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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먼 날의 회상(回想)
우병택
산자락이라도 밟고 서 있는 집에 사는 사람은 그 산에 오르는 데 그다지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그것은 산 자체에 궁핍을 느낄 필요가 없기 때문일 터다. 내가 인근에 있는 천생산을 오르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었다. 이 산을 처음 올랐던 때는 유신 초, 내 나이 스무 살 때였다. 서른 해를 넘기고서 이제야 산을 오르면서 무쇠덩어리 하나를 안고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산을 오르기로 했다.
당시 김 선배는 사학과 졸업반이었다. 내가 입학초기에 이곳저곳 서클을 기웃거리다가 동향이라는 이유로 그를 만났고 활달하고 막힘이 없는 품성에 호감이 갔다. 나는 십여 년 전에 서울에 정착한 오촌 아제집 근처에서 하숙을 했다. 덕분에 처음 1년 동안은 세탁물을 당숙모한테 맡겼고 김 선배의 옷도 가끔 싸여 들어갔다.
어느 날 선배의 부탁으로 경숙을 만나게 되었다. 선배와 동향이라는 것과 부친이 정미소를 한다는 것 외엔 선배에 대해서 더 깊이 아는 게 없는 처지에.
“자네가 나에 대해서 더 이상 알았다고 해도 도움 될 기 하나도 없는 기라."
김 선배가 내게 농하듯이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의 깊은 뜻을 알게 된 것은 뼈저린 고통을 겪은 후였다. 본래 지독한 고통이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들이닥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이 휘몰아치다가 가버리게 마련이다. 까마득한 후배가 자신들의 일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경숙은 구미 시내 요지의 B은행지점 행원이었다. 서울에서 내로라는 대학교를 중퇴한 후 무슨 연유에서인지 소도시로 내려와 은행원이 됐기에 갖은 소문이 무성했었다. 훤칠한 키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로 풍기는 첫인상은 세상을 난관이 없이 잘 살아온 듯 보였다.
「천생산은 높지 않아서 오르는데 별 힘이 들지 않습니다. 산마루가 길고 평탄해서지요. 숲이 우거지고 암벽의 경관도 훌륭하지요. 산행뿐만 아니라 소풍지로도 아주 좋답니다. 산 남쪽에는 미득암이 있고 북쪽에는 통신바위가 있어 어느 곳에서 시작하든지 미득암과 통신바위를 거쳐야 합니다. 산행 기점과 종점은 천룡사와 장천면 신장리의 자골로 하겠습니다.
- 이번 주말에 산행 하실 분은 창구로 직접 찾아오시거나 연락 주십시오. 나경숙- ⌟
그녀가 근무하는 B은행지점을 찾았을 때 은행 게시판에 붙은 산행을 알리는 글이었다. 매직으로 쓴 단정한 필체였다. 곧장 창구로 가서 그녀를 만났다. 여자 행원 중에 앉은키가 훌쩍 컸고 얼굴빛이 유난히 희었다. 나는 경숙을 단번에 알아봤다. 앞 손님이 일을 끝내기를 기다렸다가 *아버지 명의의 통장에 메모지를 끼운 현금 뭉치와 함께(무슨 용무지요?)사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경숙이 돈을 헤아리다가 내가 쓴 쪽지를 보고 눈인사를 했다.
“이뿌다카이, 그러타꼬 자네와 연애할 처지는 아이고. 혹시 모르지 또…."
김 선배가 밑도 끝도 없이 한 말이다. 연애할 처지가 아니면 아닌 거지.‘혹시 모르지 또….’는 뭔지?
“일요일 오전 10시에 은행 뒷문에서 만나요."
' 일요일 오전 10시'란 모집 광고에 명기된 사실이다. 그런데도 마치 모든 일이 금세 이루어질 듯함에 쿵쾅대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옆 사람의 귀까지 들릴 것 같아서 서둘러 은행 문을 나섰다.
약속한 일요일 아침 10시, 경숙은 약속 시간에서 1분도 늦지 않고 나타났다. 빨간 등산용 스타킹이 먼저 눈에 띄었다. 두툼한 장갑이며 등에 맨 배낭, 그리고 손에 든 스틱까지 전문 등산인의 차림이었다. 나는 함께 내려와 있는 D大 재학중인 친구한테서 그의 등산복을 빌려 입었다. 물론 키가 나보다 10cm쯤 더 큰 녀석의 옷이 제대로 맞을 리는 없었다. 교련복을 입는 것보다 좀 더 나을 것 같다는 그의 종용에 따랐다.
