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30일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제1독서 : 필리 1,1-11
복 음 : 루카 14,1-6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2 마침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셨다.
4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
5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6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에페소서에 이어 오늘부터 제1독서 필리비서의 시작입니다.
예전엔 이처럼 많은 이야기들이 서간, 즉 편지로 전달되었는데
오늘날은 이런 서간 문화도 사라지는 듯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친필 편지를 받아 본지도 오래되었고 친필 편지를 쓴지도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편지 서두부터 독특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 바오로와 티모데오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필리비의 모든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얼마나 깊이 일치된 사도의 삶인지 깨닫습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서두의 인사로 이 강론을 시작합니다.
말 그대로 감사와 기쁨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감옥에 갇혀서 사형 선고를 받을지도 모르고
또 여러 교회에 대한 갖가지 근심으로 가득 찬 상황에서 쓴 서간에서
줄곧 강조되는 주제는 ‘기쁨’입니다. 물론 이런 기쁨의 원천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일치의 삶이 감사와 기쁨의 원천이 되었음을 봅니다.
“나는 여러분을 기억할 때마다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서문의 인사에 이어지는 필리비 신자들을 위한 기도가 참 아름답습니다.
사도의 필리비 신자들에 대한 사랑이 구구절절 녹아 있습니다.
얼마나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된 바오로의 삶인지 참 감동적입니다.
“여러분이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애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도 완전과 성숙을 향해 끊임없이 성장해야 하며,
우리의 지식도 지혜와 이해 안에서 끊임없이 성장해야 함을 봅니다.
우리의 사랑은 이런 지식과 이해에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서 성장한 결과중 하나가 참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의 지혜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결코 주어진 어떤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성장해야 하는 유동적 실재입니다. 사랑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사랑과 더불어 분별력의 지혜 은총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그러니 사랑은 지혜입니다.
지식과 온갖 이해로 풍부해진 지혜로운 사랑은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기도가 그리스도 예수님과 사랑의 일치를 깊게 하며
이와 더불어 분별력의 지혜도 선사됩니다.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삶’,
얼마나 아름다운 삶인지요! 문득 수도원 정문 바위판에 새겨진 분도회 모토가 생각납니다.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성규57,9)
바로 사도 바오로의 삶이 그 모범입니다.
이에 앞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 또한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삶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수종을 앓는 이를 안식일에 고쳤다 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들과는 완전히 다른 예수님의 접근 자세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이미 질문 속에 답이 들어 있습니다.
안식일이 분별의 잣대가 아니라 사랑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법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답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이들이 할 말을 잊고 잠자코 있자 예수님은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생명을 살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모든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요, 생명이요,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타인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하는 자는 잘못될 수가 없습니다. 진실한 사랑의 행위는 무죄합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 기도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기도하신다’는
며칠 전 교황님의 말씀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기도와 사랑을 통해 복음의 예수님을 닮을수록 올바른 분별이요,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삶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답을 제1독서 필리비서의 바오로가 줍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사랑의 실천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과 사랑의 일치를 깊이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궁극으로 추구해야 할 바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를 통한 사랑의 성장이요 성숙이요,
하여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당신과 사랑의 일치를 깊게 하시며 참 좋은 분별력의 지혜도 선사하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인터넷 SNS(Social Network Service)에 자신의 일상을 올려놓는 사람이 많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그리고 하루의 일상을 사진과 짧은 글로 올립니다.
또 여행에 대한 기록도 남겨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이를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지금 힘든가 보구나. 어렵겠는데?’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잘 사는구나.’, ‘돈도 많아. 맛있는 것만 먹고 여행만 다니네.’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의 좋은 모습만 다른 이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합니다.
어렵고 힘든 모습보다는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이런 오해를 받습니다.
‘이런 것이나 올리는 철부지구나. 그렇게 사람들에게 자기 잘 산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을까?’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더 힘들어서 그 반대의 모습을 올릴 때가 더 많다고 합니다.
한 부분만을 보고서 쉽게 평가하는 우리의 섣부름을 지워야 합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더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지방 지도자로부터 안식일에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이 자리에서 안식일 문제로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하게 되지요.
수종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라고 물으십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의료 행위를 하나의 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보낼 수 없어서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안식일 말고도, 사람을 고쳐 줄 수 있는 다른 날도 많은데
굳이 안식일에 고쳐줘야 하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리는 영적 제물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임을 말입니다.
