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이후의 삶
요21:15-17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축복의 새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승리의 날로 선포하신 부활절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믿음을 고백하는 벤츄라교회의 모든 성도가 되시어서, 구원의 은혜를 넘치도록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저희는 구원받은 존재입니다. 아멘
그렇다면 이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목회 현장에 있을 때도 그렇고, 목회 현장에 한발자국 떠난 후에도 늘 목회자로서의 고민은 있습니다. 우리는“구원받는 자의 삶을 살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며, 자신의 신앙을 자랑하지만, 속으로는 어디가서 예수 믿는다고 말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구원 받은 자의 삶, 이것은 집사냐 권사냐, 몇 년을 믿었으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목사로 할지라도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듯 합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여러분은 과연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고 계신가요?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에 일어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우리가 받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믿음의 서약식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저의 연애와 결혼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저는 아내와 교제 중에 강원도로 목회를 나갔고, 장거리 연애를 하느라 속도위반 티켓도 여러번 끊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아내와 결혼하기 전에 저는 아내로부터 2번이나 차였습니다. 잘 사귀다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더군요. 그러다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고 또 헤어지자고 해서 헤어졌습니다. 헤어지자마자 선배 목사님들이 전화가 왔습니다. 일주일이면 정리되지. 마음 정리되면 말만해라. 바로 소개시켜주마... 그런데 정리가 안되더라구요. 그때가 연말인데, 시골에서 20일 새벽기도회도 하면서, 제가 하나님께 지금의 아내를 소망하며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3개월쯤 지났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저를 목회자로서 사랑해 주셨고, 기도해주셨던 고 김미호 권사님과의 만날 일이 있었습니다. 그 약속 자리에 가는 길에 권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당신은 약속 자리에 못나오신다고.... 대신 다른 사람이 올 거라고.. 그 사람이 바로 지금의 제 아내입니다. 일부러 이중으로 약속을 잡고, 저희가 만나도록 자리를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다시 마음이 연결되어, 결혼에 이르게되었고, 이제 26년차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때를 돌아보면 사랑하며 연애하는 마음과 결혼에 이르는 마음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특히 제 아내 입장에서는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매주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 부부는 그 마음과 확신을 결혼 서약서에 담아 하나님 앞에, 주례하시던 목사님 앞에, 그리고 저희를 키워주신 부모님과, 형제, 친구들 앞에서 선포하고 서약했습니다. 저희가 했던 서약서는 아니지만, 요즘 결혼 서약서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그대를 남편으로 맞이합니다.
함께한 날보다 앞으로 함께할 날이 더 많음에 행복합니다
진실한 눈빛, 해맑은 웃음
한마디 말에도 따뜻한 배려가 있는 당신
그런 당신을 존중하는 아내가 되겠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들어주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준 당신, 당신이 곁에 있음에
언제나 감사하는 아내가 되겠습니다.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것을 다짐하며
지금 이 마음 그대로 영원히 함께 할 것을
참석하신 여러분 앞에서 맹세합니다.
요즘 말로 손발이 오글거리는 서약서 같습니다. 그러나 결혼 서약서를 서로에 대한 믿음이며, 약속이며, 선포입니다.
이같은 관점에서 본문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3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5, 16, 17)
베드로는 어떤 존재입니까?
지난 3년간을 제자로서 함께했던 존재입니다. 12명의 제자 중에 가장 믿음직한 존재였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으로 말아 그 고백 위에 교회를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축복을 얻는 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의 고통을 당하실 때에는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말씀에서 “사랑”을 “믿음”으로 바꾸어 보겠습니다.
“네가 나를 믿느냐?”
이제까지 제자로서도 살았고, 배신자로서도 살았지만, 이제 최종적으로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약속과 선포를 요청하신 것입니다. 저는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질문들을 반복하시는 것을 보면서 본문을 “믿음의 서약서”라고 이름지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향했던 질문이 부활절에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네가 나를 믿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 앞에 여러분은 어떤 고백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 앞에 베드로와 같이 믿음의 서약, 영적인 결혼의 서약을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담임 목사님 앞에, 그리고 성도님들 피차간에 고백하시고 선포하시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반석 위의 백성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6-27)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1990년도에 서울의 효창교회 신학생으로 학생부 수련회를 강원도 홍천강에 진행했습니다. 수련회 장소를 찾던 중 강가에 넓은 모래턱을 발견했습니다. 강가 바로 옆이었고, 아름다운 곳이었고, 텐트 치기도 좋아서 그곳에 자리를 잡고 수련회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둘째날 밤으로 생각됩니다. 잠을 자다가 새벽 5시쯤 문득 잠이 깨서 텐트 밖을 보니, 밤새 비가 와서 강물에 모래턱이 깎여 나갔고 텐트 앞 불과 1미터 앞에서 강물이 거세기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강물이 이제 곧 텐트로 들이닥치기 직전이었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학생들을 깨우고, 짐을 들고 강가를 벗어났습니다. 평화롭던 수련회가 순식간에 피난민이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잠이 깨지 않았다면 저를 비롯한 수십 명의 학생들이 물에 휩쓸려 죽었을 것이고 9시 뉴스에 나왔을 것입니다.