“오래 걸리진 않아요. 참, 그런데 학생은 내가 댁보다 한두 살 위라는 걸 알고 있었나요? 참, 그렇기도 하겠네. 산행과 나이가 무슨 관련이 있나요? 뭐."
혼자 묻고 대답해 놓고는‘호호’거리는 그녀가 얼핏 조금은 모자란 듯하다는 생각이 퍼득 들었다.
“어데 예. 거기 아이고 예. 참,광고에는 여럿인 듯 보이던데 어째서 우리 둘뿌이니꺼? 오늘 산행 가는 사람이 예?"
나는 엉거주춤 대답인지 질문인지 모를 말을 했다.나 지신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이번엔 내 자신이 그녀보다 훨씬 더 모자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많이들 신청은 했지요. 그런데 난 댁을 보는 순간 단 둘이서 산행하기로 결정을 했거든요."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장난기 섞인 모습으로 대답했다.어쩌면 '너란 애송이야 내가 충분히 감당할 수가 있단다'하는 듯이 들렸다.
“그라믄…."
“아, 댁이 생각했던 다른 사람들 말이죠? 사실 난,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과는 산행 안 하죠. 그렇지만 걱정은 말아요. 먼저 올라간 사람이 몇 더 있으니까."
경숙은 말을 끝내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평지를 가듯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게시판에서 밝힌 산행기점인 천룡사와 장천면 신장리의 자골과는 반대편인 구미쪽에서 시작했다. 경숙은 내게 그렇게 시작 지점이 바뀐 이유를 물을 틈도 주지 않고 앞서서 산을 올랐다. 경숙의 걸음은 무척 빨랐다. 한참을 앞서 가던 그녀가 뒤돌아보며 공사가 진행 중인 공단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래 공사장들이 어떻게 보여요?"
국내 굴지의 회사들이 짓는 공장들이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본과 독일 등지에서 구걸하다시피 들여온 외화가 지금 대기업들의 배를 터지게 만들려고 저 짓거리를 하는 중이랍니다.”
나는 그녀의 속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김 선배의 말에 이렇다 저렇다 답이 될 만한 게 없는 게 아닌가. 아니, 내가 너무 성급한 건가하는 생각에 걸음이 뒤처졌다. 앞서가던 경숙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이 따스했다.
“학생이 다니는 K大도 몸살을 앓고 있다던데…."
“그렇심더."
“언제 올라가나요. 학교엔?"
“글쎄요…. 나도 모르겠심더."
땀방울이 이마에 송알송알 맺힌 경숙을 보며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장 저수지를 따라 계곡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저수지가 어째 이리도 맑을꼬?"
나는 탄성을 올렸다. 경숙은 차가운 물을 손으로 떠올려 입술에 댔다. 그리고 내 입술에 불쑥 대어 주면서 말했다.
“자, 목 좀 축이고 가시지. 학생!”
나는 뒤로 주춤하다가 마셨다. 입술에 그녀의 손바닥이 닿는 순간 냉기가 싹 가셨다.사실 나는 그때까지 여자에 대해서는 숙맥이었다.
“그만 예! 됐심더. 고마바여."
얼굴이 화끈거리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지금까지 누나들 외엔 이렇게 가까이서 여자를 접촉한 적이 없었다. 그녀보다 몇 걸음 더 앞서 걸었다. 몸이 가벼워지며 아물거리던 시야가 훤해졌다.
음력 팔월 초하루, 조상의 묘를 벌초하러 내려온 길에 상경을 하루 늦추어 천생산을 오르기로 했다. 공터에 주차하고 주위를 휘 둘러봤다. 낯설었다. 고향에 왔다기보다 영락없이 외지인이 된 기분이다. 산행을 하기에는 늦은 감이 있었지만 소요시간이 짧을 것이므로 그리 염려할 것도 못 된다. 내려오기 전날 아내가 말했다.
