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꿈꾸는 사역 Ⅲ - 하나님 중심적인 가정은 행복합니다.
[사도행전 10:1-8]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He and all his family were devout and God-fearing; he gave generously to those in need and prayed to God regularly. (The Acts 10:2)
들어가는 이야기
남자들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함께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즐기는 상황입니다. 어떤 여자하고 결혼할지?
1. 차 안에서 사탕을 먹고 껍질을 핸드백에 넣는 여자
2. 남자 차에 그냥 놓고 내리는 여자
3. 창 밖에 버리는 여자.
답은? “예쁜 여자!”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자녀를 보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똑똑하고 잘난 아들은 - 나라의 아들이 되고요.
돈 잘 버는 아들은 - 장모의 아들이 되고,
해외가면 - 해외 동포 되고
카드빚 많고 백수는 - 내 아들이랍니다.
괜히 며느리 남편과 장모 사위 탐내지 말라고요.
그래요, 지금 여러분은 어떤 가족과 함께 사나요? 그래서 행복하신가요? 아니면 가족에 대한 아픔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시나요? 우리 중의 누가 한가지쯤 가족에 대한 아픔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작가 박완서 씨에 대한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남편과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보내고 너무 견디기 어려웠답니다. 그래서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있을 때,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이해인 수녀님의 권유로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다시 삶의 의욕을 찾게 된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의 위기를 이기고 나서 [대화]라는 산문집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난 지금도 88 올림픽이라면 몸이 떨리고 무서워요. 아주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평생을 함께한 남편을 잃고, 뒤이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을 잃었는데, 어떻게 된 게 세상은 환희에 들떠 있었어요. 어디로든 숨고 싶은데 정말 숨을 곳이 없더라고요. 지옥 같은 순간을 견디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았지만, 어딜 가든지, 누굴 만나든지, 온통 기쁘고 유쾌한 얼굴뿐이었어요.
…
“정말 세상이 다 적 같기도 하고 환상 같기도 했다니까요. 저 혼자만 철저히 소외되어 있었어요. 혼자 이렇게 괴롭다는 게, 세상이 모두 환희에 들떠 있는데, 그 분위기가 너무 견딜 수가 없었어요. 애도해 주러, 위로해 주러 찾아온 사람들 표정을 볼 때도 모두 기쁜 마음을 숨긴 채 저러고 있기가 얼마나 어려울까 하는 응어리진 생각만 들었죠.”
슬픔에 짓눌려 숨조차 쉬기 어려운 나날들, 절망의 늪에서 박완서를 건져 올린 건 뜻밖에도 ‘밥의 힘’이었다고 합니다.
이해인의 권유로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박완서. 두 달가량 식사다운 식사를 한 끼도 하지 못했던 그녀는 어느 날 식당에서 새어나오는 된장국 냄새를 맡게 됐습니다. 그 순간, 뱃속에서 꾸르륵 소리가 나면서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혹시나 토하지는 않을까, 걱정을 안고 떠먹은 밥. 그간 음식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속이 그날만은 거짓말처럼 소화를 시켰습니다.
“밥을 먹으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난, 너무 슬퍼서 밥도 굶고 고상하게 죽고 싶었는데, 이렇게 배가 고픈 걸 보니 아직 살아야겠구나. 아니, 살아서 내가 할 일이 더 남아 있는 모양이구나.”
묵묵히 듣던 이해인은 이 대목에서 그야말로 “위대한 밥의 힘”이라고 응수했습니다. 말미에 술회된 박완서의 고백은 냉혹한 현실에 지쳐 나자빠져도 우리가 살아가야 할 혹은 살만한 까닭을 짐작하게 한다고.
“돌아보면 일생 중의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가정적으로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비교적 순탄했어요... (중략)...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닌 장거리 레이스이기에 지금 현재만으로는 삶의 질을 측정할 수 없다는 것, 행복해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농후하다는 것, 끝까지 살아봐야만 평가가 가능하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묘미가 아닐는지.”
결국,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인생의 굴곡이 있습니다. 그 굴곡 한가운데 가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그러한 굴국 가운데 어떻게 감사와 행복을 누리고 살아가느냐는 것이지요. 어쩌면 끊임없이 회복되고 만들어져 가는 것이 가정의 모습이 아닐까요?
<연주듣기 - 만나교회 홈페이지 주일예배 동영상 보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고넬료의 가정
고넬료의 가정을 저는 행복한 가정의 모범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 아버지 고넬료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그에 대하여 “경건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 중심적인 가정이었다고 진술합니다.
