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에 바람은 불고
7월 10일 월요일, 닥터 폴 학원, 희란 엄마 산책, 채희무
청도의 하루가 밝았다. 한국의 서해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청도에도 거세게 다가오는 것 같다. 시편 잠언을 한번 다 읽는 날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 시편 탄원 기도를 드리니 아침은 더욱 밝아 왔다. 훈춘 출신의 희란 엄마가 지어주는 밥, 식사를 하고 공동체 예배를 드린다. 판단에 관한 메시지를 듣는다. 은혜를 받고 묵상하고 있으려니. 재원이가 좋으신 분이라고 어제 온 손님 한분을 소개해서 이국재 집사를 뵙게 되었다.
중국 남방 선교를 하시는 평신도 사역자이었다. 이 집에 자주 오는 것 같았다. 그는 주인 집 아저씨가 해군 사령부 예비역 통신 장교로서 영향력이 있는 분이라고 좋아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거하고 있는 곳이 좋은 곳이라는 사실. 중국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중국어 선생이 와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조금 있으니 점심 대접을 하겠다고 심선우 형제가 초대하는 전화가 왔다. 최 목사 가정과 함께 명인동으로 나갔다.
가는 길에 왼쪽 발, 통풍 앓던 곳, 발바닥이 아퍼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연락이 없던 형제가 찾아주는 것에 반가와 그의 사업 터 학원으로 향했다. 큰 건물 30층 중 8층에 위치한 아파트형 건물 사무실에 있는 학원이었다. 5년 동안 고생한 결과 그 결실을 이룬 공간이었다. 상담하는 손님이 원장 옆에 있어서 그 바로 옆에 사택으로 들어가 기도하고 있다가 서서히 만났다.
후배들에게 보여주는 자신의 성공한 사업장, 태동의 학원 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한국인 식당으로 이동하여 푸짐한 음식을 들며 한담을 나누었다. 두 동문이 한 교회에서 사역하지만 주님의 평안이 필요해 보였다. 평안한 식탁이기를 바라며. 식사가 끝난 후 오후 중국어 수업을 하러 일행들은 가고 나는 다시 학원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문 의사의 침을 맞으려 하지만 그 의사가 다른 곳에 출타하여 의료 도움을 받지 못하고 6시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중국어 수업은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업이 진행되면서 선생님과 신웅식 형제의 결혼 이야기가 나오며 모두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결혼 이야기가 수업 시간 마다 화제의 중심이 되었고 웃음꽃을 제공하였다. 수업 끝나고 바비큐 식사를 약속하는 것 같았다. 나는 숙박하고 있는 분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집에서 조용히 있다가 훈춘의 희란 엄마와 해변가 공원으로 산책 나갔다. 그곳에서 자갈 발 안마를 하며 아줌마가 늘어놓은 아픈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저씨가 일찍 돌아간 이야기, 예수 이야기를 하며 위로하고 돌아오니 희무 형제가 음식을 사와 대화하며 신앙 상담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혜라가 바비큐 파티 공납금을 준 것 같았다. 그래서 그가 마음이 풀어져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자리 같았다. 일상에서 조그만 평화라도 맛보는 자리는 행복한 순간을 제공하는 것 같았다. 조금 있으니 우리 일행들이 들어와서 주인 집 딸 현자를 불러 같이 예배를 드리었다. 7명이 드리는 예배 자리는 천국 자리와 같았다. 오늘의 하나님의 역사는 저녁의 대단원을 멋있게 장식하며 시 23편의 말씀으로 마감되었다.
주여, 내일도 어떤 역사를 보여 주시려는지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청첩장 국제 결혼
7월 11일 화요일, 윤지영 사모, 스메이화 혼인일정
어제 아픈 다리가 통풍 부위로 옮겨서 통증이 온다. 이 아픈 상태로는 선교 일정을 가질 수 없는데. 큰 무리가 된다. 걱정이 앞서지만 한편 또 주님이 감당할 만큼의 시험을 주실 테니까. 예수와 평화란 메시지를 준비하며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구절만 본다. 복음서에서 주님의 하신 말씀과 무언의 행동 장면을 찾아 새롭게 읽는다.
아침 식사를 하고 예배를 드린다. 주님의 평화를 전하니 무한 감동이 넘쳤다. 후 선생님이 어학을 가르치기 위해 문을 두드려서 경건의 시간을 마치고 어렵게 느껴지는 중국어 열심히 공부한다. 사성의 세계, 받아쓰기 시험을 보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다. 공부 시간이 마치고 식사를 하려니 최 목사 전화가 왔다. 홍 목사 윤지영 제자 부부가 점심 대접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공부를 잘 했던 윤 사모를 만나게 된 것이다. 다리가 불편해서 움직일 수 없었지만 내가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고급 식당에 가서 처음으로 귀한 음식을 대접 받는 자리이었다. 학생들은 음식을 들지 않아도 즐겁기만 한 표정이었다.
옛날이야기를 하며 동료 교수들의 안부를 묻는다. 세월은 흘러서 이곳 청도에서 제자를 만나리라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신기하고 놀랄 따름이었다. 절룩거리는 다리로 한국인 한의원에 갔다. 침을 맞고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오후 수업 기간에 맞추려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 돌아오니 다들 드러누워 있었다. 한 시간 수업을 하고 아퍼서, 침대에 가 혼자 묵상하며 통풍의 고통을 생각하고 있으니 중국 진통제를 사온다. 한참 쉬고 나서 저녁 식사를 하려니 나갔던 인원들이 물건을 사갔고 들어오는데, 거기에 스메이화 선생이 같이 들어온다. 그래서 한국 음식을 같이 맛있게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주인집 아줌마와 희란 엄마와 더불어 국제 혼인 이야기를 나누며 재미있게 성사할 것을 예상하고 시나리오를 짠다.
가지고 온 청첩장으로 혼인 날짜를 정하게 되고, 국제 결혼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즐거워하게 되었다. 농담으로 시작한 일이 진담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본다.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모두가 놀라며 스메이화의 적극적인 반응에 반가워하였다. 8시가 되어 예배를 드리며 모두 중국 말고 공시, 공시 (축하 축하)라고 말하며 축하한다고 박수를 쳤다. 저녁 예배 시간에 신웅식 형제의 흥분된 목소리로 설교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하루의 기적은 또 이렇게 일어나고 있었다. 주여 내일은 발이 깨끗하게 낫게 하소서. 아침 일찍 선교 사역지에 갈 수 있도록 인도 하소서.
중의원 치료
7월 12일 수요일, 통풍, 중국의원, 부흥회, 조다니엘목사
진통제를 먹고 자서 왼발이 아플 것이라 생각하고 잠에서 깬다. 7시 20분에 사역지에 가기로 하여 일행들은 움직인다. 하지만 통풍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발이 왜 아픈지 알 수 없었다. 식사를 하고 주인아저씨와 짧은 대화를 하며 말 문을 텄다. 신종진 한의사, 그의 형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한 인간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다. 자랑할 만한 형, 누구를 자랑하고 사느냐. 그것은 삶의 가치관이 달린 것이고, 자신의 대한 자리를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다.
