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서점 교보에서 헤르만 헤세의 책들을 검색하였습니다. 젊었을 때 읽은
‘크눌프,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는 언제나 멀리서 흘러가는 구름이었습니다.
한 순간 어떤 제목 하나가 이마를 퍽 치고 지나갔습니다. 바로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라는 제목이 번개불 사이로 환히 비쳤습니다. “아니 이런 은유를
구사하다니….”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저의 가슴 깊은 곳까지 와닿았습니다.
서둘러 책을 구입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절판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제 이 달 들어 세 번째로 도장엘 갔습니다. 한 6개월 쉬었지만 속에서 조그만
파도가 일더니 저를 다시 도장으로 밀어넣었습니다. 저는 이상한 버릇이 있습니다.
정례적인 일상에서 나사가 하나 빠지면 동력을 잃어버리고 나자빠집니다. 도장에
나가는 것도 규칙적이 되면 시계가 돌아가듯이 아무 생각 없이 작동되지만 한두 번
빠지면 그야말로 사상누각처럼 허물어집니다. 완벽주의자가 항상 좋은 결과를
생산해 내지 못한다는 것은 알지만 저의 육체는 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검도 4단이면 사범의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늙어서 4단을 따서 언제나 자격지심도
있고 스스로 ‘편치 않은 4단’이라고 낙인을 찍은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도장에 가도
다른 사람을 지적한다는 것은 자신의 밑천을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운동만 충실히
하는 데만 관심을 두는 것이 넓은 바위에서 혼자 뛰는 메뚜기 신세로 만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좀 생각을 달리했습니다.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는 말이 제 생각을
후려쳤습니다. 아니 주저함을 밀어버렸습니다. 비록 ‘바람 풍’을 못하고 ‘바담 풍’이라고
말해도 이것만은 후배에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저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제 타격대를 놓고 죽도로 타격연습을 하였습니다. 검도에는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기검체(氣劍体)일체라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과일로 말하면 씨앗입니다. 거기서
모든 생명이 발아합니다. 기(氣)는 기합이라는 뜻이지요. 검도로 말하면 소리 지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다음에 검(劍)은 죽도를 말합니다. 체(体)는 수련하는 사람의
몸입니다. 타돌의 순간 이 세 가지가 일체가 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이 한 점을
향하여 가는 정점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버리는 검도의 진수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승패를 떠난 도의 길이 시작됩니다. 죽도가 머리에 닿았는데 몸이 아직
안 따라준다든지, 소리를 ‘머리’라고 지르는 것이 죽도로 다 치고 나서 그제야
이루어진다는 것은 인생으로 말하면 집중하지 않은 불성실의 표현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소홀히 하는 것이 기합입니다. 그 효용성이 당장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적 현실에서는 이 기합을 중요시하는 도장을 그리 쉽게 찾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합은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검은
앞에서 무언가 형상으로 나타나고 몸은 앞으로든 뒤로든 움직입니다. 하지만 기는
눈앞에서 무언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실제로 제가 그래도 기합답게 소리를 지르는 데 7,8년 걸렸습니다. 처음에 지르는
소리는 인후에 걸려서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쑥스럽다거나 효용성에 대한 불확실성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건성으로 흐늘거렀습니다. 그러다가 이게 아니다 싶어 고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이미 굳어진 버릇을 바꾸는 데 이만저만 힘드는 게 아니었습니다.
고인들의 말을 보면 기합에 무언가 내공이 있다는 걸 말하는데 그것을 니체처럼
망치로 깨부술 용기도 근본적인 자각도 없었습니다. 오모리엔 마사오(小森園正雄)
범사 9단은 검도의 기술은 기를 단련하기 위한 수단이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기술은 분명히 업적을 나타냅니다. 살면서 ‘기술’은 부와 권력과 명성과 건강일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기’는 삶을 내려다보는 깨달음이고 씩씩함입니다. 칸트 식으로
말하면 ‘최고선’이고 더 확장하면 종교의 경지에까지 이릅니다.
타격 연습을 하다가 관원들을 중지시켰습니다. 다들 웬일인가 했지요. 제가 관원을
불러 중지시키니까 그들의 눈은 의심 반 놀라움 반으로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런 적이 별로 없거든요.
“여러분, 혹시 헤르만 헤세를 아십니까? 그 사람이 쓴 책 이름을 아는 사람?” 제가
묻자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된 친구가 말했습니다. “수레바퀴 아래에서,
데미안….” “맞습니다. 유리알 유희, 크눌프, … 등등 많지요. 그런데 이런 책을 얼마
전에 제가 발견했습니다. ‘그리움이 나를 밀고 간다’. 여러분 여기서 ‘그리움’ 대신
‘기합’을 넣어 보세요.” 갑자기 와 하고 웃음소리가 난 것은 그럴 리가 없다는 모순이라는
대답과 같습니다. “‘기합이 나를 밀고 간다’ 바로 이겁니다. 기합의 소리가 내 앞을
지나 앞으로 나아가게, 그리하여 그 기합 소리가 나의 앞에 있는 벽을 뚫고 나간다는
그런 기세로 소리를 질러보세요. 그러면 소리는 여러분을 밀고 나갑니다. 한 번
해봅시다.”
저의 조언에 따라 관원들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이가 만든 경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전통에 의한 예우로 관원들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조금 전보다 지르는 소리가 도장의 공간을 꽉 채우고 우리들의 몸은
더 빨리 앞으로 튀어나갔습니다. 이 ‘그리움‘은 연인이 될 수도 있고, 믿는 사람들의
본향이 될 수도, 사상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의 취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 마음 속에 우리의 열정을 끓어올리는 그 ’무엇’이 우리를 나아가게 합니다.
오랜만에 지난 토요일에는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를 들었습니다.
집에 분명히 있었는데 씨디가 언젠가부터 없어졌습니다. 산다 산다 하다가 얼마 전에
구입하였습니다. 젊은 날에 많이 들었지요. 특히 술 한 잔 먹고 집에 들어오면 어김없이
들었습니다. 브람스답지 않게 첼로와 피아노가 빠르게 주고 받습니다. 격정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2악장의 ‘아다지오’(adagio affectuoso)로 넘어갑니다. 느린 활로
지난날의 기억의 한 군데로 쓱 스쳐지나갔습니다. 현을 뚝뚝 뜯는 소리는 저를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애절한 첼로의 소리에 마음을 실어 ‘그리움’을 느꼈지요. 다분히
‘멜랑콜리’하였지만 그래도 제게는 많은 위로를 주었습니다. 세월이 지나서인지
지난 토요일에 들은 ‘아다지오’는 젊었을 때의 그 기분은 잘 나지 않더군요. 그래도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저도 언제 가도 가야 할 나이가 서서히 오고 있습니다. 뭔가 다시 제 인생의
열정을 지피고 싶은 ‘그리움’에 목말라 있습니다. 그리움은 단지 연인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력은 바로 그리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나치면서 보았던 한 송이 꽃일 수도 있고, 나뭇잎에 머물며 살랑대던 바람일 수도
있고, 살면서 거친 파도를 겪은 풍랑일 수도 있고, 주어진 시간에 우리가 겪은 모든
것이 그리움이고, 그 그리움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첫댓글 헤르만 헷세와 니체의 망치에서 검도 4단의 실력까지...
기운이 쏟는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