이 시대가 여권이 신장하는 때이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가장이 신앙을 지키는 것보다 효과적인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7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영의 아들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말이 나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이 말씀을 통해서 보면 경건이란 한순간에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넬료가 경건했다는 것은 그의 삶을 통해 자녀에게 늘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것, 아니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힘썼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사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그 가정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되겠지요.
지난번 성지순례를 가면서 동행한 조남순 신현상 장로님의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청년 시절 성가대에서 봉사하는 자기를 최은희 닮았다고 청년회장이었던 장로님이 따라다니며 수천 통의 편지를 써서 6년 만에 결혼하게 되었답니다. 조남순 장로님은 그 편지를 가지고 시집을 갔어요. 결혼하면 그 편지대로 해 줄지 알았다고 하죠. 그런데 결혼하고 났더니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고 달라지더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급기야는 편지를 다 태워버리더랍니다. 당시 여행에서 가장 연장자였던 장로님 부부의 결론은 "여러분, 결혼하기 전에 한 이야기는 다 무효예요."
결혼 48년 만에 깨닫게 된 것이고, 지금 성지 순례를 하면서 한 번도 안 싸운 것이 기적이라고, 지금까지 무사하게 살아온 것이 은혜라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남편 장로님이 마이크를 이어받았습니다.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아내의 소원을 안다고, 당신이 장로다운 장로의 모습으로 사는 것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그래서 내가 장로다운 장로 되면 아내가 빨리 죽을까 봐 아직 이렇게 살고 있노라고, 그리고 지금까지 아내의 기도 덕으로 살고 있노라고.
평생 신앙 생활하는 동안 김우영 목사님 말씀이 “중간결산 하지 말라고” 그래서 말썽부리는 아들을 10년을 지키며 기도하고 나서 정말 하나님께서 축복하셨고 지금 여행을 보낸 준 아들이 그 아들이라고.
고난 없는 축복은 없다고, 문제없는 가정은 없다고, 중요한 것은 고난을 잘 관리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의 오장육부 중에는 꼭 약한 부분이 있듯이, 많은 축복은 약함 가운데서 주시는 것, 고난 가운데서 믿음을 주시고 축복을 주신다는 고백은 오랜 인생을 살아온 신앙인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고넬료의 가정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의 가정에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결론이 중요한 것이지요. 경건한 아버지와 더불어 온 가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결코, 중간 결산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우리 가족은 우리의 가정은 과정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의 가장 앞선 곳에 아버지가 서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온 가족이 믿음의 가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경건한 가정의 특징
오늘 본문에서 고넬료의 가정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2절을 보세요.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그가 경건하니까, 온 집이 함께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경외’라는 말을 영어 성경에서는 두 가지 단어로 표현합니다.
“He and all his family were devout and God-fearing”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헌신과 경외함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He had led everyone in his house to live worshipfully before God”
두려워한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겠습니까? 의식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나님 앞에 서서 예배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등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께서 싫어하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실상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 예배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또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경건한 자”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을 “의식한다!”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예가 적절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자라던 시절에 학급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대개 저는 점심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밥을 먹은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쉬는 시간에 열심히 먹는데, 후다닥 치우는 것은 “떴다!”라는 말이지요. 담임선생님이 오신다는 말입니다.
담임선생님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아이들을 인터넷의 해로운 환경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컴퓨터를 거실에 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부모들이 볼 수 있는 의식 속에서 아이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경건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언제든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지요.
아드리안 로저스가 쓴 [성공하는 가정을 위한 10계명]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파트타임이 아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저 사람과 닮았다고 말할 수 있고, 이 의자가 저 의자와 비슷하고, 이 피아노와 저 피아노가 똑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어느 것이나 혹은 어느 분과도 비교할 수 없다.
만일 한 여인이 방에 들어갔는데, 남편이 다른 여인을 포옹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하자.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잠깐만 기다려요. 오해하지 말아요.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말해 줄게요. 이 여인은 매우 아름다워서 당신을 보는 듯해요. 이 여인을 포옹하면서 당신 생각을 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미국 전역을 뒤져봐도 이런 말에 동의할 여인은 내 아내 조이스를 포함해 한 명도 없다. 만일 우리가 어떤 물건을 숭배하면서 '주님, 이 물건을 보면 주님 생각이 나기 때문에 숭배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진정으로 숭배하는 것이지요!'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이 말을 받아들이실까?
