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문우님들께
건안 하시죠.
꼭 챙겨볼 자료라 생각이 되어 상재합니다.
일독해 보시길...
11월 5일
송파문학 제30주년 기념 행사 가 있었습니다.
백일장도
시화전도
시화집도
제28호 송파문학도 꽃이였습니다.
더욱 돋보인 꽃은
오양호교수님의
《한국 현대시의 대부, 정지용에 바친 집념과 사랑》2022 송파문학 정기세미나 주제 발표였습니다.
전문을 발췌하여 상재
하오니 지인들과 공유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양호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인묵 김형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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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의 대부, 정지용에 바친 집념과 사랑
오양호(인천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ㅡ.2022 송파문학 창립 30주년 정기세미나에서.ㅡ
<印默 金炯植 >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문학 공부를 한 문인은 크게 둘로 나눠진다. 도쿄 유학과 교토 유학이다. 도쿄 출신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광수, 최남선, 김억, 이기영, 임화,주요한 등 많은 문인이 있는데 이들은 일본에서 선진 문학공부를 하고 돌아와 조선근대문학의 중심축을 형성했다. 교토 출신은 십수 명 정도로 그 수가 도쿄보다 아주적다. 권환(권경환, 교토제대 독문과), 백인준(교토제대), 정지용(도시샤대 영문과),
윤동주(도시샤대 영문과), 김말봉(도시샤여대 영문과), 오상순(도시샤대 신학부), 김
환태(도시샤대 예과) 이양하(교토대 대학원), 안함광 (교토제대 불문과), 염상섭(교토부립 제2중학), 이장희(도시샤중학) 등이다.
교토 출신은 수적으로는 도쿄 출신과 비교가 되지 않지만 문인으로서 수행한 역할은 대단하다. 그 가운데 정지용은 한국현대시의 대부, 또는 아버지로 불릴 정도의 위상에 가 있다. 당장 청록파 3인을 문단에 내보내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로 평가 받는 것이 그렇다. 그리고 서구의 모더니즘 시를 소개하며 한국시의 지평을 확대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기림(동북제대 영문과)이 모더니즘을 이론적으로 소개 했다면 정지용은 작품으로 그 일을 했다. 정지용 말고 윤동주가 있다. 윤동주가 어떤 시인인가는 설명이 필요 없다. 그 밖에 염상섭, 안함광도 우리 문학에서 음을 뺄 수 없는 존재다.
나는 정지용 시인에게 내 인생 오십대 황금 같은 7년의 세월을 바쳐 그의 모교 도시샤 대학 교정에 시비를 세웠고, 그의 시를 최초로 역하여 《鄭芝溶詩選》(東
京 花神社,2002)을 출판했다. 이하는 나의 그런 7년의 미련한 집념과 정지용에 대한 사랑의 자취다. 내가 비록 문단 말석의 이름 없는 자리에 있지만 정지용에게 바친 나의 애정은 그의 은혜를 받은 어느 문인보다 높고 강하다. 나는 이 글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 너무나 힘들고 어렵고, 억울한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교토의 봄
사월 어느 날 압천(鴨川)의 강둑에 줄지어선 벚꽃이 눈 내리듯 흩어지는 길을 걸어서 윤동주시비를 보러간 同志社大學은 밝고 화사했다. 내가 가 있던 京都大學과는 가모가와(鴨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교토대학이 크고, 좀 무질서한데 비해 이 대학은 아기자기했다. 같은 캠퍼스에 도시샤중학, 도시샤여자대학이 함께 있
어서 학생들이 떼로 몰려다녔고, 이 학교와 나이가 같은 백 년은 훨씬 넘은 나무들이 이끼를 덮어쓰고 서 있었다. 윤동주의 시비는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작았고,외진 곳에 서 있었다. 비에 새겨진 「서시」를 읽었다. 가슴 한쪽이 조여 왔다. 도시샤대학 동창회 사무실에 갔더니 윤동주의 「서시」가 액자에 담겨 그의 시집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관계 직원에게 도시샤대학 영문과 출신인 조선시인 정지용을 아느냐고 물었다. '전혀 모른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향수가 국민가곡처럼 열창되는 유명한 시인이 모교에서, 그것도 동창회 직원이 모르고 있었다. 내가 정지용을 이렇게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은 이때부터다. 제일 먼저 도시샤대학에 유학하고 있는 한국 유학생들을 찾아 나섰다. 정지용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생이 주로 신학부에 적을 두고 있어 시인 정지용을 잘 몰랐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때 일본 교토로 유학을 온 문인들에 대한 특강을 시작했다.
