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8/19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4 - 국내서만 자라는 미선나무, 부탄 왕실 정원서 ‘무럭무럭’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나무인 미선나무가 ‘히말라야’로 간다. 괴산군은 미선나무를 군화(郡花)로 삼아 미선향 테마파크 조성, 미선나무권역 정비사업, 미선나무 축제 개최 등을 하고 있으며 식품과 관광, 브랜드 개발 등 6차 산업에도 힘을 쏟고 있다.
2012 -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아닌 안창호” ㆍ흥사단 증언자료 공개 그동안 ‘작자 미상’으로 분류된 채 실제 주인공을 놓고 논란이 분분했던 애국가의 작사자가 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사진)이었다는 자료가 나왔다. 또 애국지사인 구익균옹(104)에게도 이를 직접 밝힌 적이 있다고 흥사단은 덧붙였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192146575&code=960201 - 이창호 (공중전화카드)
2010 - 돌부처가 이겼다 이창호, 명인전서 이세돌에 불계승 이세돌이 당대 최고라고 하지만, ‘돌부처’ 이창호 앞에서는 약했다. 백을 쥔 이세돌 9단은 19일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국기원 1층 바둑TV스튜디오에서 열린 38기 하이원리조트배 명인전 A조리그 최종대국에서 이창호 9단에 불계패를 당했다. 지난해 3월 이후 17개월 만의 대결. 이창호는 무지막지한 싸움꾼 이세돌에 맞서 차분한 국면 운용으로 완승을 거뒀다. 둘의 전적은 이창호의 31승21패로 더 벌어졌다. 둘은 9월1일부터 3판양승제의 물가정보배에서 다시 만난다. 한편 이창호는 명인전 A조 3승2패로 역시 3승2패인 안국현 2단과 공동 2위가 돼, 9월5일 재대국을 펼친다. 여기서 이기면 A·B조 1·2위가 벌이는 4명의 결선 토너먼트에 오른다. 김창금 기자 /한겨레 2010-08-24 오후 07:47:29
2004 - 삼성전자 차세대 반도체 64메가 P램 세계 첫 개발 삼성전자(대표 윤종용)가 현존하는 차세대 메모리 가운데 용량이 가장 큰 64메가비트(Mb) P램(Phase change RAM:상변화 메모리) 시제품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64Mb P램 시제품의 업계 첫 개발로 차세대 메모리 시장에서도 선두 위치를 고수할 수 있게 됐다”며 “앞으로 차세대 메모리분야 연구를 본격화해 신뢰성과 제품 특성 등을 개선, 상용화 시기를 앞당겨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P램은 ‘게르마늄 안티몬 텔룰라이드(Ge2Sb2Te5)’라는 상변화 물질을 이용, 이 물질이 비정질 상태에서 결정질 상태로 변화될 때 1비트(bit)를 얻는 방식으로 동작하는 신개념 메모리 반도체다. 삼성전자 외에도 ST마이크로, 인텔, 오보닉스 등이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전자신문 2004/08/19 16:33:35 http://ibora.net/board/index.html?imode=view&D=11&c_id= 1423&my_mode=&search_1=&search_2=&start=84&where=
2003 - 전 온두라스 대통령 레이나(Reina, Carlos Roberto) 자살 레이나 [Reina (Idiáquez), Carlos Roberto, 1926.3.13~2003.8.19] 레이나 前온두라스 대통령 총기자살 카를로스 로베르토 레이나(77) 전 온두라스 대통령이 19일 총으로 자살했다고 온두라스 당국이 밝혔다. 레이나 전 대통령은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재임하면서 온두라스에 민간정부의뿌리를 내린 인물이다. 레이나 전 대통령은 그동안 담낭과 췌장, 간 등에 퍼진 암으로 고통받아왔다고그의 동생이 전했다. 그의 시신을 검시한 관계자들은 사망 원인이 스스로에게 가한 총격이라고 말했고 동생도 이를 확인했다. (AFP=연합뉴스) /조선 2003.08.20
- 공중전화카드
2001 - 국내 최고(最古) 추정 태극기 발견 http://unsuk.kyunghee.ac.kr/jangmyun_2004/NZEO/bbs/view.php?id=gallery_km&page= 1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2
2000 - 영국-프랑스, 콩코드 운항재개 감시단 구성 영국과 프랑스는 18일 양국 교통부와 항공운항 당국간의 회의에서 콩코드기의 운항재개를 위한 항공사와 제조업체들의 노력을 면밀히 감시하고 조정하기 위한 특별감시단을 공동 구성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특별감시단은 파리와 런던에서 정기적으로 회의를 열어 콩코드기의 장래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들이 가능한한 빨리 공개되도록 할 것이라고 양국 당국자들은 말했다. 영국 교통부 대변인은 "특별감시단은 항공기 제조업체들과 기타 이해당사자들이 콩코드기의 내공성을 복구시키기 위해 수행하는 작업을 조정하는 역할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항공 대변인은 양국 정부와 항공운항 당국이 콩코드기의 운항을 재개하려는 영국항공의 의지를 공유한데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이를 위해 특별감시단 및 에어프랑스와 어떤 방법으로든 협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영국의 BAE시스템스와 프랑스의 아에로스파시알 등 콩코드기 제조업체들을 포함한 모든 당사자들은 이번과 같은 사고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콩코드기를 개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게 된다. 2000년 항공일지 /항공정보포탈시스템 http://www.airportal.co.kr/life/history/lee/LfLeeSe001.html
- Slobodan Milosevic
1999 - 유고 최대규모 반정부 시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연방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1999년 8월 19일 수도 베오그라드 중심부의 연방의회 건물앞에서 열렸다. 10만명 이상의 대규모 군중이 집결한 가운데 열린 집회에서 시위대는 당기와 세르비아 공화국 국기, 피켓 등을 흔들며 변화와 밀로셰비치의 사임을 요구했다. 시위가 시작된 직후 최루탄 1개가 터져 시위대 수십명이 몸을 피하는 과정에서 1명이 부상해 구급차로 병원에 옮겨지기도 했으나 시위는 별다른 사고 없이 일단 끝났다. 이날 집회는 정부의 갑작스런 조기 총선 제안으로 야당 연합전열에 분열 양상을 초래한 가운데도 가장 강력한 반 밀로셰비치 시위가 이뤄졌다는데 의미가 있다. 또 집회에 당초 불참 의사를 통보했던 `세르비아 혁신운동`의 부크 드라스코비치가 돌연 참석, 조기 총선을 `11월까지는 실시해야 한다`는 즉석 연설을 해 시위대로부터 야유와 환호를 동시에 받았다. 드라스코비치는 다른 주요 야당 인사들이 과도정부구성을 지지하는데 비해 정부측의 조기 총선안을 지지하는 이단적 재야 인사로서 이날도 과도 정부구성을 반대하며 합법적 틀안에서의 이성적 대응을 촉구했다. /조선
1994 - 미국의 물리화학자 라이너스 폴링(Pauling, Linus) 사망 폴링 [Pauling, Linus (Carl), 1901.2.28~1994.8.19] [어제의 오늘]1994년 라이너스 폴링 타계 ㆍ반핵운동 뛰어든 ‘노벨상 2관왕’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1901년 태어난 라이너스 폴링은 25세에 캘리포니아공대(칼텍)에서 물리·화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30세에는 세계 최고의 화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그는 화학에서 생물학으로 방향을 틀어, DNA 구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생물학자로서도 그는 탁월했다. 폴링은 51년에 단백질의 알파 나선구조를 제시하고 이듬해에는 DNA의 ‘3중 나선구조’를 내놓았다. 인간 유전의 신비는 폴링에 의해 베일이 벗겨지는 듯했다. 그러나 DNA는 3중이 아닌 2중 나선구조임이 드러났고, 이를 밝혀낸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노벨상에 있어서라면 폴링은 아쉬울 것이 없었다. 이미 54년에 화학상을 받았던 데다가, 62년에는 다른 분야에서 또다시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폴링은 서로 다른 분야에서 2개의 노벨상을 탄 유일한 사람이다. 특히 세계가 지금까지도 그를 기억하게 만든 것은 그중 두번째인 평화상을 안겨준 여러 활동들이다. 구정은기자 ttalgi21@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8-18 17:51:3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8181751305&code=100100&s_code=ap005
- Election of Boris Yeltsin, June 12, 1991
소련은 혁명으로 시작해 결국은 쿠데타로 막을 내렸다. 1917년 레닌의 혁명으로 정권을 탈취한 때로부터 74년이 지난 1991년 8월 19일, 소련의 공산당 보수파 세력이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실각을 획책했다.
