恐慌(공황)에 빠진 공수부대, ‘최후의 전투’에 임하다-
[공수부대 장교가 체험한 光州사태] 거의 알려지지 않은, 5월21일 오후의 금남로 앞
대치상황을 직접 그려보았다
‘죽음의 소리’, ‘구원의 소리’
전남도청 앞 발포사건도 그러합니다. 시민에 대한 무자비한 조준사격이라는 관점도 있고 갑작스러운 폭도들의 공격으로 국가에서 파견된 군인들이
죽어난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그날 울린 총소리가 시민의 생명을 빼앗은 것일 수도 있지만, 저의 할머니 귀엔 외손자의 목숨을 구한 구원의
종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정말 종소리에 점 하나를 찍으면 총소리가 되는 묘한 울림이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5·18에 대한 광주 시민의 심리적 자부심의 근거는 10만 이상의 군중의 결집해 시위한 점과 200여 명의 사상자에 대한 책임 요구로부터
나온다고 봅니다. 하지만 5월21일 발포사건에서 발포 책임자를 찾을 수 없다는 조사결과가 도청 앞 발포 사건의 정황을 한마디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달리 말해 對峙(대치)의 긴장을 깨뜨린 후 군인을 깔아뭉개고 사태의 판을 키운 건 폭도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라
생각합니다.
즉, 200여 명 사상자가 발생한 직접 원인과 책임은 화염병을 던지고 차량 공격을 시도한 폭도들의 경솔함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면 발포 책임자와 발포자를 찾아내 처벌하여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5월21일 오후의 금남로 앞 상황
그러나 천천히 보면 그 당시 차량
공격이 없었어도 시위대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을 것이지만, 반대로 방어사격이 없었다면 다수 공수부대원의 피해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차이가 대량
인명손실에 대한 책임소재를 가릴 수 있는 부분입니다.
‘궁지에 몰린 공수부대원의 이유 없는 총질에, 분노한 군중이 무장 대응으로 맞서는 용기’라든지 ‘어떻게 군인이 민간인에게 총질할 수가
있는가’하는 것들은, 시위대와 공수부대원 간에 최전선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데서 오는 반응입니다.
의아한 것은 그 주위엔 제법 많은 수의 내·외신 기자가 있었는데, 중요한 현장인 5월21일 오후 1~2시를 담은 현장 사진이 한 장도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후 1시 상황을 기억에 의존해 다음과 같이 그려봤습니다. 개략도이기에 생략된 부분이 없진 않지만 상상화는 아닙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전날(5월20일) 사진이나 5월21일 오전 사진보다 더 정확한 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남로는 중심도로고 兩(양) 옆에는 많은 좁은 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차량이나 인원이 쉽게 모이고 사라질 수 있습니다. 차량시위 때도
뒤에 있는 차들은 돌아 앞쪽으로 이동하곤 했습니다. 장갑차를 비롯한 군용 트럭들이 제일 나중에 도착했음에도, 맨 앞쪽으로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옆 도로를 통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전남도청 앞은 분수대를 중심으로 한 로터리이기에 장갑차가 돌진한 다음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제자리로 온 뒤
재차 돌진했습니다.
5·18기념재단이 주장하는 ‘10시30분에 실탄 받은 대원 맨 앞으로 교체’, ‘애국가가 울리면서 일제사격’과
같은 내용이 사실인 양 계속 유지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차량 돌진 당시 공수부대의 혼란 상황을 공식적으론 ‘장갑차 1대 도청 광장으로 기습
진출’이라 썼는데, 이런 한 줄로 다 설명할 수 없는 恐慌(공황)이 공수부대 내부에 있었습니다.