이 사랑의 실천이 바로 하느님께 자기를 바치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특히 바라봐야 하는 것은 지금 고통 속에 있는 수종을 앓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는 과연 안식일이라고 해서 병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1분 1초라도 빨리 병에서 해방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도 바라보지 못하고 있으니, 하느님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만의 생각에 갇혀 있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기준을 늘 간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주님 뜻에 맞게 온전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낙엽이 하늘에서 내려와 발길에 밟힙니다.
10월이 저물어 가고, 가을도 저물어 갑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낙엽”이란 시가 떠오릅니다.
낙엽은 나에게
살아 있는 고마움을 새롭게 해주고,
주어진 시간들을
얼마나 알뜰하게 써야 할지 깨우쳐준다.
낙엽은 나에게
날마다 죽음을 예비하며 살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이승의 큰 가지 끝에서
내가 한 장 낙엽으로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일까 헤아려 보게 한다.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내 사랑의 나무에서
날마다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좀 더 의식하고 살아야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 지도자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하시게 되었는데,
수종을 앓는 사람이 그분 앞에 있었고,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루카 14,1).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꼬투리를 잡아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동원된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사실, 이전에도 ‘손 오그라든 환자를 치유하신 장면’(루카 6,6-11)과
‘허리 굽은 여인을 치유하신 장면’(루카 13,10-17)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유하시는 것을 올가미에 걸어 체포하려고 결정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오히려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으로 몰아넣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루카 14,3)
그런데, “그들은 잠자코 있었습니다.”(루카 14,4). 왜냐하면, 이 치유를 인정하면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에 대한 전통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요,
인정하지 않으면 이웃의 불행에도 자비와 선행을 베풀지 않는
비정한 인간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 말씀도 하시지 않고,
“수종을 앓는 이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셨습니다.”(루카 14,4),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루카 14,5)
여전히,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습니다.”(루카 14,5).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오히려 자신들이 말려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실, 율법에 따라 일을 맡은 관리인들은 안식일에도 정해진 희생제물을 잡고
모든 의식을 행할 수 있도록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고,
또 생명의 위협을 받을 경우에는 안식일 법규를 지키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일과
선행을 하는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까지도 이 원칙을 확대시키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음은 죽이는 것과 같고,
할 수 있는데 선행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과 같음을 깨우쳐주십니다.
이 말씀은 ‘주일’이라 해서, 마냥 게으르기 쉬운 우리에게도 경각심을 심어줍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시에서처럼, 이 가을,
‘낙엽은 나에게 살아 있는 고마움을 새롭게 해주고,
주어진 시간들을 얼마나 알뜰하게 써야 할지를 깨우쳐줍니다.
날마다 죽음을 예비하며 살라고 넌지시 일러줍니다.
~사랑의 나무에서 날마다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자신의 시간들을 좀 더 의식하고 살아야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루카 14,3)
주님!
당신은 결코 사랑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안식일 율법 앞에서도, 올가미를 씌우려 지켜보고 있는 이들 앞에서도,
당신은 결코 사랑을 멈추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합당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합당한 까닭입니다.
사랑스러워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사랑스러운 까닭입니다.
살아계시기에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듯,
사랑하시기에 사랑이시며 사랑을 베푸십니다. 아멘.
모든 법의 기초는 사랑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법은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선포한
이성의 명령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법은 존중되어야 하고 지켜야 하며 지켜져야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은 어디까지나 법입니다.
따라서 적용에 있어서 형평성을 지켜야 하지만 예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것이라면 그 법은 마땅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실정법보다는 하느님의 법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창세기 2장3절에 보면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 날에 쉬셨기 때문이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저 쉬는 날이 아니라 감사와 찬미의 날입니다.
일주일을 잘 지내기 위해서 하루 쉬는 날이 아니라
일주일을 잘 보내도록 안배하신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날입니다.