다리 아픈 이유에 대한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누워 오전 시간을 보낸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오후에 중국어 수업을 한다. 스메이화의 중국어 수업, 짧은 기간이지만 집중적으로 매일 공부하니 어학이 많이 는 것을 느끼게 된다. 발 아픈 것을 완화하고 고쳐야 움직일 수 있기에 수업이 끝난 후 청도 대학 앞에 한의원을 가려고 나섰지만 스메이화는 가까운 중의원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전에 집 주위를 산책할 때 보았던 중의원으로 갔다. 말이 통하는 스메이화와 같이 들어가 통풍인 것을 말하고 피를 뽑을 수 있는지 물어본다. 의사는 뭐라 이야기 한다. 들어왔으니 치료를 받자고 생각하고 의사에게 맡긴다. 하나님이 치료하시지. 한국에서 보다 더 잘 치료를 하는 느낌이지만 확실하게 한 번에 많이 치료하는 느낌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원하던 중의원을 찾게 되어 치료받게 되어 기뻤다. 스메이화도 아픈 부위를 부앙 떠서 치료받아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쉬다가 저녁에 큰 빌딩에 있는 홍영주 목사가 사역하는 교회에 학생들과 함께 갔다. 가니 부흥회가 열리고 있었다. 조 다니엘 목사의 설교가 많은 위로를 주었고, 성령에 대한 좋은 이해를 갖게 하였다. 특히 아카펠라 찬양은 너무 훌륭하고 좋았다. 예배드리고 나오는데, 윤지영 사모가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세 자녀중 성준이 막내아들을 보여 주어서 안아주고 뽀뽀하고 앞으로 잘 크라고 50원 복 돈을 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주인집 딸 현자와 하숙생 희무씨를 위해 저녁 예배를 또 드렸다. 메시지는 이사야 53장 수난 받는 메시야에 대한 말씀이었다. 은혜로운 밤 시간이었다. 대구로 유학가려는 현자의 한국어 실력이 늘고, 예수 만나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니 이 고향집 가정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고 있었다. 28살 채희무, 재원이가 동갑내기라 친구가 되어 인생 상담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인도하시고 돌보시고 함께 하시는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었다.
주여, 오늘 하루 주님이 선교하시고 저희들이 그 손길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내일도 어학연수와 말씀의 역사가 크게 이루어지길 소원합니다.
한 영혼의 영접
7월 13일 목요일, 스메이화 친척집, 이흥연, 천진 소식
한국의 날씨가 좋지 않다는 소식이 들린다. 서울 서북부에 많은 비가 내려 물난리가 났다고 한다. 이곳 청도에는 오는 날 외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보름 동안 고향집 민박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우리의 존재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야 할 뗀데. 여느 때처럼 6시경에 일어나 화장실과 세면, 성경을 읽는다. 침대에서 보름간의 남은 기간, 혼자 여행할 걱정이 되어 기도도 할 겸 누워서 뒤척거린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리라. 아침 식사를 하고 또 한 손님과 인사를 한다. 완구점 사업을 하는, 고대 인문학과 학생을 둔, 분당에 사는 사업가를 만나서, 상견례를 하며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다. 사업이 예전과 같이 않다는 것. 어느 때와 같이 내 방에서 아침 경건회 시간을 갖는다. 오늘은 성령과 평화라는 제목의 설교 말씀을 나눈다. 성령 충만하기를 기원한다.
후령운 선생이 와서 중국어 공부를 한다. 이제 얼마 남지 공부 시간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하려 했다. 어학연수가 성공리에 마쳐가는 듯해서 뿌듯하고 하나님이 언어를 준비하게 하여 선교를 하게 하시려는 뜻을 발견하게 된다. 점심, 짜장면을 먹는다. 매일 새로운 식단으로 음식을 제공하는 손길을 보면서 주님이 세심하게 이끄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틀 전부터 신현자, 주인집 딸이 저녁 모임에 함께 하면서 주인집 부부가 대접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오후 수업 시간, 이제 신혼부부가 될 것이라는 사실에 놀라움과 질투의 눈이 엇갈리는 것을 느끼었다. 스메이화는 더욱 냉정하여 더욱 시험지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가르치는데 더욱 예민하게 임하고 학생들을 잘 인도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공사를 구분하는 지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어떠한지. 수업이 끝나고 학생 세명은 이촌 시장으로 선물 준비하러 가고, 사미화 선생의 초청으로 우리는 그의 친척 집에 방문하러 갔다. 신웅식과 나와 사 선생은 먼저 저스코 백화점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전에 사 선생님이 중국어를 가르쳤던 한동대 학생 철준이를 만났다. 서로의 상황과 지금의 만남, 혼인 이야기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좋은 계획이라고 내 아들과 동갑내기인 학생은 참으로 지혜롭고 현명하게 통역을 하며 축하를 해주었다. 서울에서 만나기로 기약하고 친척집으로 움직이었다. 택시타고 얼마가지 않아 병원 근처 한적한 곳에 마당 뜰이 있는 집에 그녀의 할머니, 아버지의 고모를 뵐 수 있었다. 그 분은 한국 전 때 해군으로 근무하였던 분으로 미군과 싸웠다고 자랑하였다. 과거의 불행한 역사의 흔적을 보며, 웃음과 유머, 축복과 사귐에 대한 사랑의 언어를 주고받으며 한 식구와 같이 친해졌다. 평화의 자리가 되었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식사를 하며 사랑과 관심의 눈길을 받을 수 있었다.
스메이화의 가정을 보며, 토요일 그녀의 친부모님을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오니 학생들은 아직 오직 않고, 손님 한분이 주인 아줌마와 같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인사를 하고 대화를 하다 보니 손님 한 사람이 다른 민박집에 오는지 여부에 따라 숙박을 해야 한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 집에 거하고 싶어 하는 단골 손님 이었다. 내 방에서 같이 지내자하고 같이 방을 쓸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와 대화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었다.
그는 만날 사람이 있다고 나가는 바람에 돌아온 학생들과 또 두 사람 현자와 채 형제와 같이 예배를 드렸다. 오늘은 현자가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재원이가 전도 메시지를 전하였고, 기도를 하여 영접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역사가 놀랍게 임한 자리였다.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은혜의 시간을 갖고 있는데 희란 엄마가 소식 하나를 전해 주었다. 천진에서 김다일 씨에게 전화가 왔는데 전화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공식 일정이 마치고 천진으로 가라는 주님의 표시(싸인)인가. 하나님의 예비하신 인도하심이 있는 것 같았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데로 움직이면 중국 선교는 성공하리라 확신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침대를 내주고 잠자리가 바뀌어도 주여 감사합니다. 이흥연씨에게 평안을 주소서. 12시에 들어온 그를 본다. 일기장의 펜을 들고 있는 나와 마주치며 말을 걸어오는 그에게 평안의 소식을 전하며 잠을 청하려 한다. 화장실에는 물이 넘치고, 피곤한 영혼들은 잠자리로 가고 아직 두 영혼은 1시가 되어도 들어오지 않고 있다. 그래도 그들에게 주님의 평안과 평강, 평화를 간구하나이다.