1982 - 전두환 대통령 아프리카 4국(+캐나다) 순방 중 나이지리아 공식방문(19일~22일) "전두환 대통령은 영부인 이순자여사와 함께 케냐, 나이지리아, 가봉, 세네갈 등 아프리카 4개국 대통령과 카나다 총독의 공식 초청을 받고 8월 17일부터 31일까지 이들 5개국을 공식 방문한다. 전 대통령은 5개국을 순방하면서 케냐의 모이 대통령, 나이지리아의 샤가리 대통령, 가봉의 봉고 대통령, 세네갈의 디우프 대통령 및 카나다의 트뤼도 수상과 정상회담을 통해 최근의 국제정세와 지역정세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상호 관심사와 양국간의 협력 강화 방안에 관해 협의하게 된다. 8월 17일부터 19일까지 케냐, 19일부터 22일까지 나이지리아, 22일부터 24일까지 가봉, 24일부터 26일까지 세네갈의 순서로 아프리카 순방을 끝내고 8월 28일부터 31일까지 카나다를 방문한다. 전두환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은 아프리카 제국과의 우호 관계 강화를 도모하고 경제적으로도 동 지역에 적극 진출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또한 방문하게 될 4개국이 모두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외교적 행동 반경을 넓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체신부에서는 전두환 대통령의 케냐, 나이지리아, 가봉, 세네갈 및 카나다 방문을 기념하면서 이 우표를 발행한다." (우표발행안내) /K-stamp
- Soyuz T-7 - Salyut 7 - Soyuz T-5 Flight (L. Popov, A. Serebrav, S. Savitskaya)
- Salyut 7 & Soyuz-T, 211 Day Flight (A. Berezovoy & V. Lebedev)
1982 - 소련 우주선 소유즈-T 7호 발사 1982년 4월 19일 우주 정거장 살류트 7호(Salyut 7)가 발사된다. 살류트는 7호까지 발사되어, 소유즈와는 T7호까지 도킹을 하였다. 1982년 5월 13일 소련의 우주 비행사 베레조보이(Anatoly N. Berezovoy)와 레베데프(Valentin V. Lebedev)가 탑승한 소유즈-T 5호(Soyuz-T 5)가 살류트 7호(Salyut 7)와 랑데뷰하기위해 발사된다. 이들은 우주 정거장에 머무는 첫 팀이 된다. 이들은 211일간 우주 정거장에 머문 후 12월 10일 소유즈-T 7호(Soyuz-T 7)로 지구로 돌아온다. 소유즈-T 7호는 8월 19일 발사되어 살류트 7호와 랑데뷰한 후 12월 10일 귀환하였는데, 거기에는 여성 우주비행사 S. 사비츠카야가 동승하였다. (화상 자료종합)
- Vladimir Lyakhop, Valery Ryumin, 175 days in space, Feb. 25 - Aug. 19, 1979
소유즈 [Soyuz] 소련이 발사한 일련의 유인·무인 우주선. 우주정거장이 설치되기 전까지 소유스는 우주정거장으로서 우주에 체류하여 활동하였다. 소유스 1~10호는 1~3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지구궤도로 발사되었으며, 이들 중 소유스 9호는 가장 오랜 비행(약 18일)을 기록했다. 그 이후 30회에 걸쳐서 소유스 선이 더 발사되었는데, 이중 거의 대부분이 추가로 수행한 임무는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살류트 우주정거장에 소유스 캡슐을 도킹시키는 것이었다. 이 우주비행에서 소유스선의 승무원은 우주실험실로 건너가 장기간에 걸친 과학실험을 했다. 1981년 소유스 35호 승무원들은 185일 동안 살류트 6호에 머물러 우주비행 역사상 가장 긴 유인(有人)우주비행을 기록했다. 또다른 중요한 소유스 비행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우주탐사인 아폴로-소유스 시험계획이다. 1975년 7월 수행된 이 우주비행에서 3명이 탑승한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이 2명이 탑승한 소유스 19호와 도킹에 성공했으며, 이들은 2일 동안 공동실험을 했다. 1980년에는 소유스 T 계열이 도입되었다. 이 캡슐들은 더 발달된 전자장치와 더 좋은 비행능력을 지니고 3명의 승무원을 편안하게 실어 나를 수 있었다. 소유스 T 우주선은 그 이전의 우주선들처럼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살류트 우주정거장까지 우주비행사들과 보급품을 정기적으로 왕복수송했다. 1986년에는 소유스 TM이 개발되어 새로운 우주정거장인 미르에 연결되어 같은 임무를 수행했다. 2001년 4월 28일에 발사된 소유스 TM32는 최초로 우주 관광객을 태우고 국제우주정거장(ISS)에 연결되었다. 이후로는 여기에서 약간 변형된 소유스 TMA가 사용되고 있다. 소유스 TMA는 미국 미국항공우주국의 요구에 맞게 개조한 것으로, 승무원의 키와 몸무게 범위를 넓히고, 향상된 낙하산을 장비했다. 2008년 4월 8일 최초의 한국인 우주인 이소연도 소유스 TMA-12호에 탑승하여 우주비행에 참가하였다. /브리태니커
1964 - 한국, 국제의원연맹(IPU) 가맹 국제의원연맹 (Inter-Parliamentary Union, IPU) 이란 1889년에 설립된 국제적인 의회기구이다. 설립목적은 국제평화 및 협력 도모, 그리고 의회제도 정착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그 활동을 정지했지만 1945년부터 재개하였다. IPU의 최초 목적은 국제재판 사상의 보급이었는데, 2차대전 후에는 평화와 전후 재건이 주안점이 되었다. 해당 연맹은 국제연합의 자문기구로써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010년 현재 총 회원국은 152개국이며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 대한민국은 1964년 8월에 스웨덴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 53회 총회에서 정식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이후 1984년 제 70회 총회, 1997년 4월 제 97차 총회·제 160차 이사회를 서울에 유치하였다. 한편 평양에서는 1990년 85차 총회가 열렸다. /위키백과
- Flight of Sputnik 5, Aug. 19~20, 1960
1960 - 세계 최초, 개 두마리 우주비행 후 무사히 귀환 (사이언스 시간여행 과거속으로) 김상연 기자 /동아사이언스 2007년 08월 15일 iew&article_no=20070810131903
사람보다 먼저 우주로 간 '동물 우주 비행사'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진행한 미국과 달리 러시아는 비밀리에 유인 우주 계획인 보스토크(‘동쪽’이라는 뜻)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1960년 3월 전투기 조종사 20 명을 우주 비행사로 뽑게 됩니다. 이들은 별과 우주 공간을 항해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미국에선 애스트로넛(Astronauts), 러시아에서는 코스모넛(Cosmonaut)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는 아직 이들이 타고 갈 우주선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어요. 그리고 유인 우주 비행에 앞서 사람 대신 다른 생명체가 우주 비행에서 무사히 돌아와야만 하기 때문에 미국과 러시아는 동물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미국은 원숭이와 침팬지를, 러시아는 개를 훈련시켰습니다. 먼저 동물 우주 실험을 시작한 쪽은 러시아였어요. 1960년 8월 스푸트니크 5호로 알려진 우주선 보스토크에는 2 마리의 개와 토끼, 생쥐, 파리 등이 실려 발사되었습니다. 벨카(다람쥐)와 스트렐카(작은 화살)라는 이름의 2 마리의 개는 전용 우주복을 입었습니다. 이들은 누워서 젤리 형태의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좁은 캡슐에 넣어져 우주선에 실렸습니다. 스푸트니크 5호는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에서 발사돼 지구를 17 바퀴 정도 돈 뒤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이 비행의 성공은 러시아 과학자들이 고안한 우주선 보호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우주선이 지구 궤도를 돌고 나서 대기권에 진입할 때의 속도는 무려 초속 7 km에 이릅니다. 특수한 보호 장치가 없다면 대기와의 마찰로 뜨거워져 우주선이 녹아버리거나 부서지고 말지요. 러시아 과학자들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우주선의 둘레에 타서 녹는 물질을 여러 겹으로 칠하는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바깥 쪽에 칠해진 물질이 타 들어가면서 온도를 빼앗아 가기 때문에 우주선은 1000 ℃가 넘는 고온에서도 끄떡없게 되었지요. 이 기술로 인해 벨카와 스트렐카는 사상 최초로 우주 비행을 한 뒤 살아 돌아온 동물이 되었습니다. 물론 같이 탔던 나머지 동물들도 무사히 돌아왔어요. 동물 우주 귀환 실험에서 첫 성공을 거둔 러시아는 같은 해 12월 2 마리의 개를 우주로 쏘아 올렸어요. 그러나 항법 장치가 고장나 탑승한 개들이 그만 우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러시아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61년 3월 2 차례에 걸쳐 개 1 마리와 우주복을 입은 나무 마네킹을 실은 로켓을 발사해 지구로 귀환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미국도 1961년 1월에 머큐리 우주선에 ‘햄’이라는 이름의 침팬지를 태웠어요. 비록 러시아에 비해 짧은 우주 비행이었지만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습니다. 이들 동물들의 우주 비행 실험은 미국과 러시아가 우주선에 사람을 태울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정홍철 스페이스스쿨 대표> /소년한국일보 2007-06-07 14:20 http://kids.hankooki.com/lpage/edu/200706/kd2007060714195977360.htm
