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27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
(마태 13,18-23)
The seed sown on rich soil
is the one who hears the word
and understands it,
who indeed bears fruit
and yields a hundred or sixty or thirtyfold."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는 주님을 배반하고 떠난 자들에게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한다. 예레미야는 유배의 끝을 알리며 이제 예루살렘이 ‘주님의 옥좌’가 될 것이기 때문에 계약의 궤는 필요 없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해 주신다.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그 결실이 다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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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시켜서 당신을 배반하고 떠난 자들에게 돌아오라고 호소하신다.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신탁은 유배의 끝을 알리고, 유다와 이스라엘 두 왕국의 재건을 예고한다. 이제는 계약의 궤도 필요하지 않다. 예루살렘이 ‘주님의 옥좌’가 되기 때문이다. 패망한 도시가 천상 예루살렘이 되는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해 주신다. 하느님 나라의 말씀에 대한 이해는 개인적, 공동체적인 극적 갈등 안에서 실현된다. 하느님 말씀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결실을 낸다. 하느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 자기의 마음 밭에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제대로 키워 낼 줄 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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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는 것은 옛날 팔레스티나 지방의 일반적인 농경법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빈 밭에 먼저 씨를 뿌리고 난 다음에 보습으로 갈아엎어서 흙을 덮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에는 동네 사람들이 밟고 다녀서 생긴 길 위나 가시덤불 위에도 씨를 뿌립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함께 갈아엎는다고 합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릴 때에는 풍성한 수확을 기대합니다. 물론 많은 씨앗들이 여건이 좋지 않은 곳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들의 대부분은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농부의 마음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신 예수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반대하고 배척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에도 실패와 성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비판과 반대에 부닥치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신뢰하시며 결코 좌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역시 수많은 실패와 어려움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뿌린 복음의 씨앗에 대해 꾸준히 기다리면 엄청난 결실을 내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복음 선포의 성공 여부는 하느님께서 평가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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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마음 밭에 당신 말씀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씨앗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마음 밭을 잘 일구어 싹을 틔우고, 잘 자라서 좋은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마음 밭을 잘 일구지 못한 사람은 환난이나 박해가 닥쳐 오면 곧 넘어지고 맙니다. 또한,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 마음 밭은 어떤 상태입니까? 씨앗이 잘 자라도록 손질하여 일구고 있습니까? 아니면, 돌이나 자갈이 많아도 치우지 않으며, 엉겅퀴나 잡초들이 무성한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 싹을 틔우지 못하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 비유의 내용을 마음 깊이 새겨 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음 밭이 제대로 일구어져 있지 않으면, 이제라도 정성스럽게 일구어, 주님께서 뿌리신 씨앗이 제대로 싹 틔우고, 좋은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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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는 말씀입니다. 하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끊는 일이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입니다. 때로는 가야 할 장소이고 ‘해야 할 의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혹도 많습니다. 힘이 부치면 즉시 ‘태클’을 걸어오는 유혹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결심하고도 무너졌는지요?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청해야 합니다. 왜 이런 결심을 주시는지 돌이켜봐야 합니다. 건강을 위해 끊을 생각을 불어넣어 주신 것인지 모릅니다. 나쁜 습관을 고치라고 욕심을 조절하게 이끄신 것인지 모릅니다. 이유를 생각하지 않으면 ‘좋은 느낌’도 금방 사라져 버립니다. 이제는 말씀이 뿌리내리도록 해야겠습니다.
유혹은 늘 도전합니다. 스승님을 유혹한 사탄입니다. 사십 일을 단식하신 그분께 사탄은 말했습니다. “당신이 이런다고 누가 알아줍니까? 천상 능력을 가진 당신이 이렇게 애쓴다고 누가 인정해 주겠습니까?” 유혹의 본질은 이렇듯 ‘누가 알아주나요?’에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넘어서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건너뛰어야 합니다. 좋은 땅은 그런 과정을 거치면 자연스레 다가오는 ‘결과’입니다. 유혹을 겸손하게 물리쳤기에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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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 좋은 땅일까요? 유혹이 없고, 삭막함이 없고, 가시덤불이 없는 땅일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유혹 앞에서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의 어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러한 장애 요소를 만났기에 더욱 기도했고,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땅은 만들어진 땅입니다. 처음부터 특별히 좋은 땅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땅과 똑같은 씨앗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것이 중요합니다. 대자연의 땅도 가꾸지 않으면 버려진 땅으로 바뀝니다. 정성과 애정을 쏟아야 바라는 땅이 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이 사실이 좋은 땅의 비결입니다.
우리 각자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막연하게 따라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아침 기도를 드리고 묵주 기도를 바치면서 시작하면 됩니다. 하루 한 가지씩 선행을 하려고 노력하면서 시작하면 됩니다. 그렇게 한 주간을 보내면 다른 느낌으로 주일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은총의 체험입니다. 이러한 생활의 연속이 좋은 땅으로 가는 삶입니다. 그러한 삶일 때 미래는 달라집니다. 좋은 땅의 결실인 것입니다.
생태적 예수
- 이동훈 신부-
캐나다 동부 온타리오 주의 컴버미어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 마돈나 하우스 (Madonna House) 라는 공동체의 본부가 있다. 이 공동체의 창립자인 러시아 출신 캐서린 여사는 1947년 농장을 시작하면서 공동체를 세웠다. 그녀는 공동체가 농장을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복음적인 삶을 사는 데 농장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으며, 시골이나 농촌에서 사는 것보다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은 없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농부는 아니었지만 시골에서 태어났고, 생애 대부분을 시골에서 자랐기에 예수님의 복음은 농사와 땅, 자연에서 취한 예화와 비유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뭄 · 가시 · 겨자씨 ·곳간 · 광야 · 꽃 · 나뭇가지 · 누룩 · 둥지 · 마을 · 무화과나무 · 밀 · 밀가루 · 벌레 · 벼이삭 · 백합 · 별 …. 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 (농부) 등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야말로 농사꾼 냄새가 솔솔 나는 단어들이 가득하다.
농부는 자연의 이치를 배운다. 철따라 무엇을 심어야 하는 지 아는 철든 사람들이다. 자연의 움직임에 기민한 농부들은 그 속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기 쉽다. 자연의 섭리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깨치는 것이다.
농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이 키우는 작물들 또는 동물들의 마음을 살핀다. 그것들이 지금 물을 원하는지 ? 음식을 원하는지 ?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농사는 관상기도의 훌륭한 연습이 된다. 농부뿐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물들에 대한 관상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좋은 방법이었다. 그렇게 하느님의 창조물들을 관상한다면 우린 “더 이상 자신들의 악한 마음을 고집스럽게 따르지 않을 것이다.” (예레 3, 17)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김 맛세오 수사-
성거산에 살면서 나무 작업을 많이 합니다.
수십 년 아름드리 소나무들 주변에 담쟁이 넝쿨하며 가시가 달린 넝쿨 식물이 제법 많아,
아무리 키 큰 소나무라도 타고 올라가 얼기설기 감아 버리면 소나무의 멋진 가지들은 맥을 못추고
죽어 버리고 맙니다. 좋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담쟁이나 가시덩굴 식물과
같은 세속의 걱정과 재물에 찌들려 허덕이다 결국 숨을 못 쉬는 가련한 사람들!
우리네 삶이 빈 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결국 동전 한 닢 가져가지 못하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인생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좋은 땅에 뿌려진 씨처럼, 환히 열려진 파아란 하늘을 향해 마음껏 자라는
곡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자신을 비우고 베푸는 실천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밭에 가시덤불이 자라지 않도록 늘 유념해야
합니다. 여기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은 묵상에 좋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육신의 정념에 휩싸여 유혹을 받게 된 성인은 가시가 많은 장미덩굴에
몸을 던져 뒹굴었습니다. 그 가시에 온몸이 찔렸을 때 얼마나 따가웠을까요.
