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교회 김다위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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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의 다니엘처럼: 세속적 도시에서 선교적 소수로 살기 (9)]
다니엘이 간직한 영원한 소망
단 7:1-28 (봉독: 1, 7-14)
예전에 미국에 있을 때, 여름이 되면 2년에 한 번 정도, 휴가 때 콜로라도 여행을 가곤 했습니다.
한번은 막내가 4살 정도가 되었을 때 장거리 여행을 떠났습니다.
콜로라도와 그랜드캐년, 옐로우스톤을 돌아오는 총 3,600km에 이르는 먼 여정이었습니다.
산도 있지만, 평야도 있고, 골짜기와 애리조나의 사막도 지나가야 합니다.
한참을 가던 중에 막내가 이러는 겁니다. “아빠 여행이 안 보여” 이미 여행 중인데,
여행이 안 보이다니요. 이동하는 모든 길과 주변 풍경이 모두 여행이지요.
그러나 막내가 여행이란 단어를 ‘숙소’로 알았던 겁니다. 즉 “아빠, 숙소가 안 보여. 숙소 언제 도착해?”
이 말이었습니다. 이 말을 1시간마다 반복했어요. “아빠 여행이 안 보여...”
저희 가족이 보관하는 “어록” 중 하나입니다. 저에게는 구글맵이 있었고 내비게이션이 있었기에 모든 여정이 눈에 보였지만, 4살짜리 어린 아이에게는 여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 막내의 질문이 우리의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인생 여정이 안 보입니다. 내 인생의 미래가 안 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다니엘서 7장 말씀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7장은 우리의 인생 여정의 “큰 그림 big picture”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는 총 2막으로 구성되는데, 1막은 1장부터 6장까지로서 주로 역사적 사건들을 다룹니다.
2막은 7장부터 12장인데, 7장 이후로는 주로 다니엘이 본 환상과 들은 예언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보통 주일학교에서는 7장 이후로는 잘 다루지 않지요. 내용이 난해하고 복잡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서 7장은 역사의 큰 그림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니엘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입니다.
6장까지는 주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게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7장과 8장은 다니엘이 직접 본 환상들입니다.
먼저 우리는 간략하게 다니엘이 본 환상들의 내용과 그 의미를 살펴보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벨사살 왕의 첫 해
먼저 1절은 다니엘이 꿈에서 환상을 본 시대적 배경이 나옵니다.
(단 7:1) 벨사살이 바빌론 왕이 된 첫 해에, 다니엘은 잠자리에서 꿈을 꾸면서, 머리 속으로 환상을 보고, 그 꿈을 적었다. 그가 적은 내용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성경에 다니엘이 꿈에서 환상을 본 시기가 기록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이미 벨사살이 악한 성품을 가진 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벨사살은 이전부터 아버지 나보니두스 밑에서 권력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나보니두스 통치의 ‘셋째 해’가 되었을 때에 벨사살은 “공동 통치자”가 됩니다.
이때가 대략 기원전 553년경으로 추정이 되는데요, 악한 벨사살이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사악한 벨사살의 통치 아래서 살아야만 하는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염려했을 겁니다.
게다가 이때는 고레스의 메대-페르시아 연합군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며 바벨론과 세력 다툼과 전쟁을 시작하던 때입니다. 국제적인 정세도 불안해지는 시기였습니다. 국내적으로, 국제적으로 어느 것 하나 평안히 여겨질 소식들이 들리지 않습니다. 다니엘 자신도 이제 나이가 들었고 모든 것이 불안하고 흔들리던 시대였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꿈을 통해 환상을 보여주신 겁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도 유사한 상황 속에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끝나지 않았는데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지속, 확산되고 있습니다.
아랍 국가들이 이 전쟁에 어떻게 반응할지 전 세계 국가들이 긴장하며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무역이 중단되거나 물품 수출입에 제한이 될까봐 염려합니다.
국제유가가 상승할까봐 걱정합니다. 정치계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희망적인 소식과 절망적인 소식이 교차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다니엘서 7장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씀하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귀가 활짝 열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확실하고 분명한 음성을 듣게 되기를 원합니다.
네 짐승들의 환상
다니엘이 꿈에서 본 환상을 보면 먼저 3절이 “서로 다르게 생긴 큰 짐승 네 마리”가 “바다”에서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암울하고, 어두운 영역입니다. 좋지 않은 것들은 대체로 바다에서 등장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바다는 구원받거나 심판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 고기를 잡던 갈릴리 어부들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영적인 바다 깊은 곳에 잠겨 있습니다. 사람을 낚아야지, 세상에 낚이면 안 됩니다.