주여, 청도에 거대한 성령의 바람을 불게 하소서. 한 여학생의 영접이 그 바람의 시작이 되게 하소서.
보이차
7월 14일 금요일, 중국어 종강, 최 목사댁
통풍의 통증이 많이 가라앉았다. 거실에서 잠자니 잠을 설치게 된다. 청도에서 보내는 날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 고향집에 평화와 화평의 시간들이 오기를 기대하며, 잠깐 머무는 우리에게도 평안을 주는 것임을 알게 된다. 계속 세 사람이 돌아가며 전하는 말씀 속에 평화 메시지에서 주님의 임재하시고 역사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평화가 깃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침 식사를 하고 경건의 시간을 갖는다. 오늘 아침에는 이흥연 선생이 동참하여 예배를 드렸다. 재원이의 준비된 말씀, 로마서 8장의 바울의 고백을 듣게 된다. 어제 밤늦게 희무 씨와 해변 바닷가에 간 이야기를 한다. 공동체 선교 무리(팀)이 남은 일정이 얼마 되지 않는다. 며칠 남지 않은 상황이라 긴장된다. 어떻게 무사히 은혜롭게 이 선교 일정을 마칠 수 있을까.
후령운 선생, 최이규 목사, 그의 조카 조시온 형제가 방문하였다. 북한 선교 여행을 마치고 단동, 장춘, 북경을 들러 이곳 청도로 오게 되었다. 예수 전도단 일원으로 탈북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성경 통독에 참여했다가 은혜 받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하나님의 선교의 감동은 북한 동포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부쩍 들었다. 함께 기도하고 중국어 수업을 하였다. 후 선생의 발음 지적이 힘들었지만 계속 기초를 튼튼하게 하라는 말로 들렸다. 월요일 종강 모임하기로 약속했다. 오후에는 스메이화 선생의 9일간 수업을 정리하는 기말 고사를 보기로 되었다. 짧은 기간 중국어 수업이었지만 책 한권을 끝내는 성과를 가졌다. 빵을 사와 먹으며 책 걸이를 하였고, 신웅식 ․ 스메이화 혼담에 신기한 느낌을 가졌다. 공부의 한 결과로 한 쌍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해서 기뻤다.
연 날리러 가는 사람, 밖으로 나가 많은 추억거리를 만들려는 젊은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발이 불편해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사람, 각기 자유 시간을 갖으며 망중한을 보냈다. 조금 있으니 한국에서 오랫동안 배타고 온 일행들을 볼 수 있었다. 일기가 좋지 못해 연착이 되어 힘들어 하는 아저씨를 보았다. 한국어를 배우는 중국 여학생이 마중 나와 대화하는 모습이 별로 보기 좋아 보이지 않았다. 중국의 한 세태를 보여 주었다. 태산을 가기 위해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키 큰 여학생을 보았다. 민박집에 차고 넘쳐 다른 가족의 집으로 손님을 보내는 모습을 본다. 우리가 이 집에 머물러서 복이 넘치는 모습이 아닌가.
저녁 식사를 들고 최 목사 집에 방문했다. 좁은 공간이었지만 큰 빌딩의 단란한 가정집이었다. 수박, 복숭아를 먹고 아주 귀하고 특이한 보이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즐겁게 하였다. 선교, 중국 이야기, 집구하는 이야기, 아이 이야기를 들으며 웃음꽃을 피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웃음을 많이 주시는가 보다.
내일의 일정, 라오산 가는 것, 스메이화 고향 집에 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일찍 일어나야 하기에 헤어져 5분 거리의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 예배를 드린다. 주인집 딸이 예수를 영접하여 밝은 표정으로 찬양을 한다. 방 친구인 이형의 기도는 힘들게 한참 진행된다. 무언가 기도하는지 힘들게 끝내지 못해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그래도 주님의 인도하시는 역사를 본다. 청도에서 긴 하루는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주여 내일은 긴 여행이 있습니다. 라이양으로, 라오산으로 가야 합니다.
라이양의 용등
7월 15일 토요일, 스메이화의 고향집, 라이양, 영안
아침 일찍 서둘러 학생 셋은 최목사의 인도로 라오산 관광에 나섰고, 신웅식과 나는 스메이화 고향집에 가려고 일찍 밥을 차려주는 훈춘 희란 엄마 덕분으로 식사를 하였다. 그녀를 기다렸다가 이윽고 그녀가 와 시외버스 정거장으로 택시를 타고 움직이었다. 스메이화의 표정은 밝지 않았지만 예쁘게 하고 나왔다. 신랑 될 한국 사람과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라 가벼워 보였다. 날씨는 좋았다. 조그만한 버스에 몸을 실고 지정해준 자리에 앉아 기도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고 시골로 향하였다. 스메이화는 연속 나의 표정을 살피는 것 같았다. 집에 가서 부모님의 반대를 반전시켜 달라는 눈치처럼 느껴졌다.
청도에서 처음으로 연대, 대련 쪽으로 북진하는 버스를 타고 외곽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속에서 푸른 나무와 식물들을 보며 가슴이 활짝 뜨였다. 2시간 반 가량 달려 큰 길에서 내려 조그만 봉고 차를 갈아타고 영안 마을로 들어섰다. 조용하고 편안한 구릉지가 병풍처럼 둘러 서있어 평화스런 마을이었다. 지형을 보면서 인물이 나올만한 아름다운 마을이라 생각하였다. 중국 시골집에 자주 가보았지만 대문앞 용등봉청(龍登鳳淸)이란 팻말이 붙은 것을 처음 보았다. 무엇인가 영원을 추구하는 마을 중심의 가문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손자와 함께 집 앞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딸이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빠가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볼 수 있었다. 딸과 신랑 될 사람이 온다니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푸짐하게 음식을 차렸다. 어머니는 인자하게 생기셨다. 잘 생긴 다정한 아버지는 예수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며 간간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마다 스메이화는 자기감정을 그대로 노출하며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때가 되어야 부모가 이해할 것이라 말한다. 고모와 고모부가 참여해서 마치 양부모 앞에 상견례 하는 자리처럼 보였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일이 진행되었는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한국남자와 중국 여자가 한 가정을 이루는 것. 그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는 이해 한다는 듯, 딸이 계속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것과 결혼 시킬 돈이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분은 눈물을 글성 글썽 이면서 딸의 앞날이 걱정스러운 듯 몇마디 늘어놓았다. 그래도 믿을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보증인 후원인으로 참여한 나는 제 역할을 다하려 했다. 주님의 인도하심이 어떨른지. 육중한 식탁. 귀한 음식 대접에 기분이 좋았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 같아 좋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내려 우리를 축복하였다. 청도 버스 정거장에 도착하여 기차 역전과 항구가 가까워서 산책하며 멋있는 해변을 바라보았다. 한국 반도가 가까운 것을 생각하며 비록 둘이 떨어져 있어도 둘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이곳 해변 가까운 곳에서 기다림과 결혼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녀가 한층 밝아진 표정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이층차를 타고 노신 공원, 해수욕장, 증산 공원을 지나 산부다점 앞에 내려 집에 도착하였다.