그 후로는 그 장미에 가시가 돋지 않았답니다. 지금도 뽀르치웅꼴라
성모 성당에 가 보면 수도원 내 한 구석 장미 정원에 가시없는 장미가
매년 아름답게 피고 있습니다.
말씀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 있는 신앙인이 됩시다.
-김기현신부-
오늘 복음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박경철 의사의 강의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그 강의 내용
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전문의가 되고 나서 백수 친구와 함께 서울에 있는 경제관련 강의를 듣게 되었다. 강연자
는 ‘W’, 곧 웹에 대한 강의를 했다. 머지않아 웹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를 한 것
이다. 90년대 초의 이야기인데, 강연을 듣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한
다.’며 강의장을 나가 버렸다. 그런데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백수 친구는 W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W가 말하는 세상에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인터넷으로 메일을 주고받는 메일링 서비
스 사업을 시작한다. 이후 W는 2조 벤처 기업의 대표가 됐고, 백수 친구는 사업을 시작해 결
국 테헤란로에 빌딩을 세 채 소유한 유력한 기업인이 되었다. 그 때 나는 이런 반성을 했다.
‘나는 왜 W와 백수 친구가 본 것을 볼 수 없었던 걸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제레미 러프킨의 말에서 찾았다. 그에 의하면 ‘인류문명은 0.1%의 창의
적 인간과, 0.9%의 안목 있는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고, 나머지 99%의 인간은 수동적으로
이를 따라왔을 뿐이다.’ 라는 말을 한다. 여기서 답이 확실해진다. ‘W’는 0.1%의 창의적인간
이었고, 백수 친구는 0.9%의 안목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99%의 수동적인 ‘잉여인
간’이었다.
실제로 인류문명은 1%의 창조적이고 안목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는가? 역사를 돌
아보니 그랬다. 경제사만 놓고 봐도 그렇다.
200년 전 영국에 모직을 생산하는 기계를 만든 창의적인 사람이 있었다. 대부분은 ‘저런 기
계가 있나보다.’ 했는데, 일부는 모직의 재료가 되는 양털이 많이 필요할 거라는 것을 감지하
고 감자밭을 뒤엎어 양 목장을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고 모직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면서,
양 목장주들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그리고 100전에 헨리포드가 자동차를 만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가치에 대해서 제대
로 이해하지 못했다. 자동차 한 대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기차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이 들었
기 때문이다. 하지만 헨리포드는 자동차의 유용함을 확신했고, 그를 W로 알아본 사람이 있
었다. 바로 록펠러다. 그는 자동차 산업이 발전할 것이라는 것을 내다보고, 주유소를 만들기
시작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다. 헨리 포드는 자동차라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어 놓았
고, 그 사업에 협력한 록 펠러는 엄청난 부를 쌓게 되었다.】
이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W가 있고, 그에 협력하고 동참하는 일부의 사람들이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요.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발견된다는 생각이 들었
습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
람은 예순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말씀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동참하는 사람들...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미쳤다. ... 쓸 데 없
는 짓 한다. ...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네. ...’ 라는 소리를 들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말씀의 가치를 깨닫고, 말씀을 마음에 품고 실천하는 사람은 언제가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
매, 그리고 생명의 열매를 백배 예순배 서른배로 낼 수 있게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하루, 말씀의 가치를 깨닫는 안목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 봅시다.
분심 없는 들음
-김찬선신부-
이런 경우는 하늘나라에 관한 듣지 못하는 세 가지 유형 중에,
즉 길에 뿌려진 씨, 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 중에
어디에 속할까요?
어제는 미사를 드리면서 내내 소음 때문에 마음을 뺏겼습니다.
아침 그리 덥지도 않은데 왜 에어컨을 킨 것인지,
키더라도 미사를 시작하면 소음 때문에 끄기로 했는데
왜 계속해서 틀고 있는지 등에 대해서 분심이 들었습니다.
分心이란 마음이 갈렸다는 뜻인데,
마음 한 편으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려 하지만
마음의 다른 한 편에서 딴 것이 깔짝대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제는 소리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고
소음을 탓하고 짜증을 내다가,
듣기 싫으면 듣지 말지 왜 소음을 듣고 있느냐고 하다가,
누가 듣고 싶어서 듣나 듣지 않을 수 없으니 듣지 하다가,
하느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는 탓을 소음에 왜 돌리냐 하다가
미사가 끝났습니다.
들리는 것을 안 들을 수 없고
그래서 소음이 듣는 것을 방해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또 어떤 경우 어디에 몰두하면 물리적으로는 소리가 나는데도
전혀 듣지 못하니 소음이 방해하는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듣고 안 듣고는 자기에게 달린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옛날에 다방이라는 것이 있어서 거기서 사람을 만날 때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누는데
그날따라 음악이 너무 시끄러워 상대의 말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음악이 바뀌면 얘기하자고 하고 다방 안을 둘러봤습니다.
그런데 저 편에서 남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들은 시끄런 음악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모든 소음을 몰아냈을 뿐 아니라
소음이 오히려 둘을 바짝 붙어서 얘기를 나누게 하고
소음이 더욱 그들을 서로에게 집중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소음을 이겨내고 대화를 성공시킵니다.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몇 년 전 경향 피아노 경연이 있었습니다.
영 한우리 아이들이 몇 참여하고
또 가까운 곳에서 하기에 격려차 갔습니다.
저는 본래 음악회에 잘 가지 않습니다.
기대를 하고 갔다가 실망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음악적 만족을 위해서는 아예 가지 않고
아는 사람 격려 차원에서만 몇 번 갔는데
이번에도 격려 차원에서 간 것입니다.
같은 곡을 몇 십 명이 연주하는데
처음 듣는 곡인데도 저는 잘못 연주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왜 잘못 연주한 것만 들리는지
듣고 있는 것이 참으로 괴로운 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노릇은 우리 아이들이 연주할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랑 없이 욕심으로 들으니
판단이 되어 지고 연주의 잘잘못이 들리는데
사랑으로 들으니 그저 연주가 들린 것이었습니다.
판단을 하지 않고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튼 듣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작용이 아닙니다.
마음의 작용이고 사랑의 작용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갖가지 장애로 인해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하면 온갖 장애가 있어도 듣고야 맙니다.
결국 분심은 사랑 없음의 결과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양승국신부-
<깨달음의 행복>
이 한세상 살아가다보면 뜻밖의 행운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여러 행운들 가운데 가장 큰 행운은 아무래도 ‘깨달음’이란 행운이 아닐까요?
삶의 전환점, 삶의 기폭제가 되는 깨달음, 새로운 진리에 눈을 뜨게 해주는 깨달음, 그간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게 해주는 깨달음, 삶의 지평을 넓혀주는 깨달음, 우리 삶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이끌어주는 깨달음...이런 깨달음은 돈 주고도 못사는 정말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이란 아무에게나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 절대로 아니더군요. 깨달음이란 내 인생 안에 새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새 집을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하나 있습니다. 허무는 일입니다. 낡고, 비좁고, 비새고, 배관도 엉망이어서 냉난방도 안 되는, 그래서 더 이상 거처할 수 없는 낡은 옛집을 과감하게 허무는 일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기존의 그릇된 사고방식, 오류와 아집, 교만으로 가득 찬 옛집을 허무는데서 깨달음은 시작됩니다.
깨달음을 통해 소중한 인생의 진리 하나를 발견했다고 다 끝난 것은 또 아닙니다. 발견한 진리를 통해 우리 앞에 펼쳐진 새로운 길, 새로운 삶의 원칙을 살아내는 일이 또한 중요합니다.
