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화상 / 김원용
대여섯 살 때 평북 보현사의 8각 9층탑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보면 어찌된 셈인지 내가 신은 고무신은 코가 뽀족한 여자 신이다. 영변 군수였던 아버지는 성미가 깔끔해서 자기 자신은 말쑥하게 차리고 있는데 꼴불견의 아들을 앞세운 무신경은 어머니 쪽의 책임임이 분명하다. 어머니는 강계에서 소녀 시절 단신 서울로 내려와 당시의 관립 한성고녀(현 경기여고)를 졸업해서 경기여고 제6회(1916) 동창의 거의 유일한 생존자처럼 된, 당시로서는 인텔리였는데 옷차림에 대한 무신경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그것은 하여튼 우리 처는 지금도 그 사진 얘기하며 “그런 쌍놈이 충청도 공주 색시 얻고 개화 많이 됐지” 하며 놀린다. 사실 우리 처 말대로 나의 고향은 평안북도 태천泰川, 출생지는 의주의 무슨 용 자 붙은 동네이고, 그래서 이름에 용龍 자가 따라다닌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은 서울로 이사왔고 나는 경기중학을 거쳐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했다. 때문에 서울의 문화인 말솜씨(?)를 배우며 자란 것과 다름없는데 늙어가면서 40년 전 사투리가 다시 머리를 들어 한두 마디만 건네도 “평안도지요” 하고 물어온다. 늙으면 혀가 굳어져서 그러는 것일까. 힘을 들이는 발음법부터가 다른 것일까.
나의 중학교 때와 대학 시절에 관해서는 『원남동의 추억』이라는 글 속에서 대강 썼기 때문에 다시 되풀이할 흥미도 필요도 없지만, 대학 예과에서는 문학을 지망하던 나는 학부에 들어가면서 사학으로 길을 바꾸었다. 나는 왜 그런지 만주·몽고 지방의 고대문화에 흥미를 느꼈고, 그것을 통한 우리 고대 문화의 기원 같은 것을 공부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대학 시절의 우리 집은 비교적 넉넉한 편이어서 나는 아무 고생 없이 편하게 자라났다. 그러나 대학 2학년 때 학병으로 일본 히로시마에 입영하면서 생명의 고통과 인간성의 추악을 뼈저리게 느꼈다. 군대로 들어가는 신체검사 때는 코뼈가 도중에서 약간 높아진 것을 무슨 비후성 비염인 줄 알았는지 또는 그때까지의 상황이 3을종 정도여서 한 군데만 더 나쁘면 병종으로 해주려고 했는지 유순하게 생긴 의사는 코가 막히는가 하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아니라고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오고 말았다. 3을종이라는 판정이 나오고 말았을 때 아차 하였고, 그것이 두고두고 후회되었지만 문자 그대로 후회막급이요, 히로시마의 보급부대 그것도 말을 끄는 만마대(輓馬隊)로 배당되었다. 이름이 군인이지 마부보다 더 심한 고역이고 학생 시절에는 무서워서 근처에도 못 가던 군마의 말굽 바닥의 똥을 쑤셔내고 다리를 안마하고 온몸을 손질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배는 왜 그리 고픈지 같은 학병끼리 모이면 옛날 떡 먹던 회고담이고, 자리에 누우면 집에 돌아가는 꿈뿐이었다.
피로하고 허기지면 사람은 동물로서의 본성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교육이나 종교는 어느 한도까지 사람의 본능을 억제할 수는 있지만 생명의 위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력해지고 사람은 개, 돼지나 조금도 다름없이 된다. 나의 이 인간 불신 철학은 학생생활에서 싹튼 것이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더 확고해지는 고집이 되었다. 그리고 그 추악한 인간상과 고통스러운 생활은 반동적으로 불교의 인생허무(人生虛無)와 제행무상(諸行無常)을 공감하게 만들었고, 학병생활 이후로 나의 종교는 불교라고 공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학병생활은 고통에 대한 인내심과 임무를 완수하는 책임감을 길러준 것이 사실이며, 이때의 고생과 경험이 그 뒤 나의 생활의 모든 면에 영향을 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일본 기타큐슈(北九州) 산 속에서 굴을 파고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리고 돌아와서 그 해 12월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였다. 내가 대학 예과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짝사랑하던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그녀의 답장은 편지를 보내지 말라는 거절의 편지였다. 그러나 나는 숙전(淑專)에 들어간 그녀에게 학교로 계속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는 모두 훈육주임이 검열 압수해서 호출되어 훈시를 받았고, 교우도 아니면서 명동성당에 가서 꿇어앉아 울었다. 그러나 궁금했던 아내는 아버지 몰래 그 편지들을 모두 읽어 보았고 나의 ‘일기초록’에 감동되어 마음이 흔들렸다. 이것은 결혼 뒤의 고백이다. 서로 말 한 마디, 편지 한 장 바꾸어보지 못했으나 아내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한 지 사흘 되던 날 함께 경복궁 뒤 눈길을 걸으면서 너무 행복한 나는 함께 자살하자고 말하였다. 이것은 이미 『아내』라는 수필에 쓴 얘기다. 그것이 지금부터 33년 전, 나도 그런 정열 넘친 젊은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놈의 정열이 아직까지 남아서 집안의 화근이라고 아내는 이때마다 공격해 온다. 그러나 나 정도의 정열(?)을 안 가진 남자 어디 있을까. 내 연구실 주변 ‘노교수님’들의 정열을 알면 기절할 것이다.
