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태를 담은 말
Daum카페/ 앞뒤 안맞는 말
① 앞뒤 안 맞는 말 홍수가 났다
살다 보면 ‘말도 안 되는 말’ 또는 ‘말 같지 않은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옛날 중국에 공 아무개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단다. 단단하고 흰 돌은 있을 수 없다고. 사람들이 왜냐고 물으니, 단단하기는 손으로 만져야 알 수 있고 색깔은 눈으로 봐야 알 수 있는데 어찌 둘이 하나가 되겠느냐고 하더란다. 이같이 사람을 속이거나 헛갈리게 하는 말을 두고 요새 사람들은 ‘궤변’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옛사람들은 ‘헛말’ 또는 ‘허튼소리’라 하여 웃어넘겼다. 하긴, 말 같지 않은 말은 웃어넘기는 게 상책이다.
‘네모난 동그라미’처럼 앞뒤가 안 맞는 말도 있는데, 이를 두고 ‘형용모순’이나 ‘모순형용’이라고도 하더라만 아무튼 이것도 말이 안 되기는 매한가지다. 그런데 이 같은 말은 더러 정색을 한 자리에서 쓰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즐거운 비명’이나 ‘공공연한 비밀’ 같은 것인데, 앞뒤가 어울리지 않긴 하지만 무슨 뜻인지 다들 알고 쓰니 문제 될 건 없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나 ‘행복한 슬픔’ 같은 말도 앞뒤가 안 맞긴 마찬가지지만, 시 같은 데서 미묘한 느낌을 살리려고 쓴 말이니 해될 일이 무엇이랴.
옛이야기에도 그런 말이 더러 나온다.
“옛날에 다리 없는 노루가 나무 없는 숲에 들어가니 가지 없는 나무에 씨 없는 앵두가 달려 있기에 밑 없는 자루에 따 담아 목발 없는 지게에 얹어서 사람 없는 장에 갖다 팔아 구멍 없는 엽전을 받아 두렁 없는 논을 샀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말이 죽 이어지다가 끝에 가서는 “무엇이 동동 떠 있기에 가만히 보니 그게 다 거짓말이더란다.”하여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살림깨나 있는 백성이 고을 원한테서 억지 영을 받았다. 말인즉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날에 옷도 아닌 옷을 입고 말도 아닌 말을 타고 선물도 아닌 선물을 가지고 오너라.”는 것이었다. 백성이 걱정하다 드러눕자 나이 어린 딸이 좋은 수를 가르쳐 주었다. 백성은 그다음 날 딸이 가르쳐 준 대로 홑이불을 걸치고 당나귀를 타고 참새 한 마리를 소매 속에 넣어 저물녘에 고을 원 앞에 갔다. 낮은 다 가고 밤은 오지 않았으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날이요, 홑이불을 걸쳤으니 옷도 아닌 옷이요, 당나귀를 타고 왔으니 말도 아닌 말이요, 참새는 내놓자마자 포르르 날아가 버리니 선물도 아닌 선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영을 말이 되게 바꿔 놓은 슬기라 할 만하다.