그저 좋다 좋아, 하고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진리가 제시하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투신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란 새로운 길, 새로운 이정표, 새로운 삶의 대원칙을 발견한 행운아들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는 일은 그분이 사신 것을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자취를 하나하나 밟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분이 행한 바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으로 그분의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깨달음의 은총에 도달한 사람으로서의 자세이며,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 뒤따르는데, 삶의 폭, 삶의 지평이 광대해져,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놀라울 정도로 관대해집니다. 그 어떤 시련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고통 앞에서도 호들갑을 떨지 않습니다. 크게 깨달은 만큼 큰 그릇이 되어 삶의 모든 국면들을 관대하게 수용합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은 문제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습니다. 미움덩어리인 사람도 그저 안쓰럽고 측은한 존재로 바라봅니다. 인생의 역풍 앞에서도, 먹장구름 속에서도 환하게 미소 지을 여유가 생깁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은 하늘나라가 내 안에,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기에 다른 곳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힘겨운 삶의 순간들도 사랑으로 엮어갈 줄 압니다.
깨달음은, 하느님의 은총은 때로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때에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다가오십니다. 갑작스럽게 다가오셔서 우리 삶을 뒤흔들어 놓으십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우리의 노력은 마음의 빗장을 푸는 일입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일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
-황지원 신부-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저에게 하느님의 넓은 품을 다시금 바라보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지형적으로 돌이 많고 밭을 경작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돌을
골라내어 씨를 흩어 뿌리는 형태로 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바람이
불면 씨앗이 경작된 땅뿐만 아니라 돌무더기에도 떨어지고 길에도 떨어지곤
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그 말씀이 어떤 땅에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길바닥이나 돌밭,
가시덤불에 씨를 뿌려 씨앗을 낭비하고 계신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은 조금 어리석은 농부처럼 여겨질 정도로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땅에까지 당신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길바닥에 떨어졌거나,
돌무더기나 가시덤불에 떨어졌다고 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비록 아직 경작이 덜 된 땅이어서 그분의 말씀을 온전히 다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그러한 우리에게 끊임없이 당신의 말씀을 뿌리시며
기대하고 계시는 그분을 바라봅시다. 삼류 농부는 밭을 탓하지만, 일류
농부인 하느님은 밭을 고르는 분이 아니라 넉넉함으로 열매 맺게 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위해 기꺼이 좋은 밭을 일구는 일꾼으로, 그리고 그분 말씀의
씨앗이 온전히 열매 맺는 땅으로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겠습니다.
깨달음 2
- 박후임 목사-
보는 눈이 있고 들을 귀 있어 행복해하는 제자들에게 들을 수 있어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을 비유를 통해 말씀해주신다 . 비유로 들어주시는 길가·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의 공통점은 모두 땅이다 . 땅은 하늘의 짝이다 . 하늘의 말씀이 씨앗이 되어 땅으로 내려왔는데 그 땅이 단단하고 돌이 많거나 가시덤불이 무성하다면,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 네 가지 마음 밭을 모두 가지고 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는 것은, 하늘말씀(씨앗)을 통해 내 안의 단단함, 돌, 가시덤불을 보고 그것들을 치워 하느님이 원래 만들어 주셨던 좋은 흙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닐까?
귀농한 지 4년째 되지만, 아직 왕초보농사꾼인 나는, 씨앗을 뿌려놓으면 싹이 나올 때까지 궁금하다. 흙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며칠 몇 날이 되어도 싹이 올라오지 않으면 걱정이 된다. 혹시 물을 너무 많이 주어 씨앗이 썩은 것은 아닐까, 하고 슬며시 흙을 파헤쳐 본다. 아직도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에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씨앗이 발아되는 데는 개개의 씨앗에 따라 다른 줄 모르고 말이다. 씨앗(생명)은 신비롭다. 그 단단한 흙을 가르며 올라오는 여린 잎을 보면 숨이 멈추어질 정도로 놀랍기만 하다.
주님, 생명의 씨앗인 당신과 하나 되도록, 늘 깨어있게 하소서. 아멘.
비옥한 땅, 겸손한 마음
-전삼용신부-
어제 병원에서 치아 신경치료를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금으로 때운 곳이 아파서 열어 보았더니 그 안이 썩어가고 있어서 신경을 죽이고 금으로 새로 씌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 말로는 치아에 신경이 몇 줄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하나가 썩은 것은 확실하고 나머지 신경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일일이 찔러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가뜩이나 공포분위기를 조장하는 치료대 위에 누워서 언제 올지 모르는 고통에 속수무책으로 내버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워서 따끔따끔한 고통에 깜짝깜짝 놀라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어제는 신경을 더 긁어낸다고 하였습니다. 전번에 느꼈던 고통 때문인지 처음부터 더 긴장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의사 선생님이 갑자기 고통을 줄 것 같아서 더 긴장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저절로 벌려진 입이 다물어 졌습니다. 급기야 선생님은 억지로 입을 벌리고 있게 하는 기계를 제 입에 집어넣었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위를 볼 수 없었고, 그렇게 입을 한 시간 동안 벌리고 있으면서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상상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아픈 것은 없었습니다. 첫 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치료시간은 더 길게 느껴졌습니다. 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마취를 할 때, “좀 따끔 할 겁니다.”라고 미리 말씀해 주셨지만 그런 말 하지 않을 때도 자주 몸을 움츠렸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아! 내가 느끼는 고통의 90%는 내가 상상하는 것에서 오는구나!’입니다. 실제로 의사를 믿고 내 자신을 맡겼다면 한 시간 내내 긴장하면서 있을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치료 받는 한 시간 동안 미리 예고 된 두세 차례 짧게 따끔 했던 것을 제외하곤 특별히 아픈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곧 의사 선생님을 믿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아프다고 할 때만 긴장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훨씬 참기가 수월하였습니다.
내가 바뀌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겸손해져야 합니다. 내가 의사가 되어 내가 상상하고 그래서 긴장을 하고 있을 때는 참 힘들었지만, ‘그래, 어차피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맘대로 하세요!’라고 생각하고 모든 걸 맡기니 편해졌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무엇을 깨달아야 삶이 바뀌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맞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성경 구절을 듣고 묵상해도 ‘진정 깨닫지 못하면’ 삶이 바뀌지 않고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씨앗이 자라날 수 있는 땅, 바로 겸손이 없다면 깨달음도 없습니다. 내 생각이 옳다는 교만을 버릴 때 상대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고 믿게 됩니다. 깨닫고 믿어야 삶이 변화됩니다.
제가 사제가 되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할 때 결혼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나를 따르려거든 네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라는 말이 깊이 다가왔습니다. 그냥 들으면 별것 아닐지라도 저는 ‘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참아내야 할 것이 있는 거구나! 그러면 나는 인간적인 애정을 참아내는 것을 매일의 십자가로 삼고 살아야겠다.’라고 깨달았고 그것으로 신학교 들어갈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신학교에 들어와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라는 성경 구절이 깊이 다가와 ‘아! 예수님께 붙어있기만 하면, 즉 기도만 하면 그 분으로부터 성령의 수액이 들어와 내 안에 저절로 성령으로 가득차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구나!’라고 깨닫고 기도에 목숨을 건다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임을 믿게 되었고 사실 그렇게 해 보니 예수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똑 같은 말씀을 듣지만 모든 사람이 매일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도 않고, 또 모든 사람이 기도에 목숨 걸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겸손히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게 될 때 비로소 삶이 변화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똑같이 들어도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진 유다도 있었습니다. 이는 마음이 겸손한 땅이 아니면 아무리 그 마음 안에 말씀의 씨가 뿌려져도 깨닫지 못하고 삶도 변화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을 때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땅을 갈고 거름을 주어 씨를 뿌리기에 적당하게 만들지 않는 농부는 없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그 말씀이 열매를 맺도록 믿고 받아들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겸손한 좋은 땅만 있으면 말씀으로 인한 삶의 변화는 급격하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마음 밭
-김찬선신부-
자주 들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오늘 처음 듣는 듯 깨달은 것은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말씀하신다는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말씀하시지만
당신 좋을 대로 말씀하시기 때문에
열매는 마음 밭이 어떠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나에게는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해서는 안 되고
내 마음 밭이 어떤지 따질 일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떤 마음 밭일까?
저의 마음 밭은 길바닥 같습니다.
솔직히 매일 말씀 나누기를 하면서 유혹이 있습니다.
말씀 나누기를 그만 할까 하는 유혹입니다.