그것은 여담이고 1947년 2월에 나는 자원해서 국립박물관원이 되었으며, 그것으로 나의 걸어갈 길은 결정되었다. 1961년 신설된 서울대학교 고고학과로 옮길 때까지의 14년간의 박물관 생활은 물질면에서는 몹시 어려웠으나 학도로서의 생활은 행복하였다. 그때의 불타던 학문에의 정열은 아직도 다 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60년대의 자기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정열이나 체력면에서 꺼져가는 등잔불과 다름없을 것이다.
처음 박물관에 들어갔던 25세 때의 꿈은 ‘우리나라 선사(先史)문화 연구에 일생’이었으나 연구 분야는 미술사로 쪼개지고, 선사도 시대의 갈피를 못잡아 삼국으로 내려갔다 올라갔다 했다. 분야가 분야라서 사람이 적고 자기는 무능해도 유적, 유물 자체가 선전하고 나서서 모르는 사람 중에는 석학(?)인 줄 오해하는 이도 있을지도 모르나 아끼는 제자 앉혀놓고 김원용이처럼 되지 말라고 야단쳤다는 어떤 교수가 사실은 나를 가장 정확하게 보았다고 하겠다. 죽기 전에 『신라토기의 연구』라도 완성하고 정말 완벽한 『한국고고학개설』 한 권 썼으면 하는 것이 일이지만, 평생 마신 술 때문인지 근래에는 급격히 몸이 약해지고 한 두어 시간 계속해서 원고를 쓰면 머리의 혈관이 터질 것 같은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몇몇 정말 유능한 젊은 고고학자나 미술사학자가 나타나게 되어 그들 논문을 읽을 때마다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있지만, 그들이 과거의 내 논문들 잘못을 하나하나 들추고 두들기고 나서기 전에 어서 죽어버리는 것이 사실은 더 행복할지 모르고, 불길한 얘기 같지만 실지로 얼마 안 갈 것 같은 예감도 들어, 연구실 벽에 붙인 유서 봉투가 새삼스러이 보여지는 때가 있는 것이다.
우리 처에 의하면 나 같은 극성도 드물 것이라는 얘기다. 글쎄 나쁘게 말하면 극성일지 모르나, 나는 남과의 약속을 어기면 잠이 안 오고 그래서 남 때문에 사느냐고 마누라에게 야단맞지만 타고난 성미이니 어찌할 수 없다. 그래서 반대로 남이 약속 안 지키면 사람같지 않고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다. 남에게 낼 돈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내줘야 직성이 풀리고, 어쩌다 외상술을 마시면 외상 갚을 때까지 매일 술 마시고 있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남이 ‘안 갚나’ 걱정할까 봐 돈을 꾸지 못하고 안 돌려줄까 걱정할까 봐 책도 감히 빌리지 못하는데, 책에다 ‘가난한 서생 김원용이 고생해서 구한 책이니 읽는 자는 때를 묻히지 마시고, 빌리는 자는 닷새를 넘기지 마시오 貧書生元龍 苦心購得之書 用之須淸靜 借覽勿過五日’라고 우정 도장까지 찍어 두어도 남의 책을 빌려다 몇 달씩 잊어버리고 있는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기는 그런 사람들은 마음이 태평해서 더 오래 사는 법이다.
사람들은 나보고 성미 급하고 만사에 덤빈다고 한다.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런 성미니까 없는 시간 쪼개서 명령 내리고 부탁 오는대로 이런 글도 쓰고 자화상까지 붙여서 수필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나처럼 바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일이 많으니까 바쁘고 성미 급하게 해치우니까 또 일거리를 떠맡겨오고 그래서 점점 더 바빠지는 모양이다.
관광안내 책자의 내용 수정부터 일본 학자들의 문헌 복사 의뢰까지 무슨 잡무가 그리 많은지, 귀찮은 일 부탁받을 때마다 ‘에끼, 죽어버리면 부탁 못해 오겠지’ 하는 생각이 가슴 속에 치민다.
그러나 정말 죽으라면 벌벌 떨면서 삼불암三(佛庵)이니 해탈이니도 온데간데없고 저녁마다 즐기는 생선회 한 접시, 술 한 잔을 끝내 잊지 못할 것이 인간 김원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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