첫 번째의 강의는 1998년 9월 28일 도시샤대학 명덕관(311호)에서 이루어
진 재외동포문학론이다. 도시샤대학 일본문화연구회가 주최가 된 이 강의는 식민지시기 한국문학을 어떤 시각에서 이해할 것인가를 함께 생각해 보자는 취지였지만, 초점은 윤동주만 알고 정지용은 모르는 도시샤대 후배 유학생들에게 정지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두 번째 강의는 1998년 11월 5일 도시샤고등학교에서 이루어졌다. 정지용의 압천과 향수를 도시샤대학 신학부 박사 후기과정에 있는 이상경과 내가 한국어의 운율을 살려 읽은 후 도시샤대학 출신 조선 문인들을 소개했다. 정지용, 윤동주와 함께 신학부 출신의 오상순, 도시사여대 영문과 출신의 김말봉 등이 한국문학사에서
차지한 위치와 그 문학적 성향이 어떠한가를 설명했다. 학생들은 정지용이 초기에는 동양적 정서에 머물러 있다가 후기에 가서 기독교적 정신세계로 전이해간 몇 편의 작품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도시샤가 미션계 스쿨이기 때문이었다.
1998년 11월 6일(금) 京都新聞은 이 특강을 「한국의 시인 생애를 배운다」 라는 제목으로 '한·일 문화교류의 기운이 싹트고 있는 시기'에 관심을 둘 만한 일의
하나라고 보도했다.
세 번째의 특강은 1998년 12월 9일(수) 도시샤중학교 전교생을 상대로 이루어졌다. 입학시험을 통해 학생을 뽑는 이 학교는 오늘의 동지사 패밀리를 이루게 한 최
초의 학교라는 점에서 관서지방에서 손꼽히는 명문이다.전교의 어린 남녀 학생들이 자기들이 다니고 있는 이캠퍼스에서 조선의 아주 유명한 시인이 공부를 했고, 그의 시를 소개한다니까 눈을 반짝이며 대강당에 소복하게 모여 있었다. 도시샤대학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윤선영양이 교장이 이끈 기도 다음에 지용의 「말」, 「해바라기씨」를 조용히 낭송했다. 지용 자신이 일어로 썼던 시다.모두 숨을 죽이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학생들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말은 왜 밤이면 먼 하늘의 달을 보며 잘까요?', '말이 슬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이 시의 말은 곧 시인 정지용입니다. 따라서 말이 슬프다고 한 것은 시인 정지용이 슬프다는 의미이고, 말이 선체로 먼 하늘 달을 쳐다보며 잠이 든
다는 것은 시인이 간절한 그리움에 잠을 잘 수 없다는 뜻입니다."라는 해석을 했다.
이날의 특강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린 일본의 중학생들에게 한국의 대표시인 정지용을 처음 소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 아마 그 학생들 중에는 틀림없이 한국인 제 4, 5세대가 있을 것이고, 그들은 귀가해서 그날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수업의 효과는 기대치를 넘을 수 있다. 그것이 설령 한 사람의 중
학생이라 하더라도 그 자긍심이 장차 그 아이들 당당한 한국인의 후손으로 자라게할 것이다. 한편 그것은 인접한 나라에 대한 우의로 자랄 것이다. 이날의 경도신문
은 "한국의 천재시인 서울에 재생"이라며 문화면 톱기사(11월30일)로 보도했다.
나는 1998년 12월 18일 교토은행 슈가쿠인(修學院)지점에 정지용기념사업회' 통장을 개설하고 일만 엔을 저금했다. 그 후 몇 사람의 유학생들이 성금을 내었고, 동장 계좌번호는 3073719번이며, 지금도 잔고가 11,000엔 남아있다.
●.정지용 소개 강의와 방송
정지용을 일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본격적인 특강은 1999년 2월 18일) 교토대 1호관에서 행해졌던 '日本을 체험한 朝鮮의 지식인들' 이라는 강의와 3월 17일
京都産業大學日本文문화연구소가 마련한
정지용시인과 한국문화' 였다. 교토대 강의는 내 수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여기서는 경도산업대의 것을 소개한다.