제 마음 밭이 길 바닥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분명 저에게 말씀하시는데
저는 그것을 저에게 은밀히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말씀인 양
시장 바닥에 내 놓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이유식이 따로 없던 옛날에 많이 보던 것처럼,
즉, 마치 엄마가 음식을 씹어서 아이가 먹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처럼
저는 먹지 못하고 다른 사람만 먹기 좋게 해준다는 느낌도 듭니다.
이런 느낌 여러분은 이해하시나요?
새벽을 열며
얼마 전에 여론조사 기관인 리서치 앤 리서치에서 성인 남녀들을 대상으로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조사한 결과를 보고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그런데 조사대상의 66.9%가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창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것이 지금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공부를 그때 더 열심히 하고, 좋은 결과를 얻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선 공부가 내 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또한 공부는 내 과거의 한 순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지요. 지금도 계속해서 공부를 통해 알아 나가야 하는 것이고, 부족한 면이 있다면 지금해도 늦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늦었다고만 생각하고 있으며, 그러면서 ‘과거의 행적을 바꿀 수만 있다면 지금 행복하고 근사한 삶을 살고 있을 텐데…….’라는 후회만 하고 있습니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과거로 되돌아가서 그것을 바꿀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멋진 미래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바로 지금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지금이 머지않은 미래에는 또 하나의 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설명해 주십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가 제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이 이런 상태라면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서 키워나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좋은 땅에 뿌려진 씨처럼, 우리들의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 나갈 때, 수많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열매는 미래에 맺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훌륭한 열매가 많이 맺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의 내 모습이 중요합니다. 과거만을 후회하면서 과거의 내 모습이 다시 되고 싶다는 생각만을 간직한다면 좋은 열매는 나의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제는 우리 성당에서 한 달에 한 번 있는 음악피정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감사의 시간이었지요. 사실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릅니다. 특히 지난달 생각보다 피정에 참석하시는 분들의 수가 적어서, 이번에도 적게 오시면 어떻게 하나 라는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음악을 담당하시는 분들도 전격적으로 교체했기 때문에 더욱 더 걱정했지요.
하지만 그러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걱정이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나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걱정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현재에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충실 하느냐에 따른 것입니다.
바로 현재에 충실한 모습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미래의 한 순간인 하느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하시지만, 그 시작은 바로 지금에 있음을 항상 강조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과거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대신 현재 지금 이 순간에 더욱 더 충실하십시오. 바로 그 때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기.
쓸모없이 뿌리시지는 않는다
-남상근 신부-
얼마나 아까운 씨앗인데 씨 뿌리는 사람은 함부로 뿌립니다.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열매 맺을 만한 땅을 골라서 씨를 뿌려도 될까말까인데, 아무 곳에나
함부로 씨를 뿌린다기에 그렇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선택적으로
파종하지 않는답니다. 길가에도 뿌립니다. 돌밭에도 뿌립니다.
가시덤불 속에도 뿌립니다. 사방 천지 곳곳에 뿌린다는 얘기지요.
불필요한 일이고 쓸모없는 헛수고인데 이렇게 어리석은 일을 왜 하는 걸까요?
뿌려진 씨는 말씀, 구원을 주고 생명을 선사하는 말씀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여기저기 씨를 뿌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일 땅을 골라서
씨가 뿌려졌다면 내가 어찌 구원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은혜롭게도
온 땅에 씨를 뿌리시기에 내가 그 씨앗을 품게 된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좋은 땅도 절로 좋은 땅은 아니었습니다. 좋은 땅도 예전에는 길가였고,
돌밭이었고, 가시덤불이었습니다. 자갈을 골라내고, 잡초를 뽑아내고,
거름을 넉넉히 넣어주어서 비로소 열매 맺을 만한 땅이 된 것입니다.
지금은 영 열매 맺을 기미라곤 없음에도 꾸준하게 씨앗인 말씀을
들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열매 맺는 삶
-임인자-
얼마 전 결혼식에 다녀왔습니다. 오랫동안 성당에 다니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 교우의 자녀 결혼이라 당연히 성당에서 하겠거니 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관면혼배만 하고 동네에 있는 호텔에서, 그것도 주일 12시 30분에 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날이 길일이고 시간이 그때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미사 후 서둘러 결혼식장에 갔더니 주례도 신부님이 아니라 다른 분이 하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론 섭섭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나는 어떤 모습인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라고 떳떳이 말하면서도 친정어머니가 봐온 신수에서 좋은 말은 꼭 되새기고, 나쁜 얘기를 듣게 되면 은근히 걱정이 되고 불안해집니다. 별자리로 한해의 운수를 보고 풀이해 주는 후배가 있는데, 재미삼아 하는 것인데 어떠랴 싶어 온 가족 것을 부탁해서 봅니다. 그러고 나선 좋은 소리는 좋은 소리대로, 나쁜 소리는 나쁜 소리대로 마음에 담아두게 되어 괜히 봤다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이런 유혹이 올 때마다 단호히 끊지 못하고 미풍양속이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합리화할 때도 있습니다. 또 불안한 마음에 십자가를 집에도 걸고 차에도 걸고, 보이는 곳마다 묵주를 놓아둡니다. 그러면서 정작 기도는 잘하지 않습니다. 기도도 습관이고 선을 행하는 것도 습관인데 남는 시간이 없다고 남는 돈이 없다고 핑계를 대며 이리저리 미룹니다. 내 안의 나쁜 습관을 어떻게 끊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합니다.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며 기도를 하고, 잠들 때마다 나쁜 습관을 끊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여곡절이 많은 삶이다 보니 나쁜 것을 최대한 피해 보려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삶에서 어떻게 좋은 길, 편한 길만 만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불행하지 않겠다는 것은 욕심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3,24)라는 말씀처럼 욕심을 버리고 기쁜 일도 힘든 일도 하느님 안에서 함께 기도하고 나누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열매를 맺는 신앙인의 참된 모습이 아닐까요?
신앙의 열매
-여성국 신부 -
말씀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열매를 맺기도 하지만 한 사람
안에서도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유혹에 약한 우리이기에 언제나
항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풍성한 열매를
맺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 안의 근심 걱정에 짓눌려 자라지 못하기도
하고, 여러 다른 세속 일에 밀려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신앙인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는 신앙인이 되기도 합니다.
언제나 좋은 밭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좋은 밭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히 밭을 일궈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수확을 얻기
위해서는 씨를 뿌려야 하고, 그 씨앗이 잘 자라게끔 부지런히
돌봐줘야 합니다. 좋은 밭이 되기 위해 양심성찰과
고해성사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수확을 얻기 위해 씨를 뿌리는
것은 성경 말씀을 부단히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으로 기도가
필요합니다.
좋은 밭과 품질 좋은 씨앗, 그리고 돌봄의 손길 이 모두가 조화를
이뤄야 좋은 수확을 얻듯이 우리도 매일의 양심성찰과 정기적인
고해성사, 매일 성경을 읽는 것, 그리고 기도를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탓? 아니며 내 탓?
-상지종신부-
오늘 복음은 지난 수요일에 들었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농부는 좋은 땅 뿐만 아니라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에 이르기까지 모든 땅에 씨를 뿌립니다. 참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좋은 땅만 가려서 뿌리면 낭비하는 씨가 하나도 없이 모두 많은 열매를 맺을텐데, 모든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일까요?
