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7. 주일예배설교
고린도전서 10장 23~33절
하나님의 영광과 남의 유익
■ 신앙생활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분이, 담임목사님을 찾아와 이런 항의를 하였습니다. “목사님, 아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네?” “제가 교회를 다니는 것은 전적으로 저를 위해서 다니는 건데, 목사님은 왜 맨날 남을 위해 살라고 하시는 겁니까? 계속 그런 말씀만 하시면, 더는 교회 안 다니겠습니다!”
이 항의에 담임목사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아이고...ㅠㅠ” 하며 한숨을? “그게 아니고요..” 라며 변명을? “그럼, 그러세요!”라는 단호함을? 혹시 여러분의 담임목사는 어떨 것 같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입장을 밝히겠습니다.
■ 바울도 고린도교회 설립자요 실질적 담임목사로서 여러 항의를 받았습니다. 그중 오늘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사안의 항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양심이 남의 양심의 제한을 받아야 하느냐는 항의였습니다. 25절과 27~28절입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당시 고린도 지역의 풍습 중 하나가 신에게 제사로 바친 음식을 팔거나 사서 먹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장 음식은 제사 음식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민거리였습니다. 이런 시장 음식을 두고 ‘먹을 수 있다’와 ‘먹을 수 없다’의 의견 충돌이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갈등에 대해 바울은 답을 해야 했습니다. 그 답은, 내 양심이 아닌 다른 이의 양심에 따라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4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전적으로 남의 양심/유익이 내 양심/유익에 우선하는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입장이 무분별한 이타성은 아닙니다. 무조건 상대에게 맞추는 것은 아닙니다. 23절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남이 갖고 있는 입장이 모두 유익한 것도 아니고, 다 덕을 세우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알고 있는 한, 남의 입장, 남의 유익을 우선으로 고려한다는 것이 줏대 없는 입장만은 아닙니다.
단지 이타적 입장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기에 줏대 없는 듯한 입장을 보일 뿐입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서입니다.
1. 남의 유익을 우선으로 고려하는 첫 번째 이유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26절입니다.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다 주님의 것이니 내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에 대한 주장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과 남의 유익을 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무슨 상관일까요? 상관이 있습니다. 주님이 지시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 다음으로 이웃 사랑을 지시하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내가 주님의 자녀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것에 포함되는 나는, 주님께 포함된 모든 것들을 주님을 섬기듯 우선 배려하고 섬겨야 합니다.
2. 남의 유익을 우선으로 고려하는 두 번째 이유는,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서입니다. 33절입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그렇습니다. 다른 이의 유익을 우선 고려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들의 구원 때문입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의 전적인 관심은 ‘구원’이십니다. 타락하고 망가진 세상을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이십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고군분투해야 하는 것은 영혼 구원입니다. 그리고 사회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아야 할 이들이 구원에 관심을 갖고 구원에 이르도록 우리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 수고 중 하나가 남을 우선 배려하고 챙기는 것입니다. 이 행위는 세상과 다른 면모이기에 이를 통해 사람들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다르구나 하는 감동, 그래서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이 자기중심적이니 타자중심적 수고를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사이시니 이 수고는 패스할 일이 아닙니다. 남의 유익이 나의 유익에 우선이어야 합니다.
■ 그런데 남의 유익에 우선하는 삶의 이유가 주님의 주권과 주님의 구원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 모든 입장/태도가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31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보시다시피, 우리 인생 최고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유익을 우선하는 삶을 지시하신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이 지시를 실천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차원이 다른 가치 추구입니다. 그렇다고 이를 굳이 고차원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다른 가치라고 말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는 그 특징이 이기적이고 자율적인 반면, 신앙의 가치는 이타적이고 신률적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표현하듯, 세상은 신앙을 이해하기 어렵고, 신앙인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자유와 양심에 대한 이해에서도 다른 입장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밝히듯, 신앙은 줌과 나눔이 자유이고 양심이라고 해석합니다.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신앙의 태도가 아닙니다. 신앙인은 오히려 자기 밥그릇을 내주어야 합니다. 남의 유익이 나의 유익에 우선이어야 합니다.
혹시 너무 비현실이고 낭만적이라고 비판하고 싶으신가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줌’에서부터 시작했기에 ‘줌’이 모든 신앙 행위의 중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것에서부터, 타락한 인간에게 은혜를 주시고,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주시고, 그리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지 않으십니까?
그러므로 ‘줌’ 또는 ‘나눔’은 기독교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개념이자 행위입니다. 이것을 제외하면, 기독교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 그런데 이러한 ‘줌’ 또는 ‘나눔’의 삶이 단순히 주고 나누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인격적 삶 또는 윤리적 삶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32절입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여기서 “거치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요? 걸림돌이 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누구에게도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인은 누구에게든 호감을 얻고, 모두에게 상대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격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성품의 변화/성숙에 힘써야 합니다. 무엇보다 온화하고 친절한 성품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그런 온화함, 그런 친절함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누구에게든 걸림돌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걸림돌이 되지 않는 삶을 타협하는 삶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선과 악, 참과 거짓을 구분 짓지 않고 타협하는 것이 온화하고 친절한 것이 아닙니다. 단호한 온화함, 바른 친절함이 신앙인의 성품입니다.
간혹 까칠함을 자랑삼는 분들이 있습니다. 단호함을 자랑삼는 분도 있습니다. 이를 어쩔 수 없는 자기 성격이라고 선을 긋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뀔 수 없는 성격은 없습니다. 시간은 걸릴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격을 바꿔야 합니다. 이 일을 성령님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 삶을 맡기듯, 성품/성격의 변화도 의뢰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聖化)의 실재입니다.
■ 바라기는 비전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늘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는 교회’이길 소망합니다. 비전교회에 속한 여러분은 ‘남의 유익에 우선인 온화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우리 모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느라 애썼다!”는 칭찬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