이런 생각을 마음과 정신에 특별히 담아 두라. 하나님은 하나님 되심을 독점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분의 보좌는 둘이 아니다. 하나님은 파트타임이 아니시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다. 당신은 그분 외에 다른 어떤 것이나 혹은 어느 분을 숭배할 권리가 없다. 마르틴 루터는 ‘우상이란 마음을 붙잡고 있는 것이나 의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경외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섬기는 것, 하나님보다 더 가치를 두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라고 요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를, 우리의 모든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정이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내 곁에, 그리고 우리 가정에 계심을 확신하는 사람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정이 되어야 행복합니다.
남자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죄를 지을 기회가 많이 있습니까? 저는 태국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한 세미나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태국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는데, 글쎄, 밤에 나왔더니 별천지더라고요. 여기에서 표현은 다 못 하겠지만, 자기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지 모릅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지금 내 곁에 계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겠습니까?
우리의 자녀가 밖에 나가서 무슨 일을 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의식하고 살 수 있다면, 그 아이들이 과연 죄에 그렇게 쉽게 빠져들까요?
하나님 중심적인 가정이 왜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아시겠습니까?
아이들이 공부를 더 하는 것보다, 아빠가 나가서 돈을 더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입니다.
이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괜히 내 마음대로 했다가 질책을 듣거나 책임 추궁을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여기까지만 생각을 해도 신앙생활이란 참으로 실제적이라는 생각이 들지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에 힘썼다!” - “규칙적으로 기도했다!”라는 표현입니다.
사실 돈이 있다고 구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구제란 신앙에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인데, 고넬료가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구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대화란, “communicate”는 상대방과의 서로 교통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서로 이해하게 됩니다. 이해가 되면 서로가 바라는 것을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규칙적인 기도란,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역시 우리의 필요를 따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적인 가정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일한 관심을 둘 때입니다. 고넬료는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생활을 하게 될 때, 많은 구제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동일한 관심을 두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일이 고넬료 혼자 가능한 일이었겠습니까? 온 가족이 함께 기도하므로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그 일 때문에 가정에 불화가 생긴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 중심적인 가정이 된다는 것은 가족이 함께 동일한 마음을 품는 것이지요, 동일하게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쓰임을 받는 일이지요.
행복한 가정 만들기
미국의 켄터키 주에 '헤이즐 패리스'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의 아들이 자꾸 못된 짓을 하자 그는 어린 아들의 버릇을 고치기 위하여 한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는 아들이 잘못을 했을 때마다 그를 데리고 가서 문설주에다 못 한 개씩을 박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고 그때마다 한 개씩 박은 못은 얼마 가지 않아서 소나무 가지에 솔잎처럼 못이 총총 박혔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무심코 문설주를 바라보니 그곳에 박혀있는 못의 숫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많은 잘못을 했나?"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어떻게 하면 이 많은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겠느냐고 애원하였습니다. 이때, 패리스는 그 아들에게 좋은 일 한 가지를 할 때마다 못 하나씩을 빼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아들은 문설주의 못을 빼기 위해 착한 일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얼마 안 가서 그 문설주에 박힌 못은 다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못 자국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못 자국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 아들은 후에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일을 회상하였습니다.
"지금도 문설주의 못 자국을 볼 때마다 부끄럽고 죄를 짓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하게 됩니다."
“행복한 가정 만들기 프로젝트”
어쩌면 우리 교회가 하는 가정 사역을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모두 완전한 사람들이라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하죠. 우리가 미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었더라면 좋을 텐데, 우리에게는 이미 너무나 많은 실수가 있지요.
어쩌면 가정이 회복되는 과정이란 못을 하나하나 뽑으면서 우리의 상처를 보는 것이 아닐까요? 그 상처 때문에 절망하기보다는 그 상처 하나하나를 보듬어 가는 과정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원합니다.
만나교회에는 이런 가정 사역이 있습니다.
“희년학교”
“Mother Wise"
"시어머니 장모학교“
“결혼 예배학교”
“출산 예비학교”
“젊은 부부학교”
정말 행복한 가정은 어떤 가정일까요? 하나님을 중심으로 동일한 생각을 하는 가정보다 행복한 가정이 있을까요? 공부를 잘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가장이 돌을 잘 버는 것이 가정을 윤택하게 그리고 편리하게 만들어 줄지는 모르지만,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주지는 못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가정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지금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 하나를 들으라면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을 듭니다. 몇 년 전 아들인 프랭클린 그레이엄이 아버지의 사역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런데 잘 알려진 대로 그 아들은 망나니였습니다. 술을 먹고 다니면서 말썽을 부리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찾으셔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도록 부르셨습니다.
