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안공(景安公) 유여림(兪汝霖)을 곤경하며
공의 휘는 여림(汝霖)이오 자는 계옥(啓玉)시고 호는 정당(政當)이시며 시호는 경안(景安)공 이시다 그리고 생하신 해는 성종7년(성희 병신년1476-1538)이요 수하신 해는 중종 33년이시다 또한 아버님 서호공과 모친 능선 구씨 사이에 태여 나셨으며 부인은 창령성씨 성담년의 따님이시며 재상 성희공에 조카 가되신다 공은 연산4년(1498)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연산군 10년 이십구세에 식년 문과(式年文科)갑과에 급제하고 겸열. 도호부사. 집의보덕 군수(郡守). 동부승지 .홍문관집재학(弘文官集堤學). 부제학(副堤學)등 을 거처 중종26년(1531) 호조판서가 되였다 공께서 사시던곳은 향리는 비인 이요 경가는 서소문밖 반송방(盤松坊) 기교 다리 건너 지금의 의주로 부근에서 살앗다고한다 본시 공께서는 선친 서호공이 유배 되였을 때 벼슬에 나아가기를 꺼려하였으나 부친 서호공이 말씀하시기를 [ 나는 비록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절 의의 뜻을 세우고 잇지만 너만은 집안의 대의를 위하여 순리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라--] 하는 충고를 따랏다고한다 아무튼 그때 공의 결심이 있어 훗날 기계 유씨의 육개파가 화려한 꽃이 피게 된겄을 다행으로 안다 공께서는 중종조가 들어서면서부터 추천 되여 사국에 들어갔고 성균관 전직 직강에 이르러 일할 때 판서 한형훈과 찬성 고형선 두막료을 보좌하니 이들이 공을 일 크러 말하기를 강직한 공의 성품 때문인지 그사람됨을두고 [장차 크게 될 재상 감이다-]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또한 공의 춘추 40새떼 중종 14년 사간원 사간 시절 정암 조광조(趙光朝)선생과 더불어 양사를 창솔하여 중종반정 공신중 납록된자를 삭재할겄을 청하였다가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 뒤로 미루어 오다가 심여원(沈汝源)등 조광조 선생과 함께 납록된자들을 처벌할 것을 다시 계하다가 드디어 뜻을 못 이루지 못하고 파직 당한다 공이 파직유배된후 공의 향리인 비인에서 은거하면서 공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벼슬이 높다 하여도 높다고 부르지 마라 달라) 하였다 고한다 그리고 공이 비인에 은거하면서 너무도 울적하여 아우님 여주공과 함께 낚싯대를 드리우곤 하엿는대 그낙시하던곳을 정당대라고 하였고 그때부터 공을 일 크러 정당이라 하여 공의 호가되엿다 그리고 함께 향리에서 은거할 때 같이 계시던 아우님 여주공께서는 기묘현랑과(己卯顯郞科)에 1등으로 추천 되였으나 여주공은 본시 시문학과 학문에만 점진한 시인이요 서예가로서 그 당시 조광조 선생께서 과거 재도 개선책의 일환으로 마련한 [과거라 함은 청렴결백한 학풍과 덕망이 잇는 사람이 치루워져야 한다면서 마련된 현랑과 ]인물 추천재도이기때문에 여주공이 추천 되였으나 어쩐 일인지 여주공은 과거급재를 마다하고 초야에 무치고 말앗다 여주공이 생하신 해는 중종 11년(1480)이고 졸 하신 해는 상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공의 자는 사성(師聖)이요 호는 그가 한산에 임벽당을 짖고 독서와 학문에 열중하였다 하여 그의 호는 임벽당(林碧當)이였으며 그로 인하여 그의 부인 임벽당 김씨 또한 시문과 문학이 출중하여 그 당시 조선조 중기 신사임당(申師任當)과 허난설(許蘭설)등과 함께 여류 시인이며 삼대 규수로 장안과 전국에 유명한 여류 