“당신, 이번에 구미에 가거든 그 경숙인가 뭔가 하는 여잘 머릿속에서 송두리째 뽑아서 선산들판에 버리고 와요. 그렇게 되잖음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랑 마시우!”
요즘엔 부쩍 경숙의 꿈을 자주 꾼다. 꿈속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다가 아내에게 면박을 맞기도 했다. 그렇게 깨어서 멍하니 앉아 한 두어 시간 동안 잡념에 시달리다가 잠이 들고는 했다.
이제 곧 작은 산성지와 맑은 저수지가 나타날 것이다. 단풍이 들 채비를 하는 듯 수목의 푸른빛이 듬성듬성 남았다. 빠르다. 하기야 나도 시퍼렇게 혈기 왕성하던 그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쉰을 넘기고 있다.육신은 시들거리는데 지난 일들과 단절하지 못하고 이렇게 그 먼 날을 거슬러 오르듯이 산을 오른다.
“저기로 돌아가야 되요. 꼭대기에 닿기 전에 먼저 온 사람들과 만나기로 했죠."
그녀는 팔을 들어 한쪽 봉우리를 가리켰다. 알싸한 입냄새에 잠시 정신이 아찔했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모습에서 여자란 이래야하는구나. 허물 없이 지낸 사촌누나들과는 또 달랐다. 김 선배와는 어떤 사이일까?
얼마 후, 그녀와 함께 만난 사람들은 대구 K大 총학생회장을 지낸 Y라는 걸출한 인물이었이라는 느낌이들었다.
Y씨는 매스컴에 수배자로 자주 오르내려서 눈에 익은 거구 둘과 함께 있었다.
“동지, 반갑소!"
나는 그 일행과의 만남에서 뜬금없이 근엄한 아버지 목소리 뒤죽박죽 섞여서 순간 아찔했다.
‘이게 바로 접선(接線)이라는 거로구나' 정신을 바짝 차려야한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건지. 구국의 일념. 그래! 그때, 경숙이 다정스레 팔짱을 끼며 말했다.
“서울 K大 2학년이랍니다. 아버님께선 요 아랫녘의 면장(面長)으로 계시구요."
경숙의 소개가 끝나자 나도 떨리긴 하지만 그래도 제법 사내답게 보이려고 침을 생키고 말했다.
“반가버 예. 함자(銜字)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심더."
Y 씨는 소문대로 호걸 타입이었다. 6척 장신에 훤한 얼굴과 걸걸한 목소리를 가졌다. 이런 인물을 예로부터 헌헌장부라고 했던가. 전국 대학생 조직을 마음대로 주무른다는 인물 앞에서 그들보다 예닐곱 어린 내가 취해야 할 것은 별로 없었다. 그저 그가 시키는 대로 해야겠다는 각오만 서 있었다.
“서울 올라가마 이걸 동지 선배한테 전해 주이소. 뭐 그리 중요타 할 건 없지마는."
그는 힘 있게 양 어깨를 꽉 잡았다. 아버지도 내가 서울 유학을 결정하고 입시에 합격하자 先山에서 조상들 앞에 무릎을 꿁은 내게 같은 포즈를 취했었다. 그리고 내 귀청이 떨어지도록 큰 소리로 말했었다.
“니 히(兄)는 군청에서 일하이 그만하만 됐고. 이제 니만 잘 되마 내 더 바랄 기 없데이!"
‘군부 독재에 유신으로 백성들이 다 죽어가도 우리만 잘 살면 그만입니꺼?’
그러나 나는 끝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 했다.
두 사람의 말이 내 머리를 혼란케 했다. 그 날 산꼭대기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경숙이 論語의 안연장(顔淵章) 앞 구절을 중얼거렸다. Y씨 일행은 정상을 거쳐 장천 쪽으로 내려간다고 말했지만 그 후 두 번 다시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전국 대학생 조직을 움직이는 몇 줄의 글이 적힌 그 쪽지 하나로 인해 당한 고통은 지금까지도 악령보다 더 질기게 내 곁을 맴돈다.