피곤하여 씻고 이틀 동안 자리를 내준 침대로 가서 눈을 붙였다. 밤에 돌아온 일행들이 예배를 드리기를 청하여 찬양 기도 말씀 시간을 갖고 다시 꿈속에서 주님을 만나려 했다. 주여, 중국 선교를 위한 아름다운 가정이 되게 하소서. 주일날 평화의 메시지가 또 울려 퍼지게 하소서, 샬롬.
마지막 만찬
7월 16일 주일, 이흥연 취직, 최후 만찬
청도에서 마지막 주일이다. 한국은 장마, 홍수로 난리가 났다고 하는데 걱정이다. 아침 저녁 경건회 예배로 인해 민박집에 온 사람 두 명이 전도되고, 밖에서 전도된 여학생 두 명이 교회에 가겠다고 하여 우리 학생들을 만나 따라왔다. 태동으로 간다. 이흥연 씨와 함께 어제 시골행 이야기를 하며 강권적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일을 말한다.
10시에 한국 미국인 중국인 찬양에 참께 참여하여 아름다운 아카펠라 찬양을 한다. 영적 치유를 느끼는 시간이다. 11시 예배에 평화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다. 새로 참여한 전도한 두 사람, 심선우 집사 등, 모두 스메이화 이야기에서 은혜를 받는다. 친교(코이노니아)에서 아름다운 교인의 사귐이 있었다. 어떠한 대화보다는 성도간의 대화는 편안하고 아름답고 즐거웠다. 엠피쓰리(MP3)를 이별의 징표로 사달라는 스메이화 자매의 요청에 신웅식 형제가 함께 손잡고 시장을 향하는 것을 보고 택시를 타고 나는 집으로 향하였다. 이흥연 형제는 전에 만났던 사람이라고 심원장이 모시고 같이 나간다. 강의 자리를 줄 모양이었다.
집에서 쉬다가 마지막 날 만찬, 초청 주인(호스트)은 심선우 형제이었다. 샤브샤브 요리를 제일 잘하는 식당으로 갔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 옆의 식당으로 가야 했다. 15명이 모여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스메이화는 예수 제자 수와 같은 13명이 모였다고 하였다. 최영광과 은혜, 최목사의 자녀까지 셈을 하니 십오명 이었다. 마지막 만찬이라고 하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가. 야야기 꽃이 피고 각가 이별의 시간을 앞두고 결혼 이야기와 정든 친구의 헤어지는 것, 사역지가 나뉘는 일, 중국 형제 자매의 거취, 학원 일의 동참, 사업 정리하는 형제, 한국으로 떠나는 선교팀 등으로 각각 처지와 여건이 달리하는 모임이었다. 최후 만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었다. 그가 함께 함으로 당신의 선교 역사는 이루어 가신다. 평화의 선교는 아름답게 마무리 되고 있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리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최목사 부부와 함께 자리였다. 태동 교회를 같이 섬기는 길에서 분리되고 있었다. 닥터폴 학원과 그 건물의 이용하던 관계에서 벗어나, 새로 선교 사역을 확대하는 차원이었다. 바울과 바나바의 비시디아 안다옥 사역에서 분리된 것처럼 사역의 분리가 이루어지는 것을 감지하는 대목이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며 하나님의 손길을 살피는 순간이었다. 그의 집이 있는 빌딩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저녁 예배를 드린다. 재원이의 메시지로 하루 일과를 마감한다. 마지막 선교의 예산, 회계 보고 정리를 하자,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자리가 되었다. 모두가 은혜 가운데 평안함을 느끼며 내일 하루 남긴 일정에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준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주여, 내일은 우리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갑니다. 무사히 돌아가게 하시고, 저의 남은 일정도 잘 인도해주옵소서.
통일 무지개
7월 17일 월요일, 평양관, 천진행
그리스도대 길림 청도 선교 일정이 끝나는 날이다. 하나님께서 매일 매일 인도하시는 모습은 참으로 놀라웠다. 심선우, 최이규, 박경순, 홍영주, 윤지영 동문들이 사역하는 곳, 청도에서 보내는 시간들은 이제 다 흘러갔다. 공동체의 평화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경건회 설교를 하였다. 11시 30분에 사은회 식사를 하기로 하여 북한 식당 평양관으로 향했다. 남북 통일의 염원을 가지고 바라본다. 북한 여성들이 식사 접대를 한다. 점심 정해진 시간이 되자 공연을 하는 것을 본다. 통일 무지개라는 마지막 노래는 역사의 필연적 과제가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고 있었다. 복무원들과 사진을 찍고, 신웅식 선생이 스메이화를 위해 카르푸에 가서 약혼 선물 목거리를 사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선물 준비하는 학생들을 보며 신 선생과 나는 집으로 향했다. 돌아와 쉬다가 주인집 아줌마가 준비한 우족탕으로 식사를 하였다. 마지막이라 감사의 뜻이 담긴 음식이었다. 맛있게 식사를 하면서 이 선교사의 이야기를 듣는다. 내가 목사라고 자신의 중국 여자와 새로운 결혼 이야기도 하고, 천진에 계신 한 목사님 전화번호도 알려준다. 이 대화를 통해 두 번째 표시(싸인)로 보고 천진 행을 주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해석하고 주인집 아줌마에게 천진행 기차표를 예약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 이흥연 선생이 닥터 폴 학원에 심선우를 마나러 간다고 하여 같이 산책을 가자고 하여 나섰다. 학원에 가니 한국에 갔다 온 사모님을 뵐 수 있었다. 상담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끝나길 기다렸다가 이야기를 나눈다.
교회 방향과 새 사역지를 만드는 최목사 이야기, 학교 이야기를 나눈다. 이흥연씨가 영문법 강사로서 학원에서 일하는 관계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선교 후원비 300원에 감사하며 나는 먼저 집으로 간다. 돌아오니 집은 주인집 가족 파티와 스메이화가 와 있었다. 학생들은 짐을 꾸리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조금 있다가 저녁 예배를 드렸다.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고 해서 주인아저씨가 처음으로 인터넷 설치한 전화로 집으로 하니 보증건 때문에 빨리 돌아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주님이 정해놓은 것이 있는데, 그리고 주님이 그 문제도 해결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마지막 시험이라 생각하고 돌아와, 불안해하는 스메이화를 해양대학까지 신선생과 바래다주고, 이별의 눈물짓는 그녀를 보며 우리는 돌아섰다.
중국 선교의 결과가 이루어지길 바라며 선교팀 들은 뒷 풀이를 하였다. 내일의 귀국행도 무사하기를 기도하며 하나님의 선교를 생각하며 밤 시간을 보낸다.
