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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정보 알림 공간 스크랩 국민의 武器/ 조갑제닷컴
鶴山 추천 0 조회 242 14.01.18 22: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부림사건에 無罪선고하였던 판사의 후회

 

 

서석구 변호사의 고백, "그때는 나도 좌경 판사였다."

 

趙甲濟   

 

 

 

행동적 우파 운동가인 대구의 徐錫九(서석구) 변호사는 2차 부림사건 재판장으로서 일부 피고인들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던 이다. 이 판결은 2심에서 뒤집어졌고, 3심에서도 유죄로 확정되었다. 徐 변호사는 자신이 판결 당시 좌편향 되어 있었다면서 ‘잘못된 판단결’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최근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렸다.
   <영화 ‘변호인’이 9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 영화는 1980년대 초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치에 뛰어든 부림사건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사실과 허구를 혼합하기 때문에 변호인 영화에도 사실과 허구가 섞여 있는데다가 부림사건 관련자들이 읽은 책들이 4배나 더 많이 팔린 것은 영화의 영향이라고 보도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부림사건 피의자들을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절대선 민주투사로 우상화하고, 수사기관과 사법부와 정권을 절대악으로 구분 극대화하는 영화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영화 변호인은 첫머리에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라고 밝혔지만 보탠 허구가 이 영화를 더 극적인 감동과 충격을 주도록 영상화한 것임을 깨닫는 관객이 얼마나 될까?
   문제는 과연 극단적인 양극화 논리가 진실인가 하는 데 있다. 필자가 부산지방법원 판사시절 노무현 변호사는 판사실에 들락거리며 로비활동을 벌이는 그런 세속적인 변호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비교적 좋은 변호사라고 생각했고 그가 그런 변호사를 계속했더라면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남한은 다 반역이고 북한은 다 애국이라는 이석기, 태극기와 애국가를 부정하면서 赤旗歌(적기가)를 부른 이석기와 혁명조직 RO, 북한의 대남전략을 도와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전복하려 한 이석기를 사면 복권시켜 대한민국을 위기에 빠뜨린 노무현 대통령의 진정한 모습은 영화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필자는 두 번째 기소된 부림사건을 담당한 재판장이었다. 첫번째 기소된 부림사건은 다른 판사가 담당하여 모두 유죄판결 실형을 선고했다. 두 번째 기소된 사건에 관하여 필자는,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이모 피고인은 징역 10년, 정모 피고인, 설모 피고인에게 5년이 각 구형된 사건에 대하여 이모 피고인 징역 1년, 정 모 피고인에게는 집행유예, 설모 피고인에게는 선고유예를 선고하였다. 국가보안법 위반 부분에 대하여는 무죄, 계엄법과 집시법 위반에 대하여는 일부 무죄를 선고,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설모 피고인에게 선고유예를 선고한 것은 그녀의 오빠인지 남동생인지가 실형선고를 받은 사정도 감안했다.
   그 뒤 필자를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우연히 만난 노무현 변호사는 국가보안법 무죄판결을 칭찬하면서 그의 요트에 나를 태워주기도 했다.
   그들이 본 이념서적이 다소 과격한 부분도 있었지만,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에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이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에 감명을 받을 정도로 과도하게 좌편향적이었던 필자는, 그들은 용공 종북적이라기보다는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투사라는 인식을 상당 부분 가지고 있었던 탓에 파격적인 판결을 선고하게 되었다.>
   서석구 변호사는 다른 글에서 <무죄 판결의 결과가 국가안보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에 도움을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마저 들었다>고 했다. 무죄판결을 내릴 때 이미 서 판사는 좌경의식화 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편협한 독서 때문이었다고 한다.
   <민중문학, 종속이론, 구성체 이론, 사회주의, 아나키즘, 無(무)교회주의, 생태주의 등에 매력을 느낀 결과 이와 배치되는 사상과의 조화를 거부하고 현실에 대한 극단적인 저항의 형태로 스스로를 의식화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서석구 변호사는 판사직을 그만두고 좌경 운동권 변론을 하면서 막연한 기대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고 고백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 중반까지 교도소에서 만난 운동권 대부분은 남한정권 = 괴뢰정권, 남한기업 = 매판자본, 남한정권과 남한기업 타도, 북한정권 = 자주정권이라는 이른바 김일성 주사파라는 것을 깨닫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운동권이 좌편향인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지독한 김일성 주사파인 줄 몰랐던 필자는 취미가 독서인지라 다양한 서적을 읽으면서 운동권의 지독한 용공 종북 편향에 실망하게 되자 운동권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기대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영화대사도 기본적인 상식마저 간과하고 있다. 가석방은 판사가 해주는 것이 아님에도 변호인들이 판사가 가석방을 해주는 조건으로 형량을 받아 들였다는 둥의 대사는 납득할 수 없다. 고문현장에 군의관이 참관해서 신체를 살폈다는 부분도 과장되었다. 부림사건 국가보안법 부분 무죄판결을 선고했던 판사가 왜 운동권과 결별하고 자유민주주의와 북한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변호사가 되었는지에 관한 장면도 없다.
   영화 변호인을 감동적이라고 하는 문재인 의원과 민주당은 지난 총선과 대선 때 이석기 등 통합진보당과 야권연대 또는 공동정책발표를 하여 이석기와 같은 종북세력을 국회에 끌어들인 데 대하여는 영화 어디에도 自認(자인)하는 그런 장면이 없다.>
  
  
   노무현은 부림사건을 변호하면서 좌경화한 데 반하여 서석구 판사는 무죄 판결을 내린 뒤 좌경 운동권에 대한 懷疑(회의)를 품게 되어 두 법률가는 상반된 길을 걷게 되었다. 徐 변호사는 자신이 더 이상 왼쪽으로 가지 않도록 잡아 준 것은 기독교 신앙이었다고 했다. 서 변호사는 천주교 평신도인데 이른바 정의구현 사제단의 선동적 행태를 비판하는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 2014-01-18, 21:04 ]

 

 

 

 

청와대 이발사가 본 박정희

 

 

趙甲濟   

 

 

 

朴正熙의 대구사범 동기인 김병희 교수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1961년 5·16 군사혁명 직후 만난 친구 朴正熙를 이렇게 묘사했다.
  
   <내가 최고회의 의장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첫 인상은 그 방이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치 野戰사령관이 있는 천막 속을 방불케 하였다. 특히 그가 앉은 의자는 길가에서 구두 닦는 아이들 앞에 놓인 나무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피우는 담배는 국산 ‘아리랑’이었다. 당시에 내가 피우던 담배는 국산으로는 최고급품인 ‘청자’였고 때로는 선물로 받은 양담배였다.
  
   하루는 그 방에 들어갔더니 마침 점심을 먹고 있는데 10원짜리 냄비우동 한 사발과 노랑 무 서너 조각이 전부였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10원짜리 우동을 50그릇이나 살 수 있는 500원짜리 고급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朴正熙가 남긴 벽돌 한 장, 해어진 혁대, 파리채
  
   1979년 10·26 사건 며칠 뒤 군의관 정규형 대위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얼굴을 보고도 왜 각하인줄 몰랐는가"란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했다.
  
   "병원에 들어왔을 때는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고 감시자들이 응급 처지중에도 자꾸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평범한 세이코였고 넥타이 핀의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해져 있었습니다.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약간 있어 50여세로 보았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각하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死後 집무실을 조사하던 청와대 직원들은 집무실 화장실 물통에서 벽돌 한 장, 2층 침실 화장실 물통에서 벽돌 한 장을 발견하였다. 물을 아끼려고 그렇게 넣어놓은 것이었다. 1층 집무실에는 부채와 파리채도 있었다. 여름에도 청와대는 기름을 아낀다고 냉방을 하지 않아 대통령은 문을 열어놓고 더위를 식혔다. 창문을 통하여 파리가 들어오면 파리채를 휘두르고 가끔 부채를 흔들었다.
  
  
  
   청와대 이발사 朴秀雄씨가 본 인간 朴正熙(월간조선에서 발췌)
  
   ―朴대통령께서 이발관을 찾으실 때 정장 차림으로 옵니까?
   『아닙니다. 朴대통령께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하얀 러닝 셔츠 차림에다 허리띠를 맨 바지의 윗부분을 한 번 아래로 접고 오십니다. 바지의 허리 부분이 헐렁할 때 허리띠를 맨 부분을 한 번 접으면 어느 정도 맞지 않습니까?
   朴대통령의 러닝 셔츠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여러 번 봤습니다. 대통령이 구멍 난 러닝 셔츠를 입고 계셨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기자는 갑작스럽게 朴씨로부터 逆질문을 받는 바람에 조금은 당황스러워 「그냥 계속하시죠」라고 넘겼다)
   허리띠도 얼마나 오래 사용하셨던지 구멍이 새끼손가락 한 마디는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날 「어르신, 이제 허리띠를 좀 바꾸시지요」라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朴대통령께서 「이 사람아, 이것도 아주 편해. 몇 년은 더 충분히 사용할 수 있어」라며 웃으시더군요』
   ―朴正熙 대통령은 아랫사람들에게 어떤 상관이었습니까?
   『朴대통령은 아랫사람들 앞에서도 예의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부속실로 하여금 이발하러 가겠다는 연락을 하도록 한 뒤 5분 정도만 늦어질 것 같아도 직접 이발관에 오셔서 「朴군, 지금 회의가 끝나지 않아서 그런데 조금만 기다리래이」 하시면서 양해를 구하십니다. 한 번은 연락을 받은 뒤 40여 분 만에 이발을 했는데, 이때에도 朴대통령께서 중간에 이발관으로 오셔서 「미안해서 우짜노. 朴군, 일 마치고 바로 올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라고 하시더군요. 도리어 제가 미안해 「어르신 저는 여기에 근무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생각하시지 말고 충분히 집무 보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리자 「그래 고맙대이」라며 특유의 옅은 미소를 지으시더군요. 그리고 원래 나이가 들면 방귀나 트림이 본인도 모르게 자주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朴대통령을 모시면서 그분이 방귀나 트림을 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 2014-01-17, 21:26 ]

 

 

 

 

언론, 검사, 판사, 학자가 주도하는 정치

 

 

조선조 이후 오늘까지 언론의 도덕적 명분론은 항상 정치를 움직였다.

 

趙甲濟   

 

 

 

조선조 이후 오늘까지 언론의 도덕적 명분론은 항상 정치를 움직였다. 조선 시대엔 三司(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와 吏曹銓郞(이조전랑)과 士林(사림)이 언론과 여론을 주도, 정치를 이끌었다. 조선조의 정치구조와 언론의 생리는 오늘의 한국과 비슷하다.
  