이 바다에서 네 짐승들이 등장한다는 말은 이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17절에 보면 천사가 다니엘에게 이 짐승들이 무엇인지 해석해 줍니다.
[단 7:17] '이 큰 짐승 네 마리는 앞으로 땅에서 일어날 네 왕이다.
큰 짐승 “네 마리”는 곧 “네 왕”입니다.
“첫째 짐승”은 사자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개가 뽑혔고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짐승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상징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를 사자와 독수리에 비유했습니다.
육상 동물의 왕이자 새들의 왕이지요.
“둘째 짐승”은 곰과 같은데 뒷발로 서 있고 입에 갈빗대 세 개를 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짐승에게 말하기를 “많은 고기를 먹으라"합니다. 이 짐승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습니다. 이 짐승은 고레스의 메대-페르시아 제국입니다. 이 곰이 물고 있는 세 개 갈빗대는
이 나라가 정복한 “리디아, 이집트, 바벨론”을 상징합니다.
“셋째 짐승”은 표범과 같은데 등에는 새의 날개가 넷이 있고 머리가 또 넷입니다.
바로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이지요.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기동력이었습니다. 그가 빠른 기동력으로 나라들을 정복하고 인도까지 동방 원정을 마치는데 고작 10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이 33세의 나이에 죽고 난 후에 그의 부하였던 장군들에 의해 나라가 넷으로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날개가 넷, 머리가 넷인 겁니다.
“넷째 짐승”은 앞의 짐승들과 완전히 다릅니다.
매우 사납고 매우 강하며 쇠로 된 이빨과 발톱으로 먹고 으스러뜨리고 나머지 짐승들을 발로 짓밟습니다.
그리고 열 뿔이 있습니다. 8절에 보니 그 열 뿔 중에서 다른 작은 뿔이 나는데 거기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들이 있고 입이 있어 큰 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넷째 짐승이 로마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로마의 적그리스도적인 행위 때문입니다. 로마는 그리스도인들을 원형 경기장에 묶어놓고 사자를 풀어 죽이게 했고, 십자가형으로 죽이기도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로마는 예수님을 죽인 나라입니다. 네로 황제와 도미티안 황제 때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잔인하게 순교를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 2:18에서
[요일 2:18] 어린이 여러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이, 지금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지막 때”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모든 기간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 당시 이미 적그리스도가 많이 생겨서 그때부터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넷째 짐승을 단지 로마로만 한정짓기보다 이 나라는 로마를 포함하여 역사상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핍박하며 하나님의 법을 바꾸는 나라들로 보아야 합니다. 그 나라들은 열 뿔로 상징되는 열 왕들에 의해 통치되고, 궁극적으로는 8절에 “작은 뿔”로 상징되는 적그리스도에 의해 마지막에는 그 권세가 최고조에 이르게 됩니다. 8절의 이 작은 뿔은 눈과 입이 달려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3절에는 이 뿔을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 대적하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뿔의 특징이 무엇인지 25절에 나옵니다.
[단 7:25] 그가 가장 높으신 분께 대항하여 말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괴롭히며, 정해진 때와 법을 바꾸려고 할 것이다. 성도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까지 그의 권세 아래에 놓일 것이다.
이 작은 뿔, 적그리스도의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가장 높으신 분께 말로 대적합니다.
요한계시록 13:5에 보면 “그 짐승은, 큰소리를 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입을 받고, 마흔두 달 동안 활동할 권세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거나 하나님을 무능하다고 하거나 하나님은 과학이 없던 시대에 만들어진 신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둘째, 가장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괴롭힙니다.
교회 역사상 성도들은 세상 왕들과 권세자들에 의해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여기에 쓰인 괴롭게 하다라는 단어는 “닳게 하다(wear out)” “마모시키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넷째 짐승에 의해 얼마나 괴롭히는지 그의 육체와 정신이 닳아 없어질 정도라는 겁니다.
그래서 21절에 보면 작은 뿔은 성도들을 이깁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패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단 7:21] 내가 보고 있을 때에, 새로 돋은 그 뿔이 성도들에 맞서서 전쟁을 일으키고, 그들을 이겼으나,
지난 역사에서부터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핍박받는 성도들이 참 많습니다. 너무나 무기력해 보입니다.
예를 들어 “히틀러”를 보세요. 그 당시 독일 최고 종교지도자들이 그를 “그리스도, 독일을 구원할 메시아”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숭배했습니다. 왜냐하면 1차 세계대전 패배와 세계 대공황 이후 무너진 독일 경제를 바로잡고 독일이 유럽과 세계로 나가 강대국의 지위를 회복할 것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강력하고 권위적인 정부 수립을 원했기에 히틀러는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결국 히틀러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거나 숭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감옥에 넣거나 처형시키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반유대적인 정책으로 유대인들은 그의 손에 의해 600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일제 시대 때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하고 순교를 당했습니까?
