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흠 시인>>
<<이대흠 시인의 양력>>
* 1968년 전남 장흥 만손리서 출생.
* 서울예전 문창과를 졸업.
* 1994년 《창작과 비평》 봄호에 〈제암산을 본다〉 외 6편의 시를 발표하여 작품활동을 시작.
*' 현대시 동인상'과 1999년 소설 「있었다 있다」로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
* 시집으로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창작과비평사, 1997)와 『상처가 나를 살린다』(현대문학북스, 2000),
시집 『귀가 서럽다』(창비, 2010) 가 있음.
*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中.
<<이대흠 시인의 대표 시>>
마음의 호랑에서 코끼리 떼가 쏟아질 때/이대흠
당신에게서 문득 파닥이는 꽃을 받았습니다
5초간,
감정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을 방법을 연구합니다
당신이 내민 꽃 떼를 받지 않을 수 없어서 나는 이름에 갇힌 죄들을 모두 풀어 버렸습니다
이러다 꽃에 물리면 온통 당신의 향기가 독처럼 퍼질 것입니다
지금 떠나시렵니까?
나의 마음은 충분히 방목 중입니다
에서의 산책/이대흠
당신을 볼 수 없을 때는 바람의 줄기를 헤아립니다
국숫발처럼 쏟아지는 바람 중 어느 한 줄기는 당신과 이어져 있을 것입니다 햇살이 내 살을 만질 때면
어떤 기척이 왔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의 작은 미동이 내게 전달된 것이겠지요
꽃을 보기 위해 세수를 합니다
신앙이 아니어도 아름다움에 대한 예의는 필요합니다
영업을 하러 가는 사람처럼 나는 준비합니다 나는 꽃에게 가장 좋은 살을 보일 것입니다
당신 앞에 선 듯 꽃 앞에 선 나는 몇 가지 표정을 지어보입니다
거짓말을 할 수는 있지만 살의 말을 숨기기는 어렵습니다 살의 떨림과 살의 향기를 그대로 노출합니다
당신이 살로 왔을 때 꽃으로 반응하던 내 살의 떨림을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까요?
살이 말하고 살이 듣습니다
입술보다 먼저 눈동자보다 빨리 살은 소통합니다
당신이 꽃 피어서 나는 웃습니다
외꽃 피었다/이대흠
꽃과 가시가 한 어원에서 비롯되었다는 글을 읽는 동안
지금은 다른 몸이 한몸에서 갈라져나온 시간을 생각하는 동안
꽃을 사랑하는 일은 결국 가시를 품는 것이라는 것을 새기는 동안
꽃이 오셨다
어쩌지 못하고 물외처럼 순해지며 아픈 내 마음이며
줄기와 잎이 가시로 덮였어도 외꽃처럼 고울 그대에 대한 생각이며
견디지 못할 것 같았던 몸의 그리움을 마음의 그늘로 염하는 시간이며
귀가 서럽다/이대흠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사랑했던가 아팠던가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시절도 지나고
지금은 다만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
저녁은 빨리 오고
슬픔을 아는 자는 황혼을 보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에서
가는 실 같은 바람이 불어오느니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귀가 서럽네