   宣祖(선조) 이후의 지배 관료층을 배출한 士林은 조선조 開國(개국)을 반대한 유학자의 제자들이었다. 생래적으로 反체제적이고 大義名分論(대의명분론)이 강했으며 저항적이었다. 조선조에 살면서 조선조 開國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나 대한민국에 살면서 建國(건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심리는 비슷한데, 자해적이고 僞善的(위선적)인 도덕주의로 이어진다. 조선조의 엘리트들은 性理學(성리학:朱子學)을 교조적으로 섬겼다. 한국의 정치인과 언론인은 민주주의를 교조화한다. 조선 黨爭(당쟁)의 主무기는 주자학적 명분론이고, 三司와 吏曹銓郞이 조성한 언론과 탄핵이었다. 이들은 실용정신, 尙武(상무)정신, 自主정신과는 멀리 있었다.
  
   21세기 한국의 언론도 그 생리가 조선조와 비슷하다. 언론은 정치의 主題(주제)를 설정하는 힘이 있고, 폭로를 主무기로 삼으며, 보도경향은 反국가, 反기업, 反실용적, 反軍的, 도덕주의의 성향을 보인다. 조선시대 司諫院(사간원)의 역할을 언론이 맡고, 司憲府(사헌부) 역은 검찰이, 홍문관은 학계, 士林은 재야 운동권, 吏曹銓郞은 정권 내의 인사부서에 비견된다. 한국은 조선조처럼 지금도 언론, 검찰, 학자들이 정치를 좌우하는데 주제가 주로 명분론과 도덕논쟁이다. 이들이 實權을 행사하니 기업, 관료, 군대, 과학자, 기술자, 정부가 맥을 못춘다. 國力을 담당하는 기능을 약화시킨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 속의 언론이지만 가치관과 행태는 조선적(守舊的)이다. 조선조적 전통, 즉 명분론, 위선, 反체제성, 군사-경제-과학에 대한 無知(무지), 사대성, 교조성은 前근대적이므로 좌경이념과 통한다. 조선조는 생리가 좌경 정권으로서 600년에 걸치고, 대한민국 建國 이후 비로소 자유와 경쟁 등 우파적 가치관이 힘을 얻게 된다. 우파 60년, 좌파 600년인 셈이다. 우파의 뿌리는 약하고 좌파는 깊고 넓다. 북한정권은 조선조의 後續(후속) 편이다. 그러니 남한의 종북좌파 세력과 親緣性이 있다. 남북한의 좌파연합은 조선조의 수구적, 자폐적 명분론의 전통을 이어간다. 자유와 민주의 기치를 내건 우파는 개화-근대화 세력의 맥을 잇는데, 뿌리 깊은 봉건좌파적 세력 때문에 힘든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生理가 있는 것이다.
  
   언론, 검사, 판사, 학자가 주도하는 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살벌하고 메말라 생산성이 약하다.

[ 2014-01-17, 16:28 ]

 

 

 

'햇볕꼴통', 중앙일보 김영희

 

 

꼴통이란 말 젊잖치 못한 것 알면서도 씁니다. 용서해 주세요.

 

이희도(토론방)   

 

 

 

꼴통이란 말 젊잖치 못한 것 알면서도 씁니다. 용서해 주세요.
  
  중앙일보의 김영희가 지난번 "철지난 북풍"이란 칼럼으로 크게 망신을 당하더니 제 딴에는 만회를 하겠다는 욕심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래? 더지른다는 식이던지, "통일이 대박이려면"이란 노골적인 햇볕정책 옹호론을 다시 펼치고 나섰습니다.
  
  요지는 동서독 봐라, 서독이 주구장창 도와주다보니 동독이 무너지고 별탈없이 통일이 되지 않더냐 그러니 남재준식 통일 같은 헛소리말고 금강산이건 뭐건 다 퍼줘라 뭐 이런 요지 입니다. 이 정도면 논리적인 반박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햇볕 꼴통이라 부를수 밖에요. 그런데 이 꼴통에게 인내하면서 동서독과 남북한의 통일이 왜 다를 수 밖에 없는지 간단히 설명 해 보겠습니다.
  
  동독은 통일되기 전에 무너진다는 예상을 누구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대로 견고한 체제였던 것입니다. 김영희는 서독의 꾸준한 동방정책이 작용했다고 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입니다. 만약 미소의 냉전 체제가 유지 되었다면 동서독의 통일은 없었습니다. 그 이전에 소련의 고르바쵸프가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실행하게 되는데, 공산주의가 졌다는 일종의 선언이었습니다. 이 선언은 한마디로 대규모 홍수와 같은 것이어서 그동안 서독의 동방정책이란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던 제방이 이 페레스트로이카란 대규모 홍수를 맞아 맥없이 무너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역사적 대변혁이 없었으면 동독은 서독의 동방정책이란 햇볕아닌 물을 잔뜩 머금고 있을 지언정 무너지는 일은 없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남북한에도 적용되는 일이냐는 것을 따져봐야 합니다. 북한이란 제방은 겉으로 보기엔 금이 여기저기 가 있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무너질것으로 일찍부터 예상들 합니다. 그런데 이 위험해 보이는 제방은 동독이란 독일식 튼튼한 제방보다 더 오래 갑니다. 서독이 동독에 잔디에 물뿌리듯 했다면 남한은 햇볕이란 소방 호수를 통해 물을 대 주었습니다. 미소의 냉전 종식이란 홍수가 나도 끄덕없이 버팁니다. 왜 그렇습니까?
  
  토양이 틀려서 그런것입니다. 동독은 그야말로 공산주의 사회, 즉 흙으로 된 토양이어서 물기를 잔뜩 먹으면 제아무리 튼튼한 제방도 무너뜨리는 그런 구조였던 것입니다. 비온뒤 맥없이 무너진 축대들 많이 보셨을겁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흙이란 공산주의 말고 김씨 왕조에다가 주체라는 사이비 종교 식의 모래와 자갈이 섞여 있어 비가 오고 홍수가 나도 그 물을 잘 배수하는 바람에 겉으로는 위태한데 꿋꿋이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햇볕이란 소방호수로 제 아무리 물을 쏟아 부어도 밑바진 독에 물붓기였던 것이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북한이란 제방은 어떻게 무너집니까? 제방이나 축대 자체의 구조물이 우리가 너무도 잘 알다시피 지금 여기저기 금이 가고 형편없이 약화되어 그냥 무너지게 되어 있는 겁니다. 따라서 두가지 길이 있습니다. 무너지도록 기다리는냐? 아니면 무너 뜨리느냐 그것입니다. 남북한 국민, 인민들이 안전하게 미리 손을 쓰느냐 아니면 조금 피해가 있어도 체제내 쿠데타와 같은 충격으로 무너져 내리길 기다리는냐 그런 선택의 길인데, 현시국을 보면 스스로 무너지는 쪽이란 겁니다. 그래서들 중국 미국이 지금 야단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김영희 같은 늙은 꼴통 햇볕론자들 말고도 배명복, 권석천, 이훈범같은 젊은 꼴통 좌파들이 득시글한데가 중앙일보입니다. 거기다 송호근, 문정인, 박명림같은 좌파 외부 필진을 두고 있습니다. 저는 중앙일보의 이런 풍토를 삼성이 조장했다고 보고 있습니다만, 일종의 생존책이지요. 좌파 10년 집권 세월을 버틴 묘책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즉 좌파를 내세워 좌파의 화살을 비켜가는 이이제이의 묘수라면 묘수인게지요.
  
  또한 대한민국의 크고 작은 조직의 암이라 할 수 있는 호남 커넥션을 이 좌파 항상제로 잘 방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가다 이호철이 삼성 예찬론을 쓰고 김진이 보수의 입맛을 맞춰주는 서로 죽이 척척맞아 삼성의 갤럭시 스마트폰처럼 아주 훌륭합니다. 훌륭은 합니다만 자랑할만한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통일이 되면 김영희같은 헛소리꾼들을 단죄해야 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임진왜란 때 김성일이가 왜를 방문 하고나서도 전쟁은 없다고 사기친 것을 상기 해 보십시요. 조선 조정은 김성일을 능지처참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도 백성을 위하다 보니 그랬다고 봐줍니다. 김성일을 봐주는 데는 유성룡도 한몫을 하지요. 같은 파니까. 그리고 김성일은 퇴계의 수제자로서 성리학의 대가로서 아직도 추앙을 받습니다. 즉 공부 잘하면 나라를 전란에 빠뜨려도 봐주는 풍토가 생긴 것입니다. 좋은 대학 나오고 고시 패스하면 인생이 보장되는 것이 어디서 유래했겠습니까? 저는 여기에 조선의 망국의 씨앗이 숨어 있었고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 2014-01-17, 09:00 ]

 

 

 

 

영화에 의한 선동의 사례: '화려한 휴가의 화려한 조작'

 

 

노무현 대통령도 광주사태를 조작한 영화 관람.

 

趙甲濟   

 

 

 

'화려한 휴가'는 反軍감정, '변호인'은 검찰과 경찰에 대한 증오심을 심었다. 허구를 사실로 둔갑 시킨 선동꾼들에 넘어가는 순진한 국민들.
 

 

[趙甲濟의 심층취재] 당시 空輸대대장과 함께 본 영화「화려한 휴가」의「화려한 造作」
-反軍감정 확산에도 軍은 침묵-
전남도청 앞에서「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아무런 경고도 없이 무차별 집중 사격하는 공수부대원」(영화 장면)은 조작이다. 그날 공수부대는 시위대가 장갑차와 버스를 몰고 돌진하자 살기 위하여 조건반사적으로 사격했다. 전남도청 앞에서 11여단 61대대를 지휘했던 安富雄 대대장은 『만화 같다』고 했으나 영화는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했다』며 시작된다.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보기 싫었던 영화
「화려한 휴가」는 정말 보기 싫은 영화였다. 너무나 우호적인 언론보도를 통해서 영화의 의도와 내용이 알려져 버렸기 때문이다. 左派(좌파)-어용 언론뿐 아니라 정상적인 언론도 이 영화에 대해서는 好評(호평) 이외에 일체의 비평을 삼가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이 영화의 성격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金大中, 盧武鉉 대통령이 이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이 나를 냉담하게 만들었다. 大選을 앞두고 개봉되어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영화이니 공수부대를 惡으로, 시민들을 善으로 그렸을 것이 뻔하다. 한편으로는 하나의 의무감이 생겼다.

1980년 5월, 부산의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이던 필자가 광주사태(공식적으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리나 선입감을 배제하고 객관적 기술을 하기 위해서 이 기사에선 「광주사태」라고 표기한다)를 취재하러 가지 않으면 기자로서 죄를 지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생각이 났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의 評(평)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20代 직장여성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한숨과 눈물 훔치는 소리가 관람석에서 들리더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왜 공수부대가 야수처럼 변하여 잔학한 진압을 해야 했는지 그 영화로는 잘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이 이 영화를 보면 국군에 대해서 치를 떨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親韓派(친한파) 일본인은 이 영화를 두 번 보았다면서 다소 흥분해 있었다.