저수지가 끝나는 곳에서 계류를 가로지르는 통나무다리를 건넜다. 주변 경관이 설악의 깊은 계곡에 든 듯 잠시 착각에 빠지기에 충분했다. 이제 곧 오솔길이다. 마른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한 점이 없다. 정면은 천룡사 정상에 있는 미득암이다. 계곡마다 그들의 넋이 배어있는 듯해서 등골이 서늘하다. 그땐 무덤이 있었는데... 보이지 않았다. 이끼가 낀 비석은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 비문은 흙바람에 마모되어 판독이 어렵다.
1년 뒤 Y씨는 유신정국이 조작한 엄청난 사건에 얽혀 구속됐다. 나는 경숙으로부터 뒤늦게 Y씨 소식을 듣고 며칠째 깡 술만 축내며 보냈다. 단 10분도 함께 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울 수가 없었다.
Y씨가 구속되기 몇 개월 전에 경숙과 함께 장천에서 며칠을 숨어 지냈다.
김 선배와의 관계로 경숙을 찾아 고향으로 형사들이 들이닥치자 군청에 다니던 형이 피신하라고 사람을 보냈다. 나는 경숙을 데리고 친구들이 여럿 사는 산동의 머들리에 있는 교회로 피신했다. 달리 믿을 만한 곳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목사님의 딸이 중학교 시절 한반이었다는 끈으로 찾아갔다. 친구는 인근 초급대학 간호학과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다행히 경숙과 나를 번갈아 보고는 이내 자신의 방을 내줬다. 그렇지만 그곳에서도 겨우 사흘 밖에 지내지 못하고 도망치듯 동리를 빠져 나와야 했다. 경숙은 이미 당국에서 찍은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렇게 다급한 때에 경숙이 말했다.
“이봐요, 나와 김 선배가 어떤 사이 같아 보여요?"
“모르겠심더, 혹시 애인 사이아입니꺼?"
경숙은 소리 없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내손을 꼭 잡았다. 순간 그녀가 이제 나밖에 믿을 사람이 없으니 자신을 도와 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사실은 꼭 이렇다 할 사이도 아닌데."
나는 어쨌거나 경숙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숙은 다음 말을 이었다.
“그라믄 김 선배 쪽에서는 그쪽을 우째 생각하는데 예?"
경숙이 말을 아꼈다. 대신 내 남은 손을 잡아 꼭 쥐었다. 그리고 한참 골똘히 생각한 후에 말했다.
“김 선배는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내가 자기를 어떻게 여기는지 잘 몰라요. 그냥 동지로만 알지요. 그 사람한테 내 존재는 그 정도쯤이지요."
이 지점에서 왼쪽으로 돌아 절벽을 바짝 끼고 걷는다. 멀리 금오산 동쪽 산자락 하나가 온통 벌겋다.
‘고속철이 국토를 황폐화시킨다.’ 이렇게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는 처음이다. 작업차량들이 괴물처럼 산자락을 들쑤시며 오르내렸다. 예전의 산 모습이 아니다. 벌러덩 누워 가랑이를 벌린 형국이다. 경숙이 다섯 달 된 아이를 무덤덤하게 지울 때의 얼굴이 머릿속을 마구 휘저어 어지럽다. 고개를 몇 번 흔들고 길을 재촉했다. 가슴이 답답하다. 심장에 문제가 있다 싶어 진료 예약을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미득암에 올라섰다. 서쪽으로는 낙동강과 금오산, 북쪽으로는 냉산이다. 해동제일가람인 도리사가 있다. 도리사는 아들 둘을 돌림병으로 잃은 어머니가 뒤늦게 얻은 형과 나를 올려놓고 치성을 드린 사찰이다. 어머니는 초하루와 보름엔 빠짐없이 치성을 드렸다. 내가 돈푼이나 만지던 서른 초반에 어머니는 이승을 떠났다.
동문(東門)을 저만치 두고 왼쪽으로 널찍한 바위동굴이 있다. 동굴입구에는 쌍룡의 형상이 양각되어 있다. 이 동굴에서 경숙과 처음으로 살을 섞었다. 둘은 다 지쳐 있었고 극도의 불안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탐닉했다. 절정에 도달할 때 우리는 잠시, 아주 잠시 불안과 공포로 부터 헤어날 수 있었다.