1954 - 이탈리아의 총리 알치데 데 가스페리(De Gasperi, Alcide) 사망 데 가스페리 [De Gasperi, Alcide, 1881.4.3~1954.8.19] 이탈리아의 총리(1945~53). 제2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의 재건에 이바지했다. 24세 때부터 〈누오보 트렌티노 Il Nuovo Trentino〉지(誌)를 주도해 이탈리아 문화와 트렌티노 지역의 경제적 권익을 옹호했다. 1911년 오스트리아 의회에 이탈리아 의원으로 선출되어 다른 이탈리아 대표들과 함께 트렌티노의 이탈리아 합병을 위해 힘썼다. 1919년 합병이 실효를 거두자 진보적인 기독교 민주주의의 전통을 계승한 이탈리아 인민당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탈리아 하원에 진출했다(1921). 1927년 반(反)파시스트 인사로 체포되어 4년 징역형을 언도받았으나 교황 피우스 11세의 개입으로 16개월 만에 풀려났다. 그후 1929년 바티칸 도서관의 사서가 되었다. 전쟁기간 동안 레지스탕스 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데 가스페리는 인민당을 기독교민주당으로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1943년 파시스트 정권이 무너지자 정치일선에 복귀했고 기독교민주당의 간사직을 맡았다. 1944년 6월 이바노에 보노미 내각의 무임소장관으로 지명된 후 2차례 외무장관을 지냈다. 1945년 12월 10일 총리가 된 후 7년이 넘는 동안 재임했다. 1947년 9월 데 가스페리는 연합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의회의 비준을 받아냈고, 1948년 1월에는 신헌법을 제정했다. 한편 중남부의 토지개혁안을 마련했으며 화산지대의 천연 가스와 증기를 에너지원으로 하는 발전소를 건설함으로써 자원의 이용도를 높였다. 외교부문에서는 이탈리아의 대외적 영향력을 회복하려고 애썼다. 1951년 서유럽 국가들과의 긴밀한 유대를 위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고 곧바로 이탈리아의 재무장에 착수했다. 민주 유럽 국가연합의 주요발안자로서 유럽 의회와 유럽 석탄철강 공동체의 설립을 도왔다(1951). 1953년 실각한 뒤 기독교민주당의 사무총장이 되었고 이듬해 5월 당수로 지명되었다. E. A. 카릴로는 〈데 가스페리:오랜 견습시절 Alcide De Gasperi:The Long Apprenticeship〉(1965)에서 1945년을 전후한 그의 삶을 다루고 있다. /브리태니커
- Mohammed Riza Pahlavi
1908년 이란에서 석유가 발견된 이래, 이란 원유를 독점한 것은 영국 자본 ‘앵글로ㆍ이라니안 석유회사(AIOC)’였다. 2차대전후 제3세계에서 민족주의가 고양되는 가운데 이란에서도 석유산업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런 국민적 감정을 타고 석유산업을 국유화시키는데 앞장선 사람이 무사데크다. 그는 영국은 물론 소련과도 일정한 거리를 둔 리버럴한 성향의 노(老) 정치가였다. 1951년 3월 국유화 법안이 상ㆍ하 양원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되자 무사데크는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곧 총리에까지 올랐다. 당시의 이란 왕은 팔레비였다. 이 상황을 그냥 지나칠리 없었던 영국이 이란석유 불매운동과 경제봉쇄조치로 이란 경제에 타격을 가하자 어느덧 국민들 사이에서는 반(反)무사데크 목소리가 높아졌다. 팔레비는 기회를 틈타 무사데크를 파면했으나 오히려 무사데크를 지지하는 세력들의 힘에 밀려 로마로 쫓겨났다. 그러나 1953년 8월19일, 미국 CIA 지원을 받은 친(親)팔레비 자헤디 장군이 쿠데타에 성공함으로써 사태가 역전된다. 무사데크 체포와 함께 이란의 탈(脫)제국주의 몸부림도 2년 만에 끝이 났다. /조선
1946 - 미국의 제42대 대통령 빌 클린턴(Clinton, Bill) 출생 클린턴 [Clinton, Bill, 1946.8.19~] 미국의 정치가, 대통령. 본명은 William Jefferson Blythe IV이며, 아칸소주(州) 호프 출생이다. 유복자로 태어나 결손가정에서 소년시절을 보내고, 15세 때 아칸소주의 우수학생으로 뽑혀 백악관을 방문, 대통령 J.F.케네디와 악수하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정치가가 될 결심을 하였다. 1968년 조지타운대학을 졸업, 이어 2년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로즈(Rhodes) 장학생으로 유학하였으며, 그후 예일대학교 법학대학원에 입학, 졸업과 동시에 아칸소대학 법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72년과 1976년 대통령선거 때 민주당후보인 G.맥거번과 J.카터의 선거운동을 지휘하였다. 1976년 아칸소주 법무장관이 되었으며, 1978년 32세에 미국 최연소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민주당 우파에 소속되어 1992년 현직 대통령 G.H.W.부시를 누르고 제42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사상 3 번째로 젊은 46세의 대통령이 되었다. 전후(戰後)세대로서 최강의 군사력과 적극적인 경제정책으로 미국을 새롭게 탄생시킨다는 노선을 지향하면서 1993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6년 4월 한국의 제주도를 방문, 대통령 김영삼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1945 - 베트남 8월혁명 베트남 8월혁명 [越南八月革命] 1945년 8월 프랑스 식민당국의 통치를 무력화시키고 베트남에서 실권을 행사하던 일본의 항복으로 생긴 힘의 공백을 이용하여 베트민[越盟]이 정권을 장악한 혁명. 1940년 프랑스 식민당국에 압력을 가하면서 베트남에 진출한 일본군은 1945년 3월에 이르러, 필리핀을 탈환한 미군이 베트남에 상륙하는 경우 프랑스군대가 이에 호응하리라는 우려 속에서 무력으로 실권을 장악하였다. 구엔왕조[阮王朝]의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保大]에게 독립을 선포시키고 쩐쫑낌[陳仲金] 내각을 구성하게 하였지만 이는 이름뿐이었다. 베트민은 행정의 공백을 틈타 농촌과 도시에서 선전활동을 통해 이미지 구축과 조직의 확대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베트민은 베트남에 독립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거국적 단체로 인식되었다. 여기에는 200만 명의 아사자(餓死者)를 냈다는 당시의 심각한 기근도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항복하자 베트민은 곧 총궐기를 선언하고, 8월 19일 하노이에서의 대대적인 시위를 통해 이를 장악하는 한편, 곧 이어 위에와 사이공까지도 그 영향권에 넣었다. 8월 30일에는 베트민의 대표가 위에에서 바오다이황제로부터 권력과 권위의 상징인 황금의 보도(寶刀)를 넘겨 받았다. 8월혁명의 결과 하노이에는 곧 공산정권이 수립되어 이후 베트남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naver
1942 - 연합군, 프랑스 디에프 상륙작전 1942년 오늘 연합군이 독일군 점령지인 프랑스 북서부 항구도시 디에프(Dieppe)의 해안으로 침투한다. 5천여 명의 캐나다 군과 천여 명의 영국군, 30대의 전차가 이 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연합군은 이 항구도시를 기습해 부두시설과 비행장을 파괴하고 포로들을 구출한 뒤 재빨리 퇴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해안 15km를 따라 지뢰와 철조망, 함정을 설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더구나 연합군의 일부 상륙정들이 진로를 벗어나 늦게 도착하면서 상륙작전은 새벽이 아닌 밝은 대낮에 시작되고 말았다. 결국 연합군은 1179명이 사망하고, 2190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에 독일군은 311명 사망에 280명 부상으로 비교적 가벼운 손실을 입고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막아냈다. /YTN