『저 나름대로 광주사태를 조사한 적이 있어 잘 알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화가 솟았습니다.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하는 것 같지만 사실을 왜곡한 데 대해서 화가 났습니다. 피해자의 입장에 서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공수부대의 잔혹상을 강조한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이 영화는 대한민국을 敵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애국가를 부르는 평화적 시위대에 대해서 집단발포하는 장면, 그건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기자는 혼자서 이 영화를 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황산벌」이 사실을 왜곡하고 역사를 戱畵化(희화화)했다고 비판하는 기사를 쓰도록 했던 나는 일부러 시간을 쪼개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영화를 볼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혼자서 보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과 같이 가서 보는 것이 마음이 좀 편할 듯했다. 同行(동행)할 사람을 생각하다가 安富雄(안부웅)이란 이름이 떠올랐다.


공수부대 대대장 출신과 영화관으로

安씨는, 1988년에 내가 月刊朝鮮 기자로서 「공수부대의 광주사태」(그해 7월호 게재)를 취재할 때 만난 공수 11여단 61대대장 출신이다. 1980년 5월21일 낮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와 트럭 등을 몰고 돌진해 오는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했을 때 그는 현장의 지휘관이었다. 「화려한 휴가」의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장면인 집단발포의 현장, 바로 거기에 있었던 실제 주인공이다. 고참 대령일 때 그를 만나 취재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가 격정적으로 쏟아 놓았던 이야기는 月刊朝鮮 기사에선 匿名(익명)의 증언으로 처리되었다.

1988년 가을, 국회의 광주사태 청문회 때 증인으로 불려나온 그는 내가 쓴 기사로 인해서 곤욕을 치렀다. 月刊朝鮮의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는 청문회 국회의원들의 교재가 되어 증인신문에 자주 인용되었다. 1995년 5·18 사건이 再수사될 때도 安씨는 여러 번 검찰에 불려가 신문을 받았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지휘관들 가운데 가장 많이 조사를 받은 이다. 그는 법정에 증인으로도 나와 당당하게 자신의 역할을 설명했다. 安씨는 광주사태의 핵심인 발포 경위를 조사할 때 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66세인 安富雄씨를 19년 만에 다시 만난 곳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한 교회 입구에서였다. 그는 내가 찾아온 의도를 묻지 않았는데도 알고 있었다.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제가 공수대대장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말입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았는데, 「군인들이 너무했더군」 하셔요. 제가 말했지요. 「아니 목사님, 그런 영화를 믿으십니까?」 그런데 저도 한번 영화를 보기는 해야겠는데 내키지 않아요』

『잘 되었군요. 우리 식사하고 같이 영화 보러 갑시다』

安富雄 예비역 대령은 서울 출생으로 갑종 출신 장교이다. 월남 전선에 두 번 파견되었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여단 대대장 중에 공수부대 경력이 가장 많다. 직업군인 출신답게 모양과 행동이 아직도 각이 진 느낌을 준다. 그는 『이제 잊을 만했는데 그 영화 때문에 또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남편이 뻘?륫ㅀ凱形ㅉ卉ㅏ?여러 번 불려다니는 데 신경을 쓰던 부인은 심장병을 얻었다고 한다.

『저는 지난 3년간 호스피스 일을 했습니다. 말기 암 환자들이 수용된 시설에 매일 나가서 죽어 가는 이들의 말동무를 했습니다. 저의 인생관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요사이는 교회 일을 돕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교회에서 색소폰 연습도 자주 합니다』

安씨는 검찰이 결론 내린 것을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趙선생도 잘 아시겠지만 광주에서는 발포명령이 없었습니다. 군인들이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돌진하는 시위대 트럭과 장갑차를 향해서 쏜 것이 발포의 시작입니다. 검찰이 그렇게 캐보았지만 발포 명령자는 찾아내지 못했지 않습니까』

우리 두 사람은 중국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영화관으로 갔다. 「화려한 휴가」의 다음 상영까지는 거의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단다. 그렇게 공을 들여 영화를 본다는 건 자존심이 상할 일이다. 다시 오기로 하고 헤어졌다.
영화「화려한 휴가」에서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유혈진압하는 장면.


감정 없는 살인기계
1996년 10월14일 12·12 및 5·17사건 항소심 2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안부웅 前 대대장(오른쪽). 왼쪽은 양대인 前 11공수여단 참모장.

그 다음 월요일 오후 기자와 安 前 대령은 「화려한 휴가」를 보았다. 공수부대를 「惡의 化身(화신)」 정도가 아니라 「살인기계」로 그린 영화였다. 반면 궐기한 광주시민 측의 인물들은 至高至善(지고지선)의 영웅이요, 천사들이었다. 너무 도식적 설정이어서 감동은 없었다.

공수부대가 몽둥이로 시민들을 두들기는 「퍽, 퍽」 소리가 일종의 영화음악이었다. 공수부대가 왜 이런 진압방식을 썼는지에 대해선 설명이 부족했지만, 조작이라고 볼 수는 없다. 광주사태 직후 계엄사가 발표한 檢屍(검시)조서상의 死因(사인)분류 통계가 있다.

165명의 사망자 중 18명이 타박상, 4명이 刺傷(자상)으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타박상은 주로 머리이다. 공수부대가 진압봉으로 시민들의 머리를 난타하고 찔러 죽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 모습을 본 온건한 광주시민들까지 화가 나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다가 나중엔 트럭·택시·버스·장갑차를 몰고 나와 軍警(군경)을 몰아붙였다. 시민들은, 5월21일 공수부대가 발포를 시작할 무렵엔 예비군 무기고 등을 습격하여 카빈·기관총·수류탄 등으로 무장하여 군인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화려한 휴가」는 그런 시각에서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선 공수부대원들이 야수 같지도 않고 기계처럼 보인다. 야수는 감정이라도 있는데 이 영화에 나오는 공수부대원들에게선 인간적 감정 반응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공수부대가 흥분하여 몽둥이질을 하게 된 것은 공수부대의 특권의식에다가 「계엄령下에서 민간인이 감히 군인들을 향해 돌을 던져?」라는 감정이 출발점이었다.

安富雄씨는 『釜馬사태식으로 공수부대가 나타나기만 하면 시위는 자동적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대항한다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그래서 시위 진압장비를 준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돌을 던지는 다수 시위대를 향하여 쏠 최루탄도 가져가지 않았고, 돌을 막아 줄 방패도 없었다. 머리를 보호하는 防石網(방석망)은 軍 수송반에서 엉성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 영화에선 시민을 추격하여 골목으로 들어온 공수부대원을 시민이 쏴 죽이고 때려 눕히는 장면이 나온다. 공수부대 장교 출신 시민이 빌딩 옥상에서 공수부대를 향해서 기관총 난사를 하는 장면도 있다. 그가 시민들에게 기관총 쏘는 교육을 한다. 트럭으로 무기고를 부수고 들어가 탈취하는 장면도 실감 난다. 이런 장면을 보고도 관객들은 「이렇게 해도 되나?」라는 문제의식이 별로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공수부대는 악당으로, 시민은 정의로운 사람들로 극적 대비를 이룬다.


나치 군대의 유태인 학살 같은 장면
영화「화려한 휴가」에서 공수부대가 집단발포하는 장면.

이 영화엔 공수부대의 사격을 유발한 시위대의 장갑차, 버스 돌진이 나오지 않는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가장 중요한 장면은 전남도청을 지키던 공수부대가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집단적으로 발포하여 수십 명(또는 수백 명)이 죽거나 다치는 대목이다. 나치 군대가 유태인을 집단학살하듯 하는 장면이다. 관객들이 공수부대를 살인집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 연출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은 이 장면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安富雄 예비역 대령에게 물었다.

『줄곧 피고인석에 앉은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까?』

『완전히 만화더군요. 그런 식의 발포명령을 내렸다면 감옥에 갔지 내가 무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을 향해서 발포하라고 명령했다면 부대원들이 나를 가만두었겠습니까? 부대원들 중엔 호남 출신도 많았는데.

그 영화에선 왜 「김대중을 석방하라」, 「최 돼지는 물러나라」는 구호는 안 나옵니까? 軍에서 장비를 지원해 준 것 같은데 왜 가만있는지 모르겠네요. 공수부대가 살인마가 되었는데』

다음날 국방부에 알아보니 軍에서 장비를 지원해 준 사실은 없다고 했다. 영화 제작사에서 각종 장비를 모형으로 만들어 썼다는 것이다. 軍에서는 영화사 측에 사실왜곡에 대해서 항의한 적도 없다고 한다.

이 영화는 도입부에서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했다」는 자막을 내보냈다. 집단발포 장면은 사실을 왜곡하는 정도가 아니라 터무니없이 造作(조작)한 것이다.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없는 내용을 극화」한 것이다.

첫째, 영화에서는 공수부대가 누군가로부터 사격명령을 받고 탄창을 M-16 소총에 끼운 뒤 무릎 쏴 자세를 취한 다음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아무런 경고도 없이 일제히 사격한다. 그날 전남도청 앞에서는 그런 사격도, 그런 사격 명령을 내린 장교도 없었다. 광주사태에 대해서 가장 정밀하게 조사했던 1995년의 서울지검과 국방부 검찰부도 「사격명령은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둘째, 공수부대의 발포는, 「시위대가 탈취한 장갑차를 몰고 군인들을 향하여 돌진해 공수부대원을 깔아 사망하게 한 사건을 계기로 자위적, 그리고 조건반사적 대응 차원에서 이뤄졌다」고 검찰은 밝히고 있다. 이때도 공수부대 중대장들에게만 15발씩 지급되고 일반 사병들에겐 실탄이 거의 지급되지 않은 상태였다.

셋째, 애국가를 부르는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공수부대가 집단 발포하는 장면은 공수부대가 대한민국에 대해서 발포하는 듯한 상징성을 풍긴다. 영화 관람자는 공수부대가 반란군이라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공수부대만 표적으로 삼은 저의는?

국방부는 이 장면에 대해서 영화사에 항의하고 국민들에게 『그런 일이 없었다』는 해명을 했어야 했다. 軍 장병들에게는 특별한 政訓(정훈)교육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공수부대의 난폭한 몽둥이 진압이 광주사태의 한 원인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실을 확대하여 공수부대를, 「동족을 무차별 사살하는 살인집단」으로 그릴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이 영화는 시작하기 전 「이 영화는 史實과 다릅니다」라는 주의를 주어야 할 터인데 거꾸로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했다」고 한 것은 2중의 왜곡이다. 국방장관은 영화를 보았다는 대통령을 찾아가 이 영화의 이 장면은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했어야 했다.

