 대표 의원 7명이 비밀 집회를 열었다. 그들은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 공 윌리엄(William of Orange)과 메리에게 영국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귀환해 달라는 요청 서한을 보냈다. 그들이 윌리엄에게 손을 내민 이유는 간단했다. 윌리엄은 제임스 2세의 큰 딸 메리의 남편인 데다 둘 다 신교도였다. 왕위 계승의 정통성으로 보나 종교적 성향으로 보나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왕으로 옹립하는 데 성공한다면 왕권 강화를 견제하는 동시에 크롬웰과 같은 독재자의 탄생을 막을 수 있었다.
마침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는 상태에서 영국의 지지가 절실했던 윌리엄은 두 팔을 펼치고 환영했다. 영국의 국왕에 즉위한다면 프랑스에 대항할 힘이 갑절은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1688년 11월 1일, 윌리엄과 메리는 배 600여 척에 병사 1만 5,000명을 싣고 잉글랜드 남서부에 상륙하여 런던으로 진격했다. 국내 귀족과 지방 지주들도 잇달아 윌리엄과 메리 부부의 진영에 가담하였다. 제임스 2세는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4만 대군을 파견했지만 모두 왕을 배반하고 윌리엄 진영에 투항했다. 심지어 영국 처칠 총리의 선조이자 당시 영국 총사령관이었던 존 처칠마저 윌리엄 진영에 가담했다. 군인들이 투항하자 왕족들도 앞 다투어 윌리엄에게 백기를 들었다. 제임스 2세의 둘째 딸 앤 공주조차 윌리엄 진영에 가담하여 제임스 2세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다. 12월 18일에 윌리엄은 아무런 저항조차 받지 않고 순조롭게 런던으로 입성했다. 윌리엄이 정국을 장악하게 되자 제임스 2세는 그의 아버지 찰스 1세처럼 처형당할까 두려워졌다. 이에 국외로 망명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왕비와 왕자를 먼저 프랑스로 도피시킨 뒤 탈출을 기도했다. 제임스 2세는 탈출 도중에 사병들에게 붙잡혀 다시 런던으로 압송되었다. 윌리엄 부부와 의회가 원하는 것은 권력이지 왕의 목숨이 아니었다. 윌리엄은 네덜란드 근위대에게 제임스 2세를 항구 도시인 로체스터까지 호송하도록 명령하여 그의 도피를 묵인해 주었다. 사실 제임스 2세는 로체스터까지 가는 동안 딸과 사위가 근위병을 시켜 자신을 암살할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근위병들의 감시가 생각보다 소홀하고 왕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야 딸과 사위의 속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결국 제임스 2세는 왕비와 강보에 싸인 어린 왕자를 데리고 프랑스로 망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프랑스로 망명한 제임스 2세는 끝내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689년에 루이 14세의 원조로 프랑스군을 이끌고 아일랜드에 상륙했다. 그러나 재기를 꿈꾸던 제이스 2세는 결국 전투에서 패하고 프랑스로 돌아가 생제르맹에서 병사했다.
1689년 2월에 영국 의회는 제임스 2세의 퇴위를 결의하고 윌리엄 부부를 각각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로 공동으로 왕위에 추대했다. 이로써 명예혁명은 무혈 혁명으로 끝을 맺었다. 이때 의회는 새 왕을 추대하면서 왕관과 함께 '권리선언'을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 이 선언을 토대로 1689년 12월 16일 의회제정법이 공포되었다. 바로 '권리장전'이었다. 권리 장전은 제임스 2세의 불법 행위를 12개 항목으로 열거하고, 의회의 동의 없이 왕권으로 법을 만들거나 집행할 수 없으며,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거두거나 상비군을 징집하여 군대를 유지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 국민의 자유로운 청원권을 보장하고 의원 선거의 자유와 의회에서의 언론 자유를 보장하며, 지나친 보석금이나 벌금 및 형벌을 금지하는 내용 등을 규정했다. 윌리엄 3세는 왕권을 제한하는 권리장전이 달갑지 않았지만, 의회와 갈등을 일으키면 자칫 왕위까지 위태로울 수 있기에 순순히 승인했다. 권리장전은 법률로 왕권을 제약하고 국왕의 계승까지도 의회가 결정하는 의회 중심의 입헌 군주제를 확립시킨 계기가 되었다. 의회가 왕권과의 투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면서 국왕 한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대가 끝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