힉소스 왕조
고대이집트 역사에도 우리나라 삼국시대 같이 혼란시대였던 제1~3중간기가 있었고, 힉소스 왕조는 제2중간기의 통치체제
고왕국시대 3왕조 ~6왕조
제1중간기(BC 2130경~1938) 7왕조~10왕조
제8왕조가 끝난 뒤 왕위는 헤라클레오폴리스 출신 왕들에게 넘어갔다.
이들은 고향을 도읍으로 삼았지만 멤피스는 여전히 중요한 도시였다
(☆아브라함 https://m.cafe.daum.net/Fullgospelgk/EMwg/525? )
제8왕조의 왕들은 나라 전역에서 통치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남부 지방에서 발견된 관리들의 비문을 보면 왕의 지배는 명목상의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제9왕조 테베 왕조(BC 2130경~2080)와 제10왕조 헤라클레오폴리스 왕조(BC 2080경~1970경)가 양립하여 싸운 광범위한 투쟁 시대가 열렸다.
테베 왕조는 안정되어 있었지만 헤라클레오폴리스에서는 왕이 자주 바뀌었다.
싸움은 끊이지 않았고 두 왕국 사이의 경계선은 아비도스 지역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바뀌었다.
제11왕조(BC 2081경~1938경)는 테베를 도읍으로 삼았다.
이 왕조의 4번째 왕인 멘투호테프 1세(BC 2008~1957)는 이집트를 차츰 재통일하고 헤라클레오폴리스인들을 추방했다.
왕위에 오른 지 20년쯤 되었을 때 그는 '하얀 왕관을 쓴 신'이라는 칭호를 채택했는데, 이 이름은 상이집트 전역에 대한 권리를 넌지시 주장하고 있었다.
중왕국시대 11왕조 ~12왕조
제2중간기(BC 1630~40경)
13왕조 ~ 14왕조
15왕조 16왕조 17왕조
이집트와 누비아의 세력 다툼은 점점 치열해졌고 이 경쟁으로 인해 새로운 두 왕조의 형성이 구체화되었다.
힉소스 왕조(BC 1630~1523경)라고도 불리는 제15왕조는 나일 삼각주에 있는 아바리스를 도읍으로 삼았고, 제17왕조(BC 1630~1540경)는 테베에 중심을 두었다.
힉소스라는 낱말의 기원은 '외국 땅의 통치자'를 뜻하는 이집트어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AD 1세기)가 인용한 마네토의 서술에 나온다.
마네토는 새로운 통치자들을,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감히 그 땅을 빼앗은 침략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힉소스인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아시아인의 지배는 이집트에 많은 기술 혁신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악기와 음악 양식 따위의 문화적 혁신도 가져다주었다.
이 변화는 청동 세공술에서 도자기 제조나 베짜기에 이르는 다양한 기술에 영향을 주었고, 아울러 새로운 품종의 동물과 곡식이 도입되었다. 전쟁에는 새로운 유형의 무기와 아울러 말과 전차가 등장해 종래의 전투 방식을 바꾸었다. 이런 변화는 기술적으로 낙후해 있던 이집트를 서아시아의 수준으로 올려놓는 결과를 낳았다.
제17왕조가 끝날 무렵 테베 왕들이 힉소스의 지배에 도전했다. 테베 왕 카모세는 비문에서 자기 땅을 아시아인과 나누어 갖는 것을 더이상 참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카모세는 북부와 남부로 진격해 중왕국시대에 이집트가 다스렸던 영토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주장을 행동에 옮겼다. 그의 위업은 힉소스 왕조를 몰아내기 위한 기나긴 투쟁에서 중요한 단계를 이루었다.
신왕국시대 18왕조 ~20왕조
제3중간기(BC 1075~656)
신왕국 말기에 이집트는 분열되었다.
북부는 타니스 왕조인 제21왕조(BC 1075~950경)가 물려받았고 나일 강 유역은 대부분 테베 성직자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현지에서 왕의 칭호를 채택했다.