벌써 많이 알려진 일이지만, 소망 교회 곽선희 목사님은 아들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그 아들 곽요셉 목사를 만나서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버지 곽 목사님이 가장 감격스러웠던 순간이 아들 요셉 목사가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목사 안수를 받을 때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분당 예수 소망교회에서 목회를 잘하고 계시지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경건한 아버지, 경건한 가정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고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선한 영향력을 끝까지 미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제가 왜 “회복”이라는 말을 썼을까요?
우리 가정이 상처가 없이 늘 온전하게, 평탄하게 가는 것이 아니라, 경건함이 그 상처를 치유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상처를 하나하나 치유해 나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회복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가장 큰 축복
지금까지 언급한 고넬료 가정의 경건함을 기억하시지요? 그의 경건함이 기도하게 했고, 구제하게 했고.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본문 4절에 보니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그의 행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예배하는 그의 삶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것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에 놀라운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환상 중에 욥바에 있는 시몬 베드로를 청하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자신의 하인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가 보낸 하인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7절을 보세요.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고넬료가 정말로 훌륭한 것은 자신의 가정만이 아니라 하인들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필립 얀시가 쓴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이라는 책에서 폴 투르니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혼자 할 수 없는 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결론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며칠 전 우연히 기독교 방송에서 최일도 목사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신학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기도원에서 성경을 베개 삼아 자다가 어떤 성도에게 무척 혼났다고 합니다. 어떻게 성경을 머리에 베고 잘 수 있느냐고? 거룩하지 못하게.
그런데 다음 날 기도원 예배당에 들어가는데 어떤 사람이 넘어져 피를 흘리고 쓰러졌는데 그 사람이 그냥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환자를 데리고 병원에 갔죠.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내가 지금 이 사람을 데리고 병원에 가는 것도 예배요, 기도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기 위해 예배자로서의 경건함을 상실하는 것이 “위선”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권세를 가진 사람 중에 예배를 드리면서, 자기가 데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배자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고넬료는 그의 삶을 통해 자신이 데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경건의 모습을 보여 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경건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은 환상 중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한 모습입니다. 5절 말씀,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라는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여 사도로 사용하시는 사람 베드로는 유대 사람입니다. 그는 그렇게 교육을 많이 받거나 고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셨기 때문에 명령에 따라 그를 청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종을 바라보는 시각” 이것이 또 하나님의 귀한 가정을 만들어내는 모습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읽지 않았지만, 사도행전 10장 25절에 보면,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교역자와의 좋은 관계야말로 가정의 큰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가정의 전통 중의 제일 아름다운 것이 목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아이가 커서 결혼주례를 받고, 또 그 자식이 세례를 받는 것, 그리고 우리 부모님의 장례를 그 목사님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신앙의 전통입니다. 그것이 기쁨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대목입니다. 어떤 장로님은 그런 기도를 하셨답니다.
“내가 죽을 때 우리 목사님이 꼭 이 자리에 있게 해 달라고.”
주의 종을 존중하고 가정에서 필요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신앙에 유익합니다. 이것은 인격을 보거나 학식을 보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맡은 이유입니다.
사실 고넬료와 베드로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넬료가 귀족이라면 베드로는 천민입니다. 고넬료는 지배국의 고위층이요 베드로는 피지배국의 어부였습니다. 고넬료가 경건하며 좋은 성격의 소유자였다면, 베드로는 다혈질의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넬료에게 그 베드로를 사모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민수기 6장 22-27절까지 보면 제사장의 축복권이 나와 있습니다.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제사장이 축복하는 곳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생각이 바뀐 사람입니다. 교인 집을 심방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이고, 지금 교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깨닫게 된 사람입니다.
주의 종이 고넬료의 집에 임하므로 일어난 일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10장 47-48절을 보세요.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출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살아생전 우리 모든 가족이 구원받는 백성이 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살아생전 하나님의 축복을 주의 종을 통해 받고, 그 가정에 유하기를 좋아하는 가정이 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종종 합니다. 목회자를 섬기는 것은 목회자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녀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그래서 목회자인 제가 두려운 것입니다.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늘 부담스러운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자격과 능력으로 된다면 어떻게 제가 견딜 수 있겠습니까?
노력은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주의 종 된 것을 기꺼이 감사하고 누릴 수 있는 것, 여러분이 자격으로 섬기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아가려는 종들을 섬기는 마음이 아름다운 교회와 가정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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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