경도산업대학의 청중은 거의 일본문화연구소의 교수들이었다. 소장 도고로 이사오 교수를 비롯하여, 하야시 다까시, 가와무라 가쿠쇼(村), 후지이
에이사브로(藤井) 등 약 20여명의 사람들이 내 강의에 참석했고, 진지하게 질문도 했다. 질문 가운데 한국인의 이별의 한(恨)에 대한 문제를 지용의 압천(鴨川)과
연계한 질문은 설명하기가 상당히 난감했다. 그것은 일제의 한국지배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날 강의한 내용은 교토산교대학 <일본문화연구소 논문집>(1999년)에 芝溶文學산고(1) 수록되었다. 마지막 강의는 릿쯔맨간대학 평화 뮤지엄 관장 안자이 교수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1999년 3월18일). 그날 강의 제목은 '한국의 문화 속에 나타나는 일본문화 ㅡ정지용의 시를 중심으로' 였다.
정지용의 소개 작업에 대단원의 성격을 띤 행사는 1999년 3월 9일에 촬영하고, 3월 20일(토)에 방영된 요미우리 TV의 " 京의 音
- 京都에 울리는 詩歌의 소리''이다. 이 프로는 방영시간이 겨우 5분 남짓하지만, 정지용이란 조선 시인을 TV화면을 통해 여러 자료를 소개하고, 입체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내가 연구실에서 인터뷰를 했고, 릿쯔맨간 대학의 조수 이수경(현재 東京學藝大學교수)이 가모가와에서 압천을 낭송했다. 또 동지사 대학 신학부 박사과정에 적을둔 이상경과 그의 부인 정부경이 역시 가모가와에서 정지용의 시가 조선 사람들의 입에 얼마나 많이 회자되고 있으며 또 우리 정서를 얼마나 훌륭하게 압축하고 있는가를 교토의 평화로운 압천을 배경으로 말했다. 나는 이 방송을 위해 시간과 경비를
들여 서울 집으로 와 정지용의 시집 <정지용시집>, <백록담> 원본과 산문집 <지용독본>을 가져가 TV 방송 때 소개했다.
이밖에 정지용에 대한 소개는 1999년 2월 1일(월) 도시샤중학 도시마(田島) 선
생과 함께 FM845 경도에 나가 대담을 하고 정지용 시에 대한 대체적 성향을 이야기 한 것과, 같은 달 23일(화) 코오베(神戶)의<무궁화회>의 히다이찌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모임이었다. 고오베에서는 다다미방에서 이루어진 좌담형식의 소모임이었는데 거의가 친한 인사 들이었다.이 일의 기록에 꼭 남기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내 침구가 남아있을 아세아현대사연구소의 다가시게루(林茂)와 후지까씨
그리고 나를 통역처럼 도와 준
시오즈까 전 메이지생명 부장, 경도신문의 후다마쯔히로키
기자 <중앙일보> 동경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교토까지 와서 내가 한 일을 보도해준 예영준 기자, 또 내가 하는 일의 의미가 크다고 인정하고 격려해준 학교법인
동지사의 마쯔야마(松山) 총장, 교토대 명예교수이며 지한인사인 이누마,친구처럼 객고를 풀어준 도시샤고등학교 다까무라 교장, 동기간 같이 복날이 되면 삼계탕을 끓여 내 아파트로 부부가 찾아왔고, 정지용시 번역 때문에 여러
차례 서울에 온 경도산업대
하야시다가시 교수, 그리고 항상 내일이라면 후원 해주었던 경도대의 이께다히로시 교수, 경도에서 유학하고 있는 많은 한국
학생들이다. 이런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용을 위한 나의 일은 하나도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정지용 시비 건립을 위한 세미나
정지용기념사업에 획기적인 전환이 온 것은 2004년 12월 4일 도시샤대학에서 이
루어진 제1회 재외한인문학 국제심포지엄 '경도에 있어서의 한·일 문학의 교류와
발자취'이다.
京都에 있어서의 한일문학 교류의 발자취
*韓ㆍ日文學交流의 回顧와 展望
발표: 李御寧(前文화부 장관)
토론: 林陸(京都産業大)
*동아시아 山中詩의 韓·日 變奏에서 본 정지용
발표 : 趙東一(啓明大, 前서울大
토론: 左野正人(東北大)
*同志社大學과 朝鮮文人
발표:宇治鄕 毅
토론: 沈元燮(早稻田)
*한국문학 속의 경도 출신 문인들
발표 : 吳養鎬
토론: 水野直樹(京都大人文學硏究所)
이 심포지엄에서 거둔 최대의 성과는 시인 정지용이 어떤 사람인가를 도시샤대학에
확실하게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어령 교수의 발표가 그러했다.원고 없이 진행된 <한·일 문학 교류의 회고와 전망>은 일본 청중, 특히 동지사 대학 관계자들을 완전히 설득시켰다. 그 결과 나타난 반응은 '정지용은 동지사의 프라이드이다.' 였다. 이날 강연 원고는 한국시학, 2005 <여름 호>에 게재되었다 이 행사로 시비 건립부지가 확보 되었고, 그날 밤 도시샤대학 총장(재단이사장)은
만찬회 축사에서 정지용 시인을 통해 도시샤 대학이 일본에서의 한국학의 중심이 되는 계기로 삼겠다는 말을 했다. 나는 답사에서 '동지사대학의 국제주의 자유주의 교육이념이 정지용, 윤동주, 오상순 같은 유명한 문인을 배출시킬 수 있었으며 이런점에서 한국문학은 결과적으로 도시샤대학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정지용의 시념사업을 알차게 벌려 그의 문학적 성취를 한국과 일본에 널리 알리려한다'고 말했다.
