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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석 이준의 《영사원종공신록권》과 《형제급난지도》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35)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조선중기의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은 선서하였다. 선서(善書)란 ‘글씨를 잘 썼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현전하는 그의 작품은 간찰(簡札)마저도 매우 희소하다.
창석 이준과 그의 형 이전(李㙉)은 조선중기에 형제간의 우애로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니 만치, 이전과 이준 형제의 유묵은 조선시대에도 수집가들 사이에서 선호되었지만, 좀처럼 볼 수가 없다. 특히 이전의 유묵은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것이 없어 그 수준을 평하기가 불가능한 것 같다.
1. 창석 이준의 약력
이준(李埈, 1560~1635)의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이다. 본관은 흥양(興陽)이고, 이조년(李兆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탁(李琢)이고, 아버지는 이수인(李守仁)이며, 어머니는 고령신씨(高靈申氏) 신수경(申守涇, 10세)의 딸이다.
창석 이준은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82년(선조 15) 생원시를 거쳐 1591년(선조 2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 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피난민과 함께 안령에서 적에게 항거하려 했으나 습격을 받아 패하였다. 그 뒤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의병 몇 천 명을 모집해 고모담(姑姆潭)에서 외적과 싸웠으나 또다시 패하였다. 1594년 의병을 모아 싸운 공으로 형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듬해 경상도 도사가 되었으며, 이때 중국 역대 왕들의 덕행과 신하들의 정사(正邪)를 밝힌 『중흥귀감(中興龜鑑)』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세력을 키워 많은 사람을 주변에 모았으나 가담하지 않았다.
1597년 지평이 되었으나 유성룡이 국정운영의 잘못 등으로 공격을 받을 때 함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같은 해 가을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군비를 정비하는 등 방어사(防禦使)와 협력해 일하였다. 이어 예조정랑·단양군수 등을 거쳐, 1603년 수찬으로 불려 들어와 형조와 공조의 정랑을 거쳤다.
1604년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 때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쳐 교리로 재직 중 대북파의 전횡이 심해지고, 특히 1611년(광해군 3) 정인홍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를 비난하자 그에 맞서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바뀌자 다시 교리로 등용되었다.
인조 초년 이귀(李貴) 등 반정공신을 비롯한 서인 집권세력이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廢世子)를 죽일 때, 은혜로운 처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다가 철원부사로 밀려났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아 의승군(義勝軍)이라 이름했으며, 그 뒤 부응교, 응교, 집의, 전한, 사간 등 삼사의 관직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이즈음 집권 서인 세력이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하여 선조의 아들인 인성군 공(仁城君珙)을 죽이려 하자 남인으로서 반대의견을 주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했고, 조도사(調度使)에 임명되어 곡식을 모았으나 화약이 맺어지자 수집한 1만여 섬의 군량을 관에 인계하였다. 이 공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28년 승지가 되고 1634년 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이르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국방과 외교를 비롯한 국정에 대해 많은 시무책(時務策)을 제시했으며, 정경세와 더불어 유성룡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남인 세력을 결집하고 그 여론을 주도하는 중요한 소임을 하였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과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창석집』을 남겼으며,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를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2. 《형제급난지도》 원화 《월간창석형제급난도》와 그 주인공
《월간창석형제급난도(月澗蒼石兄弟急難圖)》, 원화, 지본담채(紙本淡彩), 가로 21.5cm×2, 세로 29㎝. [사진 제공 – 이양재]
1604년(선조37)에 제작된 월간(月澗) 이전(李㙉, 1558~1648)과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 형제의 《월간창석형제급난도(月澗蒼石兄弟急難圖)》가 있다. 이 그림은 월간 이전과 창석 이준 형제의 우애를 묘사한 목판화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의 원화(原畫)로, 가로 21.5㎝, 세로 29㎝이다. 그 원본이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그림에는 얽힌 일화가 있다. “임진왜란 다음 해인 선조 26년(1593) 봄, 병으로 거동이 힘들던 동생 창석 이준 선생이 형인 이전 선생에게 피신하여 가문을 보존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형은 동생의 부탁 대신 위험을 무릅쓰고 끝까지 동생을 업고 백화산 정상으로 피해 겨우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을 후에 창석 이전 선생이 명나라에 가서 중국인에게 이야기하니 그들이 감동하여 화공을 시켜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라고 한다.
그림을 보면, 백화산을 배경으로 왜적이 산 아래 진을 치고 창검을 들어 형제에게 다가오자 형이 아우를 업고 떠나는 장면, 업고 가던 아우를 내려놓고 적들에게 활을 겨누는 모습, 산 정상을 향해 아우를 업고 달리는 모습 등이 한 면에 묘사되어 있다. 그림이 완성되자 창석 이준 선생은 주위의 유명인에게 시문을 청하여 부록으로 그림 뒤에 부치었다. 비록 중국인 화공이 그린 것이긴 하나, 그림만으로도 지극한 형제애를 느끼게 해주며, 그림 뒤에 붙은 선비들의 시문 역시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이다.