공수부대를 휩쓴 10만의 격랑
한 예로 62대대 5지역대
6중대장이 심각한 위협을 느낀 나머지 民家(민가)로 잠입 피신한 적이 있습니다. 이후 약 3주간 광주 시민이 그를 보살펴 주었고 광주가 완전히
평정된 뒤에 부대로 복귀하게 됩니다. 또 병사 1명은 무등산 軍부대로 피신했다가 1주일 뒤에 복귀했습니다. “장갑차 한 대가 기습 진출했다”는
내용과 “중대장과 병사가 현장을 이탈했다”라고 하기보다는 이미 사기가 瀕死(빈사) 상태에 이른 시점에 10만 명의 激浪(격랑)이 쓰나미처럼
공수부대를 쓸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그들이 느꼈던 공포와 혼란에 대해 “이게 무슨 당나라 군대야?”라고 이 비웃을 수만은 없을 겁니다. 이와 관련해 상부에선 戰場(전장)
이탈이나 지휘 소홀에 대해 책임 추궁이나 처벌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군인들이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불가항력적 상황을 참작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1시30분경 차량 돌진이 뜸해진 가운데 1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시위대 중 한 명이 두 팔로 욕을 만들어 하자 누군가 사격을 해
고꾸라졌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기어 나와 쓰러진 사람을 부축해 들어갔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누구는 그런
非이성적인 행동은 自衛(자위)를 넘어선 범죄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총을 쏘고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선생, 사람 죽여 봤어요?”
제가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일입니다. 아버지뻘 되는 윤리 선생님이 저에게 묻습니다.
“이 선생, 광주
다녀왔죠.”
“예.”
“사람 죽여 봤어요?”
“선생님이라면 그런 경우 죽이겠습니까?
“아니, 제가 왜
죽여요?
“선생님이 안 죽일 거라면, 저는 왜 죽인다고 생각하세요?”
“아이! 그때 사람이 많이 죽었다니까 그러는 거죠.”
많은 사람은 자신은 善하고 이성적이어서 그런 상황에서 객관적 입장을 견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막상 현실에 처하면 생각과는 달리
혼돈의 연속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시 모두는 그 자리에 각자의 맡은 역할에 충실한 것이다.
점차 시민들이 敵으로 보여…
5월21일 오후 공수부대는 수협 빌딩에서 조선大로 이동하면서 작은 골목길을 건너면서도 위협사격을 하며 철수합니다. 몇몇 대원들의 공포와
분노가 서린 총질이었으나, 막는다고 시민들이 들을 단계는 이미 지난 뒤였습니다. 그건 광주 시민을 시민에서 폭도, 폭도에서 敵으로 간주하는
순간처럼 보였습니다.
저녁을 먹고 조선大를 이탈한 후 안전지역을 향해 출발했지만, 목적지의 地名(지명)도 좌표도 몰랐습니다. 대대 작전참모가 지도 한 장 가지고
자기만 따라오라는 데, 그것도 밤에 산길을 1열 종대로 300여 명이 이동하는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단지 2~3시간 행군하면 도달할
거리라고 해서 군장도 대충 꾸려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습니다.
저녁 10시 쯤, 계획에 따르면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야 할 시간임에도 行軍(행군)이라기보다는 멈춰 대기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 탓에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제 바로 앞의 병사가 총을 배낭에 걸어둔 채 앉다가 실탄이 장전된 총이 땅에 닿는 충격으로 발사되었습니다.
내 귀에서 1m 정도 거리에서 하늘로 발사된 총소리에 근처에 있었던 대원 모두가 놀랐습니다. 우리의 위치가 폭로되자 잠시 후 산 아래서
차량 소리가 나더니 우리 쪽을 향해 기관총을 무작위로 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멀리 있어 보이지 않았기에 應射(응사)는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폭도들의 차량이 철수한 뒤 행군이 계속되었으나, 그건 행군이라기보다는 조별 각개 약진이었습니다. 목적지도 모르는 밤길 기차놀이는 작전참모와
대대장님마저 각각 분산되었습니다.
敵이 추적해오는 긴박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주변의 敵이 어디쯤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행동은 제약이 많았습니다. 또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이유는 낮에 있었던 발포로 인한 당혹스러웠던 충격이 다 가시지 않은 탓인 듯했습니다. 대대장님도 본인이 월남전도 참전해 봤지만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 겪는다고 했습니다.