디에프 상륙작전 제2차 세계대전 초반기 동안 영국은 독일이 점령한 대서양 연안 방어망을 교란하기 위한 코만도 작전을 펼쳤다. 1941년 이들 작전을 총괄하는 영국 전쟁부 합동작전국 국장에 임명된 마운트 배턴 경은 사단급의 대규모 기습 상륙작전을 검토했다.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2001&menuSeq= 39&menuCnt=30917&writeDate=20060825&kindSeq=1&writeDateChk=20060822
1936 - 스페인의 시인, 극작가 가르시아 로르카(Garcia Lorca, Federico) 사망 가르시아 로르카 [Garcia Lorca, Federico,1898.6.5~1936.8.19] 에스파냐의 시인, 극작가 그라나다의 푸엔테바케로스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나 그라나다대학에서 법학 ·철학을, 마드리드대학에서 문학을 배웠다. 처녀작 《나비의 장난》의 상연(1920)은 실패하였으나, 이듬해의 첫시집 《시의 책》을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 후에 《노래의 책》(1927)과 전통시의 형식을 살리면서 공고라풍(風)의 다채로운 이미지를 담은 《집시 가집(歌集): Romancero gitano》(1928)을 내어 시인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1931년 제2공화국 정부가 성립되자, 대학생 극단 ‘바라카’를 조직, 농촌을 순회 공연하여 연극의 보급과 고전극의 부활에 힘썼다. 또한, 이 무렵부터 극작에 전념하여 불행한 사랑을 그린 《피의 혼례 Bodas de Sangre》(1933), 석녀(石女)의 비극을 다룬 《예르마 Yerma》(1934), 폭군적인 어머니 아래에서 부자연스러운 생활을 강요당하는 딸들의 비극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La casa de Bernarda Alba》(1936)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모두가 숙명적인 본능의 힘으로 움직이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이다. 1936년, 스페인 전쟁이 일어난 며칠 뒤에 고향인 그라나다에서 프랑코측에 의하여 사살되었다. /네이버
1929 - 러시아의 발레 프로듀서, 무대미술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Dyagilev, Sergei) 사망 디아길레프(댜길레프) [Dyagilev, Sergei Pavlovich, 1872.3.31~1929.8.19] 러시아의 발레 프로듀서이자 무대미술가. 노브고로트에서 출생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후에 음악으로 바꾸어 1892년 그곳 음악학교를 졸업하였다. 1898년 미술잡지 《예술세계 Mir Iskusstva》를 창간하여 1904년까지 계속 발간하였으며, 1899∼1901년 왕립극장의 특별 조수로 일하였다. 1908년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F.I.샬리아핀 등 러시아 음악가들에 의한 M.P.무소륵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를 공연하였다. 그 후 발레를 전문으로 다루어 1909년 발레단 ‘발레 뤼스’를 파리에서 창단하고 그 후에도 당대의 첨단을 걷는 예술가들을 기용하여 《세헤라자데》(1910) 《목신의 오후》(1912) 《봄의 제전》(1913) 《불새》(1916) 《삼각 모자》 등의 작품을 런던·몬테카를로·파리·뉴욕 등지에서 차례로 발표하였다. 발레 뤼스는 1929년 그의 죽음과 함께 해체되었다. /naver
1906 - 미국의 텔레비전 개발의 선구자 필로 판즈워스(Farnsworth, Philo) 출생 판즈워스 [Farnsworth, Philo Taylor, 1906.8.19~1971.3.11] 미국의 텔레비전 개발의 선구자. 고등학교 시절 텔레비전의 기본적인 필요요건을 인식하고 2년 뒤 유타 주 프로보의 브리검영대학교에서 사진전송의 과정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1926년 크로커 연구소를 공동 설립했는데, 이는 판즈워스텔레비전사(1929)로, 후에는 판즈워스라디오텔레비전사(1938)로 재편되었다. 1927년 60개의 수평선으로 구성된 상(달러 표시)을 전송하는 데 성공하고 그는 최초의 텔레비전 특허를 신청했다. 판즈워스는 계속해서 광학적 상(像)을 전기신호로 전환시키는 장치, 증폭관, 음극선관, 전기 스캐너, 전자증배관, 광전 물질 등 많은 장치를 발명했다. 또한 레이더 방식 진공관 개발 및 원자핵융합에 의한 전기 에너지 생성에도 공헌했다. /브리태니커
1902 - 미국의 시인 오그던 내시(Nash, Ogden) 출생 내시 [Nash, Frederic Ogden, 1902.8.19~1971.5.19] 미국의 시인. 대담한 유머 시를 써서 큰 호응을 얻었다. 하버드대학교를 1년(1920~21) 다닌 후 광고업·교직·편집·채권판매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시가 성공하자 시작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첫 시(1930)는 〈뉴요커 The New Yorker〉지에 실렸으며, 한때 이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시집 〈역경 Hard Lines〉(1931)의 출판을 시작으로 약 40년 동안 작품활동을 하면서 〈나쁜 부모들의 시원(詩園) Bad Parents' Garden of Verse〉(1936)·〈나는 여기서 이방인이네 I'm a Stranger Here Myself〉(1938)·〈그대와 나를 뺀 모두 Everyone but Thee and Me〉(1962) 등 시집 20권을 썼다. 볼티모어에 살면서 미국 전역을 순회 강연했다. 이밖에도 뮤지컬을 위한 서정시 〈비너스의 손길 One Touch of Venus〉(1943)·〈두 사람은 친구 Two's Company〉(1952) 등과 여러 권의 아동 도서들을 썼다. 그의 각운들은 귀에 거슬리게 어긋나거나 아니면 불안할 정도로 정확하다. 또 연(聯)의 짜임새도 고르지 않아 한 단어로 된 행에서부터 장황한 문단 가량의 길이를 갖는 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때로는 부적절한 여담들이 끼어들기도 한다. 그는 그의 작시법을 실수가 많기로 이름난 '미시간의 달콤한 가수' 줄리아 무어의 뜻하지 않은 실수로부터 배웠다고 회고했다. /브리태니커
1883 - 프랑스의 패션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Chanel, Gabrielle) 출생 샤넬 [Chanel, Gabrielle Bonheur, 1883.8.19~1971.1.10] 프랑스의 복식 디자이너. 별칭은 코코(Coco)이다. 1910년 파리에 여성 모자점을 열고 모자 디자이너로 활동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여성복 디자이너로 전향하였다. 간단하고 입기 편한 옷을 모토로 하는 디자인 활동을 시작하여 코르셋 등 답답한 속옷이나 장식성이 많은 옷으로부터 여성을 해방하는 실마리를 만들었으며, 여성복에 저지라는 소재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오늘날 샤넬 슈트라고 불리는 카디건 스타일의 슈트를 발표하여 유명하게 되었다. 약 15년간 가게를 닫았으나 1954년 다시 문을 열었다. 장식이 생략된 옷의 본체에 브레드나 코드의 테두리를 붙이고, 당시에는 보기 드문 크고 작은 색유리나 크리스털 글라스의 액세서리를 붙이기도 하였다. 간단하고 입기 편하며 활동적이고 여성미가 넘치는 샤넬 스타일은, 유행의 변천 속에서도 별로 변함이 없이 오늘날에도 애용된다. 또, 그녀가 만든 향수 ‘샤넬 No.5’도 유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모델의 모자’라는 암호명으로 나치스첩보원으로 활동하였음이 사후 20년이 지난 1995년에 확인되어 충격을 주었다. /네이버
- 50th anniv. of the falling of the Tungus meteor and the 75th anniv. of the birth of L. A. Kulik, meteorist