내 손을 꼭 잡은 그녀가 뛰는 내 가슴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그녀의 눈에 물기가 돋았다가 이내 볼을 적시었다. 나는 그녀를 힘주어 안았다. 그 날 밤 우리는 산동을 지나 해평까지 10킬로미터를 밤새워 걸었다. 대구, 상주 간 일등 로를 따라 걸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찢고 들이닥치면 길섶에 엎드렸다.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먼지를 흠씬 뒤집어썼다. 간혹 마을이 나타나면 비켜서 빙 돌아 걸었다. 마을을 지날 때마다 개가 떼를 지어 짖어댔다. 등골이 조였다. 섬뜩하다.
낙동교 근처에 사는 중학 동창이 산 아래 초가로 안내했다. 우리는 지쳐서 쓰러졌다. 그리고 친구의 도움을 받아 보름을 지낼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지금까지 장천은 물론 해평과 낙동을 다시 들른 적이 없다. 악몽처럼 떠오르는 그 마을을 다시 찾지 못했다.
초소가 보인다. 보기만해도 주눅이 든다. 경숙을 데리고 이곳저곳 쫓기며 전전할 때마다 가장 두려운 존재 초소. 세 개의 성상이 흘렀지만 아파트 경비 초소 앞을 지날 때도 온 몸이 움츠려든다. 이 두려움은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을 터다.
Y씨와 한 패거리로 지목된 김 선배 그리고 Y씨, 그들은 한두 살 차이를 두었으며 경숙에게 늘 걱정을 안겨주는 인물들이었다. 나는 그들에 비해서 나이도 어렸지만 주목받을 만한 인물도, 수배 인물도 아니었다. 다행스럽다면 면장인 아버지 덕분에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았던 점이 경숙은 편했을지도 모른다.
동문에서 다시 오른편으로 올라서면 작은 연못이 나타나고 분지가 형성되어 있다. 옛 선인들의 숨결이 절로 느껴지는 곳이다. 우리는 왼쪽 아래의 된비알로 내려서며 흙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썼다. 그렇게 20분쯤 뒹굴다가 당도한 곳이 천생산. 그 가파른 벼랑을 등지고 보광전이 은밀히 자리 잡고 있었다. 경숙이 주지스님을 은행 고객으로 둔 덕분에 시장기를 메우고 산을 내려왔다.그렇게 경숙과 함게 먹었던 그 한 끼 밥이 지금은 이 세상 어떤 먹거리에 비할 바 없이 행복하게 느껴지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듬해 3월, 개학 날짜에 맞춰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상경했다. 학교근처 하숙집에 짐을 풀었다. 유신 철폐를 외치던 축들이 겨울 방학 동안 숨을 고르고 있었다. 경숙도 그녀의 언니네 집 근처 청량리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나는 하숙을 정리하고 자취를 시작했다.
경숙이 가끔 연탄불에 꽁치를 구워들고 자취방을 찾아왔다. 구운 꽁치를 고추장에 찍어 술안주로 삼았다. 경숙은 늘 멍한 상태로 지냈다. 김 선배가 자취를 숨긴 이후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은행에서 쫓겨난 그녀의 미래는 절망적이었다. 경숙이 깡 소주를 들이키는 일이 점점 더 잦았다. 그런 날은 예외 없이 나와 몸을 섞었다. 그러나 경숙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런 따위는 나도 물론 상관하지 않았다.
내림 길을 따라 다시 오름길로 접어들었다. 장승이 저만치서 덧없이 웃고 있다. 한 시대, 자신의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된 소영웅들. 김 선배는 궁벽한 산골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새로운 영웅이 되어 정계로 진출했고 경숙은 막강한 여성단체 하나를 이끄는 여걸로 변했다. 나는 여기저기를 떠도는 대학 강사로 지내는 중이다. 고등학교 교사인 아내가 전적으로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있다.
산의 정상부는 2단으로 구성된 단애(斷崖)가 조망되었다.첫 비탈을 오르면 깍아지른 듯이 보이던 광경이 넓직한 축구장 둘 정도의 평지가 이어지다가 다시 가파르게 기어오르면 처음의 반의 반 넓이로 테니스장 하나쯤은 세울 수 있을 넓이가 펼쳐진다.