주여 감사합니다. 주님은 오늘 하루도 승리하게 하셨군요. 내일도 기대합니다. 천진행의 행군을 주여 친히 이끄소서.
청도의 마지막 날
7월 18일 화요일, 선교팀 귀국, 천진 도착, 자매 민박
오늘로서 중국 단기 선교팀의 일정은 끝나는 날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선교 기간이 아쉽게도 끝나게 되었다. 이제는 나홀로 하는 선교기간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다. 마지막 식사를 민박집에서 하고 아침 예배를 드린다. 재원이가 예배를 인도한다. 재치가 많은 혜라는 이번 여행을 통해 선교 정신(마인드)이 많이 생긴 것 같았다. 혜은이는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은 딸이라 밖에 생활이 어려웠는데 많이 생각이 바뀌고 넓어진 것 같았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두에게 넘쳤다. 학생들은 10시에 공항으로 가기로 하여 짐을 꾸리려 하는데, 갑자기 아주머니가 천진행 기차가 오전 10시 40분이라 말하여 내가 먼저 청도에서 떠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빨리 청도 하늘에서 내보내는 것을 느끼며 짐을 꾸려 나왔다. 왜 먼저 떠나게 하는 것인가. 내가 가지고 있던 성경책을 흥연이 형에게 주며, 본인이 정신병이 있다고 해서, 그 책이 정신병 치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권면하였다. 친절하게도 흥연이 형은 차비 거금 200원을 주며 청도 역전까지 데려다 주었다. 짧은 기간 같이 하며 침대를 빌려 준 것이 감동을 주었는지. 바닷가를 한번 쳐다보며 바다 같이 넓은 마음과 꿈을 갖자고 말하고 헤어졌다.
최이규 목사가 준 성경책을 가방에 넣고 청도발 북경행 침대차(워푸)를 타고 정들었던 도시를 벗어났다. 시골 길을 보며 천진을 향해 기차는 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싸인을 보고 천진을 향하는 길이다. 중국 침대 기차를 타며 그들의 생활상을 체험하는 첫 기회가 되었다. 낮에 기차에 누워 8시간 여행하는 것은 큰 나라에서는 평이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생소하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천진 서역에 도착하니 마중 나온 사람이 없이 민박집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조건 떠난 천진행, 하나님의 부르심 따라 떠난 여행이었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는 여행이 이와 같지 않았는가 생각이 든다. 중국돈 1000원의 여행, 17일간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예산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바랄 수밖에 없는 여행이다. 이 돈도 여러 사람들이 청도에서 후원해 준 것이다. 태동 교회 300원, 신웅식 100, 재원 40, 이흥연 200원 등이다. 천진에서 내려 택시 운전사가 붙어서 짐을 맡기니 그의 아내가 전화를 들고 내 수첩에 적인 송범석, 김다일의 전화를 눌려 민박집으로 인도한다. 가려했던 송 선생님의 인도는 무산되고, 두 번째 김 선생의 추천 민박집으로 향했다. 아마 시설이 좋은 민박집을 소개하려는 의도인가 보다 부둣가 민막 집은 갈 수 없었다. 천진 선교사들이 많이 간다는 집은 알 수도 없었다.
택시 운전사가 내려놓은 청화리 아파트에서는 민박집을 찾을 수 없었다. 내리기전 그 딸에게 복 돈을 주었어도 소용이 없었다. 걸어서 원화리 아파트로, 한국 사람을 찾을 수 없어서, 택시에서 봤던 고향 산천 식당으로 갔다. 거기서 다시 김다일 씨에게 전화 한다. 민박집에서 데려 올 것이라고 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사람은 오지 않는다. 주인집에서 전화하여 집 위치를 가르쳐 주어서 가랑비가 내리는 길로 다시 걸어가는 곳을 택시가 처음에 내려준 곳이었다. 광야 길을 뱅뱅 돌아도 원점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과 비슷하였다.
집에 들어서니 한국 사람들이 서넛 있었다. 2층에는 조선족 청년들이 5명이 모여 있었다. 상해에서 출장 온 젊은이들이었다. 100원 짜리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주님 여기는 너무 비쌉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명을 가지고 온 줄 아는데, 무엇인가 보여주옵소서. 꿈속에서 그 비전을 보여 주소서. 학생들은 무사히 집에 돌아가서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당구 해안에서
7월 19일 수요일, 탄구(당구), 주윤종 장로
천진에서 첫 아침을 맞는 날이다. 홀로 움직이는 선교 여행이다. 송범석 목사님은 연락이 안 되고 김다일 씨도 오지 않는 가운데 계속 천진에 있어야 하는가. 회의감이 들어 북경행을 생각하게 되었다. 전화를 하고 나서 김선생을 기다리기로 하고 부둣가 탄구로 가서 선교사들의 거점이라는 민박집을 찾기로 하였다. 1.5원 짜리 천진역 버스, 5원 짜리 탄구 행 버스를 타고 천진 시내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시내를 벗어나서 시외를 향해 2시간가량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거리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시민들이 많이 눈에 띄었고, 청도만큼 발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탄구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은 바닷가 위락 시설이 잘 되어 있는 관광지였다. 바닷가 주위를 거닐며 선교 여행을 이끈 수고를 스스로 축하하며 위로받으라는 주님의 싸인으로 알고 즐기었다. 간판이 한국 음식점과 커피점이 있어 들러 민박집을 물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식당에 가서 간단한 만두(매주 탕면, 5원)를 시켜 먹고 한국 간판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왜인걸 한국 사람들은 한명도 없는 중국 식당이었다. 한국 풍을 좋아하는 중국 사람을 겨냥한 음식 장사 속이었다. 헛걸음 한 것을 알고 발걸음을 돌렸다.
먼 여행을 하고 집에 도착하여 샤워하고 한 잠을 청하였다. 수요 예배를 드리려 시간을 알아 두었다. 7시 30분에 한인 예배가 있다고 하여 저녁을 서둘러 먹고, 천탑 옆 홍빈관으로 갔다. 천문 기상을 맡고 있는 천탑은 남산 타워처럼 웅장하였다. 그 옆에 있는 5층 건물 중 홍빈관 4층의 홀에서 한국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복된 천진 한인 교회였다. 담임 목사 배 목사님은 출타 중이었고, 조재삼 장로라는 분이 예배를 인도하였다. 거기서 주윤종 장로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분을 하나님이 만나게 하신 분이라 생각하였다. 그 분은 문서 사역을 10년간 해 오신 귀한 분이었다. 예배가 끝마치고, 그분의 인도로 사무실을 들러 다음 예정지를 계획하고 그 분 댁에서 잠을 자기로 하고 다음날 새벽 예배에 참석하기로 했다. 끝나고 조 장로님의 차로 다시 민박집에 돌아가기로 하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신기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선교는 계속 되고 있었고, 북경으로, 하얼삔 오산까지, 길림성으로 갈 예정이다. 주여 끝까지 가겠사오니 저를 써 주옵소서.
