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중국인이었다. 그의 도착은 교우들에 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었다. 그는 견진성사를 주재하고 필담으로 고백성사를 들었으며, 성스러운 부활절을 축하하고 영성체를 주었다.
하늘과 땅이 환희로 진동하도록 이처럼 영광이 드러난 순간부터 조선교회는 모든 장애물을 딛고 계속 자라나서7년 뒤인 1800년에 이르러서는 신도가 1만 명을 넘게 되었다.
이 때 돌연 새로운 박해가 시작되었다. 중국인 선교사가 그 최 초의 희생자 중 하나였다. 그는 조선인 신도 150명과 함께 순교 자의 영관(冠)을 받았다. 순교자들 가운데는 특히 용기가 빼어 난 두 사람의 부인이 있었다.
박해가 잠잠해지자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다시 그리스도의 제단 아래 모이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제가 있을리 없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북경의 주교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공교롭게 중국에도 박해가 맹위를 떨쳐 성직자들이 너무 많이 희생당했던 터라 자신들의 영적 버팀목조차 잃은 이 불행한 교회는 남에게 성직자를 파견해 줄 겨를이 없었 이런 상황하에서 여러 해가 흘렀다. 유방제 라는 중국인 선교사가 마침내 조선에 파견되어 수도에 정착한 것은 1833년의 일이다. 그러는 동안 사도좌 대리 교구장인 브뤼니에르 신부가 같은 목적으로 중국과 타타르(만주) 를 건너 길을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 병에 걸려 몽골의 한 촌락 에서 고생하다가 그와 동행한 중국 사제인 고 신부의 손에 종부 성사를 겨우 받고 숨졌다.
3년 뒤인 1836년, 프랑스인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그리 고 뒤이어 사도좌 대리교구장인 앵베르 신부가 마침내 조선 전교 를 이어받았다. 이 때 조선인 신도의 수는 1만 명에서 4천 명으 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 신부 한 사람의 도움을 받으 며 이 세 명의 열정적인 프랑스 신부들은 도처에서 끊임없이 봉착하게 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2년도 한 되어 신도수를 9천 명 이상으로 늘려 놓았다. 이 숭고한 일꾼들은 구제주의 은혜 가 운데 성공을 거두어 가는 목자로서의 일을 즐거워했다.
그러나 곧 죽음이 그들에게 천국으로 안내하는 문을 열면서 땅에서의 일 을 끝마치게 했다. 그들의 영광스러운 순교는 1839년 9월 21일 에 일어났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약 1백 명의 신도들도 얼마 뒤 신앙을 증거하다 목숨을 바쳤다. 그들 중에는 열 살이 채 안 된 소녀도 여러 명 있었다.
앵베르 신부의 후임이 곧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에 입 국하기까지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병사들의 피에 굶주린 야만스러운 땅 조선은 그로 인해 믿음의 영웅들이 더욱 갈망하는 선교의 대상국이 되었다. 모두가 영원한 혼례의 웨딩드레스를 순교자의 자줏빛 피로 적시러 가는 영광을 부러워 했다. 조선국 선교를 자원하는 여러 지원자들 중에서 페레올 신부가 선택되었다. 만주 주교인 베롤 신부의 축성을 받은 뒤 그는 조선이 승리의 터전이 될 것을 희망하면서 역사(役事)의 터전으 로 서둘러 향했다.
그는 신앙전파를 위한 열정에 넘쳐 한시 바삐 전교지에 들어가 기 위해 온갖 묘책을 짜냈지만 교구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막에서 40년간 방황한 이스라엘 인들처럼 페레올 신부는 그에게 '약속의 땅'인 조선 입국의 기회 를 기다리며 만 6년을 보냈다. 조선교우들이 이 숭고한 고위성직 자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사이에 일어난 잔인한 순교의 실상을 이 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가슴에 품고 있던 자비와 사도로서의 열 정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또한 그가 사랑하는 천주의 발 아래에 뿌린 눈물과 침묵의 기도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드디어 1845년 10월 12일, 모두가 순교자의 아들이자 형제이며 부모인 12명의 남자가 탄 작은배가
조선의 강가에 닿아 페레올 신부를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