어머니의 나라/이대흠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뜨거운 물을 땅바닥에 버리지 않는다 수챗구멍에도 끓는 물을 붓지 않는다 땅속에 살아있을 굼벵이 지렁이나 각종 미생물들이 행여 델까 고것들 모다 지앙신 자석들이라 지앙신이 이녁 자석들 해꼬지 한다고 노하면 집이 망해분단다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남은 음식을 버리지 않는다 그 나라 부엌의 수챗구멍 밑에는 염라대왕이 젝기장 들고 앉아 누가 먹을 것을 버리는지 살피고 있다 죽어 저승 갔을 때 한 톨 쌀을 한 가마로 쳐서 고걸 드는 벌을 슨단다 귀한 음석 함부로 하먼 쓴다냐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감을 딸 때도 까치밥 두어 개는 반드시 남겨 둔다 배고픈 까치는 물론 까마귀 참새 들까지 모두 제 밥이다 날아와 먹는다 가을걷이할 때는 까막까치 참새를 다 쫓지만 그 어느 것이라도 굶어죽는 건 우리 몸의 일부가 떨어지는 것이기에
먹을 것 귀한 겨울에는 산 가까이에 시래기나 생선뼈를 놓아두기도 한다 배고픈 산짐승들 그걸 먹고 겨울 난다 때로 산토끼를 잡기도 하고 들고양이를 쫓기도 하지만 제아무리 고방 생선 훔쳐먹는 도둑괭이라도 새끼 밴 암컷에겐 생선 대가리를 내어준다 행에나 새끼 밴 짐승 죽게 하먼 사람 새끼도 온전치 못하는 벱이다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똥오줌이 오물로 버려지지 않는다 땅에서 온 모든 것 땅에게 돌려준다 그마저 생오줌이나 생똥으로 갚는 게 아니다 사람이란 독한 짐승이라 사람 침에 뱀이 죽고 사람 발에 풀이 죽고 생똥 생오줌에 채소가 녹기에
생오줌은 합수통에서 지글지글 끓여서 독기 다 뺀 후 무 배추 밑 돋우는 거름으로 쓰고 생똥은 짚풀과 섞어 한 육 개월 푹 삭힌다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나무 한 그루 함부로 베어내지 않는다 나무마다 신이 있어서 허락없이 베어내면 살(煞) 맞아 사람 목숨 하나가 끊어지기에 정히 나무 필요할 때면 막걸리 두 되쯤 바친 후 나무신 마음 먼저 풀어주고 톱 댄다
죽어 땅으로 돌아갈 때도 잡초 우거진 빈 땅이라고 함부로 구덩이 만들지 않는다 파낸 자리마다 무덤자리라 뜻 없이 파낸 자리엔 사람 목숨 하나 눕게 된다는 머나먼 어머니의 나라에서는
천관/이대흠
강으로 간 새들이
강을 물고 돌아오는 저물녘에 차를 마신다
막 돋아난 개밥바라기를 보며
별의 뒤편 그늘을 생각하는 동안
노을은 바위에 들고
바위는 노을을 새긴다
오랜만에 바위와
놀빛처럼 마주 앉은 그대와 나는 말이 없고
먼 데 갔다 온 새들이
어둠에 덧칠된다
참 멀리 갔구나 싶어도
거기 있고
참 멀리 왔구나 싶어도
여기 있다
어머니라는 말/이대흠
어머니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입이 울리고 코가 울리고 머리가 울리고
이내 가슴속에서 낮은 종소리가 울려나온다
어머니라는 말을 가만히 떠올려보면
웅웅거리는 종소리 온몸을 물들이고
어와 머 사이 머와 니 사이
어머니의 굵은 주름살 같은 그 말의 사이에
따스함이라든가 한없음이라든가
이런 말들이 고랑고랑 이랑이랑
어머니란 말을 나직히 발음해보면
입속에 잔잔한 물결이 일고
웅얼웅얼 생기는 파문을 따라
보고픔이나 그리움 같은 게 고요고요 번진다
어머니란 말을 또 혀로 굴리다보면
물결소리 출렁출렁 너울거리고
맘속 깊은 바람에 파도가 인다
그렇게 출렁대는 파도소리 아래엔
멸치도 갈치도 무럭무럭 자라는 바다의 깊은 속내
어머니라는 말 어머니라는
그 바다 깊은 속에는
성난 마음 녹이는 물의 숨결 들어 있고