우리는 요즘 비가 내리는 시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로만 살아가 최근 3년을 조금 넘게 비즈니스를 했습니다.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일이 있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어려움은 기본이었습니다. 제가 사업을 시작했던 2021년 11월에 100년 만에 홍수가 났고, 제가 일하는 지역이 완전히 고립되어서 2주 동안을 가게에서 피난민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일 마치고 밤중에 월마트를 갔더니, 물건들이 동이 났습니다. 차들이 개스를 채우느라 줄이 서 있었고, 개스 스테이션이 개스가 Sold out되서 문을 닫기도 했습니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요즘은 거의 세계대전 분위기입니다. 코로나와 전쟁으로 인하여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모든 비용이 2배로 뛰었습니다. 잘될 조건들보다는 잘 안될 조건이 몇 배는 넘는 것 같습니다. 비가 와서, 눈이 와서, 개스 값이 올라서, 등등. 일일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모든 상황과 조건들은 수시로 변하고 요동칩니다. 세상의 조건들은 믿을 만한 것들이 별로 없습니다. 이같은 현실 속에서 저같이 사업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지난 3년간을 렌트비, 자재비 걱정 없이 보낸 것도 기적이요 축복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계십니까?
예수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과 더불어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대부분은 사명에 초점을 두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에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명령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예수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로서 승리를 보여주심으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야, 네가 혼자 하라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야, 너만의 힘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베드로야, 죽음도 이긴 내가 함께 할 것이다”
“베드로야, 내가 너의 든든한 반석이다”
부활 이후, 부활의 주님께 믿음의 서약서를 고백하신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반석이 되어 주십니다. 세상은 변해도 예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믿음을 지킨다면 예수님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능력이 되시며,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러기에 비가 온다고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태풍이 와도, 벼락이 쳐도, 우리의 든든한 반석 되시는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아멘
셋째, 구원 이후에 우리의 삶은?
이제 예수님과의 결혼 서약에서 싸인하고, 예수님을 반석으로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겠습니까?
제가 2월달에서 눅15:11-32의 “돌아온 탕자”를 배경으로, “당연하지 않습니다.”라는 설교를 했었습니다. 당연지수 올라가면 은혜지수, 감동지수, 감사지수 폭망합니다. 기억하시죠. 제가 돌아온 탕자 이야기로 “돌아온 탕자 그 이후”라는 시리즈 설교를 6주에 걸쳐서 했던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돌아온 이야기만 있지 그 후의 이야기는 없기에 “아마도 그는 잘 살았겠지!”라고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탕자가 돌아온 후에 “그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라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그의 마음을 살피면서, 그가 변화되었을 것 같은 단어들을 찾아냈습니다.
| 자족 | 믿음 | 분별 |
|
| 만족 | 신뢰 | 기쁨 | 열정 |
| 사랑 | 감사 | 회개 |
|
| 자비 | 인내 | 순중 | 나눔 |
돌아봄 | 경청 | 겸손 | 행복 | 성실 |
많은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빈칸은 여러분이 생각나시는 단어로 채우셔도 됩니다. 탕자의 대표적 변화는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꼈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돌볼 줄 아는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종합해보면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백성된 자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저도 외국 나온지 이제 곧 20년이 되어갑니다. 그동안, 제 자신도 그럴 때가 있었고, 목회 중에 상당수 그런 모습을 봤습니다.
“이민 안 왔어야 했어”, “이럴 줄 알았나”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여러분의 삶의 자리와 화해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면서, 행복하기도 쉽지 않고 무엇보다도 믿음의 길을 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가 있는 삶의 자리, 내가 섬기는 교회, 내가 만나는 성도가 내 삶의 최고의 축복임을 깨닫고, 감사하고, 사랑하고, 때로는 인내하는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 이후의 믿은 자의 삶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