원본은 1책 56판(112면)이며, 표지 제목은 「형제급난도병서시(兄弟急難圖幷序詩)」이다. 표지 다음에 간지가 있고, 제2정부터 제3정까지 주색단선(朱色單線)으로 곽(廓)을 그어 놓고 제2정 전면(前面)에 전자대자(篆字大字)로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라는 여섯 자로 표제하고 2정 이면과 3정 전면에 형제급난지도가 있다.
제4정부터 제56정까지는 병서시(幷序詩)로 유명인사의 자필이 수록되어 있다. 구도(構圖)는 대각선이며, 청·홍·황·흑(靑·紅·黃·黑)의 4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그림에는 준령(峻嶺) 구릉(丘陵)과 왜진기치(倭陳旗幟)와 형제가 피난하는 5개 장면을 구체적으로 그려 놓았는데 순서는 형제논의(兄弟論議)→부제급피(負弟急避)→당왜격퇴(當倭擊退)→부제등고(負弟登高)→산정도달(山頂到達)로 되어있다.
왜병(倭兵)이 칼을 잡고 추격하는 장면(執刀追擊場面)에는 이들이 모두 하반신에 훈도시(褌)를 차고 있다. 왜진 기치는 청색 9본, 황색 9본, 홍색 10본이다. 병서시 부분은 제4정에 이준의 구제급난도(求題急難圖)가 있고, 5정부터 8정까지 제형제급난도(題兄弟急難圖)라는 자필이 있다.
이어서 이 두 글에 답하는 여러 인사들의 친필이 끝까지 실려있다. 즉 제문을 쓴 이는 이호민(李好閔) 이수광(李晬光) 정경세(鄭經世) 등 26명의 친필이 실려있다.
형제급난지도는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갈충우애(竭忠友愛)의 주제화(主題畵)이다. 부록으로 첨가된 병서시는 당시 명현 문필가의 친필을 모은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이 그림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명나라 화공의 그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림의 화법이 조선초기 《삼강행실도》에서 보여주는 한 면에 여러 상황을 그려내는 조선의 전형적인 행실도 모습을 하고 있다. 실물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사진만을 보았을 때 필자의 감각으로는 이 그림은 명나라의 종이가 아니라 조선의 닥종이에 그려진 것 같다.
3. 목판본 《형제급난지도》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 목판화, 《월간창석형제급난도》와 《형제급난지도》는 원화와 모판화를 비교하며 그 변화를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옛 목판화로서, 회화사적으로 아주 소중한 문화재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1652년(효종 3)에 이 원화 《월간창석형제급난도》를 저본(底本)으로 하여 목판본으로 《형제급난지도》를 간행하였다. 현손 이증록(李增祿)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증록의 발문이 있다. 원본 그림에서 보여주는 그대로를 베껴서 목판화로 변환(變換)한 것이다.
그러나 원화를 번안(飜案)하면서 목판화에서는 많은 차이점을 드러낸다. 목판본의 권수에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라는 전자체(篆字體)의 인서(印書)가 있고, 이어 차천로(車天輅)가 그린 「형제급난지도」와 이준의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어 「형제급난지도」를 주제로 이호민(李好閔) 이수광(李睟光) 이안눌(李安訥) 신흠(申欽) 이민구(李敏求) 김시국(金蓍國) 이식(李植) 한준겸(韓浚謙) 장유(張維) 정경세(鄭經世) 이성구(李聖求) 김식(金湜) 김극항(金克恒) 최현(崔晛) 등이 쓴 제후(題後) 증시(贈詩) 약 20편과 끝에 홍여하(洪汝河)가 지은 「급난도인(急難圖引)」이 수록되어 있다.
「형제급난지도」는 판화이므로 흑백의 소묘로 되어 있다. 백화산을 배경으로 형이 동생을 업고 가는 모습과 칼과 활을 든 적병 2명이 형제를 가해하려는 장면을 그리고, 그림 옆에 배경과 등장인물을 글씨로 부주(附註)하였다. 창석 이준의 해설에 의하면, “자신은 병이 위독해 이미 죽은 목숨과 다름없으니, 형이나 빨리 피신해 생명을 보전, 가문에 잘못되는 일이 없게 하라”고 간청했으나, “형은 자신의 손을 잡고 울며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는 말로 위안하였다. 그리고 자기를 등에 업고 가다가 적군을 만났는데, 적이 칼을 빼어 죽이려다가 형제의 우애에 감동, 살려주었다.