모난 마음 다듬어주는 매운 파도의 외침이 있다
먹어도 먹어도/이대흠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는 농심 새우깡처럼, 아무리 그리워해도 나의 그리움은, 채워지지 않고, 바삭바삭 금방 무너질 듯 마른기침을 토하며, 그리워 그리워해도 그리움은, 질리지 않고, 물 같은 당신께 닿으면 한꺼번에 녹아 버릴 듯, 왠지 당신의 이름만 떠올라도 불길처럼,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그리움은,
불현듯 내 갈비뼈가/이대흠
불현듯 내 갈비뼈가 튀어나와 내 곁에 눕는다 그 뼈는 지렁이가 되고 뱀이 되고 잉어가 되고 사슴이 되고 이슬이 되어 내 목을 핥는다 뼛속으로 바람 불고 그 뼈는 희고 둥근 울음을 울며 내 가슴으로 파고든다 그 뼈는 여자가 되어 내 옷을 벗긴다 내 가슴이 꽹과리처럼 운다 밤 깊어 그 뼈는 어머니가 되어 나를 낳는다 나를 낳은 내 갈비뼈가 툭 부러져서 썩어간다 구더기철머 그 뼈를 갉아먹으며 나는 살아간다
기억에 대하여/이대흠
내 조그만 다락방,
몸 전체가 다락인 그가 산다
그곳에는 몇몇 죽은 자들의 유언과
산 자들의 열망이 책장에 꽂혀 있다 한때
내 정신을 비틀고 지나갔던 그리움들이 벽돌이 되어
침착하게 쌓여 있고 사랑의 꽁초들은 죽는 것만이
남은 일처럼 쉬고 있다
다락이 몸인 그는 자신의 죽음을 자신의
아가리에 처넣으며 살아간다 이따금 나는 그의 가슴에 꽂힌
몇 장의 명함을 찢고 싶다
그의 품속에는 아득한 것만 남아 있구나
내 속에 든 그를 나는 종이처럼
구겨버릴 수 없다
내가 죽은 뒤에도 그는
내가 지나쳐 온 모든 길에서 주소를 옮겨
타인들 속을 떠돌아다니리
자화상/이대흠
사당행 전철에 앉아 있습니다 늙은 여자가
앞에 서 있는데
자리를 양보하기 싫습니다 차창 밖은 검은 세상
나는 그 밖보다 더 우두워지기 위해
앉아 있는 걸까요
세월은 마음의 연한 흙을 쓸어가는
물결입니다 상처 많은 젊은 날
나의 직업은 죄입니다
일곱 박스의 귤을 팔았습니다
리어카 끌고 셋방 갑니다
귤 껍질 벗기듯 마누라 벗기고
달콤하고 신맛도 좀 있는 밤
그런 귤쪽같이 붉은 시월입니다
내 무성했던 가지들마다
잎이 지고 있습니다
감옥입니다 어찌 보면
내가 있는 곳은 전부 감옥이었습니다 나는
어머니 뱃속 그 따뜻한 감옥에서
이 차가운 감옥으로 태어났습니다 세상은
뜨거움 없는 여름입니다
두렵지 않아 슬픕니다
다산과 함께 귀양갑니다
전라도 해남땅은 오지입니다
내 작은 그리움은 오지 않습니다
오지를 편 듯 작은 반도들이
쭈욱 뻗어 있습니다
그 부엌에서 물이 끓고 있는 늦은 밤에
면발처럼 풀어져 잠들었씁니다 나는
너무 잘 익어 팅팅 분 라면발
아이들에게 버림받고
젖가락처럼 나란히 선 전신주 곁에
찌꺼기로 버려져 잠들었습니다
지나온 것들이 내 안에 가득하다/이대흠
- 호삼에게
산에 오르면 산으로 가득 차야 하건만
마음의 길은 자꾸 떠나온 쪽으로 뻗는다
세상 밖으로 가지 못한 바람 불고
추억은 소매치기처럼 떠오른다
사람의 말들이 이슬로 내리던 밤이 있었다 그 밤에
그 남자와 그 여자와 밤을 새웠다 나는
외로워지고 싶어 자꾸 지껄였다
그 여자는 가늘었다 가는 여자 가버린 여자
그 남자는 흘러갔다 흘러간 남자 홀로 간 남자
그 여자를 나의 길로 믿었던 적이 있었다
그 남자를 나의 길로 믿었던 적이 있었다
가는 것들이 나를 갉아 나는 자꾸 작아진다
구슬처럼 작아져 나는 왔던 길로
거슬러 가지 못한다 헉헉대며 굴러온 세월
오래 된 인간의 말들이 돌 되어
길을 막곤 했다
세상이 나보다 더럽게 보여
깨끗한 극약을 가지고 다닌 적이 있었다
저지르고 싶어 팍 무너지고 싶어
이 집은 그 집이 아니야 그집은 어디 갔지?