피신가던 학생들
개인적으론 이날의 철수과정이 광주에서 수행한 작전 중 가장 미숙하고 부끄러운 작전으로 기억됩니다. 결국 2~3시간이면 갈 수 있다는 길을
자정을 넘어서야 도착했습니다. 물론 도착한 곳이 원래 계획한 곳에 제대로 온 것인지 누구도 자신이 없었습니다. 묘지 근처에서 눈을 붙이다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5월22일 아침이 되자 주변이 갑자기 소란해졌습니다. 두 명의 청소년이 멈춰 서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논을 가로질러 도망을 갔고, 대원 한
명이 따라갔습니다. 잠시 후 앞쪽에 숙영하던 대원이 한 발을 쏘았고, 달아나던 한 명이 쓰러지자, 그 바람에 놀란 나머지 한 명이 도망을 포기한
후 생포되어 대대장님 앞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누가 봐도 고등학생이기에 대대장님의 간단한 심문이 있었던 후 제가 이것저것 물어보았습니다.
그들은 친구 사이로 광주가 안전치 않다고 판단해 친척 집에 피신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운이 없게도 야산의 군인들 숙영지 앞을 지나다
멈추라는 소리에 당황해 도망가다 당한 경우였습니다. 책가방 속에는 수학 연습장과 《정통 종합 영어》 책이 있었는데 가지런히 정리된 수학 연습장을
보니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생존한 학생을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 같이 이동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로 금방 친해졌습니다. 학생이 자발적으로 군장도
들어주고 산길을 나온 후 오후 늦게 안전 지역인 헬기장에서 헤어졌습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대결
광주 비행장에 도착해서 며칠 간 휴식과 정비를 취했습니다. 비행기 격납고 속이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지붕이 있고 평평한 바닥에서 자는 잠이라
편히 있을 수 있었고 훈련도 간단한 구보 이외는 경계 근무조차 없었기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습니다.
도청 진압이 결정되자 11여단에선 1개 지역대만 차출되었습니다. 참여 지역대는 명령에 의한 지정이 아니라 9개 지역대장 사이에 제비뽑기로
결정되었다고 들었습니다. 1개 지역대 100여 명 生死가 걸린 문제가 이런 식으로 정해졌다는 게 인생이고 현실인가 봅니다.
작전
당일 광주 시민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이유는 알겠지만, 공수부대가 왜 보병부대 옷을 입고 진압작전을 해야 했는지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작전은 도청을 점령한 폭도를 敵으로 규정한 ‘敵과의 전투’였습니다. 왜냐하면 시민군이 소총에 조준경을 장착, 조준 사격을 감행했기
때문입니다.
그 실제 결과도 프로와 아마추어의 대결처럼 일방적으로 끝났습니다. 진압 전날 선무작전을 통해 내일 새벽에 계엄군이
들어올 것이란 걸 다 알고 있었기에 거기에 남은 사람은 죽기를 각오한 자들입니다. 그들의 시민군에 대한 충정과 生을 포기한 결단의 비장감은
이해되지만, 역사에 있어 승자와 패자가 있어야 한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군악대의 합주가 울려 퍼지는 송정리역에서 해태종합선물을 1인당 한 세트씩 副賞(부상)으로 받고 서울의 국민대학교로 재배치되었습니다. 저도
면회 온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정강이에는 던진 돌에 까진 상처가 있으며 내 마음 속엔 광주에서 죽었던 대원이 운송 트럭
위에서 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비를 맞으며 흔들리고 있었던 장면이 남아 있습니다.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5월21일 도청 앞 그 긴장된 대치 국면에서 화염병 하나가 균형을 깼습니다. 이로 인해 차량 돌진과 발포가 시작됐고, 쌍방의 무력 사용이
5월27일 도청 진압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200여 명 희생을 줄일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는 화염병 던지기 직전까지였다고 봅니다.
시민들이, 과격 진압에도 불구하고 공수부대의 평화적인 철수를 허용했다면 대자대비한 사랑으로 충만한 ‘평화 민주화 운동’이라 불려도 어색치
않았을 겁니다. 그런 면에선 차량 돌진 때 피신해 들어간 공수부대원을 인도적 차원에서 몇 주씩이나 보호해준 따뜻한 마음씨가 광주의 진정한 자랑이
아닐까 합니다.
5·18을 치르고 35년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갖게 된 것에 공수부대의 일원으로서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과 동시에, 5·18이
광주의 恨으로 남아 대한민국의 화합과 발전에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리라는 말씀을 동시에 드려봅니다. 저는 광주가 민주화의 聖地(성지)로 자부하는
정치적인 도시보다는 南道(남도)의 멋과 맛을 간직한 예술의 本鄕(본향)으로 되돌아오길 바라는 맘이 간절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