1883 - 러시아의 광물학자 레오니드 쿨리크(Kulik, Leonid) 출생 쿨리크(쿠릭) [Kulik, Leonid Alekseyevich, 1883.8.19~1942.4.24] Leonid Alekseyevich Kulik (Russian: Леонид Алексеевич Кулик, August 19, 1883, Tartu – April 24, 1942) was a Russian mineralogist who is noted for his research into meteorites. He was educated at the Saint Petersburg Forestry Institute and the Kazan University. He served in the Russian military during the Russo-Japanese War, then spent some time in jail for revolutionary political activities. He then served with the Russian military during World War I. Following the war he became an instructor, teaching mineralogy in Tomsk. In 1920 he was offered a job at the Mineralogical Museum in the city of St. Petersburg. In 1927 he led the first Soviet research expedition to investigate the Tunguska event, the largest impact event in recorded history, which had occurred on June 30, 1908. He made a reconnaissance trip to the region, and interviewed local witnesses. He circled the region where the trees had been felled and became convinced that they were all turned with their roots to the center. However he did not find any meteorite fragments from the impact. During World War II he again fought for his country, this time in a paramilitary militia. He was captured by the German army and died in a prisoner of war camp of typhus. Honors * Asteroid 2794 Kulik is named for him. * The crater Kulik on the Moon is named after him. http://en.wikipedia.org/wiki/Leonid_Kulik
퉁구스카 강 유역폭발사건 [Tunguska event] 1908년 6월 30일 오전 7시 40분경에 지금의 러시아 연방 중앙 시베리아(북위 60° 55′, 동경 101° 57′)의 포트카멘나야퉁구스카 강 유역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공중폭발. 이 폭발로 약 2,000㎢의 소나무숲이 파괴되었다. 폭발 에너지는 10~15Mt급의 TNT(트리니트로톨루엔)가 폭발할 때 발생하는 에너지에 해당했다.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여러 증거들로 미루어볼 때, 폭발은 혜성의 파편이 지구와 충돌하여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혜성은 주로 얼음과 먼지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표면에서 멀리 떨어진 높은 고도의 대기 중에서 분해되어 불덩어리와 충격파를 형성하므로 운석구덩이를 만들지는 않는다. 혜성의 파편은 대략 10만㎞/h의 속도로 지구와 충돌했으며 무게는 10만~100만t 이상에 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람의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이 폭발장소는 1927~30년에 러시아의 과학자인 레오니트 알렉세예비치 쿨리크(1883~1942)가 이끄는 탐사대에 의해 최초로 조사되었다. 그가 발견한 폭발 중심지의 주변에는 방사상으로 약 15~30㎞ 지점의 나무들이 넘어지고 쪼개져 있었고, 모든 것들이 황폐화하고 그을려, 폭발사건이 일어난 지 약 20년이 경과하도록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나무들은 모두 폭발 중심지로부터 멀어지는 쪽을 향해 넘어져 있어 폭발 중심지는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그 중심지에는 늪지가 있을 뿐 운석구덩이는 없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 폭발사건을 지켜본 목격자들에 의하면, 폭발 당시 먼저 불덩어리가 수평선에 나타났으며 곧이어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사람을 넘어뜨리고 건물을 뒤흔드는 강한 지반의 진동과 폭풍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유럽 서부에 있는 지진기록계에는 폭발에 의한 지진파가 기록되었다. 초기에는 약 800㎞ 떨어진 곳에서도 폭발 잔해를 볼 수 있었다. 폭발지점에 있었던 각종 물체들이 모두 기화되고 그 가스는 대기중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에, 폭발 후 처음 얼마 동안은 시베리아와 유럽에 비정상적인 백야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 Romania, 5 Lei (2005, Banknote)
1881 - 루마니아의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 제오르제 에네스쿠(Enescu, George) 출생 에네스쿠 [Enescu, George, 1881.8.19~1955.5.4] (프)Georges Enesco. 루마니아의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 7세 때 빈 음악원에 입학하여 바이올린을 공부했다. 1894년 브람스와 알게 되었는데 그의 초기 교향곡 형식을 나중에 자신의 작품 모델로 삼았다. 1895년 파리로 가서 작곡과 바이올린을 공부했다. 1898년에는 그의 작품 〈루마니아의 시 Poème roumain〉를 파리에서 연주했으며, 1899년 파리 음악원에서 바이올린 부문 1등상을 받았다. 그후 바이올린 명연주가로서 경력을 쌓아갔으며 바흐 작품의 해석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휘자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실내악 작품으로는 3곡의 바이올린 소나타(그중 마지막 곡은 대중적인 루마니아의 양식으로 작곡되었음), 3곡의 피아노 소나타, 2곡의 현악 4중주가 있다. 관현악곡으로는 3곡의 교향곡, 2곡의 루마니아 광시곡, 루마니아 민속 주제에 의한 서곡이 있다. 민속 주제는 그의 오페라 〈오이디푸스 왕 Oedipe〉(파리 오페라단, 1936)에도 사용되고 있다. 말년에 루마니아 민족악파의 지도자가 되었고, 바이올린 교사로서도 큰 존경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 Philippines, 20 Piso (Banknote)
1878 - 필리핀 연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마누엘 케손(Quezon, Manuel) 출생 케손 [Quezon (y Molina), Manuel (Luis), 1878.8.19~1944.8.1] 케손은 필리핀 연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필리핀의 정치가·독립운동가이다. 마닐라의 산토토마스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1899년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이끄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케손은 필리핀이 독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국과 협상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1909년 미국 하원의 필리핀 상주 대표로 임명되자 미국 정부로부터 필리핀 독립을 승인받기 위해 투쟁했다. 그는 1916년 미국 의회에서 존스 법이 통과되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법안은 필리핀의 독립을 약속했으며 독립에 필요한 몇몇 사전 조치를 규정했다. 1916년 마닐라로 돌아와 새로 구성된 필리핀 상원에 진출해 상원의장이 되었다. 그는 또한 1934년 타이딩스-맥더피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법안을 근거로 독립공화국 수립의 전단계인 연방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필리핀의 완전독립 시기도 보장받게 되었다. 1935년 9월 17일 케손은 필리핀 연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재임하는 동안 군대를 재조직하고 정부 내의 부정부패를 없애는 작업을 추진했다. 1941년 재선되었으나 1942년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하자 미국에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자서전 <위대한 투쟁 The Good Fight>(1946)을 썼으며, 필리핀의 완전독립을 보지 못한 채 결핵으로 죽었다. /브리태니커
"미국인들에 의해 운영되는 천국 같은 정부보다는 차라리 지옥 같더라도 필리핀인들의 손으로 직접 꾸려지는 정부가 낫다. "
- 마누엘 케손
- (짙은 수염이 아우인 오빌 라이트입니다.)