새로운 왕조의 도래와 함께(어쩌면 그보다 약간 일렀는지도 모르지만) 람세스 3세가 주로 북부에 정착시킨 메시웨시 리비아인 정예부대가 지배 계급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제21왕조의 제5대 왕 오소르콘 1세(BC 979~973경 재위)는 리비아인의 혈통을 이어받았고 그의 시대부터 제26왕조까지는 리비아인의 혈통을 가진 통치자들이 이집트를 다스렸다. 이들 가운데 특히 중요한 사람은 제22왕조(BC 950~730경)를 세운 셰숑크 1세(BC 950~929 재위)였다.
제22왕조는 초기에는 성공적이어서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의 영향력을 되살렸다. 솔로몬이 죽은 뒤(BC 936경) 셰숑크 1세는 팔레스타인에 들어가 예루살렘을 유린했다. 오소르콘 3세(BC 888~860경 재위) 때 페이웨드 리비아인이 삼각주 서부지역을 위협하는 바람에 이집트군은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제22왕조의 후반기를 특징짓는 것은 나라의 분열이었다.
한꺼번에 최고 6명이나 되는 왕이 나라를 쪼개어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리비아인 족장들도 저마다 지역을 다스렸다. 이같은 지역 분할과 동시에 도시화 경향이 일어났고 분열이 가장 심한 곳은 나일 삼각주 지역이었다.
그러는 동안 테베에서는 제23왕조가 일어났다.
제24·25왕조 때 이집트 국내 정치는 아시리아 제국의 성장에 영향을 받았다. BC 671년에 아시리아 왕 에사르하돈이 이집트에 들어와 타하르카 왕(BC 690~664 재위)을 상이집트로 쫓아냈다. 2년 뒤 타하르카는 멤피스로 돌아왔지만 BC 667년에 에사르하돈의 후계자인 아슈르바니팔은 타하르카를 쿠시인이 확고한 기반을 유지하고 있는 테베로 쫓아냈다.
타하르카의 후계자인 타누타몬은 아시리아를 지지하는 삼각주 군주들의 동맹군을 멤피스에서 무찔렀지만, 이에 대해 아슈르바니팔은 테베를 약탈하는 것으로 보복을 했다.
힉소스 민족과 히브리족
우리는 성서를 통해 이집트가 예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피난처가 되어왔음을 알고 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가족은 가나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아 기근이 들자 물이 풍성한 이집트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고,신약시대 예수의 가족은 헤롯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도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예로 팔려갔다가 총리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른 요셉이야말로 이집트의 성서적 배경을 가장 잘 나타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중세 이후 이집트를 여행했던 유럽인들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요셉의 곡식창고'라고 불렀으며,지금도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으로부터 흘러나와 저지대인 파이윰 오아시스의 호수로 흐르는 하천을 아랍어로 `바흐르 유셉',즉 `요셉 하천'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했다기보다는 무력으로 이집트를 점령했다는 사실은 신약시대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한 작품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당시 이집트의 항구도시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는 매우 번성했다.그 도시의 아피온이라는 한 이집트인이 `유대인들에 대항함'이라는 글을 통해 출애굽 당시 유대인들이 문둥병자들이었기 때문에 이집트로부터 쫓겨났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서는 금으로 만든 당나귀를 만들어놓고 숭배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치욕적인 비난에 대항해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을 발표했다.
그는 그 글에서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역사가 마네토를 인용하면서 유대인들이 한때 이집트를 통치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유대인을 옹호하거나 반박하는 편 모두가 인용했던 마네토라는 인물은 기원전 3세기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으로서 이집트의 역사를 그리스시대까지 모두 30왕조로 나누어 저술한 이집트 최초의 역사가였다.
비록 그의 역사책 원본이 남아있지 않고 요세푸스에 의해 부분적으로 인용됐을 뿐이지만,힉소스라 불리는 이방민족이 다름아닌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언급했다는 점에서 그의 저술은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에 의하면,힉소스 민족은 북쪽에서 쳐들어와 많은 도시들을 불사르고 신전을 파괴했으며 이집트민족을 학살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멤피스를 점령해 수도로 삼았다가 아바리스라는 도시를 건설했고,나중에 이집트에서 쫓겨날 때는 그들의 재산을 모두 가지고 나가서 유다 지방에 예루살렘이란 강력한 요새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1824년 영국의 윌킨슨(G.Wilkinson)은 이집트 중부지방의 한 유적지인 베니 하산에 들러 절벽 중턱에 만들어진 바위굴 무덤들을 조사했다.