북경에 성경책
7월 20일 목요일, 북경, 전환필
천진에서 3일째 맞는 날이다. 어제 만난 주윤종 장로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 4시에 기상, 5시에 홍빈관 4층, 예배당으로 가서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중국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절한 생존의 비결이 이 기도의 결과라는 사실을 보게 하였다. 예배가 끝난 후 성경책 가방을 들고 설교를 한 조재상 장로님 차에 실고 주 장로님과는 헤어 졌다. 성경책 전달하는 사명을 맡은 것이다. 장로님이 사는 곳 청화리는 내가 묵고 있는 민박 잡과 가까웠다. 집에 돌아와서 한숨 더 자고 아침 늦은 시간에 식사를 달라고 하여 먹고 피곤한 몸을 풀려고 더 잠을 청하였다. 청도에서 만났던, 천진으로 오라 했던 그분은 연락이 없고, 한남 민박집은 찾을 수 없었다. 송범석 목사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의 선교를 열심히 하던 선교사의 부고를 듣는다.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일찍 데리고 가시는지 모를 일이다. 심양에 왔던 손님을 맞이하러 가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성경책을 받고 보니,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아 하루 100원의 숙박비가 만만치 않았다. 기다리는 분이 전화 정지당한 사실을 알게 되고, 연락도 주지 않고 있으니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주인아줌마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 사장과 통화를 하고 바로 천진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1시간 20분 만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박 사장 이란 푯말을 보고 마중 나온 분을 만나 택시를 타고 왕징이란 곳으로 가게 되었다. 이곳에는 한국인이 5 만명 이나 사는 곳이라 한다. 높은 아파트 10층에 있는 집에 들어가 노부부의 살림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북경시내는 복잡했고 매연으로 희뿌연 공기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나라 중심부에 들어오니 감회가 달랐다. 드디어 중국의 예루살렘에 왔구나. 이곳에서 주님은 무엇을 보여 주시며 어떻게 장춘으로 이끌어 가실까. 이제 탄환도 떨어지고 500원 정도 남은 것으로 버티기 힘든 상황인데, 10일을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주여, 도와주소서.
성경책 사역을 하며 중국 복음화에 열심을 냈던 분들, 한분은 뇌출혈로 반신불수 상태에서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또 한분은 사업이 잘 안되어 고전하고 있는 상태이었다. 하얼삔의 김매남 씨는 연락이 안 되고 있다. 하나님 내일은 친히 인도해주옵소서. 성경책은 전달했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동북행 바람
7월 21일 금요일, 지동선, 천안문, 혜림행
바람이 분다. 왕징(望京) 아파트 10층 침대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잠을 깨 이불을 덮었다. 오늘은 어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올까. 거실에 나가보니 음식을 준비하는 할머니, 집사님은 중풍을 고치려 운동 나가셨다. 옛날 어렸을 때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셔서 집에만 계셨던 것을 기억한다. 요즈음 통풍으로 걷기가 불편한 상태에서 여행을 하고 있어 상당한 기도가 요구되고 있다. 하나님 도와주소서.
아침 식사를 차려 놓고 할머니는 민박집 밥을 해주시기 위해 나가셨다. 성경책을 펴서 읽으면서 집사님을 기다려 식사를 하려 했다. 조금 있으니 전 집사님이 들어오시어 아침밥을 같이 먹었다. 부흥회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을 듣는다. 주은래 이야기를 듣는다. 모택동의 책사로 그는 신앙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골방에서 기도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유골을 비행기에서 뿌리라고 해서 반은 중국 상공에서 뿌리고, 나머지는 대만 상공에다 뿌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찬송가 샘물과 같은 보혈이라는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고 들으며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1974년 그 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통해 전도 되었다고 한다.
9시에 교회에 가서 인터넷 검색을 하기로 했다. 걸어서 같이 나가 30층 빌딩에 4층에 위치한 조선족 소망 교회에 들어갔다. 그 교회는 김희 라는 51세 여자 목사가 이끄는 교회이었다. 곽선희 목사가 후원하는 교회이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지동선이라는 청년, 40세 노총각, 신앙의 열정이 대단한 사람을 만나게 하였다. 그와의 만남이 새로운 여행을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하얼삔 목단강, 혜림을 가기로 한 것이다. 나는 삼일 후 다음 주 월요일 움직이자고 하니, 그는 내일 동북으로 가자고 제안하였다. 좋다고 하고 점심 식사를 내가 사고, 천안문 구경을 하자고 했다. 같이 다니며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국의 형편과 공산당 창립 구성원(멤버) 이야기, 1년간 한국 선박을 타고 조타수가 되어 항해하던 이야기, 교회 개척하던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야기꽃을 활짝 피우며 10일간 같이 하기로 했다.
기온이 35‘C 웃도는 찌는 듯한 날씨로 그늘을 찾아야 했다. 천안문에서 근방에는 많은 공안들과 사복형사들이 곳곳에서 사람들의 동정을 파악하고 있었다. 천안문 사태로 데모가 일어나지 않는지 항상 살피는 곳이 되었다. 정권 유지에 만전을 기하려고 저항(데모)의 씨앗을 없애려 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전철을 바꿔 타고 다시 왕징으로 돌아와 내일 아침 9시에 하얼삔으로 떠날 것을 전 집사 가정에 말했다. 저녁 식사를 하며 이별의 담소를 나누었다. 이 여행을 통해 무엇을 이루어 주시려는지. 꿈나라로 들어간다. 내일은 짧은 북경 여정을 마치고 다시 천진으로 목단강을 향하여 여행한다.
빨리 떠나라
7월 22일 토요일, 북경-천진-심양
오늘 북경을 떠나는 날이다. 중국의 예루살렘을 빨리 벗어나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동북 3성을 가자는 약속대로 아침 식사를 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변경된 시간을 알리려 전 집사님을 만나러 간다. 지 전도사가 있는 교회로 갔다. 가는 길에 전 집사님을 만났다. 길거리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며 다음의 만남을 위한 기약을 하게 되었다. 교회에 가니 조용기 목사의 육성이 컴퓨터를 통하여 울려 나오고 있었다. 누워 있는 전도사에게 준비되었다고 알리니 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한다. 나와 해피 하우스 커피 집에서 기다렸다. 아파트와 오피스 건물이 있는 빌딩이라 무인 신호 장치, 안전 출입기가 있어 오가는 것이 용이하지 않은데 주님이 키가 되셔서 인도하는 손길도 느낄 수 있었다.
손님이 없어서 컴퓨터를 하며 혼자 주인이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 열린 공간에서 밖을 왔다 갔다 하면 한동안 인기척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영희 씨가 나와서 손님이 있는 것을 알고 커피를 주문받는다. 대화를 하며 전도를 하여 북경에 성경책을 가지고 갔던 것 중에 견본(샘플) 하나, 중국 성경 책 포함 책 세권을 주었다. 예수 믿으라고 건네주었다. 순순히 내가 묻는 질문에 답한다. 불행한 인생사를 이야기 해준다. 왜 개인의 이야기를 다 이야기 하느냐고 반문하니 자신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훈춘에서의 아픈 이야기를 묻고 고향에도 못 내려간다고 하였다. 언젠가 훈춘에 가자고 말하고 나는 동북으로 간다고 했다. 그 책을 잘 보라고 하고 지 전도사에게 상담을 잘해주라고 부탁한다.