盧武鉉 대통령은 지난 9월1일 서울시내 영화관에서 김지운 감독, 기획시대 제작의 이 영화를 봤다고 한다. 극장 관계자에 따르면 대통령은 영화를 본 후 눈시울을 붉혔고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金大中 前 대통령도 이 영화를 보았는데, 오마이뉴스는 그가 유인택 기획시대 대표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했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관객이 얼마나 들었습니까?』(DJ)

『400만 조금 넘었습니다』(유인택)

『얼마나 더 들겠습니까?(DJ)

『700만~800만 정도 예상합니다』(유인택)

『좀더 노력해서 1000만 명이 됐으면 좋겠습니다』(DJ)

『어떤 장면이 기억에 남으셨습니까?』(유인택)

『마지막 결혼식은 명장면이었습니다. 아이디어가 좋았습니다』(DJ)

朴槿惠 한나라당 前 대표는 경선기간에 광주의 한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본 후 『마음이 아프고 무거운 심정으로 봤다』고 말했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고 덧붙였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인데 上記 정치인들은 事實이라고 전제하고 감정적 반응을 보인 듯하다. 「이 영화는 사실을 근거로 극화했다」는 영화 제작자의 선전이 먹힌 셈이다.

이 영화는 공수부대의 「蠻行(만행)」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했다. 공수부대 이외의 진압부대, 즉 31사단이나 경찰은 열외시켰다. 광주사태는 특공작전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를 시위 진압에, 그것도 진압장비 없이 투입한 데서 비롯되었다.

공수부대의 투입은 정치적 결정이었다. 全斗煥 장군 그룹, 이른바 新군부가 정권을 잡기 위하여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인들을 연행하고, 국회를 봉쇄하고, 학교를 휴교시킨 이른바 5·17 조치의 일환으로 공수부대가 광주에 내려간 것이다. 1996년 대법원은 全斗煥 그룹의 이 조치를 내란행위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광주사태 진압도 내란행위가 되었다.

영화는 이런 배경 설명을 소홀히 하고 공수부대의 강경진압만 부각시켰다. 광주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을 공수부대에만 집중시키는 영화를 만듦으로써 反국군 감정을 자극하는 영화가 되어 버렸다. 5·18 재판 때 법원은 공수부대의 지휘관들에겐 법적 책임을 묻지 않았다. 검찰은 집권과정의 주모자만 기소했고, 광주에 파견된 군인들을 기소하지는 않았다. 「군인 신분으로서 상부의 명령을 수행했으므로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 영화는 검찰이 「처벌불가」라고 결정했던 공수부대를 처벌하고 있는 셈이다.


非체험 세대를 誤導할 영화
시사회에서 영화「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있는 汎여권 정치인들.

6공화국 때의 국회 청문회, 金泳三 대통령이 지시한 5·18 사건에 대한 再수사로 인해서 광주사태의 진상은 거의 완전하게 드러났다. 시민 측의 시각과 정보가 지배적이던 데서 벗어나 이제는 진압군 측의 정보도 많이 공개되었다. 진압군과 시민 양쪽에서 이 사건을 종합적·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흘렀고, 피해보상이 이뤄졌으며, 고위 책임자들이 斷罪(단죄)를 당했고, 사람들이 성숙해졌다. 「화려한 휴가」는 이런 변화를 전혀 수용하지 못했다. 시민 측의 시각에만 충실하다 보니 진실에서 멀어졌다. 이런 영화는 1980년대에 나왔어야 했다.

광주사태는 벌써 27년 전의 사건이 되었다. 광주사태를 잔인하게 진압한 全斗煥 정권에 대한 분노가 1980년대 학생운동권, 즉 386세대의 가장 큰 동력이었다. 지금 젊은 세대는 이 사건을 日帝시대 사건 정도로 아득하게 느낄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영화가 잘못된 선입감을 白紙(백지) 상태의 이 젊은이들에게 심어줄 가능성이 있다. 非체험 세대에겐 이 영화가 광주를 이해하게 하는 교과서 역할을 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나는 「공수대대장 安富雄의 광주사태」를 소개해야 균형이 잡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휴가」는 시민 측의 시각을 편파적으로 대변했지만, 나의 기사는 공수부대의 시각을 공정하게 소개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安富雄씨가 검찰에서 진술한 내용과 최근 기자에게 증언한 내용, 그리고 검찰 수사로 확정된 사실들을 종합한다. 기사에서 나오는 질문은 검사가 한 것이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 공수부대 투입

11공수여단의 61대대장이었던 安富雄 당시 중령은 1980년 5월19일부터 광주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11여단은 강원도 춘천에 본부가 있었다. 全斗煥이 장악한 군부는 5월17일 全軍지휘관 회의를 열고 전해 10·26 사건(朴正熙 대통령 피살 사건) 이후 계속되어 온 비상계엄령을 제주도를 포함해 全國으로 확대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되면 계엄사령관이 직접 대통령으로부터만 지휘를 받아 三權을 통제하게 된다.

학생 시위의 확산을 막는다는 구실로 5월18일 0시를 기해서 발령된 계엄확대조치와 동시에 합동수사본부(본부장 全斗煥)는 金大中·金鍾泌 등 정치인들을 연행하고 국회를 봉쇄하여 崔圭夏 대통령을 포함한 기성 정치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國保委(국보위)를 통한 정권 인수에 들어갔다.

5월15일까지 전국적으로 학생 시위가 확산되어 계엄해제를 요구했으므로 軍은 부대를 출동시켜 지방의 대학교를 점령하는 조치를 취했다. 특히 대규모 시위가 예상되었던 서울·광주엔 주로 공수여단을 중심으로 편성된 강력한 진압부대를 투입했다. 신군부의 집권과정에서 실무 간사 역할을 했던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 權正達(권정달)씨는 이렇게 진술했다(1996년 검찰).

<釜馬사태 진압작전에 대한 평가과정에서 시위의 대규모 확산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初動(초동)단계부터 공수부대 등을 투입해 강경진압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반성론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이 교훈이,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후 발생 예상되는 시위 진압작전의 기본방침을, 신군부 핵심세력이 「공수부대에 의한 초기 강경진압」으로 설정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1979년 10월 釜馬사태 때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이 먹혔던 것은, 朴正熙 대통령의 鐵拳(철권)통치 체제下에서 일어난 시위였기 때문에 지속력이 약했고, 시위대가 비상계엄령 선포에 눌려 아예 저항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때도 공수부대가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하여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다.

1980년 5월은 달랐다. 金泳三·金大中·金鍾泌의 3金 세력이 주도한 「80년의 봄」이 민주세력을 고무했고, 학생·노동자들이 한창 욕구를 분출시키고 있을 때였다. 釜馬사태 진압이 불씨를 끈 것이라면 광주 진압은 타오르기 시작하는 불길을 잡는 일이었다. 이 점을 신군부는 간과했던 것이다.


타작당하는 공수부대
1980년 5월21일 광주 금남로에서 대치하고 있는 시위대와 공수부대.

『1980년 5월17일 새벽, 주둔지에서 출발해 춘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김포 1공수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5월18일 12시경 동국大에서 천막을 한참 치고 있는데 오후 3시경에 여단장으로부터 광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실탄은 개인에게는 지급되지 않았고 후속 부대가 가져오도록 조치했습니다』

―당시 출동장비는 어떤 것이었는가요.

『개인장구로 M16·군장·방석모 등과 부대장비로 팀 단위 무전기·가스살포용 화염방사기 등을 가져갔습니다. 당시 계엄군으로 출동하면 대학을 점령하고 운동장에 주둔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둔 개념으로 장비를 가지고 다닌 상태였습니다. 예를 들면 TV, 테니스 라켓 등 개인 私物(사물)도 전부 가져갔습니다』

광주로 공수된 11여단은 5월19일 새벽 조선大에 본부를 설치했다.

『1980년 5월19일 새벽이라 그런지 시위대와 충돌은 없었습니다. 배치된 병력들로부터 「이상無」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특이상황은 없었습니다. 그 뒤 (여단 본부인) 조선大로 복귀하여 잠시 정돈을 하면서 지내다 세면을 하려고 준비하는데, 1지역대장으로부터 무전보고가 왔습니다. 「충장로 파출소에 배치되어 있던 1개 지대가 시위대에 완전 포위되어 돌과 화염병으로 얻어맞고 있는 상황이다. 지원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1지역대장에게 침착하게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시위대가 계엄군을 포위하여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확인을 지시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지역대장이 「지금 병사들이 엄청나게 당하고 있으니 대대장님이 빨리 나와서 확인해 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급히 지프에 작전장교 등을 태우고 금남로로 갔습니다.

차량 사이렌을 울리며 가보니 어느 은행 앞에 저희 1개 팀 10여 명 정도가 200여 명의 시위대에게 포위당해 그야말로 돌과 화염병으로 타작을 받는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도망 다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사이렌을 울리고 가니까 시위대들이 후속부대가 오는 줄 알고 사방으로 도망갔습니다. 시위대가 해산하고 난 뒤 보니 최상규 하사는 다리가 부러지고, 김영상 중위는 얼굴을 돌로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6~7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군인에 대항하는 데 흥분, 무차별 폭행
1980년 5월19일 시위대를 연행하는 공수부대.

광주에 맨 먼저(5월18일) 투입됐던 공수 7여단 35대대장 김일옥 중령은 대구사람, 33대대장 권성만 중령은 전주사람이었다. 35대대 3중대장 朴炳洙 대위는 전북 김제 사람이었다. 朴씨는 『5월17일 저녁에 트럭으로 전북 금마의 여단본부를 떠났는데, 대학에 진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둑판과 배구공을 가지고 갔다. 대학에 진주한다는 것을 놀러 가는 일 정도로 생각했다』 고 말했다.

「특전사의 작전일지」는 5월18일의 상황을 이런 요지로 기록하고 있다.

<18일 새벽에 전남대, 조선대에 진주한 계엄군은 학교에 남아 있던 40여 명의 학생들을 연행했다. 오전 9시쯤 전남대학교에 들어가려던 학생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광주시 중심부 금남로로 이동, 계속 시위를 벌였다.

정오 무렵 7여단 33대대는 가톨릭 센터로 출동,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103명을 포고령 위반혐의로 체포했다. 33·35대대는 다시 충장로와 금남로로 진출, 시위자 283명을 체포했다. 시위대는 블록과 음료수병을 던지며 대항하였다>

시민 측에서 본 7여단 진압 상황은 사뭇 달랐다. 당시 ㄷ일보의 광주주재 기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18일 오후 4시쯤 나는 광남 로터리 부근에 있는 고층빌딩의 광고탑에 올라가 밑에서 벌어지는 데모 장면을 사진촬영하고 있었다. 市 외곽 방면에서 군인들이 탄 트럭 수십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로터리 앞에서 전원 하차하더니 대오를 정비했다. 그걸 보고 시위 학생들은 벌써 달아나 버리고 길가에는 구경 나온 시민들뿐이었다. 시민들 속에서는 군인들을 환영한다는 뜻에서 멋모르고 박수치는 사람도 있었다.