우리나라와는 달리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에서는 이렇게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하여 이러한 비유를 든 이유도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은 어느 누구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한 것이 더 큰 이유일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려졌기 때문에, 이제 이 말씀과 은총이 열매를 맺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것은 하느님의 책임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각자의 책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씨가 땅에 심어져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의 씨를 가지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농부가 뙤약볕 아래서 무수한 땀을 흘리면서 추수의 날을 준비하듯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온갖 유혹과 어려움을 참고 견뎌 내야합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당장에 한 사람이 완전히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 사제 서품을 받았다고 해서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거룩한 사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느 순간 반짝하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을 잘 가꾸어 갈 때,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이미 하느님 나라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복권이 당첨되어, 아니면 땅 값이 갑자기 올라서, 어느 날 벼락부자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느님 나라는 결코 이러한 요행수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만약 어떠한 요행수를 가지고 하느님 나라에 살기를 원한다면, 이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의 말씀의 씨를 열매맺게 하는 좋은 땅이 아니라, 길바닥이요 돌밭이며 가시덤불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정녕 하느님 나라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매일의 삶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 마음으로 가난한 이웃에게 자비와 선행을 베풀며,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주신 작은 일들에 충실할 때 우리 모두는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복된 백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정원순 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삶의 자리는 초대교회가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도 실패할 때가 많았고, 신자들의 생활을 살펴보아도 부실한 면이 많은 쓰라린 현상을 체험한 곳이다. 믿음이 사라져 좌절하고 실망에 빠져 있던 공동체에 용기와 희망을 주고 격려하려는 의미에서 복음이 형성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믿음은 발전한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믿음이 커지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그것을 반성할 때 믿음은 성장하고, 체험을 통하여 신앙인으로서 성숙해 간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한 마음, 말씀을 들으면 기쁘지만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넘어지는 마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는 가시덤불 같은 마음, 그리고 열매를 백배, 예순 배, 서른 배를 맺는 마음도 있다.
마음이라는 밭에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미사에 참례해야 한다. 믿음이 있어서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아니라 미사에 참례함으로써 믿음이 성장해 간다. 믿음이 있어서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커간다. 그리고 믿음이 있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함으로써 믿음이 발전해 간다. 우리가 마음에 무엇을 심고 살아가야 할까 하고 묵상하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마음밭에 믿음이 자라도록 믿음을 심자!
- 이영창 신부 -
오늘 복음은 지난 수요일 들었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씨 뿌리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러 다니는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씨 뿌리는 이'에 견주고 있습니다. 씨는 바로 기쁜 소식 즉 ‘복음(福音)’이며, 여러 가지 밭은 그 말씀을 듣는 ‘여러 청중’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고, 그 방법에 따라 결과(열매)도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말씀의 결과는 듣는 자에게 전적으로 달려있습니다. 같은 씨(말씀)가 같은 시간에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이 뿌려지지만, 듣는 자의 반응에 따라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첫째 부류의 사람은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가 뿌리를 내리기에는,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앗처럼 불가능한 일입니다. 즉 자신의 편견과 아집, 옛 것을 고수하려는 마음, 새 것을 덮어놓고 싫어하고 위험시하는 근시안적인 자기폐쇄, 그리고 부도덕한 생활, 교만과 자아도취, 특히 진리에 대한 무관심 등이 그를 소경으로 만듭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마음 밭에 하느님의 말씀의 씨가 뿌려졌으나 뿌리가 내리기 전에 사탄이 낚아채가서 냉담해 버리는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 세례까지 받았지만 얼마 뒤 “성당에 다니면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하면서 완전히 세속 생활로 빠져버려 하느님과는 이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얄팍한 인생관을 가진 자로서, 깊이 생각하는 일도 없이 새로운 것이면 무엇이든 덮어놓고 좋아는 하지만, 즉시 싫증을 내고 끝을 맺지 못한 채 도중에서 그만둡니다. 그들은 시작하는 것은 많아도 오래가지 못하고, 쉬 더웠다 쉬 식어버리는 자들입니다. 즉, 돌밭에 떨어진 씨는 싹은 나왔으나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경우인데 환난이나 어려움이 닥치면 하느님을 배반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지만, 실제 자신에게 위기와 화가 닥쳐오면 이내 얼굴을 바꿀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자신의 이익으로 계산하게 되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믿어봤지만 너무 힘들어. 달라지는 것도 없어”라고 생각하며 이내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세 번째 부류는 마치 두 주인, 아니 셋 넷의 주인을 섬기는 자들로서 그들의 생활은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에 분주하여, 참다운 가치관을 터득치 못한 자들입니다. 현대인들의 생활은 여기에 속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들은 세속 일에 바빠, 기도하는 시간도, 성경을 읽을 틈도, 성당에 나갈 여유도 없을 뿐 아니라, 주님을 만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생활 영역에서 밀어냅니다.
이처럼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주변의 가시덤불에 덮여 도저히 열매맺지 못하는 것과 같이 세례를 받긴 받았으나, ‘산도 가야지, 바다도 가야지, 운동도 해야지, 파티도 가야지, 술도 마셔야지’하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시간을 내면서 주님을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을 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도대체 죽을래야 죽을 시간이 없다’며 세상 걱정과 유혹이라는 덤불을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마지막 부류는 옥토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음을 열어 놓고 언제나 배우려 듭니다. 또 귀를 기울이고 언제나 듣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친구의 충고를 듣는 사람은 도덕적 실패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심사숙고하여 세상의 참된 이치를 깨닫고, 그가 듣고 아는 바를 실천에 옮깁니다. 그런 사람은 좁은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열매를 맺습니다.
이러한 청중들 가운데 우리는 어떠한 부류에 속하고 있는가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말씀의 씨앗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들을 귀 있는 자로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사랑의 열매를 맺어갑시다. 주님의 씨앗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이 나아가야할 참 진리요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아멘.
마음 밭
-이수철신부-
히브리서 4,12절 다음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내면을 환히 비춰주는 살아있는 거울이요,
영육(靈肉)의 최고 치유제입니다.
진정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마음도 깨끗해지고 영육의 병도 치유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의 위력도 인간의 협조를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은 공동협력자 인간을 필요로 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의 씨도
길바닥 같은 마음 밭이나 돌밭, 가시덤불 같은 마음 밭에 떨어지면
도저히 풍요로운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음 밭이 좋아야 합니다.
탓해야 할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 마음 밭입니다.
몸을 가꾸고 돌보는 데는 그렇게 정성을 다하면서
마음을 가꾸고 돌보는 데는 왜 그리 소홀한지 모르겠습니다.
밭의 이치와 마음 밭의 이치는 똑같습니다.
좋은 땅도 방치하여 가꾸고 돌보지 않으면
곧 잡초 우거진 거칠고 굳어버린 밭이 되듯이
마음 밭도 냉담으로 방치하여 가꾸고 돌보지 않으면
곧 거칠고 어둡고 차갑고 딱딱한 마음 밭이 됩니다.
애당초 타고난 좋은 마음 밭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마음 밭도 길바닥 같을 때도 있고,
때로는 돌밭 같은 때도, 가시덤불 같은 때도 있는 법입니다.
이래서 항구한 수행이, 말씀 공부의 수행이 필요합니다.
내 마음 밭의 현실에 개의치 말고
늘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행하는 노력이 있을 때,
점차 좋은 땅의 마음 밭으로 바뀌어 갑니다.
잘 들어야 좋은 제자입니다.
마음 밭이 좋아야 잘 듣습니다.
베네딕도 규칙도 ‘들어라(Obsculta)'로 시작됩니다.
겸손과 순종의 정신으로 잘 듣는 제자 있어야 좋은 스승도 나옵니다.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에게 내 마음에 드는 목자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너희를 지식과 슬기로 돌 볼 것이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하느님은
참 스승이자 착한 목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마음 밭을 좋은 땅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풍부한 말씀의 결실을 맺게 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루가8,15)!”
아멘.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양승국신부-
<초라한 인생의 결실 앞에서>
이것 저 것 작물들을 잔뜩 심어만 놓고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돌보지 않는 제게 한 전문 농부께서 이렇게 ‘뼈있는’ 충고를 하셨습니다.
“농작물들은 주인 발자국 소리 듣고 크는 법이라네. 틈만 나면 자주 가봐야혀.”
이른 봄부터 부지런히 땅을 갈아엎고, 거름을 섞고, 이랑을 만들고, 비닐을 씌우고, 씨를 뿌리고, 물을 대고, 약을 치고, 잡초를 뽑아주면서 애지중지 키운 작물들은 어찌 보면 농부에게는 자식, 혹은 분신과 다름없습니다.