이어 수록된 여러 사람의 글은 이 사실을 입증하고 또한 찬양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목판본 《형제급난지도》의 후쇄본은 시중에 아주 간간이 나온다. 그리고 원화와 목판화를 비교하며 그 변화를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옛 목판화이다. 그러니 어찌 회화사적으로 소중한 문화재가 아니겠는가?
4. 창석 이준의 《영사원종공신록권》
《영사원종공신록권(寧社原從功臣錄券)》, 1628년, 목활자본, 23.4×20.9cm, 필자 소장. 창석 이준이 1628년 9월 하순에 인조로부터 받았다. 첫장 앞면 두 번째 줄에 “同副承旨李埈”이라 적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필자는 10여 년 전에 대구의 모 경매에서 《영사원종공신록권(寧社原從功臣錄券)》을 낙찰받았다. 《영사원종공신록권》은 수여자가 700여 명이므로 수여자가 수 천명에 이르는 다른 여러 원종공신록권보다는 흔한 녹권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 녹권은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준(李埈)이 1628년에 받은 것이다. 이준은 위에서 언급한 《형제급난지도》의 바로 그 이준이다.
《인조실록》 권18, 인조6년(1628년) 5월 26일 병술 3번째 기사에 “以成安義爲右副承旨, 李埈爲同副承旨, 李性源爲持平, 崔惠吉爲修撰”라고 한 것을 보면, 즉. “성안의(成安義)를 우부승지로, 이준(李埈)을 동부승지로, 이성원(李性源)을 지평으로, 최혜길(崔惠吉)을 수찬으로 삼았다.”라는 것을 보면 창석 이준은 1628년 음력 5월 26일에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 원종공신록권의 서두를 보면 이 녹권은 ‘숭정원년 9월 14일’ 녹훈된 것이다. 따라서 창석 이준은 1628년 9월 하순에 이 《영사원종공신록권》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영사원종공신록권》은 1628년(인조 6) 인조반정으로 도태된 북인의 남은 세력이 꾸몄다고 설명되는 유효립(柳孝立)의 모반 사건을 다스리는 데 공을 세운 자들에게 녹훈한 것이다. 문서의 명칭 《영사원종공신록권》에 이어 발급받은 인물의 관직 및 신분과 성명을 실었다.
본문은 임금의 전지 두 가지를 수록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영사원종공신 녹훈의 의의를 천명하고 등급별로 공신을 녹훈하는 1628년 9월 14일의 전교를 수록하였다. 일등 공신은 봉림대군(鳳林大君) 이하 보인(保人) 김효신(金效信)까지, 이등공신은 주부 최대근(崔大根) 이하 사노(私奴) 고룡쇠(高龍金)까지, 삼등공신은 참지 유백증(兪伯曾) 이하 사령 주린(朱麟)에 이르기까지 모두 700여 명의 명단이 실려있다.
두 번째 전지는 같은 해 12월 26일 공신에 대하여 특전을 내린 내용이다. 특전의 내용은 공신 등급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공신 본인의 품계를 1등급 가자(加資)하고 그 부모를 봉작(封爵)하거나 자손을 서용하는 것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조(吏曹)에서 처리하게 하였다.
이 녹권은 목활자본이며, 책의 크기는 23.4×20.9cm이다. 모두 17장으로 끝장에는 공신도감 관직자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당상에는 홍서봉(洪瑞鳳, 1572~1645)과 허적(許積, 1610~1680)이, 낭청에는 김남중(金南重, 1596~1663)과 이경증(李景曾, 1595~1648)이, 감교낭청(監校郎廳)에는 이수림(李修林)과 허일(許佾)이, 감조관(監造官)에는 이유기(李裕基)가 참여하고 있다.
창석 이준이 받은 이 녹권과 목판본 《형제급난지도》는 하나로 묶어 광역시도의 지방문화재로 지정하는 데 손색이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 목판본 《형제급난지도》는 입수하지를 못하였다. 될 수 있는 대로 초쇄본을 입수하였으면 한다.