탈출기20장 10절 11절에 보면 십계명중 3번째 계명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다음 하느님의 백성으로써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탈출19,8)한 후 시나이산에서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에는 노예뿐 아니라 가축까지도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노예 살이 했던 옛 상황을 기억하고 해방의 기쁨을 나누기 위한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안식일은 찬미와 감사, 그리고 해방의 기쁨을 함께하는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 속에 안식일 안에 담긴 알맹이는 사라지고 법규의 틀만 지키기에 급급해 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법을 잘 지키기 위한
세부 규정을 만들고 해석한다는 빌미로 이제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자신들의 뜻을 합리화시키는 방법으로 안식일 법이 변질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국가보안법’이니 ‘긴급조치 법,‘ ’유신 법’ 등
정권유지를 위한 방법으로 법의 남용을 많이 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사형제도라든지 낙태법을 빌미로 살인죄를 용납하고 있고,
‘유전무죄’,‘무전유죄’의 악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모든 것 위에 있고, 안식일과 같은 거룩한 제도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 취지를 살리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기득권을 누리려고 외면해 온 것뿐입니다.
이렇게 보면 “수종 병자”는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구실을 내세워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병에 걸려있었습니다.
병중에 가장 무서운 병은 ‘자폐증’이라고 합니다.
자기 안에 갇혀있는 병, 마음이 오그라든 병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것을 알면서도 바꾸려 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못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못된 것이 참 많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잘못을 범할 때 정말 모르고 범합니까?
아닌 것을 알면서도 나의 달콤함을 채우기 위해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합리화시키려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법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인간을 앞설 수 없으며 또한 그 근본취지를 잘 살려야 하겠습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우리의 태도 또한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날,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의무적으로 주일미사에 오신다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수가 없습니다.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주일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법은 영원합니다. 법을 집행할 때 사랑이 빠지면 악법이 되고 맙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루카 14, 5)
한상우 바오로 신부
생명을 위한 안식일이다.
생명이 있기에 안식일이 있다.
생명을 살리는 안식일이다.
안식일은 생명을 향한다.
우리 앞에 있는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그 어떤 것도 생명의 관계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연민의 마음은
곧 안식일의
마음이다.
연민의 마음은
함께 살아가는 생명의 마음이다.
안식일은
생명을 위한 날이기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제도와 규정이 아니라
생명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다.
안식일은
그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다.
안식일과 생명이
뒤바뀌어서는 안 된다.
생명을 되찾는 안식일이다.
생명이 안식일이다.
서로를 향한 측은지심이
안식일의 본래 마음이다.
생명은 마음이고
원칙은 본질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생명이 있기에
생명을 돌볼
안식일이 있는 것이다.
바리사이, 율법학자의 꼰대 근성에서 벗어나려면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초대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 아닌지 살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그들은 자유롭지 못한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쳐 돌려보내신 다음,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분이 나이 들면서 배운 것 중의 하나는
대답을 즉시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대답을 즉시즉시 했더니 사람들이 그 대답으로 옭아매어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에 대해서는 질문을 해도 일단 침묵을 지킵니다.
물론 말실수를 줄이기 위해 신중한 것은 좋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 사람이 말을 막 할 때가 좋습니다.
어떤 것들에 일부러 침묵하는 모습을 보면
‘아 저 사람은 나에게 솔직해지고 싶지 않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신중해서가 아니라 솔직하지 못해서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심으로는 무엇이 중요한지 알면서도
자신들이 외적인 것에만 치중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이렇게 솔직하지 못하다면 그 사람은 ‘꼰대’라는 말을 듣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꼰대들은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이었습니다.
‘이날치’는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입니다.
본명은 이경숙이지만, 날쌔게 줄을 잘 탄다는 의미에서 날치라는 예명이 붙었습니다.
상민과 양반, 모두에게 두루 사랑받은 서편제의 대표 소리꾼으로,
흥선대원군의 부름을 받아 어전에서 소리판을 열기도 했습니다.
얼굴도 목소리도 전해지진 않지만,
그가 새타령을 부르면 실제 새가 날아들었다는 말까지 전해집니다.
조선 시대 이날치의 재기 넘치는 멋과 흥을 되살린 ‘이날치 밴드’가 지금 매우 유명해졌습니다.
‘조선의 힙합’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면서 세계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이날치 밴드가 등장하는 한국관광공사의 홍보영상은
조회 수가 2억 7천만을 넘어서 해외에서도 인기몰이 중입니다.
반복되는 가사와 중독성 있는 멜로디, 홍대 앞 클럽에 어울릴 법한 분위기지만,
가사를 들어보면 엉뚱하게도 판소리 ‘수궁가’의 한 장면입니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범 내려온다.”