공수부대 병력은 횡대로 늘어섰다. 장교가 핸드 마이크로 경고방송인가를 하더니 그대로 시민들을 향해 돌격 명령을 내렸다. 군인들은 몽둥이로 무차별 구타를 시작했다. 수십 명의 시민들이 광고탑이 세워진 건물의 옥상으로 피신해 올라오는 것을 나는 광고탑 꼭대기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다.

얼마 안 있어 공수부대원들이 뒤따라 올라왔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다. 나는 「하느님, 이번만 저를 살려 주시면 성당에 열심히 나가겠습니다」하고 기도했다. 탑 아래 옥상에서는 무지막지한 몽둥이질이 벌어지고 있었다. 군인들은 야구 방망이 같은 몽둥이로 머리, 어깨 등 가리지 않고 두들겼다. 몽둥이가 머리를 칠 때 피가 분수처럼 튀어오르는 게 보였다. 군인들은 시민들을 끌고 내려갔다. 그들은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한참 있다가 광고탑에서 내려왔다. 계단은 온통 피칠갑이었다. 양동이로 핏물을 부어 놓은 것처럼 아래 계단에까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깥에 나가니 윗몸이 발가벗겨진 청년들이 「원산폭격」을 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청년을 붙들면 윗옷을 찢어 머리를 덮어씌우고는 머리를 땅에 박게 하였다가 트럭에 던져 넣듯이 하여 어디론가 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첫날은 사망자가 없었다. 이틀째인 5월19일 시민 두 명이 타박상으로 사망했다. 5월20일엔 시민 네 명이 타박상으로 죽었다. 이날엔 경찰관 네 명도 시위대가 몬 버스에 치여 죽었다.


경북 번호판 차 불타고 운전사 쓰러져

―고소·고발인 및 당시 광주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이 주장하기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학생을 잡으면 먼저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쓰러뜨리고, 서너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군화발로 머리통을 으깨 버리고, 등과 척추를 짓이겼으며, 심지어 군화발로 얼굴을 뭉개고 곤봉으로 쳐서 피 곤죽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피의자의 생각은 어떠한가요.

『병사들에게 교육을 시킬 때에 하반신을 때리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병사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구타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5월19일 날이 어두워지자 시외버스터미널에서 200m 정도 되는 지점에서 차량에 불이 나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1개 지역대 병력을 제가 데리고 가보니 경북 번호판을 단 타이탄 트럭 1대가 불타고 있었으며 운전사로 보이는 사람이 구타당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운전사는 경찰에 인계하여 후송시키고 다시 로터리로 복귀했습니다』

첫날부터 광주지역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칼로 유방을 도려냈다」, 「임산부를 대검으로 찔러 태아를 꺼내 길에 뿌렸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는 따위였다(검찰 수사 보고서).

―5월20일 상황을 진술하시오.

『그날 오전에는 별다른 충돌상황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1개 내지 2개 팀을 주요 목지점에 배치해 놓았는데 12시경 되니까 시위대가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대가 계엄군을 습격하는 방법은 대략 이러했습니다.

시위대 중 40~50代 정도의 사람 2~3명이 계엄군에게 먼저 말을 걸어 봅니다. 「고향이 어디냐, 어디 부대냐, 언제 내려왔느냐」라고 물으나 저희 병력은 답변하지 않고 「해산하십시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삽시간에 100여 명 이상의 시위대가 집결했습니다.

시위대가 집결하면 앞에서 말을 걸던 사람이 군중 속으로 빠지면서 「우우」 하는 신호를 보냅니다. 그러면 군중들도 따라하다 계엄군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순식간에 200~300명이 모여들어 같이 돌을 던지곤 해 할 수 없이 그곳에서 우리 대대는 처음으로 최루탄을 사용해 진압했습니다.

그런 상황이 저희 대대 작전지역 여러 곳에서 일어났으며, 순식간에 금남로 전체에 수많은 군중들이 집결했습니다. 여단에 즉각 상황보고를 하니 여단에서는 「도청을 死守(사수)하고 宣撫(선무)작전을 통해 시위군중을 해산하라」고 막연하게 지시했습니다.

시위군중이 많아져 도저히 우리 대대 병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때마침 62대대도 시위군중에 밀려 금남로로 들어와 우리 대대와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차량 공격 시작

―병력배치를 한 다음에는 상황이 어떠했나요.

『여단에서 지시받은 대로 宣撫작전을 하며 해산을 종용했으나 시위군중은 해산하지 않고 오히려 금남로 지하상가 공사장에 있던 돌을 공수부대에 던지고 화염병도 던져 그때부터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에 돌, 화염병과 최루탄을 투척하는 상호 충돌이 계속되었습니다.

19시경이 되자 최루탄이 다 떨어지고 날도 어두워지고 해서 약간 소강상태였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와서 「지금 무등 경기장에 차량 100여 대가 집결, 금남로를 향해 오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여단에 보고하니 여단에서는 「宣撫작전으로 해산시키라」고만 하고 더 이상 지원도 해주지 않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상황이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노동청 앞 쪽에서 경찰병력이 시위대 차량에 의해 4명이 압사했다는 보고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금남로에서 도청 쪽으로 밀려들어 오는 차량들을 보니 분명히 저희 병력을 향해 밀고 들어올 것 같아 병력을 인도 쪽으로 비키게 했습니다.

저희 뒤에는 경찰병력이 횡대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공수부대원들이 인도로 비키니까 도로 상에는 경찰병력들만 횡대로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경찰병력들은 당황해서 저희들에게 시위차량을 막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버스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화분대를 향해 돌진해 오다 장애물을 발견하고 주춤거린 뒤 핸들을 꺾어 충장로 방향인 62대대 쪽 가로수를 받고 정지했습니다. 62대대 병력이 정지한 버스에 최루탄을 투척해 버스 안에 타고 있던 10여 명 정도의 시위대들을 체포했습니다.

그 버스가 도로를 가로질러 정지했기 때문에 그 뒤에 따라오던 다른 차량들이 그 버스에 막혀 더 이상 앞으로 진행하지 못하게 되자 자연히 그 버스가 바리케이드 역할을 해 뒤에 따라오던 택시, 대한통운 트럭 등도 전부 정지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막히고 얽혀 뒤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니 시위대는 전부 차에서 내려 도망갔습니다. 정지 차량을 장애물 내지 엄폐물로 삼아 다시 戰列(전열)을 정비했는데, 조금 있다 보니 시위대가 다시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몰려들었습니다. 우리 병력은 정지한 차량을 엄폐물로 삼아 시위대를 진압했습니다.

21시경이 지나자 시위대가 앰프를 단 차량으로 도로 상을 돌아다니며 최초로 宣撫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여자가 애끓는 듯한 소리로 시민들을 자극하는 방송을 했습니다. 이북에서 對南방송하는 여자들의 억양과 같아 전율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내용은 「지금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려고 왔다. 우리가 이대로 있어서야 되겠느냐, 금남로로 전부 모여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방송이 있은 다음부터 시위양상이 격렬해졌습니다』

―당시 시위대들의 무장상태는 어떠했던가요.

『몽둥이·쇠파이프·갈고리·도끼 등 흉기가 될 만한 것은 전부 들고 있었으며 시위 상태도 이전과 약간 달라졌습니다』

―당시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 서로 때리고 하는 상황이었는가요.

『5월20일 금남로 상황은 계엄군이 시위대를 때렸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병력이 시위대로부터 구타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병력들이 완전히 의기상실하고 공포감에 눌린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병력들을 향해 「대대장과 너희들이 여기서 죽는다. 이 자리를 물러날 수 없다. 죽을 각오를 하고 이 자리를 지키자」라고 병사들을 격려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다음날 새벽 3시 정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경찰관 네 명 버스에 깔려 죽다
광주사태 당시 도주하는 시위대를 추적하는 공수부대.

여기서 객관적인 위치에 있었던 한 전경(南東成·남동성)이 기자에게 증언했던 내용을 手記 형식으로 소개한다.

<나는 경북 대구의 경북대학교 정외과 2년을 마치고 전투경찰관으로 입대, 전남 도경 2기동대 소속으로 광주에서 근무하다가 광주사태를 맞게 됐다.

광주사태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던 5월20일 밤, 나는 전남도청 앞에서 데모대를 막고 있었다. 광주의 밤하늘은 여기저기서 타오르는 불길로 환했다. 「타닥타닥」 불타는 소리와 가끔 「펑!」하면서 치솟는 화염이 전장을 방불케 했다. 우리 전경부대는 도청 앞의 네거리 중 노동청 광주지방 사무소 쪽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노동청 사무소 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주유소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군중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데모대는 이 주유소에서 기름을 퍼내 차에 불을 질러, 불타는 차들을 우리 쪽으로 계속 밀어붙였다. 트럭·버스·승용차·지프 등 갖가지 차들이 슬금슬금 밀려오다가 중간 지대에서 멈췄다. 불타거나 불탄 차들이 서로 뒤엉켜 절로 바리케이드가 쳐진 형세였다.

밤 9시쯤 됐을까, 군중 쪽에서 버스 한 대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 버스는 부서지고 불탄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와 우리 戰警부대를 향해 달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피해라!』 하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그 버스를 향해 돌을 집어 던졌다.

그때 우리는 최루탄이 거의 떨어져 데모대가 몰려오면 投石(투석)으로 대항하고 있었다. 戰警들은 양쪽으로 쫙 흩어졌다. 버스는 속도를 늦추며 오른쪽으로 비켜 오른쪽 담벼락을 긁으면서 스르르 멈추었다.

버스 쪽으로 달려가 보니 어둠 속에서 비명이 새나오고 있었다. 버스와 담벼락 사이에 경찰관들이 여러 명 끼이거나 깔려 뒤엉켜 있는 게 아닌가. 『어머니! 어머니!』 하는 신음이 들렸다. 우리는 끌어내려고 팔다리를 잡아당겼다. 벌써 축 늘어진 팔다리였다.

거의 같은 순간 운전석에서 두 사람이 튀어나오더니 담벼락을 넘고 달아나는 게 보였다. 한 사람은 이미 달아났고, 다른 한 사람이 담벼락에 다리를 걸친 순간 두 명의 경찰관들이 달려들어 이 뚱뚱한 사람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이 사람은 뒷발길질을 하여 뿌리치고는 달아났다.

우리는 플래시로 버스 바퀴를 밝히면서 사상자들을 끌어내 병원으로 옮겼다. 이 경찰관들은 사고 당시 담벼락 밑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었다. 前列(전열)에 있었던 젊은 전경대원들은 달려오는 버스를 보고 피해 달아날 수 있었으나 이 경찰관들은 앉아 있다가 뒤늦게 버스를 피하기 위해 담벼락에 붙어 서 있다가 버스와 담 사이에 끼이거나 깔린 것이었다.