짐을 꾸리고 내려와서 북경을 빠져 나와 다시 천진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가는 길에는 5원이 싼 버스를 타고 갔다. 서민들이 타는 버스 안 풍경을 경험할 수 있어 좋은 기회이었다. 중간의 남은 공간에 간의 의자를 놓아 타고 가는 만원 버스이었다. 조그만 의자를 빈자리에 놓아 움직일 수 없는 차, 사람들은 천진까지 가는 길에 모두 그 자리에서 꾸벅 꾸벅 상대방에게 기대어 조는 모습이었다. 천진에 와서 밤차로 심양에 가기로 하였다. 저녁 침대차에 타고 심양을 향해 가는 이유는 무엇인지 몰랐다. 강행군과 저녁 시간 이용하기, 빨리 북경을 빠져나가 동북을 빠르게 보기 위한 것이었다. 천진에서 잠시 있는 시간에 전화 두 통화를 한다. 김 씨와 주장로에게 안부를 물었다. 지전도사가 천진에서 개척 교회를 하며 직장 생활을 하던 곳이다. 천진 시내를 들러보고 음식을 사서 밤길에 올랐다.
오후 4시 30분에서 새벽 5시, 12시간 기차를 타고 가는 장거리 여행이었다. 기차에서 일박을 하는 체험을 가졌다. 심양은 일제시대 봉천으로 중국의 주요한 도시로서 동북의 심장이었다.
주여, 빨리 예루살렘을 떠나 어디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주여, 이곳에 무엇을 보여 주시려 하시는지. 감사합니다. 이 여행을 허락해주셔서.
압록강 물
7월 23일 주일, 심양-동관교회, 서탑교회, 단동
새벽에 기차에서 내려 심양 역전으로 나가니 거리는 조용했다. 날이 밝아와 맥도날드 음식점에 들어가 쉬며 성경을 보다가 가이드, 돕는 천사역의 지전도사가 세면을 하고 나오자, 로스 선교사가 세운 동관 교회에 갔다. 차 안에서 그 교회 가는 할머니들을 볼 수 있었다. 교회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 예배당 밖의 의자에 앉아 예배드리는, 아름다운 정원 교회 모습이 펼쳐졌다. 한 천 여명이 예배드리는 것 같았다. 헌금을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가면서 헌금 통에 준비된 사람들은 넣는 것을 보았다. 이 교회는 4부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한 선교사의 씨앗이 100년이 지나서 그 열매를 거두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역사적 유적지인 교회를 빠져 나와 서탑 교회를 향했다. 그리스도의 교회 훌륭한 여성 지도자였던 고 신옥녀 권사님의 신앙생활의 얼이 담긴, 모교회에 방문하게 되었다. 옛날 교회는 양복점과 어학원이 들어서 있고 그 옆에 5층 건물의 현대식 건물이 크게 건축되었다. 그곳을 보니 호프 선교회, 차광철 집사님이 생각나서 주일 학교 모임이 있는 곳에서 한 선생님께 물어 보았다. 그 분을 안다고 하며 안부를 전해 주겠다고 하여 나와 서점에서 기다리고 있는 전도사을 만나 같이 심양역으로 향하였다.
오전 11시 30분 단동 행 열차를 타고 압록 강변을 향하려 했다. 기차 여행을 하며 보니 주위 환경이 산악 지역이었다. 강원도 산간 지역과 유사하였다. 단동에 도착하니 모택동 동상이 유난히 크게 보였다. 방을 잡고 압록강을 보러 갔다. 이곳을 보기 위해 그렇게도 먼 길을 달려 온 것이다. 그 만큼 강을 보는 감회와 감동을 컸다. 6.25 동란의 아픔을 담고 있는 끊어진 철교의 흔적이 있는 곳, 한중 우호교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관광지로서 이 철교는 비극적 역사의 현장을 보여 주고 있었다.
배를 타고 바라보는 북쪽 지역과 사람들의 모습은 초라하였다. 배에 타고 있는 중국의 중년 남자들은 북한 쪽과 중국 쪽을 비교하며 우스개 소리로 말하였다. 천국과 지옥의 모습이라 비유하며 언제 통일이 될 것 같냐고 물어본다. 10년 안에 될 것이라 대답하며 북쪽을 바라보는 내 눈에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눈물이 가득 고인 것을 느꼈다. 압록강물이 한 민족의 눈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숙소에 들어와 주일 주의 만찬을 하고 위로받고 잠자리에 들었다.
주여, 내일은 새벽 5시에 기차를 타고 다시 심양으로 하얼삔, 혜림으로 갑니다.
긴 여정 함께 해주옵소서. 마지막 여정의 또 다른 안내자를 보내주소서.
머나먼 기차 길
7월 24일 월요일, 단동-심양-목단강 혜림
한 많은 압록 강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 첫차로 심양으로 간다. 지 전도사의 고향집 혜림을 가기 위해 나선 여행이었다. 돌아가는 길이지만 기차 안 풍경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었다. 단동에 있는 최승준 선생님, 풀루웃과 클라리넷을 우리 가정에게 가르쳐 주던 분, 또 자주 가는 식당에서 일하는 조선족 아줌마의 식구는 만나지 못하고 이곳을 떠나야 했다. 기나긴 여행이 계속되고 있었다. 단동에서 목단강까지 1200km거리이다. 부산에서 회령까지 한반도를 가로 질러 갈 수 있는 여행 거리였다. 대국에서 기차 여행은 한마디로 시간 여행이다. 시간의 개념을 다르게 느끼게 하였다. 하루 만에 다 갈 수 있는 한국에서와 달리 며칠을 자고 가야하는 거대한 중국 땅, 이곳에서 여행은 생각의 폭을 달리하게 했다. 심양에 도착하니 10시 30분가량 되었다.
기차 안에서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찬양하던 지전도사. 그의 마음에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인지. 점심 식사는 다시 압록강 집에서 개장국을 먹고 허리 요통을 달랬다. 심양에 있는 차광철 집사에게 전화하려해도 통하지 않았다. 조선족이 운영하는 컴퓨터 방에 들어가서 메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양의 조선족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며 흩어진 민족사의 거리, 서탑에서 동족애와 한 많은 세월의 숨결을 느껴 볼 수 있었다. 저녁 밤기차로 또 여행길에 오른다.
앉아 가는 기차로 12시간 가야 한다. 기차 여행 시간을 궤고 있는 지전도사는 여행 경비를 줄이며 경제적으로 기차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밤에 잠을 자야 그 다음날 활동할 수 있기 때문에 침대차를 구하려 동분서주하며 애를 썼다. 네 번 움직여서 차장과 이야기를 하여 새벽 1시 50분경에 하얼삔에서 침대 자리를 얻어 잠에 들 수 있었다. 동북 삼성으로 가는 열차 길은 길고도 아주 길었다. 이번 기차는 지 전도사의 고향 혜림 역으로 데려다 주는 여로이다.