나는 왜 자꾸 철거당하는 걸까?
산 깊어 길 없고 지나온 길들이 내 안에서
실타래처럼 풀린다 이 언덕은 미끄러워 자꾸
나를 넘어뜨린다 감자처럼 궁구는 내 몸뚱이
세월은 비탈지구나 그러나
세상을 믿어 나는 괴로웠다
하루가 지나면 하루만큼의 상처가 남고
한 사람이 지나가면 한 사람만큼의 상처가 남는다
상처받을 수 있다는 건 씹다 뱉는 희망보다
얼마나 큰 선물인가 노래를 부르며
나는 걷는다
생의 뒷장을 넘기지 못하고 세월이여
불행으로 삶을 엮는 사람의 죽음은 불행인가 무엇이
지나온 길을 내 안에 묶어 두는가
연꽃 피네/이대흠
덕진공원 호수에 연숲이 있네
그 위로 녹슨 철교 흔들거리네
도 미 솔 화음 속 입맞추며 남녀들
세상의 철교 건너네
불현듯 연숲으로 달디단 바람 불고
엉덩이만한 잎새들
깔깔깔 들썩이네
팔월 땡볕
하늘이 쩌억 갈라져 자꾸
재채기 나오려 하네
햇살, 양수처럼 뿌려지네
연꽃 피네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이대흠
내가 없었을 때 세상은
짐승들의 것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도
세상은 짐승들의 것이었다
오래도록 세상은 젓갈처럼 깊어가고 나는
아무런 문을 열지 않았다
나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고
한 나라를 이루지도 못했다
지네인 듯 발이 많은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고 처음보다
부피만 더 커진 몸뚱이로
나는 외길에 서 있다
(삼십여 년 세상의 빛이 되지 못했지만 내 몸을 만들 때 나의 부모는 그 누구에게도 하청을 주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따금 하자 보수를 해야 할 때도 있지만 나는 삼풍처럼 무너질 염려가 없다 어쩌다 천재지변이 일어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직껏 까딱없었고 향후 삼십 년은 튼튼하리라 내 몸 안을 방문중인 무수한 세균들이여 안심하라 내 안의 보일러는 반영구적이며 온도 쎈서는 고장나지 않는다 이따금 그대 향한 내 마음 욕정의 물탱크실에서 고수위 정보가 울리고 그리움이 그치지 않고 흘러 넘치지만 내 몸 안의 길들은 무너지지 않는다 나의 오장육부를 쇼핑하는 자들아 그대들은 항상 따스한 곳에서 즐거이 양식을 구하리라 내 몸 안의 세균들이여 질병이여 내 몸 안의 소주여 사글셋방이여 빌딩들이여)
내 몸엔 탐진강이 흐르고 있으며
북한산과 용두봉이 둥지를 틀고 있다
나는 이미 한강의 일부이며 그 강은
나의 일부이다 나는 매일
이 땅의 산과 강으로 호흡한다
누구도 나의 미래를 커닝할 수 없고
살아 있다는 것으로 나는 얼마나
위대한가
작침(鵲枕)/이대흠
어떤 사람이 떠나고 그 사람이 그립다면
그 사람이 멀리 있다고 생각 마라
그리운 것은 내 안으로 떠나는 것이다
다만 나는
내 속을 보지 못한다
* 작침 : 까치 베개. 까치가 집을 지을 때 풀이나 나뭇가
지 사이에 집어 넣는 작은 돌. 그 돌을 품에 가지고 다
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된다 함.