별주부가 호랑이를 만난 순간을 묘사한 이 노래,
한국관광공사 홍보영상에 등장하며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고,
유튜브 조회 수만 2천9백만, 이날치가 등장하는 다른 영상들까지 합하면 2억7천만을 넘었습니다.
베이스 2명과 드럼 1명, 그리고 정통 국악을 전공한 소리꾼 4명의 조합으로,
2018년 밴드 결성 이후 국악도, 힙합도, 디스코도 아닌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국악계의 불편한 시선도 없지 않지 않습니다.
그 불편한 시선에도 음악은 무엇보다 일상에 녹아들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해 왔습니다. 이에 대해 안이호 보컬은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가 만들어준 가치라는 것이 주는 압박이랄까요.
그 무게감은 사실 일상에 스며들기는 힘들잖아요. 그 가치에 스스로 짓눌려있는 것 같아요.”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추구한다는 오랜 가르침을 새롭고 독특한 음악으로 몸소 구현하고 있습니다.
[출처: ‘2억7천만 뷰 기록한 ‘이날치 열풍’, 세계 매료시킨 ‘조선의 힙합’’, 정연욱 기자, KBS 뉴스, 2020.10.28]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이전의 틀을 고수하려는 사람과 이전의 것을 익혀서 현 대중들에게 맞추려는 사람들입니다.
판소리는 여전히 현대 음악과는 거리가 먼 일부만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이날치’란 젊은 그룹이 판소리를 힙합과 결합해 인기몰이 하니까
일부 판소리꾼들은 그들에 대해 거북한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판소리는 조선 시대의 힙합과 같은 대중음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시대에 맞춰 이 대중음악의 틀도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대중이 알아주지 않으면 판소리는 이제 영원히 잊힌 음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전의 형식만을 강조하면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처럼 꼰대 소리를 듣게 될 수 있습니다.
대중이 원하지 않으면 잊히는 것이고 잊히면 의미 없게 됩니다.
이전의 가치의 무게를 벗고 현시대에 그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려면
‘무엇은 바뀌면 안 되고 무엇은 바뀌어야 하는지 명확히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며칠 전에 별세하신 삼성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대중이 원치 않는 스마트폰과 가전제품을 만드는 것에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꼰대 근성에서 벗어나려면 대중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확대되면 ‘이웃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꼰대’는 젊은이들이 잔소리꾼 어른들을 일컬어 부르는 은어입니다.
이들이 잘 쓰는 말은 “나 때는 ~”입니다.
이것을 비꼬며 발음이 비슷한 ‘라떼’ 커피와 결부시키기도 합니다.
꼰대에서 벗어나려면 오늘 예수님의 모범을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그런 것을 주장하는 것이 옳으냐?”고 물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안식일’ 법이 현재의 가치에 대해 논하십니다.
‘지금’ 바뀌지 말아야 하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사랑의 가치’입니다.
‘지금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어떻게 변해야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고,
지금 어떻게 변해야 사람을 기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가차 없이 바꿔야 합니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고 무엇이 바뀌지 말아야 하는지 아는 것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역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라고 하십니다.
‘지금’과 ‘이웃사랑’만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길 수 있다면, 절대 꼰대라 불릴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김 요나단 수녀
오늘 짧은 복음에서 안식일이 세 번이나 나온다.
어느 안식일에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사이의 지도자의 집에
예수님께서 초대를 받으셨다.
거기에는 많은 바리사이들이 있었고,
그들의 눈은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해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식사하시는 그 앞에 몸이 붓는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하필 왜 수종을 앓는 사람이었을까?
이 수종을 앓는 사람의 모습 안에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서 자신은 의롭다고 믿고,
하느님 앞에서 떳떳하다고 팽창되어 있는 바리사이들의 교만이 있다.
안식일은 하느님 안에서 모든 생명이 쉼을 가지기 위함이다.
하지만 아픈 이들과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이들은 고통 속에 있기에 쉴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이 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몸이 부어 고통 받고 있는 이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주심으로써 구원해 쉬게 하셨고,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져서 생명이 위태로울 때 구해내는 것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임을 밝히셨다.
이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본 바리사이들은 침묵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의 수종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
제가 옳다고 믿는 것, 의롭다고 믿는 것,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로 인해
제 자신이 팽창되지 않게 해 주시고,
아픈 이들을 돌보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봉사하게 하소서. 아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