이 행사 이후 시비건립 사업은 차질 없이 진행 되었다. 조각가 신동수는 뒤에서 보면 물에 뜬 오리모양('오리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오리모가지는 자꼬 간지러워 <호수 2>를 하고, 앞에서 보면 원형인 화강암에 실계천의 무늬를 넣어 높이 1m, 너비
1.6m, 두께 35cm의 비를, 높이 20cm 지대석에 앉힌 시비를 만들었다. 서예가 김승애가 쓴 <압천>을 한국어와 일어로 새겼다.
이 시비는 정지용기념사업의 제2차분을 마무리하는 성격의 2005년 10월 8일(토)
인천대학교에서 치러진 정지용기념사업회 학술심포지엄에서 공식적으로 소개되었다.
●.시비건립이 만난 암초
이렇게 잘 진행되던 시비건립사업이 11월 초순에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을 만났다. 도시샤대학 코리안 크럽의 이우경등 몇 사람이 시비 건립을 반대하고나왔기 때문이다. 교토로 전화를 해서 이우경 회장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기분이 아주 나쁘다. 이유는 없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허허 웃으며 '그런 이유로 시비건립을 반대할 수 있느냐. 나는 이 사업을 위해 동분서주 7년을 보냈으니 도와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무 말 없이 전화가 뚝 끊겼다. 전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현해
탄을 건너 덜컥 울려왔다.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그러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뒤 와세다대학에 가 있는 심원섭 교수로부터 시비건립 반대이유가 e-메일로 왔다.
첫째, 시비 건립을 자기들과 상의하지 않았다.
둘째, 시비 건립은 남북통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셋째, 정지용은 유명한 시인이 아니다. 이 이유는 어느 것도 맞는 데가 없다. 첫째는 내가 코리안 클럽 간사 박세용(朴世用)과 1998년 겨울 도시샤대학 학생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거의 세 시간 동안 설득했으나 실패했다. 그들은 윤동주 시비를 근 10여년 준비하여 약 1억 엔을 들여세운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내가 두려웠을 것이다. 내가 셈하는 시비 건립 액수가 윤동주 시비 건립 액수와 엄청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둘째와 셋째는 누가 봐도 논리가 서지 않는 억지다. 그러나 나는 이 일에서 한발 물러섰다. 나의 성질이 폭발하면 일을 영 그르칠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격이 서글서글한 이인석 옥진문화원장에게 이 일을 맡겼다. 사업가적 감각을 지닌 이 50대 초반의 남자가 예상보다 빨리 이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인석이 이우경 등 반대자들을 설득한 효과가 나타나는 틈새로 유쿠지오키타 (沖田行) 도시샤대학 국제센터 소장이 이 일을 정면돌파 했다. 일본인 특유의 오토꼬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정지용시비 제막식을 하기위해 옥천군수, 옥천문화원 원장, 옥천군민, 그리고 내가 2000년 12월 17일 밤 9시경 교토의 니지마조 도시샤대학 설립자 기념관에 도착했을 때, 유쿠지오키타 교수는 나를 별실로 불러 '코리안 크럽 멤버가 시비건립은 오
교수와 나, 단 두 사람이 정지용 시비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다른 모든 관계자는 반
대한다면서 오사카 총영사에게도 시비건립 반대의사를 전달하고 재교토 조선인들에게도 이런 조건을 들어 이번 행사를 중지시키려했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시비는 니지마조 도시샤대 설립자가 세운 유서 깊은 교회 옆자리에 이미 윤동주의 시비보다
한 발 앞선 자리에 건립된 상태였다.17일 환영만찬은 니지마 기념관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저녁 10시경 한국에서 간 34명 일행은 애초의 숙소 교토 도큐호텔이 아닌 비와코 호반의
프린스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18일 아침 히에장(比山)이 발 뿌리를 담그고 있는 일본 최대의 호수, 비와코에 눈발이 휘날리는 환상적인 정경을 22층 화식 레스토랑에서
내려다보면서 나는 그간 이 사업에 바친 7년여의 시간과 노력을 회상했다. 그리고 동숙한 유봉열 옥천군수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만약 옥천군이 시비
건립에 드는 일체의 비용을 마련하고, 성의껏 일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이번 일은 암초에 부딪친 배꼴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8일 제막식은 9시부터 도시샤예배당에서 식전행사가 치러진 후 이루어졌다.