나 아직 이십대/이대흠
꽃처럼 무너지던 시절 있었네
나 아직 이십대 늙은 사내처럼
추억을 말하네......
사라져간 물결 있었네
그 물결 속으로
그리움의 나뭇가지를 꺾으며 나는
제발 내게 기적이 없기를 빌었네
삶이 전쟁이므로 사랑도 전쟁이었고
나의 샤먼 그대는 나를 적시지 않았네
세상에 대한 알 수 없는 적개심
나 휘발유 같던 시절 있었네
자폭하고 싶었지 나 아직 이십대
그대 내 전부의 세상
그대는 바뀌지 않았네 나 참을 수 없어
몸을 떨었네 휘발유 같던 시절 있었네
지난날에 발 담그고 나는
구시렁거리네 철든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노여움으로부터
자신에 대한 노여움으로
건너오는 건 아닌지
나 아직 이십대 개떡같은 사랑
이야기하네 왜 나, 나의 사랑을
과거의 일로 돌리려 애쓰는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대였으므로
나는 외로웠네
모든 바람은 새로웠지만
낯익은 것들이었네 폭풍이 몰아쳐
그대 조금 흔들렸지만
내 몹쓸 사랑, 꽃처럼
무너지던 시절 있었네
불 속으로, 그 남자/이대흠
마음속 우거진 슬픔을 누가
벌초해 주리 그 남자
함부로 돋아나는 슬픔의 밑동을 자르며
불 속으로 그 남자 세상 속으로 온몸을
불 속으로 밀며 나사처럼 야위어
어긋난 세상에서 헛돌며 자꾸
헛돌며 뱅뱅 불 속에서 세상
속에서 헛돌며 슬픔은 나비떼 뱅뱅
날아오르고 아찔해 그 남자
세상의 불 속으로 걸어가네 흐느낌 없는
세상은 뜨거워 그 남자 헐거운 몸으로
세상을 조이고 있네 세상 속에서
불 속에서 녹슬지 않는 몸으로
그 남자
꽃핀 나; 검증 없는 상상/이대흠
사랑이란 머릿속의 포로노 테이프를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
그리움이란 성욕의 다른 이름
나는 그다지 타락하지 않은 것 같은데
너를 만나면 관계하고 싶다
그 봄 때죽꽃이 연이어 포경 수술을 해댈 때
나는 군인이었고 휴가 마지막 날
터미널 근처의 비뇨기과에서 붉은 꽃술을 내밀었다
꽃핀 나는 꿈속에서 친구의 애인을 겁탈하였고
아무런 벌을 받지 않았다
나는 무죄였고
무죄였으므로 나는 괴로웠고
괴로워하지 않았고
면회 온 대부분의 여자들과 관계 맺는 상상을 하였다
나는 팅팅 꽃피었고
어느 암술에도 닿아보지 못한 채
봄날은 갔다
함성으로 만발한 꽃들
어느 꽃 끝에도 여름은 없이
율도 1/이대흠
전기 용접기 찌르를 이곳에 새벽을 붙여놓는다 청담동 건영아파트 현장 인부들은 삽으로 햇살을 썩썩 잘라 쓰레기와 함께 시멘트 포대에 담는다 몇개의 햇살이 후닥닥 자루 밖으로 뛰어나온다 풀리지 않는 피로가 쓰레기를 따라간다 숙취는 누룩처럼 무겁고 알콜에 절은 육신은 오히려 쉽게 썩으리라 빈속에 자판기 커피 한 잔 마시고 파이프를 맨다 물탱크실 배관을 하러 옥상에 오르면 한강은 낮게 풀어져 서울을 들고 있다 도시는 스티로풀처럼 물위에 둥둥 떠 있다 이 도시는 너무 가볍다 부초처럼 뿌리박지 못한 채 어디로 흘러가는지 올림픽대로 위 차들은 일당처럼 날아간다
이 여름 피서 못 가고
용접을 하네
용접기는 쓰르라미 흉내를 내고 나는
선글라스 대신 용접면 쓰고
장갑 끼우고 웬지
용접기처럼 씁쓸해지네
실속 없게도 남들은 다 이어주고
자신은 그 누구와도 화끈히
붙어보지 못하는 용접기여
백 채의 집을 지어도 내 집은
하나 없구나
저녁에 눈과 팔 다리 후끈거리고
얼음으로 찜질해도 화상입은 것처럼