(편집자 注: 이 사고로 함평경찰서 소속 정춘길 경장, 강정웅 순경, 이세홍 순경, 박기웅 순경 네 명이 숨졌고, 김대민 순경 등 네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버스를 몬 운전사 김갑진, 배용주씨 2명은 그 뒤 경찰에 구속, 복역하다 석방됐다. 이들은 군중들이 버스를 탈취해 몰지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하여 몰고 가다가 연기 등으로 앞이 보이지 않게 되자 차를 세웠는데 그런 사고가 났다고 진술했다)

20일 자정인지, 21일 새벽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 밤에는 데모대가 밤을 새워 시위를 했다. 중학생에서 노인까지, 여대생에서 할머니까지 남녀노소 구별이 없었다. 골목골목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들의 손에는 몽둥이·쇠파이프 등이 들려 있었다. 모두가 악에 받쳐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자가 마이크로 군중들을 격려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광주시민 여러분, 경찰이 던지는 것은 수류탄이 아니고 최루탄입니다. 맞아도 죽지 않으니 전진합시다』

도청에서 가까운 충장로로 우리 부대가 진압차 출동했다가 돌아오는 도중, 데모군중의 습격을 받고 우리 몇 명은 고립됐다. 군중들이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곁에 있던 동기생 한 놈이 『우린 여기서 죽는다』고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달아나다가 쓰러졌다. 「여기서 맞아 죽는구나」하고 생각하는데 저쪽에서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 1개 소대 병력이 횡대로 우리를 구원하러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군중 속으로 돌입했고, 군중은 흩어져 달아났다.

갑자기 주위가 깨끗이 청소된 듯 비어졌다. 공수부대원들이 휩쓸고 지나간 저쪽 길바닥에 중학생 교복을 입은 두 명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달려갔다. 한 중학생은 가슴이 밟혔는지 푹 꺼져 있었다. 이미 숨은 끊어졌다. 다른 중학생은 『엄마! 엄마!』 신음하고 있었다. 곧 신음도 끊어졌다.

나는 이 소년도 가망이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두 소년을 길에서 들어내 가게 옆에 붙여 놓고는 부대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도청 옆 주유소 근방에서 공수부대원에게 끌려가는 중학생 한 명을 목격했다. 나는 저놈이 軍 부대로 넘겨지면 혼이 날 것 같아 공수부대 사병에게 『이 놈은 나에게 넘겨 주십시오. 혼을 내서 돌려보내겠습니다』 했다.

나는 인수한 소년을 도청 근방의 民家로 데리고 가 넘겨주면서 잘 보호했다가 부모를 찾아주도록 부탁했다. 그러고 나서 도청 쪽으로 돌아와 보니 데모군중과 진압부대가 충돌, 군중들이 노동청 사무소 쪽으로 달아난 뒤였다. 주유소 앞에 20代 청년 두 명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한 청년은 이미 죽어 있었다. 치명상이 어딘지는 알아볼 겨를도 없었다. 다른 청년은 숨이 끊어져 가고 있었다. 나는 방독면을 벗고 5분쯤 인공호흡을 시켰다.

나는 「엉엉」 울었다. 나는 기독교 신자인데 「하느님! 왜 이 사람을 죽였습니까」 하고 속으로 부르짖었다. 누구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허망함이 그때의 내 심경이었다.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대해 내가 본 사례로는 18일인가 19일쯤의 일로서 금남로 부근에서 대낮에 구타당하는 대학생을 할머니가 감싸고 말리는데 공수부대원이 진압봉으로 할머니를 때렸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퍽 쓰러졌다. 공수부대의 진압봉은 약 70cm. 야구방망이처럼 앞이 굵다. 단단한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다. 휘두르면 앞이 무거워 가속도가 붙는다>

5월20일 사망자는 경찰관 네 명을 포함해 11명인데 동신중학교 3학년 박기현(14)이 끼여 있다. 타박상으로 죽었다. 이 手記에 나오는 중학생일 가능성이 있다. 다시 11여단 安富雄 61대대장의 증언으로 돌아간다.


암흑 속 아수라장
광주사태 당시 시위대원의 머리를 곤봉으로 내리치는 공수부대원.

―당시 5월21일 03시까지 시위대와 충돌하면서 최루탄 등 진압장비는 충분했나요.

『최초 차량들이 진입할 때 경찰로부터 얻은 최루탄은 순식간에 다 소비하고 오직 진압봉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날 상황은 마치 적은 병력의 공수부대와 무수한 수의 시위대가 야간에 패싸움을 하는 듯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금남로에는 시간이 늦어서 그런 면도 있겠지만 건물의 불은 전부 꺼진 상태였고, 날씨는 맑은 날이 아니고 그믐 때 정도여서 달빛이 없고, 가로등마저 꺼진 상태였기 때문에 완전히 암흑 속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물 한 방울 먹지 못할 정도의 상황이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5월21일 오전, 공수부대는 수십만 명으로 불어난 광주시민들에 의해 코너로 몰리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취재 일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오전 10시54분: 땅을 치고 통곡하는 군인들의 모습 보임. 『왜 이런 식으로 우리 동료가 다쳐야 하느냐』며 흔들림. 무장 데모군중이 사방에서 군을 포위하고 압축하는 상황에서도 낮에는 실탄을 회수. 이에 대해 『탄환을 달라』고 아우성도. 군은 부상병이 생겨도 사방이 포위돼 응급치료와 수송을 못 해 더욱 자극되는 듯>

『광주에 온 이후 더운 밥을 먹은 것은 두 끼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시위대에 포위되어 있었고 취사반이 접근을 못 해 비상식량으로 때웠습니다. 부상자가 많았는데 앰뷸런스도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대대원 300여 명 중 약 70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주로 돌에 맞은 이들이었습니다. 공수부대는 훈련이 세기 때문에 직속 상관과 동료들에 대한 戰友愛(전우애)가 강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戰力이지요. 공수부대의 이런 특성상 동료가 시위대로부터 얻어 맞으면 복수심에 불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때는 지휘관이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공수부대가 아닌 일반 보병부대였다면 시위대에 포위된 상태에서 공포감에 휩싸여 무질서한 사격으로 더 많은 피해를 냈을 것입니다. 나는 수십 만의 무장 시위대에 포위된 상태에서 1000명 남짓한 공수부대가 21일 오전까지는 총도 안 쏘고 전남도청을 死守(사수)한 데 대해서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공수부대, 실탄 배급 늦추고 사격 자제

5월21일 오전 전남도청을 지키던 공수부대에 대한 실탄 배급 상황에 대해서는 1995년 서울지검과 국방부 검찰부의 조사로 밝혀졌다. 수사발표문을 인용한다.

<수사결과 11공수여단 61·62대대는 도청 앞 금남로에서 시위대로부터 차량공격을 받은 후 시위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5월20일 24시경 대대장 지프차 등에 통합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위급시에만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중대장 이상 장교들에게 1탄창(15발씩)씩 분배했다.

63대대는 5월21일 오전 10시30분경에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같은 날 13시경 시위대의 차량공격이 있기 이전에 이미 장교를 위주로 실탄이 분배되어 있었다>

공수부대는 1명의 대대장-3개 지역대-9개 중대-27개 팀으로 구성된다. 1개 팀은 장교 1명에 사병 10명이다. 중대장 이상 장교들에게 1인당 15발씩 실탄이 배급되었으니 사병들에겐 1인당 한 발씩도 돌아가지 않았다는 계산이다.

安富雄 당시 61 대대장의 검찰 진술을 본다.

『조금 있으니 지역대장과 중대장 몇 사람이 저에게 와서 실탄을 분배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안 된다고 했으나 지역대장과 중대장들이 불안해하고 「사격을 할 것도 아닌데 분배해 달라」고 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중대장들에게 1탄창씩 지급했습니다』

―중대장들에게 실탄을 분배할 때 어떤 지시를 했는가요.

『이 실탄은 절대로 사격하라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 마음의 안정감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 중대장들이 휴대하라고 주는 것이지 절대 사격하라고 주는 것은 아니므로 대대장 지시 없이는 사격하지 말라고 누차 강조했습니다』

―피의자는 소속 대대의 중대장 이상에게 150발 정도의 실탄만 지급하고 나머지 실탄은 추가로 다시 지급한 적이 없는가요.

『5월21일 도청 앞에서 발포가 있은 후 조선大에서 주답마을로 철수하면서 실탄을 지급했습니다』

5월20일엔 시위대의 차량공격이 격화되어 3공수여단 상사 한 명과 경찰관 네 명이 깔려 죽었다. 그럼에도 공수부대는 이날 차량에 대응 사격을 하지 않았고, 최소한의 실탄을 중대장 이상에게만 나눠 주었다. 공수부대의 몽둥이 진압은 과했지만 실탄 및 사격통제는 상당한 자제력을 보여 주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 새끼를 이걸로 골을 빠개?』
광주사태 당시 가족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는 유족들.

5월20일의 차량 공격에 대해서 1995년의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 수사발표문은 이렇게 설명했다.

<5월20일 17시경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가격에 분개한 택시기사들이 50여 대의 영업용 택시를 몰고 광주역에 집결, 계엄군을 밀어 버리겠다고 결의했다. 18시경 무등 경기장에 100여 명의 택시기사들이 택시를 몰고 다시 집결하여 군 저지선을 돌파하고 계엄군을 몰아낼 것을 결의하였다>

<5월20일 22시경 갑자기 시위대의 11t 트럭 한 대가 광주역 쪽에서 돌진하여 오다가 방향을 틀면서 전복되어 공수부대 하사관 한 명이 트럭에 깔려 사망했다(편집자 注: 당시 사망자는 3공수여단 16대대 소속의 육군상사 정관철)>

<광주역 앞에서 공수 3여단 12·15대대는 5월20일 20시경 시위대가 드럼통에 휘발유를 넣어 불을 붙여 굴려 보내고 트럭·버스 등 차량돌진 공격을 계속하자 인도로 피하거나 가스탄 투척 등으로 시위대를 저지했다. 22시경 돌진하는 시위대의 트럭에 하사관 3명이 깔려 중상을 입자, 일부 대대장은 권총을 차량 바퀴 등에 쏘아 돌진하는 차량을 정지시키고 운전자 등 시위대를 체포했다>

<차량 돌진 등 시위대의 강력한 공격에 위협을 느낀 대대장들이 실탄 지급 등 지원을 요청했다. 崔世昌 3공수여단장은 22시30분경 위협용으로 사용하되 위협용 이외의 사용시에는 사전에 보고하라는 지시와 함께 경계용 실탄을 대대에 갖다 주도록 지시했다.