나는 경숙의 친구를 통해 내 월급 서너 달 분을 보냈다. 그렇지만 경숙은 단 한 마디의 소식도 전해오지 않았다. 그랬던 경숙이 내 나이 서른, 어머니 빈소가 마련된 고향집에 검정 상복을 입고 나타났다. 나는 이미 한 사내아이의 아비였다. 더구나 상복을 입은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서럽게 울었다. 울음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아내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시침을 뚝 떼고 곡을 하는 여장부와 한 사내아이의 어미인 아내,두 여자 사이에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땅거미가 깔린 산을 내려왔다. 어둠은 암담했던 시절을 곧잘 떠오르게 한다.
이듬해 3월, 김 선배의 지시대로 나는 이과대학 윤(尹)아무개를 찾아갔다. 그도 수배 중이었다. 나는 오랜 공백 기간 탓에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윤(尹)아무개를 기다리던 사복형사한테 끌려가서 삼켜버린 쪽지가 사흘 만에 똥으로 나올 때까지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그들보다 달포 먼저 체포된 우리는 돌이켜보면 운이 좋았다면 어패가 있지만 뒤이어 엄청난 사건이 발표되자 부모님이 먼저 안도했다. 그 엄청난 사건이란 당시 중앙정보부가 민청학련 사건 수사상황발표에서 민청학련을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학생을 주축으로 한, 정부를 전복하려는 불순 반정부세력'으로 규정했다. 이와 관련하여 긴급조치 제4호 및 국가보안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1천24명이 영장 없이 체포됐다. 그 중 253명이 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송치 된 사건이다. 그 엄청난 사건과 연류 되지 않은 것만이라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불가마의 더운 물로 몸을 풀기로 했다. 몇 몇 사내들이 내 어깨와 오른쪽 허벅지에 그어진 상처를 곁눈질로 힐긋거렸다. 경숙이 보는 앞에서 두어 번을 혼절할 때 생긴 자국이다. 그 고초를 겪던 날 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 양쪽 젖가슴이 온통 다 들어난 채로 누더기를 걸친 경숙이 눈앞에 초점을 잃고 묶인 채로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었다. 기력을 잃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서울 평화 시장에서 내가 사서 입혀 준 스웨터가 누더기가 되어 그녀의 몸에 겨우 걸쳐져 있었다.
그녀가 당한 고초가 얼마일까. 경숙이 냉혈이라고 하더라도 고문관은 남자다. 그 남자가 더구나 도덕적인 가치가 무너진 경우라면, 20대 중반의 여대생인 경숙한테 가한 것이 무엇일까? 나 외에는 알 수 없는 그녀의 비밀스러운 그곳,만 알고 있는 그녀의 비밀스러운 곳, 어떤 치욕스러운 짓을 했단 말인가.경숙은 그날 당한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전해 준 적이 없다. 그 말단 권력이 저지런 그것이 어쩌면 경숙을 성노리개 취급을 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면 치가 떨렸다. 우리는 멍청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꿈이라면 빨리 깨기만을 빌었다. 신앙인이었다면 기도라도 할 터인데… 나는 속수무책, 침묵과 절망을 지키다가 혼절했다. 대학에 합격해서 상경하는 나를 배웅하면서 어머니는 말했다.
- 야야, 데모대에는 절대 끼지 말거래이. 패가망신한 데이. 너거 핵교가 디기 심하다 카이 걱정스러버서 하는 말이데이.-
절규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경숙은 보이지 않고 바싹 마른 사내가 의자에 앉아서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냉혈한의 포악함에 나는 온 몸이 굳어버렸다.
‘내가 언젠가 네 놈을 무참히 짓밟아주겠다’ 이를 악물었다. 군화가 허벅지를 찍어 누를 때 난 상처로 지금도 공중목욕탕에 가기를 꺼린다. 아무것도 모르고 내 자취방에 들린 경숙이 잡혔다. 온갖 수모와 고초를 겪은 끝에 내 앞까지 끌려 온 것이다. 나는 군 실세였던 먼 친척의 도움으로 그곳을 나왔고 그 모진 고통 속에서도 나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소영웅들이야말로 유신의 참담한 상황을 끝낼 수 있는 인물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슬이 퍼렇던 그 때 대구 K大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3월의 시위는 우리 두 사람이 겪은 고통의 대가와는 아랑곳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그 소영웅들이 모두 투옥되고 그 중에 8인은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중에서 Y씨는 유일한 대학생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땐 그 길만이 구국의 길인 줄로 믿었다. 그 구국의 길에서 다시 못 올 길을 간 뚝심들은 지금 세간에서 잊혀져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꿀물로 엉뚱한 애국자들이 나라를 구렁텅이로 끌고 가고 있는 현실이 더 비감스럽다. 그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했던 그 충정은 지금 어떤 형태로 나라를 끌고 가고 있는지.