주여, 내일은 이 여행을 잘 인도해주는 전도사님의 어머님과 누나 매형을 만나는 날입니다. 좋은 만남과 평화의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아멘.
발해 제국의 터에서
7월 25일 화요일, 혜림-목단강-동성역 발해유적지-녹도
혜림 역을 빠져 나와 바로 시장이 있는 곳으로 가서 송어와 메기를 선물로 산다. 또 과일, 복숭아 수박을 사들고 시장 건물 위층의 누님 댁으로 들어섰다. 노모가 반갑게 맞아 주시고, 매형은 아침 식사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 만에 보는 된장찌개 식탁이었다. 정성스레 준비한 아침 식사를 하며 10년 간 한국에서 살다온 매형의 이야기를 듣는다. 한국의 빛과 어두움을 정확하게 이야기 하고 있어서 오히려 내가 배운 느낌이다. 지전도사의 상황을 할 수 있는 자리였다. 결혼을 해야 하고, 어머님을 모셔야 하는 장남의 역할, 교회 개척의 사명 등, 매형은 계속 처남에게 반복하여 교훈과 덕담을 하고 있었다.
조선족 가족 상황을 알 수 있었고, 조선족의 한국에서 차별받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점심 식사는 메기 매운탕을 끓여서 맛있게 먹고 발해 유적지를 향하였다. 목단강까지 마을버스를 타고 나와 동성역에 있는 발해 유적지로 빨리 빠져 나오듯 또 여행의 박차를 가했다. 차 안에서 19살 조선족 자매를 만나 발해 유적지가 있는 곳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삼륜차를 타고 쉽게 발해 제국의 유적지를 갈 수 있었다.
주후 200-600년 사이에 당나라 때 문화 유물과 유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고구려 발해의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중국은 자신들의 속국, 한 소수 민족의 왕궁터라 소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중국 문화 유적지라 주장하고 있었다. 우리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발해, 고구려 역사 유적지가 아닌가. 영토 문제로 자신들의 문화 유적지라 주장하고 있으니. 발해진, 발해라는 지명을 밝히고 있어 우리의 정통성을 밝힐 수 있는 좋은 장소이었다. 대조영으로부터 역대 왕들의 영정을 모신 그림을 볼 수 있었다. 발해 제국의 터가 동북 삼성의 평야 지역에 위치하여 쉽게 흥망성쇠의 궤도를 탄 것이었다. 성은 간 곳이 없고 유일한 건물 하나만 남아 그 당시의 위용의 한 자락을 보여 주고 있었다.
주위의 유적지 터를 살펴보았다. 그곳에 한국 역사 탐험 팀들이 버스를 대절하고 여럿이 와서 교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궁궐터가 5군데 흩어져 있어 돌아다니며 흔적을 찾아놓은 것을 밟아 보았다. 또 한 곳 다른 방향의 마을에 있는 청나라 시대 유적지에 가서 사당을 구경하였다. 우상이라고 빨리 빠져 나가는 지 형제를 보며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을 무언으로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그곳을 다음 기약을 하고 기차를 타고 연길에 가기 위해 녹도 역으로 향하였다.
계속되는 동북 지역 여행으로 몸이 몹시 피곤해 있었지만 우리 문화의 고향, 발해의 땅, 옛날 우리민족이 말달리던 곳 그 땅을 밟고 있다는 감격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 사실에 계속 유적지를 향해 발걸음은 옮기고 싶어 했다.
주여, 내일은 한 많은 두만강을 가려합니다. 내일 일정도 붙잡아 주소서.
선구자
7월 26일 수요일, 녹도(鹿道)-연길-용정-돈화
산악 지방 녹도(사슴이 사는 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어느때와 같이 아침 경건회를 하고 간단히 식사를 하고 연길로 향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마을 주위 풍광을 본다. 한가로운 시골 마을의 모습이었다. 먹을 것을 좇아 어스렁 어스렁 거리는 암캐, 옷짜기 위해 실을 푸는 아낙네, 일을 가기 위해 곡괭이를 메고 가는 노인, 연길행 버스는 만원이었다. 가는 길의 가로수와 풍경은 우리나라 농촌과 매 한가지였다. 산들과 마을 모습, 장백산(백두산)을 가기 위해 노년의 조선족 친구들이 함께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3시간 가량 달려서 도착한 연길은 한국의 거리와 비슷했다. 간판이 한자 옆에 한글로 쓰여 있어 조선 자치구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족들이 많이 있었다.
먼저 서 시장으로 가서 요기를 한다. 팥죽 한 그릇을 맛있게 먹었다. 주인 아줌마가 좋아 보여 옆에 옥수수 죽도 청한다. 그 분은 시골 아줌마의 정감 있는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감사하다고 말하고 연길 기독교회당으로 갔다. 교인 2000명이 주일날 모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회에 가서 구경한다. 기도실에 권사님들이 이어서 기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기도 수첩(장부)를 보며 교회 존재 이유의 뿌리를 보는듯 하였다.
연길 역전에서 용정(화룡)가는 버스를 타고 윤동주, 문익환의 용정 중학교(대성)를 생각하며 갔다. 지 전도사는 일송정으로 인도해서 그곳에 조선족 기업가들이 세워 놓은 탑과 소나무를 볼 수 있었다. 혜란 강이 그 옆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선구자들이 말달리던 모습이 보이는 듯, 조선족 사람들이 정자에 와서 맛있는 것을 먹으며 놀고 있었다. 빨리 움직이는 바람에 조선족 시인이 쓴 시를 스쳐봐야 했고 강경애의 시비도 그냥 지나쳐야 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조선족 처녀 두 명이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한국에 나갈 꿈을 꾸고 있었다. 아리따운 조선족 처녀들, 한국 꿈에 젖어 있는 조선족 바람에 그들도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연길에 다시 도착하여 교회당에 들러 성경 시디를 사서 역전으로 갔다. 맡겨두었던 짐을 찾고 허기진 배를 달래려 함흥식 개장국 밥을 먹고 또 이동하였다. 길림가는 기차표가 떨어져서 돈화로 가기로 했다.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조선족 지동선 전도사 덕분에 여행의 묘비를 느끼며 즐길 수 있었다. 편한 자리에 앉아 3시간 가량 가서 돈화 기차역에 도착하였다. 길림 가는 장춘행 침대 버스를 타려고 하니 한 사람 당 60원을 내야 해서 내일 떠나기로 하였다. 주위에 초대소(여관)에 가서 짐을 풀고 목욕탕에 간다. 목욕재계, 5일간 강행군에서 지친 몸의 온갖 찌끼를 깨끗이 씻으려 했다. 내일 길림에 입성하기 위해 세례를 받고 들어가라는 의미인지. 내일은 20일 금식 기도하고 보식하고 있는 안 전도사를 만난다고 한다.
주여, 내일의 만남도 축복하셔서, 윤동주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