이번 수해로 한 순간에 그 ‘아까운 것들’ 다 날렸을 뿐만 아니라, 논이고 밭이고 살아갈 터전이고 형태도 없이 사라져버려 망연자실해있는 농부들의 그 허탈한 마음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오를 뿐입니다.
주님의 위로에 우리의 위로가 보태져서 그분들, 조금이나마 얼굴을 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수해복구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주민들의 말씀입니다.
“자원봉사자들이 오셔서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많은 일을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함께 해주시니, 따뜻한 마음 보여주시니,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에, 완전히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는 마음에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유난히 제게 크게 다가옵니다.
불과 서너 달 전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호박 모종 몇 개 심었을 뿐인데, 지금은 넝쿨이 자라나 꽤 큰 언덕을 다 덮고 있습니다. 큰 호박잎 밑 비밀스러운 곳에는 축구공보다 더 큰 호박덩어리들이 보물처럼 숨겨져 있습니다.
이른 봄 제 눈에 제대로 띄지도 않던 가냘픈 깻잎 모종 조금 심었을 뿐인데, 지금은 자라고 자라서 제 키 만해 졌습니다. 그간 따먹은 깻잎만 해도 리어카로 몇 리어카는 될 것입니다. 가지, 고추, 상추...꽤 쏠쏠한 재미를 봤습니다.
제대로 된 결실을 맺은 작물들, 얼마나 기특했는지 모릅니다. 생각만 해도 흐뭇합니다. 고맙습니다.
반면에 그렇게 ‘쌩고생’하면서 돌보고 키웠는데 전혀 협조하지 않고 수확은커녕 말라비틀어져버린 작물들을 바라보니 화가 날 뿐입니다. 모종 값만 해도 얼만데...하며 본전 생각이 납니다.
우리를 이 땅에 심으시고 돌보시는 우리의 주인이시자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시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탐스런 열매를 가득히 맺는 인생 앞에 하느님께서는 흡족해하실 것입니다. 전혀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인생 앞에서 하느님께서도 안타까우실 것입니다.
나는 이 한 세상 살아오면서 별로 이룬 것도 없고, ‘이거다’ 하는 결실도 없는 초라한 인생을 살아왔는데, 어쩌나 고민하시는 분들도 계실 텐데,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 타고난 토양이 다르기에 어쩔 수 없이 결실도 다릅니다. 주어진 그릇이 다르기에 수확의 양이 다른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인류 발전을 위해, 타고난 달란트를 바탕으로 한 생산을 통해, 다양한 서비스를 통해 풍성한 결실을 거둔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은 없겠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닙니다. 반드시 외적으로 드러나는 결실만이 다가 아닙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적인 결실, 기도의 결실, 희생의 결실, 인내의 결실도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타고난 이 세상에 전혀 기여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분도 나름대로의 결실을 거두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 있어 결실은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것만 해도, 생명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만 해도 엄청난 결실입니다.
우리 각자의 나날 안에서, 우리 각자의 오늘 처지 안에서, 우리 각자의 인생 안에서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민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무가 열매에 의해서 구분되듯이 우리의 신앙도 결실을 통해서
-김태환 신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내포한 뜻을 묻고 예수님께서 설명해주십니다. 똑같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결실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설명하십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듣는지 그 듣는 태도를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이 듣는 태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유치부 어린이들과 만날 때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아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모든 말을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까지 낮춰서 해야 하는데, 그게 정말 어렵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들려 줘도 듣는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의 답답함은 정말 큽니다. 복음도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면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의 사정을 안타까워 하십니다. 악한 자에게 말씀을 빼앗기는 사람. 환난과 박해에 넘어지는 사람. 그리고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허덕이는 사람 모두를 안타까워 하십니다.
말씀을 잘 들은 우리는 들은 것으로만 끝내버릴 수 없습니다. 들은 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뿌리 깊이 내린 믿음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정확한 평가를 받습니다. 복음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어려움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기만 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으로만 그친 사람은 고난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커다란 고통 가운데 있음에도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를 찾는 분들이 부럽습니다.
혹시 열매를 맺지 못하는 힘없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면 나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염려가 무엇인지 살펴봤으면 합니다. 걱정으로 나를 옭아매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합니다.
나무가 열매에 의해서 구분되듯이 우리의 신앙도 결실을 통해서 평가됩니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맺어야 인정받고 포도나무는 포도를 맺어야 인정을 받습니다. 이름만 사과나무일 뿐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쏘시개로 밖에 쓰이지 못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좋은 씨와 밭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당연히 좋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밭을 일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을 맺도록 만들어 주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들로 인해 하느님의 영광이 가리워 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좋은 열매는 먼저 열심히 말씀을 듣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들은 말씀을 깨닫고, 깨달은 말씀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 삶 속에 성령의 열매가 열릴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기르시는 나무와도 같습니다. 때문에 반드시 꽃을 피우고 그 꽃에 상응하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가 삼십배, 육십배, 백배에 이르는 열매를 맺으려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더욱 크게 자라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의 노력은 하느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오늘 나에게 허락된 삶터에서 듣고 깨달은 복음을 실천하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비유말씀을 설명해 주시는 이유
-박상대신부-
예수님을 직접 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나라에 관한 현실감을 좀처럼 체감하기 어려웠던 마태오복음공동체나 현대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비유설교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하느님나라의 신비에 관한 마지막 도구(道具, instrument)요, 상징(象徵, symbol)라고 했다. 하느님나라의 신비는 곧 하느님 존재의 신비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바로 그 자리에서 그분을 직접 보는 눈과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는 귀는 참으로 행복한 것이다.(16절) 이는 갈수록 어떤 신비스러운 것으로부터 이탈해가고, 심오한 것을 마치 미신(迷信)으로 여기듯 하는 현대의 우리들이 참으로 부러워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느님나라의 신비에 관한 일곱 개의 비유 중에서 그 첫 번째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이미 말씀해 주셨고,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까지 밝혀주신 예수께서 오늘은 그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 사실은 비유설교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겠으나 설명해 주시는 이유를 곱씹어 보아야 한다. 우선 씨앗은 하늘나라의 복음(福音)이다. 그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복음선포자이다. 그 씨앗이 뿌려지는 곳은 네 곳으로 언급된 바 있다.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은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토양으로서 선포되는 복음말씀을 듣는 청중과 그 청중의 내적 조건을 의미한다. ① 길바닥에 떨어진 씨는 새의 밥이 된다고 했다. 길바닥이란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 경우를 말하며, 이 때 그 씨앗을 먹어치우는 새는 악한 자, 즉 사탄을 의미한다. 결국 길바닥은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곳으로서 이는 청자의 마음 밭이 세속적인 지식이나 교훈, 과학이나 철학이념으로 다져져 있어 복음을 받아들여 싹을 피울 수 있는 어떤 마음의 바탕도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이런 고정관념들이 씨를 쪼아 먹는 새에 비유된 사탄인 셈이다. 사탄은 곧 인간 스스로의 마음에 살고 있는 교만이나 자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② 씨앗의 싹을 피울 수 있는 어느 정도의 토양만을 제공하는 돌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조건이다. 강한 햇볕 속에서 피운 싹을 부지하기란 불가능한 조건인 것이다. 이런 돌밭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기는 했지만 그 뿌리가 마음속에 내리지 않아 그 말씀 때문에 닥쳐오는 환난이나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말라죽는 경우이다. 