5. 창석 이준의 유묵
『송신좌랑조천(李埈 筆 送申佐郎朝天)』, 송별시 시고, 이준, 1628년 음력 7월, 1면; 31.9×18.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간찰』, 이준, 1점, 28.6×43.5cm, 상주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황감사 송별시』, 이준, 계혜(1623년) 가을, 35×42.8㎝, 위창 오세창 선생의 구장품, 성균관대학교 소장. 위창 오세창(吳世昌) 선생은 당대(當代) 최고의 감식안(鑑識眼)을 지닌 분이다. 그의 수집품 《근묵(槿墨)》에 채집되어 있는 이 행서(行書)는 창석 이준 행서를 감식하는데 중요한 기준 작품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준의 간찰과 시고』, 신축년(1601년) 5월 초9일, 필자 소장. 위의 글씨는 행서체로 단아(端雅)하게 썼지만, 아래의 글씨는 생각나는 대로 마구 휘둘러 썼다. 이 두 장은 함께 전해 내려왔는데, 분리하지 않고 함께 표구하였다. 이 작품을 보면 역시 조선시대의 구안자(具眼者)들이 “창석 이준이 선서하였다”라고 말할 만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창석 이준은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서가(書家)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매우 희소하다. 간찰은 더러 시중에 나오지만, 완벽한 상태의 작품으로서의 시고나 서작(書作)은 매우 희소하여 몇 점 확인되지 않는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이준 필 송신좌랑조천(李埈 筆 送申佐郎朝天)〉 1점2면(1면 크기 ; 31.9×18.8cm)이 있다, 이 작품은 무진년(1628년) 맹추(孟秋, 음력 7월)에 쓴 송별시(送別詩)이다. 상주박물관에는 보존 상태가 험한 〈창석 이준 간찰〉이 1점(28.6×43.5cm)이 있다.
또한 위창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의 유묵 컬렉션 《근묵(槿墨)》에는 출생 연도순으로 245번째에 채집되어 있는 계해년(癸亥年, 1623년) 가을에 황 감사에게 써준 한시가 있다. 그 한시는 요수정(樂水亭)의 황 감사(黃監司)를 방문하여 지은 《황감사 송별시》 행서(行書) 1점(35×42.8㎝,)으로, 위창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의 유묵 컬렉션 《근묵(槿墨)》에 채집되어 있다. 이 시를 지은 시기는 계해년(1623년) 가을인데, 그해 3월 14일 새벽에 서인들이 주도하고 남인들이 동조하여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니, 계해년 가을이면 인조반정 4개월 후이다.
이런 식으로 창석 이준의 유묵, 특히 간찰은 조선중기 문인들의 간찰첩이나 유묵첩에 더러는 채집되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십여 년 전에 창석 이준이 신축년(1601년) 5월 초9일 날 쓴 간찰과 시고를 함께 구입하였고, 서울 낙원동 낙원표구사(사장 이효우)에서 족자로 표구하였다. 1601년에 쓴 이 간찰과 시고는 창석 이준의 작품으로는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유묵이다.
이렇듯 창석 이준의 작품이나 간찰이 현재 몇 점이나 남아있는지 명확하지가 않으므로 여기 ‘신 잡동산이’에서 소개하는 것이다.
6. 부(附) ; 《형제급난지도》의 일화를 통해본 현대의 정황
《흥양이씨족보(興陽李氏族譜)》를 보면 월간 이전은 1558년 4월 14일 태어나 1648년 윤3월 13일에 향년 91세로 졸하였다. 반면에 동생 이준은 1560년 3월 6일날 태어나 1635년 6월 17일에 향년 76세로 졸하였다. 즉 동생 이준보다 두 살 위이고, 동생이 졸한지 13년 후에 졸하였다. 조선중기에 91세에 졸하였다는 것은 요즘으로는 110세를 넘겨서 졸한 것과 같다.
월간 이전의 자는 숙재(叔載), 호는 월간(月澗). 아버지는 이수인(李守仁)이고, 동생은 이준(李埈)이다. 동생 이준과 함께 유성룡의 문하에서 이황의 학설을 배웠다. 임진왜란 때 이준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적중에 포위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전이 병이 난 동생 이준을 업고 적진 탈출에 성공하여 형제가 무사할 수 있었다. 뒤에 이준이 감복하여 화공을 시켜 그 모습을 그리게 하고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라 이름하니, 당시의 명공(名公)·거경(巨卿)들이 이 일을 노래로 읊었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는 슬프게도, 조선시대 월간(月澗) 이전(李㙉, 1558~1648)과 창석 이준(李埈, 1560~1635) 형제가 지녔던 것과 같은 형제간의 우애가 없는 것 같다.
우리 민족이 외세에 대응하는 현대의 정황을 이 그림에 빗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할 경우 이 그림이 시사하여 주는 점은 매우 크다. 어찌 왜적이 형제 가운데 한 사람만 목표로하여 쫒겠는가?
현대의 정황은 형이 동생을 업고 피난하지도 않고, 뒤쫒는 왜적에 활을 겨누지도 않고 있다. 현재 정황은 오히려 형제를 해치려는 외세에게 아우가 있는 곳을 가리켜 알려주는 정황이 아닌가? 이런 정황은 형제 모두가 위태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세상이니 슬프고 억울하고 우울하다. 천지사방이 막혀 있으니 무어라도 좀 해결되었으면 싶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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