여단 정보참모가 먼저 신안동 굴다리에 있던 16대대에 경계용 실탄 100발을 전달했다. 여단 작전참모와 함께 광주역으로 진출하면서 수백 명의 시위대의 저지에 부딪혔다. 경고 방송에도 불구하고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자 차량에 거치한 M60 기관총을 위협 발사하고 권총과 M16으로 공포 사격을 하고, 최루탄을 발사, 시위대를 해산했다>

실탄을 갖고 있던 공수부대원들도 21일까지는 차량·휘발유·투석 공격에도 조준사격은 하지 않았다. 安富雄씨 증언으로 돌아간다.

―5월21일 오전 상황을 진술하시오.

『5월21일 08시경 시위대가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금남로에 완전히 꽉 찰 정도로 운집하여 저희 병력 약 10m 전방까지 진출했습니다. 우리로서는 어떻게 진압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시위대도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지는 않고 우리 앞 10m 전방까지 전진했습니다.

당시 저는 병력들에게 「눈도 돌리지 말고 서 있으라」고 지시해 병력들은 不動(부동)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시위대가 전날 밤과 마찬가지로 돌, 화염병, 쇠파이프 등 흉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09시경 정도 되니 어제 선동방송을 하던 여자가 시위 군중 사이를 헤치면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리어카를 끌고 앞으로 나왔는데, 나오면서 「죽은 사람이 내 동생인데 계엄군이 죽였다. 살인마 계엄군을 쫓아내야 한다」는 취지로 선동을 했습니다. 군중들이 「와와」 소리를 지르며 호응한 뒤 칼·도끼 등을 든 사람들이 시위대의 전면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병력 바로 앞에까지 와서 도끼로 병사들의 철모를 툭툭 치면서 「이 새끼를 이걸로 골을 빠개?」, 그리고 가위, 칼 등을 눈앞에 대고 「이걸로 눈을 쑤셔 버려?」 등의 위협을 해 우리 병사들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병력들은 꿈쩍도 않고 있었습니다』


『도청을 死守하라』
탈취한 차량을 타고 광주시내를 누비는 시위대원들.

―그 당시 밀려오는 시위대들을 왜 해산시키지 않고 대화에 응할 생각을 했던가요.

『그날 오전에는 시위대가 먼저 돌과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고, 또 시위대의 수가 엄청나 충돌이 있었다가는 저희 병력들이 전부 맞아 죽을 상황이었습니다.

대화를 해보니 시위대가 요구하는 내용이 세 가지 있었습니다. 「①계엄군은 즉각 철수하라 ②체포해 간 사람들을 즉각 석방하라 ③계엄군은 폭력을 쓰지 말라」고 요구하여 잠시 기다리게 한 뒤 대대장들과 어떻게 답변할 것인지를 의논한 뒤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리는 전방 지휘관이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것이 군인이기 때문에 도청을 死守하라는 지시를 받은 이상 우리 마음대로 철수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신들이 요구했던 사항을 상급부대에 보고하겠다. 둘째, 체포한 사람들은 모두 경찰에 인계했기 때문에 우리가 보호하고 있는 시위대는 없다. 셋째, 우리 계엄군도 국가와 국민을 위한, 국민으로 구성된 군인이다. 우리가 쓸데없이 폭력을 쓰겠느냐. 지금 봐라, 당신들이 폭력을 쓰지 않으니까 우리도 폭력을 쓰지 않고 있지 않느냐」

우리의 답변을 듣고 그들이 도지사와의 대화를 요구해 여단에 보고하니 「답변을 잘했다」고 하며 도지사와 연락해 만나게 하라고 했습니다. 35대대장으로 하여금 도지사에게 안내토록 했습니다.

여자와 남자 3~4명 정도가 시위대 대표로 나와 35대대장의 안내로 도청에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광주시장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택시 지붕 위로 올라가 「광주시장입니다」라고 이야기한 뒤 「광주市 만세」라고 하자 시위대가 함성을 지르며 시장을 에워싸고 시위대 쪽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조금 있으니 경찰 헬기 한 대가 도청에서 이륙하더니 도청 상공을 선회하면서 「나는 전남도지사다. 지금 계엄회의차 戰敎司(전교사)로 가는데 오늘 낮 12시까지 계엄군을 철수시키겠다. 시민들은 모두 해산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3회에 걸쳐 방송한 뒤 戰敎司 쪽으로 갔습니다.

이 방송을 듣고 여단에 무전으로 우리의 철수여부에 대해 문의하니 약간 시간이 경과된 뒤에 무전으로 연락 오기를 「철수계획이 없으?도청을 死守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2시가 되니까 운집한 시위대가 「왜 12시가 되었는데도 물러가지 않느냐」며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시위대에 「지금 계엄회의가 계속 중이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말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시위대가 웅성웅성해 살펴보니 시위대 뒤편에서 장갑차와 시위대가 가득 탄 5t 군용트럭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차량을 몰고 저희 병력 앞으로 나와 장갑차와 트럭 등을 저희 병력을 향해 횡으로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저희 병력들과 시위대 차량이 마주 보고 있게 된 것이지요』


장갑차에 깔려 공수부대원 1명 사망

安富雄씨는 나에게 여러 번 『전남도지사가 「12시에 계엄군이 철수한다」는 방송을 한 것이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말했다. 시위대를 고무시켰고 공수부대를 수세로 몰았다는 것이다.

『우리 앞에 시위대의 장갑차와 군용트럭, 거기에 탄 시위대가 보였는데 그들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흉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보니 총을 가진 시위대가 군데군데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병력의 뒤에는 62대대 뒤에 장갑차가 1대가 있었고, 그 장갑차 뒤에 63대대 1개 지역대 병력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13시경에 이르러 시위대가 장갑차와 차량의 시동을 걸고 「부릉부릉」거리는 등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대대병력들에게 防毒面(방독면)을 착용시켰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장갑차의 「빵빵」 소리와 함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1개가 날아와 62대대 장갑차 있는 곳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장갑차가 화염병을 보고 뒤로 빠졌으며 그와 동시에 시위대 前列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t 트럭이 계엄군 쪽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 차량을 막을 재간이 없어 도청을 향해 병력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시위대 차량이 빠른 속도로 저희 병력을 향해 들어왔더라면 많은 병력이 깔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장갑차 1대만 빠른 속력으로 도망가는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충장로 쪽으로 갔습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났습니다』

11여단 소속 통신병 慶箕萬씨의 증언이다.

『우리 등 뒤에 있던 APC에 누가 화염병을 던졌는지 불에 타기 시작했다. 우리 대열은 불을 끄려고 뒤로 물러났다. 이때를 틈타 시민 측에서 장갑차와 버스를 앞세우고 돌진해 왔다. 우리는 도청 쪽으로 달아났다. 실탄이 없었기에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달아나면서 보니까 시민 측의 장갑차 한 대가 우리 공수부대 대열에 돌진, 두 명이 깔리는 것이었다. 나중에 보니 11여단의 권용문 상병은 머리가 장갑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아났다』


『사격 중지』 명령 안 먹혀

공수부대 대열의 뒤쪽에 있었던 전투경찰 南東成 상경은 이렇게 기억했다.

『장갑차와 함께 버스가 돌진해 왔는데 한 장교가 권총을 빼들더니 운전사를 향해 사격을 했다. 운전사가 맞았는지 버스는 분수대 근방에서 멈추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이 버스를 향해서 사격을 했다. 한 장교는 M16을 들고 나오더니 엎드려 쏴 자세로 사격을 했다』

이때 동료가 치여 죽는 장면을 목격한 공수 11여단의 한 하사관은 『눈에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누구든지 죽여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 기분,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더라』고 실토했다. 한 공수부대원도 『동료가 죽고 다치는 것을 보니 내 마음속에 잠재해 있던 야수성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이 차량돌진은 공수부대와 시민 측의 총격전이 시작된 계기였다.

―당시 상황을 계속 진술하시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하고 나간 뒤 저의 대대 정보장교인 장두혁 대위로부터 「62대대 이창호 대위가 얼굴에 약간 스칠 정도로 총알을 맞아 비틀비틀 하기에 내가 부축해 주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 뒤 도망을 가 분수대에 도착한 후 전부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4개 대대병력이 서로 뒤섞인 상태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쉬고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갑자기 총소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뭐야」 하고 일어나서 보니까 분수대 옆 충장로 쪽으로 시위대 버스 1대가 저희 병력을 덮쳤습니다. 당시 저희 병력들은 쉬느라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버스가 달려드니까 누군가가 버스를 향해 사격을 한 것입니다. 버스는 사격을 받고 분수대에 부딪힌 뒤 방향을 바꿔 충장로 쪽으로 가다 담을 들이받고 정지했습니다.

이때 관광호텔 쪽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t 트럭이 동시에 계엄군을 향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차를 향해 공수부대원들이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사격을 하니까 시위대 차량이 주춤하더니 뒤로 물러났습니다. 제가 「큰일 났구나」 생각하며 뛰어다니면서 「사격 중지」를 외쳤습니다. 「사격 중지」를 외쳐도 동시에 사격 중지가 되지 않아 제가 병사들 속을 뛰어다니며 발로 걷어차면서 「사격 중지」를 외쳤습니다』


시위대 무기 탈취, 분배
1980년 5월24일, 계엄군이 철수한 후 전남도청을 경비하고 있는 무장 학생들.

1995년의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 합동 수사 보고서는 이렇게 정리했다.

<(5월21일) 13시30분경 시위대 쪽으로부터 장갑차 1대가 빠른 속력으로 도청 쪽으로 또 돌진하자 그 순간 경계 중이던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를 향하여 일제히 發砲(발포)하여 장갑차 위에서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흔들던 청년이 피격되었다.

공수부대의 발포로 후퇴했던 시위대가 다시 가톨릭센터, 한국은행 광주지점 부근에 모이고, 그중 5~6명이 태극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고 나오자 공수부대원들은 이들을 향해 발포했다.

그 무렵 방송국 등의 警戒(경계)임무를 수행하다가 전남도청으로 철수해 있던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 병력이 師團(사단)으로 철수하면서 경계용 실탄 200여 발을 7공수여단 35대대 군수장교의 요청에 따라 공수부대에 넘겨주어, 35대대 장교들도 1인당 10발 정도의 실탄을 분배받았다.

한편 시위대는 軍輛(차량)을 이용하여 인근 광산·영광·함평·화순·나주·영암·해남·강진·완도·송주·고창 등지로 진출하여 무기를 확보, 무장했다.

13시경 광산 하남파출소에 시위대 80여 명이 차량 3대를 타고 와 카빈 9정을 탈취했다. 고속버스·트럭 등 10여 대의 차량에 탑승한 광주 시위대가 함평에 도착해 群衆(군중) 시위를 벌이고 신광지서에서 총기 100여 정, 실탄 2상자를 확보했다.