라이트 [Wright, Orville, 1871.8.19~1948.1.30] 1871 오빌 라이트 출생 세계 최초로 비행기를 만든 라이트 형제 중의 아우인 오빌 라이트가 1871년 이날 태어났다. 오빌은 1903년 12월17일 인류최초의 동력비행기 '플라이어'호를 타고 세계 최초로 하늘을 나는데 성공하였다. /KBS
1865 - 러시아의 작가 베르디체프스키(Berdichevsky, Micah) 출생 베르디체프스키 [Berdichevsky, Micah Joseph, 1865.8.19~1921.11.18] 필명은 Micah Joseph bin Gorion. 러시아의 작가. 히브리어·독일어·이디시어로 글을 썼다. 다른 어떤 유대 작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열정을 가지고 작품을 썼으며 전통과 동화(同化) 사이에서 찢겨지는 19세기 유대인의 '감정의 분열'을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유대인의 전설과 민담을 끊임없이 재현시킨 작가이다. 전통적인 유대교의 형식적인 일에 대한 집착보다는 신에 대한 봉사에서 경건함과 기쁨을 강조한 신비주의 유대 종파운동인 하시디즘 율법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10대에 결혼했으나, 그가 비밀리에 하스칼라(계몽운동)에 관한 작품들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장인에 의해 발각되자 결혼 생활은 깨어지고 말았다. 하스칼라 운동이란 유대인들이 사회와 융합할 것을 주장하며 비종교적인 현대교육을 장려하는 운동이었다. 그뒤 얼마 동안 볼로진 신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25세에 브레슬라우대학교에 들어갔다. 이 시절에 자신이 받아왔던 교육과 정신적 자유에 대한 갈망 사이의 내적 갈등은 더욱 깊어졌으며, 이러한 갈등은 그뒤 수십 년 동안 단편·수필·소설을 통해 끊임없이 표현되었다. 생의 마지막 10년은 베를린에서 보냈는데 치과의사로 활동하면서 통찰력과 시적 안목으로 유대 전설과 민담에 관한 저서들, 특히 ' 아가다'에 관한 부분을 재창조했으며 이 가운데 일부를 히브리어로 된 〈아가다의 보물 중에서 me-Otzar ha-Aggada〉(1913~14)로 출간했다. 또한 〈유대인 집단거주지역에서부터 me-Ḥutz letaḥum〉(1922~23)·〈벽 사이에서 Ben ha-ḥomot〉 등과 같은 단편집에서는 유대인들이 겪는 삶의 고통을 추적하고 있다. 그의 소설 양식은 다양하며, 주인공은 주로 사회에 동화함으로써 유대 전통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헛된 노력을 하거나, 유대인 거주지역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유대인 등을 다루고 있다. 그의 사후인 1922년에 9권으로 출간된 평론집 가운데는 〈문학분야에서 Be-sede sefer〉·〈도중에 Baderekh〉·〈성찰과 가르침 Maḥshavot we-torot〉 등이 있다. 또한 문학 비평과 이미 죽어버린 유대교 전통에 맞서는 논쟁을 비롯해, 하시디즘을 이상화시킨 글들이 다양하게 실려 있으며, 특히 저명한 작가 아하드 함(1856~1927)의 '영적 시온주의'를 공격한 평론들도 있다. 베르디체프스키는 과거 유대교에는 통일된 정신적 철학이 없었으며(따라서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있음), 초기 유대 역사에서는 고대 히브리인들이 우상을 숭배하기도 했다고 주장하면서 독특한 유대 역사론을 전개했다. 수필집 〈호렙 Horeb〉(성서에서 부르는 시나이 산)에서는 아가다에 관한 글들에서 아름답고 인도적인 생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호소력있게 설명하고 있다. 유명한 유대 문학사가 마이어 왁스만을 비롯한 몇몇 권위자들은 베르디체프스키가 아가다 이야기를 재구성함으로써 문학에 아주 지속적인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브리태니커
1862 - 프랑스의 작가, 정치가 모리스 바레스(Barrès, Maurice) 출생 바레스 [Barrès, Maurice, 1862.8.19~1923.12.5] 프랑스의 작가, 정치가. 개인주의와 극단적인 국가주의를 주장해 같은 세대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바레스는 낭시 고등학교를 마친 뒤 법률을 공부하러 파리로 갔지만 법학 대신 문학을 택해, 그 시대의 정신적 스승이자 역사가인 이폴리트 텐, 에르네스트 르낭을 비판하는 몇 편의 평론을 발표했다. 그후 고독한 자기 분석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의 엄격한 자기 분석은 〈야만인들의 눈앞에서 Sous l'oeil des Barbares〉(1888)·〈자유인 Un Homme libre〉(1889)·〈베레니스의 정원 Le Jardin de Bérénice〉(1891) 등 3권으로 이루어진 〈자아예찬 Li Culte du moi〉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27세에 그는 파란많은 정치생활을 시작했다. 낭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한 그는 독일이 점령한 알자스로렌을 돌려받아 프랑스 영토를 복구하라는 정견 발표로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같은 애국적 입장을 토대로 그는 점점 더 보수적인 국가주의를 채택했다. 이 단계는 〈뿌리뽑힌 사람들 Les Déracinés〉(1897)·〈병사에게 보내는 호소 L'Appel du soldat〉(1900)·〈그들의 모습 Leurs Figures〉(1902)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3부작 〈국가적 역량에 대한 소설 Le Roman de l'énergie nationale〉에 자세히 보고되어 있다. 이들 작품에서 그는 "자아란 조국 땅에 굳건히 뿌리받은 나무"이며, 따라서 그것은 가족과 고향과 조국에 대한 충성 이외에 다른 존재 이유를 가질 수 없다는 개인주의를 설명했다. 교조주의자 샤를 모라스와 함께 〈라 코카르드 La Cocarde〉('휘장')·〈르 드라포 Le Drapeau〉('깃발') 두 신문을 통해 자신들의 견해를 거듭 발표했고, 이러한 주장은 그의 주도로 조직된 프랑스 조국동맹의 강령이 되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일어난 유명한 사건에서 격렬한 보수주의 입장을 취했고(예컨대 드레퓌스 사건 때에는 반드레퓌스파의 선봉이었음), 〈독일의 공헌에 대하여 Au service de l'Allemagne〉(1905)·〈콜레트 보도슈 Colette Baudoche〉(1909)로 이루어진 〈동방의 요새 Les Bastions de l'Est〉는 전쟁을 선전하는 도구가 되었다. 〈영감의 언덕 La Colline inspirée〉(1913)에서는 가톨릭 신앙과 국가주의의 통합을 주창했다. 그러나 바레스의 저서에서는 예술가적 기질이 정치가적 기질을 압도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스페인·이탈리아·그리스·아시아 등지를 여행한 경험은 〈피와 쾌락과 죽음에 대하여 Du sang, de la volupté et de la mort〉(1894)·〈오롱트 강변의 정원 Un Jardin sur l'Oronte〉(1922)에 영감을 주어, 이데올로기에서 해방된 아름다운 문장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1906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정되었다. /브리태니커
1849 - 브라질의 정치가, 저술가 나부코 (데 아라우조)(Nabuco, Joaquim) 출생 나부코 데 아라우조 [Nabuco (de Araújo), Joaquim (Aurelio Barreto), 1849.8.19~1910.1.17] 노예제 폐지운동을 이끌었으며 많은 저작을 남겼다. 브라질 북동부의 유서 깊은 귀족가문 출신으로 하원(1878~)과 스스로 설립한 반노예제협회에서 노예해방을 위해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으며, 결국 1888년 5월 13일 노예해방이 선포되었다. 뒤이은 경제파탄으로 페드루 2세가 퇴위하고(1889) 공화국이 출범했으나, 군주제를 신봉했던 까닭에 공직에서 물러났다가 1900년에야 정계에 복귀했다. 1905년부터 미국 대사를 지내면서 범미주의(汎美主義)의 옹호자로 이름을 떨쳤다. 저서로는 포르투갈어로 쓴 〈카몽스와 루시아다스의 노래 Camões e Os Lusíadas〉(1872)·〈노예폐지론 O Abolicionismo〉(1883)과 프랑스어로 쓴 〈단상과 회상 Pensées détachées et souvenirs〉(1906)이 널리 알려져 있다. /브리태니커