“이 노무 자슥들! 내 새끼를 이 지경으로 맹글라 놓고, 너그들은 얼매나 더 오래 잘사나 보재이!”
아버지는 출감하는 나를 데리고 내려오는 군용열차에서 깡 소주를 마시면서 처음으로 반동이 됐다. 그 아버지의 손을 잡고 경숙이 고향 집으로 내려온 것은 3개월이 지난 후였다. 그녀는 넋이 나가 있었다. 그런 경숙을 아버지는 친딸보다 더 사랑으로 보살폈다. 아버지는 내가 출감하기 직전에 면장 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나를 원망하는 말씀을 평생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경숙은 아버지의 지극정성에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인근의 용하다는 한의사들로는 별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을 안 아버지가 경숙을 대구 K대학병원에 입원시키라고 했다. 여자로서 더 이상의 구실을 하지 못할 만큼 짓이겨져서 하혈이 멈추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치성 덕분에 경숙이 차츰 회복이 됐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내가 강제로 입대할 때까지 부부처럼 행복한 한 5개월을 보낼 수 있었다.
경숙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안 것은 내가 첫 휴가를 나온 때였다. 그러나 이미 그녀가 자신의 고향 근방으로 떠난 후였다. 그 사실을 알려 준 것은 나보다 두 살 아래인 내 누이였다.
“오빠야, 어무이가 언닐 메누리로는 못 들이겠다고 저리 난리 아이가.”
어머니는 경숙이 집안에 들어앉아서 남편이나 보살필 여자가 아니라고 마뜩잖아 했다. 경숙을 찾아간 나는 말없이 아버지가 마련해 준 돈뭉치를 건넸다.
“예상은 했었어요.”
경숙은 무표정하게 나를 쳐다보다가 내 손을 끌었다. 시외버스로 한 시간 넘게 간 곳이 서울 자양동에 있는 허름한 산부인과였다. 그곳에서 경숙은 내 아이를 지웠다. 한강 둑에 앉아 소주병을 비우며 우리들은 꺼이꺼이 울었다. 군인 신분으로 경숙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차장 한 쪽에 하루 종일 땡볕에 서 있게 한 차동차 문을 열고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걸려온 메시지가 빼곡하다. 확인하지 않고 나는 과거를 떨쳐버리 듯 시동을 걸었다.
제대 후에선배들의 소설을 필사하면서 시간이나 축내는 소설 습작을 하고 있을 때, 경숙이 전화로 결혼 소식을 전해 왔다.
“나, 결혼해요."
경숙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당연히 축하를 해 줘야 할 터인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네, 우린 여기까지가 인연인가 봐요. 안녕히!”
“아....."
내 말이 끝나가도 전에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무작정 열차를 탔다. 경숙이 머물 것 같은 경기도 광주로 갔다. 남종에서 만나 강상까지 강을 따라 십리 길을 내쳐 걸었다. 길옆 능금밭에선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러나 그 꽃이 고왔는지 향기가 진했는지는 지금도 기억할 수가 없다. 강상에서 털털거리는 시외버스로 광주까지 되돌아오는 길에 경숙의 손을 꼭 잡고 속으로만 빌고 빌었다. 비록 남남으로 돌아가지만, 마음만은 함께 있을 거라고 맹세했다.(유아적인 의식이며 심리가 나이답지 않습니다. 작가가 이 부분에서 고민 좀 해야 되지 안을 까요?) 혼자서 수원을 거쳐 구미로 내려오는 동안에도 그렇게 *기도했다(작가여! 단어 선택에 고민하시기를...).
나는 고향 집에 돌아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곧바로 상경했다. 한 때의 기쁨을 영속시키려는 것은 서글픈 시도라는 것쯤은 잘 안다. 더구나 경숙과 남긴 그 기쁨이라는 것이 극도의 공포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피어낸 것이기에 더더욱 아플 수밖에 없다.