13시35분경 화순 소재 4개 파출소에서 총기 460정과 실탄 1만 발을 탈취했다. 14시경 나주 남평지서 무기고에서 카빈 20여 정과 실탄 7~8상자를 탈취했다.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와 나주 시위대가 합세하여 나주경찰서에 진입해 군용 레커차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카빈 500여 정, M1 소총 200여 정, 실탄 4만6000여 발을 탈취했다.(中略)

시위대는 이 무기들을 가져와 광주공원과 학운동에서 분배한 후 銃器(총기) 사용 교육을 실시했다. 15시경 광주공원에서 銃器를 분배받은 시위대가 지프차를 타고 시내를 돌면서 상황을 전파했다.


시민 측, 기관총으로 헬기 공격

17시경에는 광주공원에서 총기 사용 교육을 받은 시위대들이 組(조)를 編成(편성)하여 정찰, 도청 감시, 외곽도로 경계 등의 임무를 부여받고 시내 요소에 배치되기 시작하는 등 이른바 「市民軍(시민군)」이라 불리는 무장 시위대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4시50분경 공수부대는 전남도청 본관과 신관, 전남일보, 水協(수협) 도지부, 상무관 등 인근 건물 옥상에 일부 병력을 배치하여 도청 부근으로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하여 銃擊(총격)을 가하였다.

15시15분경 전남도청에서 500m 정도 떨어진 우체국 쪽에서 시위대 2000여 명이 모여 일부 시위대는 카빈과 실탄을 휴대하고 전남도청 쪽으로 진출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15시50분경 카빈을 휴대한 시위대가 전남의대 오거리에서 전남道警 쪽으로 사격을 하면서 이동했다.

16시경 광주은행 본점 부근에 트럭이 도착하여 시위대에 30여 정의 카빈을 분배했다. 일부 시위대는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서 LMG 2정을 설치하고 전남도청과 軍헬기를 향해 사격을 했다.

14시45분경 20사단 61연대장이 11공수여단과 병력을 교대하기 위하여 61 항공단 203대대장이 조종하는 UH-1H 헬기를 타고 전남도청 上空에서 공중 정찰을 하던 중 시위대의 對空 사격으로 6발이 헬기에 맞았다.

15시50분경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宣撫방송을 하던 같은 機種(기종)의 61항공단 방송용 헬기도 6발의 총격을 받았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공수부대가 전남도청에서 발포하기 시작한 시점과 비슷한 시간대에 시민 측이 무장하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총과 총의 대결이 되었다.


사격 명령을 한 적도 받은 적도 없다
1980년 5월27일, 진압작전이 종료된 후 계엄군이 무기를 회수하고 있다.

安富雄씨는 영화를 보고 난 뒤 나에게 『그때 전남도청 앞에선 사격지시를 내린 사람도, 받은 사람도 없었다』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돌진하는 시위대의 장갑차와 버스에 깔려 죽지 않기 위해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검찰 조사로써 이미 입증되었다.

―실탄이 지급된 뒤 돌진하는 시위차량을 향해 사격 명령을 내렸는가요.

『사격명령을 내린 적은 절대 없습니다. 순전히 급박한 상황에서 부대원들이 조건반사적인 사격, 그러니까 돌진하는 시위대의 차량에 壓死(압사)당할지 모른다는 심한 공포감으로 인해 실탄을 삽입하여 발사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출석한 장교들의 진술에 따르면 1차 발포가 있은 후 공수부대원들이 전일빌딩, 상무관, 도청, 水協 전남도지부 건물 옥상에 배치되어 차량 돌진자나 시위대열 선두의 주동자들을 겨냥해 사격을 실시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고소인들의 주장과 달리 공수부대엔 저격수 같은 직책은 없지만 당시 상황이 긴박해 도청 인근 건물 옥상에 병력을 올려 보내 그들이 경계병 임무와 차량 돌진자나 극렬주동자 및 옥상에서 사격하는 시위대에 사격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검찰 자료에 의하면 5월21일에 시민 61명이 사망했는데, 전남도청 앞에서 M16총탄을 맞고 죽은 것으로 확인된 사망자는 4명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선 최소한 수십 명이 집중사격으로 쓰러진다.

安富雄씨는, 이날 오후 5시 공수부대 4개 대대가 전남도청에서 조선大로 철수할 때 전남의대 병원 옥상에서 기관총 사격을 집중적으로 받았고, 시민들도 맞았을 것이라고 했다.

―조선大로 철수한 뒤의 상황을 진술하시오.

『조선大에 해지기 전이니까 17시경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병사들을 식사시킨 뒤 병사들에게 실탄을 휴대시키라는 지시를 여단 작전참모로부터 정식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조선大에 통합 보관되어 있던 실탄을 병사들에게 기본 휴대량인 60발씩 분배했습니다.

철수는 63대대, 여단본부, 62대대, 61대대 순으로 했는데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각 대대는 도보로 조선大 뒷산을 거쳐 주답마을로 갔습니다. 주답마을로 철수하는 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으며, 조선大 주변 건물에서 시위대가 저희들을 향해 사격을 했습니다.

보이지 않아 응사하지 않고 우리 위치를 노출하지 않은 채 산을 넘어 주답마을로 갔습니다. 1개 여단 병력이 야간에 이동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려 우리는 소태동을 지나 대로로 야간행군을 했습니다. 주답마을에는 5월22일 새벽 해뜨기 전에 도착해 병사들을 취침시켰습니다』


공수부대를 시위 진압에 동원한 것이 잘못

―당시 광주 상황이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강경한 진압만 하면 진정될 것으로 보이던가요.

『우선 시위대들의 수나 시위양상으로 보아 방석모·방석복 등 진압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공수부대원들이 진압봉 하나만 들고 진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습니다만, 상부의 명령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이 시위진압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적으로 열세인 저희들이 진압을 하려니 일부 과잉행위가 발생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태 당시에 찍은 사진들이나 여러 자료들을 보면 단순히 현장에서 우발적으로 과잉진압이나 발포가 있었던 것이라기보다는 공수부대의 특성상 원천적으로 과잉진압을 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고, 제도적·조직적인 과잉진압이나 살상행위가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공수부대가 유사시 敵 후방에 침투하여 교란작전을 하는 게릴라부대로서 성격상 시위진압에는 적절치 못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공수부대를 시위진압에 동원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확인된 사실

그동안 쟁점으로 되어 있다가 1995년 서울지검과 국방부 검찰의 합동조사로 확인된 사실들이 있다.

1. 사격명령 없이 자위적으로 발포: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는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 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하여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받은 장교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하여 自衛(자위) 목적에서 발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계속된 발포에선 군에 대하여 직접적 위협을 가하고 있지 아니한 상태에까지 발포가 이뤄진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 사격통제에 문제점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2. 공수여단장들이 과연 현지 사단장 말을 안 들었나: 공수여단의 부대 운용에 대한 지휘를 현지 31사단장과 戰敎사령관이 행한 사실이 인정된다. 지휘권의 二元化는 없었다.

3. 무장헬기 사격은 없었다: 헬기 장착 무기에 의한 사격으로 人命 피해를 야기한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

4. 군 헬기에 대한 시위대의 사격은 있었다: 5월21일 오후 2시45분경 20사단 61항공단 소속 정찰용 헬기가 전남도청 상공에서 시위대의 對共 사격으로 여섯 발을 맞았다. 오후 3시50분경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宣撫방송을 하던 같은 機種의 61항공단 소속 방송용 헬기도 6발의 총격을 받았다.

5. 시위대의 기관총 사격: 5월21일 오후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서 LMG 2정을 설치하고 전남도청과 군헬기를 향해서 사격을 했다.

6. 군인의 대검 사용 있었다: 9명의 死體에서 刺傷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지휘관의 의사와 무관하게 공수부대원들에 의하여 시위진압 현장에서 대검이 사용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7. 화염방사기 사용하지 않았다: 화염용 약품 자체가 지원된 사실이 없다.

8. 연행자에 대한 가혹한 구타로 사망자 있었다: 3여단이 연행자를 싣고 광주 교도소로 철수하면서 과다한 인원을 트럭에 싣고, 최루탄을 터뜨리고, 진압봉으로 구타하였다. 교도소에 도착했을 때 차량에는 질식사 등으로 사망한 5~6구의 死體가 있었다.

9. 비무장 민간인 피살 있었다: 11여단 병력이 매복 중인 戰敎司 교도대로부터 폭도라고 誤認(오인)되어 공격을 당해 9명의 공수부대원이 사망했다. 63대대 병력이 이에 격분하여 부근을 수색하여 시위대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장시위대원 1명과 마을청년 3명, 마을주민 1명이 피살되었다.

10. 사망자는 193+47명: 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 외 광주시위 관련 행방불명자로 인정되어 보상금이 지급된 사람이 47명이다.

11. 유언비어: 「유방을 도려 냈다」,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 「경상도 군인들만 왔다」는 식의 유언비어는 모두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12. 시민끼리의 誤認 사격 사망도 많았다: 1980년 5~6월 검찰의 檢屍 조서에 따르면 사망한 165명의 민간인과 경찰관 중 총격 사망이 131명, 찔려서 죽은 사람이 4명, 맞아 죽은 사람이 18명, 차에 깔려 죽은 사람이 12명이었다. 총격 사망자 중 군인들이 쏜 것으로 보이는 M16 소총 실탄 피격자가 96명, 시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카빈 소총탄에 의한 피격사망자(군인 제외)는 26명, 기타 9명이었다. 카빈탄 피격자는 시민끼리의 誤認사격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광주사태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나?

全斗煥 그룹의 5·17 집권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당시 국군 保安司(보안사)의 정보처장 權正達씨는 1996년 1월4일 검찰 조사 때 이런 진술을 했다.

<광주사태의 근본 원인은 공수여단이라는 과격한 부대를 시위현장에 투입해 강경진압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계획을 입안, 실행한 全斗煥, 黃永時, 鄭鎬溶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에 전적인 책임이 있다.

공수여단 병력들은 이런 정치적 의도를 전혀 모르는 채 상부 명령에 복종했던 것에 불과하므로 그들 또한 광주사태의 희생자라는 생각이 든다>

「화려한 휴가」는 공수부대 투입 명령자에 대한 照明(조명)이나 추궁은 거의 생략하고 명령을 수행한 공수부대원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예고도 없이 무차별로 집단 사살한 집단으로 그렸다.

군대에 갈 많은 젊은이들은 이 영화를 사실이라고 믿고 反軍 감정을 품게 될 것이다. 정치인들도 이 영화를 나름대로 이용하고 있다. 국군의 정통성과 권위를 수호해야 할 국방장관·합참의장·육군참모총장·특전사령관이 침묵하고 있다. 광주사태는 이제 다른 모습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인가.●

출처 : 월간조선, 2007년, 재록
[ 2014-01-15, 2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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