모두 39개나 되는 무덤의 주인들은 대부분 중왕국시대인 11왕조와 12왕조시대의 지방 영주와 귀족들이었다.
그 중에서 `크눔호텝'이라 불리는 한 영주의 무덤 벽에는 농사짓는 모습과 사냥하는 장면,다양한 동작으로 두 사람이 레슬링을 하는 모습 등 당시 이집트인들의 일상생활이 매우 생동감있게 표현돼 있었다.
그는 벽화 중에서 이집트인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독특한 턱수염이 있고 화려한 무늬로 짜여진 통치마를 걸친 한 무리의 사람들을 주목했다.그들의 우두머리는 산양 한 마리를 붙들고 있었으며,그의 이름은 힉소스 `아비샤'로 기록돼 있었다.또 그림의 위쪽에는 `37명의 힉소스들이 눈 화장품을 팔기 위해 이집트에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윌킨슨은 그들을 통해 아브라함을 비롯해 창세기에 등장하는 히브리 족장들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그 무덤은 기원전 1900년경 건설된 것이므로 어느 정도는 연대상으로도 가능한 추론이었다.비록 이름은 다르게 나타났지만,이집트의 한 무덤벽화에서 히브리 족장들을 연상시키는 가나안 출신 유목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히브리 족장들 중의 하나인 야곱은 `스캐럽'이라 불리는 이집트의 도장에서 그 이름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최고신은 태양신 `라'였다.이른 아침에 짐승의 똥을 공처럼 둥글게 뭉쳐서 굴리고 가는 말똥구리를 그들은 태양신의 운반자로 여겨 풍뎅이 형상의 부적을 만들었으며,도장에 새겨서 반지에 끼고 다녔다.
1930년대 예루살렘에서 수집돼 베를린의 이집트박물관에 소장된 한 스캐럽에는 `야쿱~헤르'라는 이름이 파라오를 의미하는 타원형 테두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1969년 이스라엘의 항구도시인 하이파 근처 쉬크모나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스캐럽에도 상형문자로 분명하게 `야쿱~헤르'가 표기되어 있었으며,베를린에 있는 것과 거의 같은 모습이었다.
함께 출토된 토기들을 통해 그 무덤의 주인공인 야곱이 기원전 1750년 경의 인물인 것으로 밝혀졌다.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또다른 스캐럽에는 이집트 15왕조의 파라오임을 증명하는 표시와 함께 야곱의 이름이 새겨져있다.그는 힉소스 왕조의 2대 왕으로서 기원전 1600년 경의 통치자였다.그 조그만 도장들을 통해 야곱은 당시 가나안의 왕족들에겐 흔한 이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 원전 1900년 경의 화려한 채색 옷을 입은 아비샤를 비롯한 37명의 힉소스들과 이스라엘 항구도시에서 발견된 기원전 1750년 경 한 도시의 왕이었던 야곱,이집트의 최고 통치자로서 군림했던 기원전 1600년경의 파라오 야곱 등은 모두 창세기의 족장들을 역사적으로 조명해주는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들이다.이집트 역사에서 힉소스라 불렸던 히브리 족장들은 파라오로서 1백여년간 이집트를 식민통치했다.따라서 이제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자들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출처 https://m.blog.naver.com/anes70/20053060501
https://youtu.be/6KYONakuNnY
힉소스왕조, 이집트에 세워진 가나안 셈족 왕조
https://youtu.be/uXxKZak_Fug
이집트 중왕조와 힉소스 왕조
https://youtu.be/xnGrRvWT3g4
https://youtu.be/lCcdC4zjTUA
https://m.cafe.daum.net/Fullgospelgk/EMwg/469?searchView=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