이번 산행에서도 끝내 경숙의 그림자를 떨쳐 내지 못하고 아내와 아이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다가오는 일요일에 Y씨의 30주기 추모제가 조촐하게 열린다고 김 선배가 전해왔다. 아내는 미장원으로 백화점으로 그날을 위해 분주하게 나다닌다. 자신보다 십 년이나 위인 경숙을 평생의 연적으로 마음을 굳힌 이상 경계를 늦추지는 않을 심산이다. 그러나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나는 믿는다. 훗날로 돌리지 않고 주어진 순간순간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 참사랑이라는 것을 먼 길을 돌아 비로소 깨달았다.그 찬란했던 젊은 날의 우리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행복을 추구했었는지 모른다(난해한 문장을 조금 풀면 어떨까요?). 그렇지만 그것이 비록 진정성을 담보로 하는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또 다른 형태의 괴로움을 겪게 될 수밖에 없는 존재였으리라고 믿는다. (편한 문장으로 풀어 주었으면 어떨까요?)
김 선배가 전화를 해 왔다. 벌써 세 번째 전화다.
“여보게 후배, 그날 경숙이 중요한 일을 맡는다는데 우리 꼭 만나서 격려해 줌세.”
“그라믄요.”
“이 사람 확실히 대답해 보거래이….”
"참, 선배님도 꼭 참석해서 자릴 뜻있게 해 주셔야지요. 저는 요즘 여기저기 수업준비에 밀려서 우째 될지 모르겠습니다."
경숙을 보고 싶은 마음이 절실한 것과는 달리 퍽도 자신이 없게 말하고 먼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경숙은 고난의 젊은 날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야권의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지금 그녀를 만나면 어떤 마음이 들까? 김 선배는 또 어떤 마음일까?
아내가 양 손에 잔뜩 쇼핑백을 들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속이 타서 내쳐 소주를 마신 탓에 깜빡 잠이 들었다가 전화벨이 요란히 울리는 통에 받았다. 어머니는 막 6개월 지난 조카를 업고 마룻바닥에 엎드린 채로, 아버지는 동네 목욕탕에서 냉탕 온탕을 오가다가 졸지에 저승으로 가신 뒤로는 새벽에 울리는 전화벨은 늘 불안의 대상이다.
“교수님 댁이지요?”
“그런데요?”
“대구 K대 학생회입니다. 나경숙 씨 아시지요?”
“예, 예, 경숙 씨가 나를 찾는다구요?
사무적인 투의 말이다. 전화 저편에서 딸깍 수화기를 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유도 모른 채 중부고속도로를 통해서 내륙고속도로를 들어설 무렵에 벌건 해가 산위로 솟아올랐다. 서른 해 전에 천생산을 오를 때 꼭 마치 세상이라도 구할 듯이 앞서던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손짓을 했다. 어서 오라고.
라디오의 볼룸을 올렸다.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3부는 피고인 8명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같은 해 8월 21일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의 소에서 서울지방법원은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고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의 항변을 배척하면서 시국사건 상 최대의 배상액수 637억여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는 내용이 긴급뉴스로 나왔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누더기 같은 스웨터 위로 드러난 상반신이며 멍하니 풀린 눈동자……. 한 동안 잠잠하던 가슴 통증이 들고 일어났다. 숨을 고를 수가 없다. 나는 길가에 차를 세웠다.
전화기가 울렸다. 경숙이의 목소리.
“ Y씨 모교에서 추모비를 건립하기로 결정했대요. 와서 힘 좀 보태 달라구요.”
나는 감곡에서 차를 돌렸다. 더 이상 아픈 상처를 들추고 싶지 않았다. 겨우 얻은 강사자리마저도 잃는 게 두려웠다.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의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다음 주 강의 시간에 맞춰서 수업준비를 무사히 끝낼 수 있을지 조바심이 났다. 소시민인 <나>라는 인물이 시대적인 변화와 맞서는 허탈감과 교차되는 상념에서 비롯된 그 아픔을 속으로 삭이며 살아간다. 사랑도 이념도 흘러가는 것이다.
(길이: 200/76)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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