이런 것은 다 이치에 안 맞고 앞뒤가 안 맞긴 하지만,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렇다는 걸 알면서 하는 경우다. 말이 안 되지만 무슨 뜻인지는 다 알고, 미묘한 느낌을 즐기려고, 또는 일부러 재미있으라고, 아니면 상대의 억지를 뛰어넘으려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애교로 봐줄지언정 여기에 대고 딴죽을 걸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 자기 잘못을 감추기 위해 앞뒤 안 맞는 말을 만들어 쓴다면? 그리고 그걸 대놓고 자랑삼거나 옳은 말이라고 우겨댄다면? 이를테면 어떤 도둑이 있어, 자기는 강도짓을 하긴 했지만 남보다 폭력을 좀 덜 썼다고 ‘비폭력’이라 자랑한다면? 해코지도 조금밖에 안 하고 돈도 조금밖에 안 빼앗았다고 해서 ‘비폭력 강도’라고 주장한다면 어떨까?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다들 기막혀서 말도 안 나올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멀쩡한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 우선 몇 해 전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로, 높은 벼슬아치가 텔레비전에 나와 ‘친환경 폭탄’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사연인즉, 그때 러시아에서 새로 만들어 낸 폭탄이 핵무기와 맞먹는 힘을 가지고도 방사능을 내보내지 않아 ‘친환경적’이며 그래서 인류에게 더 ‘유익한’ 폭탄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사람을 죽이는 폭탄이 ‘친환경’이라니! 그 놀라운 말재주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여기서 혹시 우리는 그 뻔뻔스러움에 질린 나머지 그 폭탄보다 진짜로 더 나쁜 폭탄, 이를테면 핵무기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잠깐이라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미국 같은 큰 나라에서 작은 나라에 쳐들어가 이른바 ‘질서를 유지’한다는 군대를 일러 ‘평화유지군’이라 하더라. 나는 맨 처음 이 말을 들을 때 누가 우스개로 지어낸 말인 줄 알았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군대를 보내 폭력을 쓰겠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이쯤 되면 이치에 맞고 안 맞고를 따지기에 앞서 그 뻔뻔스러움에 그만 기가 질린다. 자기네가 휘두르는 폭력만 정당하다는 오만 앞에서는 아무리 이치를 앞세우는 말도 소용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은 종종 일어난다. 다들 알다시피 오래전 권위주의 정부 시절 국회에서 언론법인가 하는 것이 ‘날치기’로 통과됐는데, 이 일을 두고 헌법재판소라는 곳에서 ‘불법으로 만들었지만 법은 유효하다’는 취지로 판결을 했다더라. 이를 두고 누리꾼들 비꼬기가 봇물을 이뤘지. ‘술은 마셨지만 음주는 아니다. 사람을 때렸지만 폭력은 아니다’와 같은 댓글놀이가 인터넷을 달구지 않았나. 이 판결이 놀림을 받은 까닭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면 우스개처럼, 적어도 좀 무안해하며 말하는 게 제격이건만 너무나도 정색을 하고 점잖게 내놓으니 놀림감이 되는 것이다.
또 한때 유행처럼 떠돌았던 ‘녹색성장’이나 ‘녹색개발’은 또 어떤가? 나 같은 어리보기가 생각해도 성장이나 개발은 도무지 녹색이 아니다. 푸른 것이 아니라 푸르스름한 것, 아니 푸르다가 만 것 언저리에도 못 가는 것이 성장과 개발이 아닌가.
‘강 살리기’라는 말도 그렇다. 강바닥을 파내고 강둑에 돌가루를 입히면 강은 죽는다. 흐르는 물은 가만히 두어야 산다. 이건 초등학생도 다 안다. 그런데 강바닥 파헤치고 콘크리트 둑 만들어 물을 가두는 걸 두고 강 살리기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만약에 ‘강을 죽이긴 하되 될 수 있는 대로 덜 더럽히면서 천천히 죽이겠다’는 뜻으로 그런 말을 했다면, 그건 ‘비폭력 강도’나 ‘친환경 폭탄’보다 나을 게 없다.
‘서민을 위한 감세’도 마찬가지다. 본디 가진 게 없는 서민은 세금을 조금 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감세’를 하면 가진 게 많아 세금을 많이 내는 부자들이 득을 본다. 중학생쯤만 돼도 다 아는 이치다. 어쨌든 서민도 세금을 조금 덜 내게 될 것이니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10원 덜 내고 100원어치 혜택을 포기해야 한다는 걸 숨긴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잔꾀요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같은 앞뒤 안 맞는 말들은 일부러 사실을 감추려고, 또는 본모습을 흐리려고 억지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그 본바탕이 속임수이며 거짓말이다. 그러면서도 거짓이 아닌 척하기 때문에 대놓고 하는 거짓말보다 더 나쁘다. 사람끼리 지킬 최소한의 약속인 말뜻을 마구 허물어 드디어 모든 말을 믿지 못할 말로 만들어 버리고, 끝내 사람끼리 지녀야 할 한 조각 믿음마저 깔아뭉개 버리기에 더 그렇다. < ‘누구나 쉽게 쓰는 우리말(서정오, 도서출판 보리, 2020.)’에서 옮겨 적음. (2024. 3.18. 화룡이) >
첫댓글 감사합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앞뒤 안 맞는 말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도록
말을 가려 쓰십시다, 우리!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