복음말씀과 신앙 때문에 손해를 견디지 못하는 것도 같은 경우일 것이다. ③ 가시덤불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도 말씀을 듣고 깨닫기는 했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복음말씀을 받아들이고 깨달았다고 하여 걱정과 유혹거리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더 크고 심각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이런 장애들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신앙의 성장을 도모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신앙인은 세상 안에 살면서 세상의 것을 향유하면서도 집착과 과욕을 제어하고 천상의 것에 대한 감각을 늘 유지하고 성장시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④ 예수께서 바라시는 것은 좋은 토양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이다. 좋은 토양은 복음말씀을 잘 듣고 깨닫는 사람의 마음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씨앗이 길바닥에 떨어진 경우를 제외하고,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이나 좋은 땅에 떨어진 경우는 모두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경우를 의미한다. 깨달았다는 말은 씨앗이 발아(發芽)하여 싹이 피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문제는 그 뿌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견디어 내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돌밭과 가시덤불 속의 씨앗은 뿌리는 내리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복음의 씨앗이 좋은 땅에 뿌려진다고 해서 저절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적당한 햇볕과 알맞은 수분이 토양과 더불어 훌륭한 가실(佳實)을 이루어낸다. 그렇다고 좋은 땅이 아닌 곳에 떨어진 씨앗이 결코 열매를 맺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물론 길바닥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이 비유 속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러나 비유의 설명 속에서는 얼마든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들과 산을 돌아다니다 보면 암층의 절벽에서뿐만 아니라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있는 꽃이 있지 않는가. 이것이 오늘 예수께서 비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시는 이유이다. 사람은 자신을 변화시켜 고정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고, 환난과 핍박과 박해의 온갖 어려움도 이겨낼 수가 있으며, 세속의 온갖 걱정과 유혹거리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복음의 뜻을 따라 기도하고 묵상하며, 사랑하고 선행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기 위해 신앙에 항구하고 지구(持久)하는 것이다. 신앙의 지구력, 그것은 결실을 위한 하느님 성령의 능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열매를 맺는 일에는 깨달음을 행동으로 수행하는 자신의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좋은 땅(마태 13,18-23)
- 유 광수신부-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 들어라.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씨가 길에 뿌려진 이가 바로 그러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때가 있다. 우리 나라에 많은 크리스챤들이 있는데 왜 사회는 점 점 더 악해지고 있을까? 카톨릭 신자들만도 2백만명이 넘고, 개신교 신자까지 합하면 아마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수효는 우리 나라의 3분의 1은 될 것이다. 그렇게 많은 종교인들이 있는데 우리 사회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영성적으로 나아진 것이 없고 오히려 더 부정과 부패, 살인과 폭력, 음란과 사치, 물질적인 탐욕과 이기주의 등이 그 도를 더해 가고 있다. 오히려 옛날의 따뜻한 마음과 친절 그리고 양심적인 생활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고 삭막함과 서로간의 불신, 이혼과 마약 등이 우리 사회를 물들여가고 있다. 왜 그럴까? 그토록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주일이면 미사 참례하고, 예배를 보고, 아침 저녁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고, 성직자, 목사, 수도자들이 그렇게도 많은데 왜 우리 사회는 복음적이지가 못할까?
내 개인적인 영성생활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할 때가 있다.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고 또 활동도 많이 했는데 왜 나의 영적인 수준은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할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발전한 것이 없고 오히려 내가 처음 영세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을 때보다도 더 믿음이 약해졌고 기쁨도 없다. 왜 그럴까? 왜 나에게는 신앙생활을 하는 기쁨이 없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없을까?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고서도 같은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왜 저 사람은 그렇게 열심히 기도생활을 했는데도 조금도 변하지 않을까? 왜 저 사람은 매일 똑같을까? 아침저녁 기도를 하고 매일 미사 참례를 하고 레지오 활동도 하고, 봉사하러도 많이 다니는데 왜 저 사람은 그렇게 차갑게 사람을 대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더 물질에 대한 욕심이 많고, 자기 것만 알고 나누지를 못할까? 저 사람은 성당에서 반장 구역장, 레지오 단장이다, 회장이다 모든 감투는 다 가지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인색하게 사는가? 사랑이 없을까? 아무튼 우리는 이런 저런 질문을 많이 하게 되고 의문을 갖을 때가 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는데 어떤 것은 길에, 어떤 것은 돌밭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고,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뿌려졌다. 그런데 길, 돌밭,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였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만 열매를 맺었다. 왜 그럴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와 열매를 맺는 씨의 차이는 무엇일까? 씨는 같은 씨이다. 즉 길, 돌밭,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다 같은 씨이다? 그러니까 열매를 맺고 못 맺고 하는 것은 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씨가 떨어진 장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아무리 좋은 씨이라도 즉 열매를 낼 수 있는 씨이라도 그 씨가 뿌려진 장소가 길, 돌밭, 가시덤불 속이라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 그 씨란 무엇인가? 그 씨는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이요 길, 돌밭, 가시덤불 속, 좋은 땅이라고 표현된 장소는 바로 우리 마음 즉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는 이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영적으로 성숙되지 못하고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가 길,돌밭, 가시덤불 속과 같은 자세로 들었기 때문이고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던 사람은 좋은 땅처럼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오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더라도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 자세가 길, 돌밭, 가시덤불 속과 같을 때에는 영적으로 성숙할 수 없다. 영적으로 성숙시켜 주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지성, 활동이나 시간이 아니라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가 오랜 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하늘 나라에 고나한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뿌리가 없으면,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버리면 결코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오직 좋은 땅 즉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읽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바로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며 지름길이다. 우리의 영적 성숙은 결코 활동에, 아니면 막연한 신심에. 미사 참례나 겨우 왔다 갔다는 하는 신앙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다. 깨달아야 하늘 나라에 대해 눈이 뜨인다. 깨달아야 하늘 나라의 소리가 들린다. 깨달아야 죽었던 내 영혼이 다시 부활한다. 깨달아야 병들었던 내 영혼이 치유 된다. 깨달음이 있어야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다. 깨달아야 영적인 감각이 다시 살아나고 깨어난다. 깨달음이 있어야 우리가 매일 지고 가야할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갈 수 있고 웃으면서 봉사할 수 있다. 깨달아야 이 세상의 것에 얽메이지 않고 어떤 사건이나 문제 앞에서 초조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초연할 수 있다. 깨달음이 있어야 신앙생활의 기쁨이 있고 가슴 벅찬 충만함이 밖으로 베어 나온다. 깨달음이 있어야 옳고 그름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고 올바르게 도와 줄 수 있다. 깨달음이 있어야 입에서 하느님의 소리가 나오고 하느님의 글이 나오고 하느님의 말이 나온다. 깨달음이 있어야 무디어진 나의 마음이 깨어지고 새 살이 돋아난다. 깨달음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그래야 사람들은 내 안에 맺은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다. 깨달음이 없는데 어떻게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전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의 가장 취약점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깨달음이 없이 듣는다는 것이다. 듣기는 듣지만 그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식 없이 듣는다. 아니 깨달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봉사한다고 나서고, 기도한다고 앉아있고, 바쁘다고 여기 저기 다닌다.
내가 시골에서 형제들과 함께 지내고 있을 때 한 형제가 아침 식사 때에 와서 "신부님, 밭이 없어졌어요."라고 말하였다. "무슨 밭이 없어져?"라고 물으니까 "봄에 우리가 심어놓은 고구마 밭이 없어졌어요."라는 것이다. "그럼 그 밭이 어디갔느냐?" 라고 물으니 "우리가 심어놓은 고구마는 하나도 자라지 않고 풀만 무성하게 자랐어요."하는 것이다. 고구마를 심어 놓고 공부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한번도 돌아보지도 않았으니 고구마 싹이 나오기도 전에 풀이 자라서 고구마 밭을 덮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밭이 없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하늘 나라에 관한 말씀의 씨가 지금 내 안에서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독서> : 십계명의 비밀 : 당신은 복받은 약속의 백성입니다.