- Discovery of Gold in California, Centenary, 1948.1.24
1848 - 뉴욕 해럴드 지가 캘리포니아의 금광 발견을 미국 동부에 보도하다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 캘리포니아는 19세기 초만 해도 ‘문명세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오지였다. 백인보다는 인디언의 인구수가 10배가 넘었으며 대부분의 땅들은 멕시코계 농장 주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무역이 주종을 이루던 당시 해안에서 벗어난 내륙 지대 땅들은 관리하기도 힘든 쓸모 없는 곳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곧 바뀌게 된다. 1848년 1월24일, 새크라멘토에서 동쪽을 40마일 떨어진 시에라네바다 구릉지대 플레이서빌(Placerville) 인근에 있는 서터스 밀(Sutter’s Mill)의 목수인 제임스 마샬이 비상하게 큰 금덩어리를 발견했다. 계속 찾아보니 광석이 더 발견되었고, 곧 “저기 언덕에 묻혀있는 돌 속에 금이 있다”(There’s gold in them those hills)라는 말이 캘리포니아 전역에 메아리쳤다. http://www.koreatimes.com/article/20983
- Niepce and Daguerre
다게르가 현상에서 정착까지의 프로세스를 완성하여 아름다운 영상을 영구적으로 고정하는데 성공한 것은 1837년이었다. 다게르는 자신의 스튜디오의 일각을 촬영했다. 이 사진은 ‘예술가의 스튜디오’라고 제목이 붙어지고 다게레오 타입의 싸인과 1837년의 년호가 기입되어 있으며 현재 피리의 프랑스사진협회에 소장되어 있다. 법안이 상하양원을 통과한 1839년 8월19일 아라고박사는 과학학사원에서의 과학아카데미와 미술아카데미 합동집회 석상에서 다게르타입의 기술적인 요소를 상세히 설명, 발표하였다. 이 과학학사원에서의 아라고박사의 공식발표는 바로 사진술의 발명선언으로 인정되고 따라서 8월19일을 사진술 발명의 날로 기념하여 전해지고 있다. 1989_05_7582
사진술의 발명(요약) 1. 1839년 1월 7일 프랑스의 루이스 다게르가 다게레오타이프( Daguerreotype, 은판사진)를 발명한 사실을 세상에 공표. 2. 다게레오 사진술이 발명되고 3주도 채 지나지 않은 1839년 1월 25일, 영국의 아마추어 과학자인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가 자신도 카메라 옵스큐라의 상을 고정시키는 방법을 발명했다고 영국의 왕실 학회에 알렸다. 탈보트가 서둘러 준비한 자료를 발표했을 때, 그는 상당히 실망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사진을 발명한 최초의 인물이 되고자 했던 그의 희망이 다게레오에 의해 무참히 깨져 버렸기 때문이다. 3.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종신회원 프랑스와 아라고박사가 과학학사원에서의 과학아카데미와 미술아카데미 합동집회 석상에서 다게레오타입의 기술적인 요소를 상세히 설명, 발표. 이 과학학사원에서의 아라고박사의 공식발표는 바로 사진술의 발명선언으로 인정되고 따라서 8월19일을 '사진술 발명의 날'로 기념하여 전해지고 있다.
[사진술의 발명] 1939.01.07 - 프랑스의 다게르, 다게레오타이프 발명 사실을 발표 1839.01.25 - 영국의 탈보트, 사진술의 발명을 왕실학회에 보고 1839.08.19 - 프랑스 정부, 다게레오타이프 발명을 공식 발표
1819 - 증기기관을 발명한 영국의 기계 기술자 제임스 와트(Watt, James) 사망 와트 [Watt, James, 1736.1.19~1819.8.19(25)] 영국의 기계기술자.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을 아버지 일터에서 보내는 동안 수세공(手細工)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머 스쿨을 마친 뒤, 1755년 런던으로 가 수학기계공 견습이 되었고, 1757년 글래스고대학 수학기계공으로 임명되었다. 1763년 최초 발명인 투시화법기(透視畵法器)를 만들어 낼 때까지 J.블랙, J.로벅 등의 과학자들과 교류하였다. 1764년 와트는 대학으로부터 뉴커먼 배수기관(排水機關) 모형의 수리를 의뢰받았다. 이 기관의 열효율이 좋지 못한 점을 발견하고 1765년 콘덴서를 분리하는 착상을 하였다. 이 착상을 로벅이 구체화하려고 하였으나 피스톤의 패킹 문제에 부딪쳐 개발은 진전되지 못했다. 동료인 크레이그가 죽자, 1767년~1774년까지 스코틀랜드 운하측량사(運河測量師)로서 일하였다. 1768년 버밍엄의 업자 M.볼턴을 알게 되었고, 1769년 로벅의 원조를 받아 증기기관에 관한 최초의 특허를 받았다. 1773년 로벅이 파산하자 1774년 볼턴이 와트기관의 특허 소유권을 획득하였다. 1775년 볼턴은 와트의 특허권을 25년간 연장함으로써 버밍엄에 공장을 경영, 볼턴과 와트의 유명한 공동사업 ‘볼턴-와트 상회’가 문을 열게 되었다. 그들 최초기관은 1767년 운전을 개시하였으나, 실용화되기까지는 다시 5년이 걸려 이 기업은 1780년대까지는 이익을 보지 못하였다. 1775년~1780년대까지 와트는 그의 기관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였다. 팽창작동(膨脹作動) ·복동기관(複動機關) ·유성기어장치의 회전기관(1782 특허) ·평행운동(1784) ·보일러의 매연방지장치(1785) ·원심조속기(遠心調速器)(1788) ·압력계(1790) 등의 발명과 마력(馬力)의 단위에 의한 동력의 측정 등은 주요한 업적이다. 또 버밍엄의 진보적 과학자 등의 모임인 ‘달의 모임’의 핵심 멤버가 되었고, J.프리스틀리와 만나면서부터 화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794년 새로운 기업 ‘볼튼-와트 및 가족상회’를 설립하여 점차 자녀들에게 사업을 이양해 가는 한편, 1795년 소호의 주조공장을 개설, 기관의 대량생산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800년 최초 특허권의 기한이 만료됨으로써 볼턴과 공동사업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여생을 조각기계의 발명에 바치다가 히스필드에서 죽었다. /naver
1780 - 프랑스의 시인, 샹송작가 베랑제(Béranger, Pierre-Jean de) 출생 베랑제 [Béranger, Pierre-Jean de, 1780.8.19~1857.7.16] 프랑스의 시인, 대중가요 작가. 프랑스 사회가 전반적으로 급속하고 때로는 과격한 변화를 겪고 있던 시기에 자유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견해로 명성을 얻었다.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다가 그 회사가 망하자 파리대학교 서기로 일자리를 얻었다(1809). 지붕 밑 다락방에서 잠을 자고 남는 시간에 하찮은 잡문을 써서 간신히 살아갔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복고된 부르봉 왕조가 세운 정부를 격렬히 비난하는 노래와 시를 썼다. 대중의 감정을 대변하는 이 작품들로 그는 곧 명성을 얻었지만, 그 대신 일자리에서 쫓겨났고(1821) 3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그는 감옥생활이 다락방에서 사는 것보다 낫다고 했음).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그의 노래는 방금 스쳐간 나폴레옹 시대의 메아리였고, 군주제도와 반동적 성직자들을 비웃는 그의 풍자시는 명쾌하고 단순하며 매력적인 문체로 되어 있었다. 노래와 풍자시를 통하여 자유주의적인 파리 문단뿐 아니라 평범한 시골 사람들한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생전에 이미 영향력있고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작품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을 비롯한 모든 공식 명예를 거부했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난 뒤 새로 구성된 민주주의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성격이 상냥하고 너그럽기로 유명했다. 파리 문단에 있는 수많은 친구들을 힘닿는 대로 도와주었고, 그들의 도움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가장 널리 알려진 시는 〈이브토의 왕 Le Roi d'Yvetot〉(1813경)·〈가난한 사람들의 신 Le Dieu des pauvres gens〉·〈우둔한 샤를의 대관식 Le Sacre de Charles le Simple〉·〈할머니 La Grand-Mère〉·〈늙은 중사 Le Vieux Sergent〉 등이다. /브리태니커