명사로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이러한 아우를 두신 여림 공께서는 형조 판서 시절 방자한 김안로(金顔老)가 정치를 그릇 치자 탄핵하는 계를 올리다가 또파직당하여 향리인 비인으로 두 번째로 은거된다 훗날 공의 춘추 60세에 방자한 김안로는 죄갑으로 사사 당하고 그해에 다시복작 되시었으나 그 이듬해 향년62세로 시월 초이튿날 타개하시니 문중 대소가 집안간의 슬픔은 물론 나라님도 애석해 하시며 시중을 철시케 하시고 애도의 뜻을 표하였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공의 슬하에는 내분의 자식이 계신대 장자는 생원(生員) 기계부원군(杞溪府院君)관(綰)이요 차자는 서흥부사(瑞興府事)서흥공(瑞興公) 진(鎭)이시고 그및이 호조판서 숙민공(肅敏公) 강(絳) 이시며 내째는 진사(進士) 윤(倫)이시다 그리고 손자는 단성공 호(灝). 충목공 좌의정 (弘). 학생공 준(俊). 자산공 영(泳). 진사공함(涵). 억(億) 등이잇다.훗날 우리의 진사공 함(涵)께서 백부 서흥공 진(鎭) 이 자손이 무하여 친부 숙민공을 떠나 양자로 가시게 된다 그리고 함의 형 자산공(泳)은 기계 유씨 15개파중 6개 파는 물론이요 가장 가까우며 6계파 모두가 여림 공의 후예 가된다 또공이 묻히신 벽재 관산리 선산에는 .진. 함. 수안공 대경(大擏).등 기계 유씨 조상 70여분 이상이 잠들어 계시다 우리 모두 명심하여 시월 상달 재향시 참석하여 조상의 얼을 기리자 공이 타개 하신 후 수새 월이지나 숙종사십육년 유림들에 의하여 비인 청절사 에 선친 서호공 과 함께배향되여 있음을 영광으로 안다 그리고 공께서 생전에 세자빈객 (世子賓客)을 역임도 하시었기 공이 타개한 후 묘표기는 영의정 홍언필(洪彦弼)이 군수 김현성(金憲成)과 함께 추기 하였으며 신도비는 (특교노직 신도비)는 칠세 손 지수재 척기가 추기 하였다 공이가신 수백년후 문중의 어른들이 1985년 공의 유고인 정당유고를 탈고하였음을 밝히며 후속 부록에는 숙민공 유고가 여러 옜어른들의 관한기록과 친족들의 유익한 글들이 실려있다.
진 (鎭) 양부
]-----진의 아우 강 이 나은 둘째 함을 양자 한다
강 (降) 생부
진 (鎭)
공의 휘는 진(鎭)이요 자는 지순(芝純)이시며 1531년 생원과에 합격하고 문과 급재후 통정대부를 거처 서흥부사(瑞興附事)를 지냈다 하여 그분을 우리는 서흥공이라고 부른다 부인은 사직을(司直)를 역임하신 단양 우씨(丹陽禹氏)의 따님이시며 그리고 공의 태어나신 해는 상고할 수가 없다 선친 경안공 여림과 모친 창령성씨 사이의 차자로 태여 나시였다 형재는 위로 생원 기계부원군 관(官)과 밑의 아우 숙민공 강(降).진사(進士) 윤(淪) 모두가 사형재분이시다 그러나 안타까웁게 일점 생혈육이 없어 아우님 숙민공 두아들 자산공 영(泳과 진사공 함(涵) 형재중에서 둘째 조카 함(涵)으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시니 집안의 우의가 돈독 하엿다고한다 그러무로 기계 유씨 진사공파들은 모두가 서흥공 진(鎭)은 양부요 숙민공 강(降)은 생부라 말하며 자산공과는 형재의 끈끈함이 있어 현재 후손들도 가까운 사이다 또한 우리 서면 유씨들은 진사공 함의 세쩨아들 수안공 대경(大擏)의 후예가 되며 그때부터 종손가가된다 서흥공 역시 벽재 관산리에 분영이 모셔져 있으며 그가 생전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님 경안공 이 타개하시자 식음을 거르고 유명 인사들을 방문 자문을 얻는 효을 보였다고 전함은 말하고있다 역시 공의 재향도 시월 상달 대종회 주관으로 시재를 모신다.
공의 16세손 병은(炳銀)이 감히곤경하며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