성경은 우리 자신을 보여주는 좋은 거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05)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여러 책들 중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은 탈출기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탈출기는 참으로 소중한 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를 통하여 나 자신을 실상을 정확하게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탈출기의 중심은 시나이산입니다. 탈출기는 이집트의 고센에서 출발하여 시나이산에 도착하여 약속의 말씀을 받아 성막을 세우는 일까지의 기록입니다. 탈출기는 20장 십계명을 전후해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이집트를 빠져나오는 탈출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며, 후반부는 시나이산 약속으로 주어지는 성막문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십계명에 대한 총론적인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각 계명의 각론적 구체적인 의미는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십계명이 주어질 때 시나이산에 일어났던 일과 십계명 서두에 주신 말씀의 의미와 십계명 전체의 중심사상과 오늘날 십계명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 십계명이 주어질 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은 먼저 모세를 불렀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올라가자, 주님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 집안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알려 주어라."(탈출 19,3)고 했습니다. 먼저 모세를 불러서 시나이산에서 일어날 사건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Orientation)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가 내려와서 백성들에게 하느님과의 계약 체결을 준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셨습니다.
① 백성들은 3일간 옷을 빨고, 여인을 금하며, 성결한 삶을 살게 했습니다(탈출 19,10-11. 15).
② 백성을 위해서 사방으로 경계를 정하여 이를 위반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게 했으며, 오르는 자는 반드시 죽게 했습니다(탈출 19,12).
③ 모세가 산을 오를 때 70원로들과 아론을 적당한 거리에 두었으며, 여호수아는 조금 더 동행케 했으며, 자신은 정상으로 나아갔습니다(탈출 24,13-14).
이상과 같은 준비가 끝나자,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약속한대로 시나이산에 강림하셨습니다.
① 성부 하느님이 시나산에 현재하신 것입니다. 옹기점 연기같은 구름이 온 산을 뒤 덮었으며, 번개가 뻔쩍이며, 우뢰소리와 같은 나팔소리에 산이 진동했습니다(탈출 19,16-19) 온 산에 주님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탈출 24,16-18). 그 모습이 얼마나 장엄했던지 백성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탈출 20,18-19).
② 성자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도 하늘의 천사가 동원되었고(루카 2,14), 구원활동을 완성하실 때도 갈바리아의 지축이 흔들렸으며(마태 27,51-52), 후일에 재림하실 때도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오실것입니다(1테살 4,16).
③ 성령 협조자가 마르코 다락방에 강림하실 때에도 홀연히 일어난 급한 바람으로 대진동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사도 2,1-4).
인간에게 특수한 사명이 주어질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천지에 충만하신 하느님이 특수한 사명을 이루시기 위하여 직접 임재하실 때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간혹 국가의 원수들이 방문할 때 야포를 쏘며 빵파레를 울리면서 환영을 합니다. 그 권위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시편 기자는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모두 그분의 길을 걷는 이 모두!"(시편 128,1)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함으로 신전의식의 인격자로 살아가는 자가 복된 인간입니다.
둘째: 십계명의 서론적인 의미는 이러합니다.
십계명 서론은 이러합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탈출 20,2)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젠 바로의 종이 아닌 하느님의 자녀라는 성민의 신분과 이들의 처소가 이집트의 고센이 아닌 약속의 땅 가나안의 시민이라는 사실과 이들이 지켜야 할 법이 바로의 명령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명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세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① 십계명은 종의 윤리가 아닌 아들의 윤리입니다.
종에게는 자유와 안식과 상이 없습니다. 종의 노력은 지극히 당연한 수고입니다(루카 17,7-9). 그러나 아들은 자유함과 안식과 상이 있습니다(루카 15,22-23).
② 십계명은 이집트의 문화가 아닌 성민의 문화입니다.
이집트의 문화는 우상숭배의 문화입니다. 그러나 성민의 문화는 약속의 문화요, 하느님께 영광돌리는 삶입니다.
③ 십계명은 저주의 규례가 아닌 축복의 법칙입니다. 당신은 바로의 명령대로 우상숭배하면서 살면 결국은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모세의 인도로 파스카 어린양의 피 아래서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느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면 영육간에 복을 받습니다(신명 28,1-14).
당신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당신의 생애에 잊을수 없는 사건이 있다면 출애굽 사건입니다. 파스카 어린양은 바로의 권세를 짋밟고 당신을 마귀에게서 풀어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사단권세를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당신은 이 은혜의 감사와 감격으로 남은 여생을 살면 십계명은 당신에게 결코 무거운 짐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셋째: 십계명의 중심사상은 이러합니다.
십계명은 두 돌판에 새겨진 열가지의 계명입니다. 이는 성문계시의 표본이요, 모든 율법의 근원입니다. 시나이산 이전의 족장 시절에는 하느님이 때마다 필요시 신실한 족장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나이산 약속으로 하느님의 감추어진 비밀한 것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그 언약을 보고 지킬 수 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 언약은 계시의 첫 열매가 되어서 이후로 수 많은 계시가 예언자들을 통하여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십계명의 중심사상은 어떠한가?
십계명의 중심사상을 세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하느님은 인격적인 신이심을 가르칩니다.
구약의 제사나 신약의 예배(미사)는 철저하게 인격적인 약속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세속적인 무속종교와 다른 점은 인격과 비인격의 차이입니다. 생명력이 없는 비인격적인 것을 숭배하는 것이 우상숭배행위입니다.
② 인간에게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가르쳐 줍니다.
하느님의 닮은 모습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 멀리하는 것이 인생의 불행이요, 비극의 원천입니다. 모든 삶의 우선은 하느님입니다. 계시의 순서는 이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③ 삶의 행위에 있어서 그릇된 욕망의 절제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 계명은 우리의 행위로 지켜야 할 법도입니다. 이 계명을 분석하면 적극적으로 지켜 준행할 것은 두가지이며, 그외 여덟가지는 모든 금지법입니다. 처음 에덴에서 주어진 창조명령은 전부를 허용하고 주권의 상징으로 하나를 금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인간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 열가지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당신이 어떻게 이 계명을 지킬 수 있는가? 주님은 우리에게 한가지 비밀한 것을 가르쳐 주어서 이 모든 계명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 계명과 구약의 모든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은 하나의 새계명을 주심으로 모든 계명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 계명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넷째: 십계명의 오늘날 의미는 이러합니다.
당신은 십계명을 오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는 구속사의 완성으로 구약의 모든 율법이 폐지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루지 못한 율법의 빚나간 부분을 바로잡아 완전케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씀하시기를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효가 되게 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자는 것입니다."(로마 3,31)고 했습니다.
주님이 이루신 구원사는 이러합니다.
① 주님은 의식적인 제사를 십자가로 완성하셨습니다. 제물을 가지고 드리는 제사를 갈보리에서 자신의 몸을 드림으로 단번에 청산하신 것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히브 9,12) 그러므로 우리가 더 이상 소나 양의 피를 가지고 나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② 주님은 구약적인 규례를 부활사건으로 전환시켰습니다. 그래서 율법적 안식일을 부활의 주일로 바꾸었으며, 의식적인 제사를 찬양의 미사(예배)로 바꾸었으며, 할례를 세례의 씻음으로 전환했습니다.
③ 주님은 육체적 행위의 법을 성결한 마음의 법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덕질 하지 말라는 육체적인 행위의 법을 성결한 마음의 법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마태 5,21-32).
오늘날의 그리스도 교인들의 윤리의식이 어떠한가? 우리는 구약적인 약속의 법도를 무시하고 신약의 은혜와 사랑만 강조하다보니 죄를 피하여 의롭게 살기보다는 범죄한 이후에 베풀어지는 용서에 너무 쉽게 길들여져서 기독교인의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구원사를 완성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주신 십계명보다 더 엄한 윤리의식을 산상설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면 이 십계명을 누가 받을 수 있는가? 이는 파스카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을 하여 홍해를 건넌 자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누가 이 고귀한 법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늘의 양식 만나를 먹고 구름기둥 불기둥 아래 있는 자 만이 이 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 법을 지키면 어떠한 보호를 받는가? 이 법 아래 있으면 하느님의 주권적인 간섭을 받습니다. 그들이 약속의 법을 가지고 가는 곳마다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산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문화권이 형성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막문화였습니다.
성막의 중심이 바로 법궤(언약궤)입니다. 지성소에 보관된 법궤에 하느님이 항상 현재해 계셨던 것입니다. 사제는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당신이 이 계명을 지키면 날마다 하느님의 현재(임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