《중앙일보>는 이날 행사를 '향수의 시인 정지용 시비 일본서 제막식'이라는 제목으로 크게 다루었고(2000.12.19일) 동아일보(2000.12.28)도 나의 기고문 " 일본 교토(京都)에 되살아 난 한국의 시혼"을 실으면서 정지용 시비건립이 갖는 의의를 대서특필했다.1998년 내가 살던 교토대학 국제교류센터 아파트 앞 교토은행 슈카쿠인(修學院)
지점에 처음으로 '정지용기념사업회 대표 오양호' 이름으로 통장을 개설한 날자가
12월 18일이다. 그런데 7년 후 똑 같은 날짜 12월 18일에 정지용의 시비가 제막되
었다. 두 행사가 우연하게 같은 달 같은 날에 이루어졌다. 그뿐만 아니다. 시비 건립 후 인천대학 학생들과 처음으로 헌화제를 한 날짜도 12월 18일이다. 이 세 사건이 겹칠 확률은 얼마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신통하다. 아마 저 세상의 정지용이 나를 아주 이쁘게 여긴 탓에 일어난 기적이 아닐까. 이래서 12월 18일은 나에게 생일에 버금가는 특별한 날이다.
2005년 12월 18일(토), 동지사대학 교정에 드디어 정지용의 시비가 단아한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시비건립과 정지용 시 일본어 번역을 시작했을 때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들의 냉소와 코웃음, 특히 도시샤대학 출신조선인 단체인 코리안구락부의 이모 박모의 비웃음을 뒤통수에 느끼며 나는 저능아처럼 이 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나는 8대 1의 경쟁력을 뚫고 대산문화재단의 해외한국학 지원금을 받았고,
옥천군 옥천문화원의 지원, 그리고 지용의 모교의 큰 배려로 내가 요미우리 TV에
서 약속한 두 개의 사업을 완성했다.
이상의 사업을 수행함에 있어 절대적인 지원자는 옥천군청과 옥천군 문화원과
이었다. 최초의 일역판 정지용 번역시집은 대산문화재단의
<해외 한국문학 번역 지원금 1만불을 받아 2002년 11월 동경 가신샤에서 발간되었다. 가신샤는 일본을 대표하는 시집 전문출판사이다.
정지용기념 사업을 회고하면서 유언처럼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100권을 도시샤출신 조선인클럽 '코리안구락부 회장 이우경에게 100권을 주
었는데 그 책값을 받지 못했다. 못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그런 책을 받은 일이 없다고 했다. 나는 이 반쯤 성공한 사업가, 아니 온갖 어려움을 뚫고 성공한 교포 장사꾼을 이길 어떤 힘도 없고 빽도 없다. 나는 이 말을 지금 증명할 방법도 없다. 영수
중이나 증거가 될 만한 증빙서류를 안 받았기 때문이다. 이우경은 애초부터 정지용 시비 건립을 반대한 장본인이다. 내가 윤동주 시비보다 더 훌륭한 정지용시비를 세운 것에 대한 반응이 엉뚱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코리안구락부 회원들이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가 그 가운데 몇 권이라
도 후세에 남을 테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 <대산문화재단에 30부를
주었고 한국의 주요 도서관에는 내가 기증하였고 아직 수십 권이 남아있다. 이 책을
아주 적절히 기증하려 한다.
●.오양호교수 약력
• 대구카톨릭대, 인천대, 교토대, 북경의 중앙민족대 교수 역임, 정지
용시비 건립, '芝溶詩選' 공역(花神社.東京), <아르코문학상>(평
론>, <청마문학 연구상> 등 수상, 연구서로 <1940년대 전반기 재만 조선인시 연구>, <한국 근대수필의 행방> 등, 평론집으로 <낭만적 영
혼의 귀환>, <한국현대소설의 서사담론> 등
첫댓글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동행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