몸 속 열기 빠지지 않네
이걸 썬탠이라고 하나
용접하고 껍질 벗고 붉고 검게
익어버린 내 몸뚱이
허물 다 벗겨져도 내 크기는 변함 없고 마음은 자꾸 알 속으로 들어간다 한세상 이룰 꿈 없이 알은 깨어지고 징그러워라 유리솜 같은 터럭들이여 세상을 향해 돋아났던 믿음들이여 나의 종교는 유리 같은 발톱 같은 것이었다 해머드릴로 벽을 까다가 나는 누군가 살아갈 방바닥에 오줌을 눈다 이 오줌 위에 한 가정의 안녕과 행복이 놓여지리라
사람의 체온/이대흠
아파트 공사장에서 몇 달을 지내다보면
내 조그만 월세방에서 밥 먹고
잠잘 수 있다는 것이
고맙게 여겨집니다
전철 공사장에서 또 몇 달 보내고 나면
전철 타는 게
예사롭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야근과 특근, 때론 밤샘으로
위태롭게 쏟아부은 피곤의 무게가
그토록 부드러운 바퀴로
굴러가는 것을 보면
허무라든가 절망이라는 말들이
쥐새끼처럼 달아납니다
현장에서 몇 년을 비비다보니
어디서건 노동은 따스함으로 다가섭니다
집들이에 가거나 개업식에 가서
수도꼭지를 틀어보기라도 하면
나와 같은 노동자들의 땀방울이
콸콸 흘러나와
때묻은 내 손을 닦아줍니다
밤늦어 귀가하여 전등을 켜면
딱딱한 스위치에서
전기 통하듯 찌릿찌릿 느껴지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봄/이대흠
아이를 낳아보고 싶습니다
사람의 아이가 아니라
다 헐은 자궁으로
수국이나 박태기나무
여치나 개똥쥐빠귀 같은
살려내는 우주를
낳고 싶습니다.
봄은/이대흠
조용한 오후다
무슨 큰 일이 닥칠 것 같다
나무의 가지들 세상곳곳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숨쉬지 말라.
그대 언 영혼을 향해
언제 방아쇠가 당겨질 지 알 수 없다.
마침내 곳곳에서 탕,탕,탕,탕
세상을 향해 쏘아대는 저 꽃들
피할 새도 없이
하늘과 땅에 저 꽃들
전쟁은 시작되었다
전쟁이다.
애월(涯月)에서/이대흠
당신의 발길이 끊어지고부터 달의 빛나지 않는 부분을 오래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무른 마음은 초름한 꽃만 보아도 시려옵니다 마음 그림자 같은 달의 표면에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발자국이 있을까요
파도는 제 몸의 마려움을 밀어내며 먼 곳에서 옵니다 항구에는 지친 배들이 서로의 몸을 빌려 울어댑니다 살 그리운 몸은 불 닿는 노래기처럼 안으로만 파고 듭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불빛도 물에 발을 들여놓으면 초가집 모서리처럼 순해집니다 먼 곳에서 온 달빛이 물을 만나 문자가 됩니다 가장 깊이 기록되는 달의 문장을 어둠에 눅은 나는 읽을 수 없습니다
달의 난간에 마음을 두고 오늘도 마음 밖을 다니는 발걸음만 분주합니다
시위하는 경찰/이대흠
시위대 다섯 명 앞에 경찰 오백 명이 줄지어 섰다 완전무장을 한 경찰들은 진시황의 무덤에서 발굴된 군사들 같았다 지나가는 한 외국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시위하나요?
네
내국인이 대답했다
경찰이 엄청 많네요 경찰이 도대체 무슨 시위를 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