- France, 500 Francs (1985, Banknote)
1662 - 프랑스의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Pascal, Blaise) 사망 파스칼 [Pascal, Blaise, 1623.6.19~1662.8.19] 파스칼은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이자 <명상록 Pensées>으로 유명한 그리스도교 사상가이다. 일찍부터 수학에 천재적 재능을 나타내어 17세에 <원추곡선론 Essai pour les coniques>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22세에는 최초의 계산기를 발명했다. 또한 물리학에도 관심을 가져, 1648년에는 수은 기압계를 만들어서 대기압에 관한 토리첼리의 가설을 증명했고, 6년 뒤에는 피에르 드 페르마와 함께 근대 확률이론의 기초를 확립하는 등 과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일찍이 얀센주의적 신앙을 받아들였던 그는 1654년 강력한 신앙적 체험을 한 뒤, 포르루아얄 수도원에 들어가 엄격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1656~57년에 쓰여진 <시골 친구에게 쓴 편지 Les Provinciales>는 예수회의 공격에 맞서 앙투안 아르노를 변호한 글로, 그리스도교의 진정성을 회복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교 호교론을 집필하기 위한 단상들을 써 모으기 시작했고, 이는 사후에 <명상록>으로 정리·출간되었다. 인간의 실존적 비참과 신앙의 신비를 갈파한 이 작품은 그리스도교 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동시에, 장 자크 루소, 앙리 베르그송 등 후세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브리태니커
- 'Isaac blessing Jacob'
에크호우트 [Eeckhout, Gerbrandt van den, 1621.8.19~1674.9.29] 1621. 8. 19 암스테르담~1674. 9. 29 암스테르담. 네덜란드의 성서화가·풍속화가·초상화가. 렘브란트의 문하생(1635~40)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전반적인 화풍이 그의 스승과 너무나 유사해서 그가 그린 많은 그림들이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알려져왔다. 인간성이나 감정의 깊이를 표현하는 데서는 렘브란트에 미치지 못했지만 문하생 가운데서 더욱 폭넓고 대담해진 렘브란트의 원숙한 회화 기법을 가장 성공적으로 모방한 편이었다. 한편 전형적인 렘브란트풍의 그림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고도의 완벽성을 지닌 풍속화도 많이 그렸는데, 경비실이라든가 주사위 놀이 장면들을 그린 작품들이 그것이다. 한때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여겨졌던 초기의 대표작으로는 베를린의 국립 프로이센 문화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야이루스의 딸을 일으켜 세우는 예수 Christ Raising the Daughter of Jairus〉가 있다. 테르보르흐의 수법으로 그린 풍속화의 대표작으로는 코펜하겐의 국립미술관에 있는 〈음악수업 The Music Lesson〉(1655)이 있다. 런던 국립미술관에는 1657년에 완성된 뛰어난 집단 초상화 〈암스테르담 주류상 및 양조업자 길드의 임원 4명 Four Officers of Amsterdam Coopes' and Wine-Rackers' Guild〉이 있다. /브리태니커
- Andrea Palladio - 'Villa Rotunda'
1580 -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Palladio, Andrea) 사망 팔라디오 [Palladio, Andrea, 1508.11.30~1580.8.19] 이탈리아의 건축가. 파도바 출생. 처음에는 석공 ·조각가로 활약하였으나 동향 시인 토리체노의 비호를 받아 로마로 유학하고,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와 로마의 유적을 연구한 후, 고향에 돌아와 수많은 궁전과 저택을 설계하였다. 이 기간의 대표작으로 빌라 로톤다(1550∼1553)가 있다. 1546년 이래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활약하였고, 산 지오르지오 마조레(1566 착공:사후에 스카모치에 의해 완성)와 이루 레덴토레 등 그 도시의 뛰어난 건축물의 조영에 공헌하였다. 만년의 작품으로는 비첸차의 테아트로 올림피코(사후 스카모치에 의해 완성)가 중요 작품이다. 《로마의 유적 Antichita di Roma》(1554) 《건축 사서(四書) I Quattro Libri dell’ Architettura》(1570) 등의 저서도 있으며, 18세기 영국의 신고전주의 건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네이버
14 -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사망 아우구스투스 [Augustus, BC63.9.23~AD14.8.19] 14년 8월 19일 나폴리 근처 놀라에서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독재정치로 공화제가 무너진 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황제가 되었다. 그가 추진한 공화정의 회복은 겉모습에 불과했고 사실상 독재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밖으로는 끝없는 정복전쟁을 벌여 제국을 팽창시켰으며, 안으로는 군사·치안·경제·행정 전분야에 걸친 개혁을 실시해 로마에 지속적인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로마에 의한 지배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문화 유산이 후세에 전달되었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졌다. 걸작 건축물도 수없이 세워져 일부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데, 로마에 있는 마르켈루스 극장과 거대한 아우구스투스 광장 유적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개인적으로 드루수스 전기와 시·경구 등 많은 글을 썼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전해지지는 않는다. 그의 뒤를 이어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제2대 황제가 되었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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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