신사참배를 거부하면 감옥에 구류되었습니다. 일황이 살고 있는 일본을 향하여 절하는 ‘궁성요배’마저 거부하면 간수들에게 끌려가 모진 매를 수차례 맞거나 집단 구타를 당하고 독방에 갇히기도 했습니다(이덕주, 한국교회 이야기).
중국의 “마오쩌둥”도 그렇습니다. 그가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시기 10년 동안 그는 중국의 거의 모든 교회들을 폐쇄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투옥시키거나 사형시켰습니다. 많은 중국인들은 문화혁명의 광기와 폭력에 치를 떨면서 그 시대를 한마디로 “겁탈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북한은 어떻습니까? 2013년 모퉁이돌 선교회 통계에 의하면 1945년에서 2006년까지 북한에서 순교한 인원이 1만 7천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 숫자는 박해 받고 순교한 사례 761건을 분석한 숫자입니다. 책이나 문서로 정리된 것만 수집한 결과이기에 더 많을 겁니다. 여기에는 한국전쟁 중에 순교한 자는 포함되지 않은 숫자라고 해요. 이 숫자는 로마 시대 때 순교한 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입니다. 북한은 순교자의 피로 적셔진 땅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짐승의 시대”입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보십시오.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습격하여 얼마나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였는지 모릅니다. 이에 분노한 이스라엘이 가자를 폭격하여 분노는 증오를, 증오는 더 크고 흉악한 짐승을 만들고 있습니다. 악한 영의 역사에 의해 사람이 짐승이요, 아니 짐승보다 못한 괴물입니다. 세속도시에서도 피고용자를 학대하고 사람을 물건 취급하며 비인격적인 대우가 벌어집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짐승의 시대입니다.
#셋째, 정해진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입니다.
넷째 짐승의 특징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DNA, 본성을 가진 짐승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때와 법을 고치려고 한다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BC 175-164년 통치)는 유대인들을 통치하면서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강제로 경배하게 했습니다. 성전 제사를 폐지하였습니다. 그 왕은 종교를 완전히 말살시키려 했던 자입니다.
적그리스도의 별명이 “불법의 사람”입니다. 기준이 어디 있냐는 겁니다.
기준은 “나”라는 겁니다. 내가 싫으면 안하는 거라는 거죠.
예를 들어 십계명을 보세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했는데 신의 위치에 “인간"을 두고 “신은 만들어졌다”고 주장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라는 여섯째 계명은 어떻습니까?
내가 싫으면 낙태해도, 살인해도 된다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이 이제는 마땅한 “권리”라고 합니다.
저는 아직도 작년에 저에게 어떤 분이 미국에서 보내주신 메시지를 잊을 수 없습니다.
이 젊은 시절에 매일 파티에 다니며 약도 하고 그러다가 원치 않는 임신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해요.
미국에서는 각 주마다 다르지만 비교적 낙태가 자유롭습니다. 이미 1973년에 법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낙태가 여성의 권리니까 아이를 지운 적이 여러 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돌아보니 자신이 젊은 시절에 얼마나 어리석게 살았는지 뒤늦게 후회가 되더랍니다.
아이를 갖고자 했지만 생기지가 않고 계속 유산을 하는 겁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수술하는 의사가 보더니 이미 자궁에 오래된 상처 자국들이 많다며 그 낙태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몸에 남아 있더랍니다. 아기가 자라야 할 집이 이미 망가져 있는 거예요. 자신은 회개하여 십자가의 보혈로 죄가 씻겼겠지만, 몸에는 여전히 죄의 흔적들, 상처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더라는 겁니다.
제가 이 편지를 읽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아직도 제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법을 바꾸려는 무법자에게 속은 것이지요. 그것이 자유이고, 권리이고 진보인 줄 알았으나,
실은 속박이요 퇴보였습니다.
동성애 이슈도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법을 고치려는 짐승의 시도로 봐야합니다.
물론 교회는 모든 죄인들을 품어야 합니다.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가장 큰 죄는 교만과 우상숭배이며 자기 의가 더 큰 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기에 누가 누구를 정죄하겠습니까?
하지만 분명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동성애자는 잃어버린 자들로서 품어야 할 대상이지만, 동성애는 결혼을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라고 만든 하나님의 법과 창조 질서에서 어긋한 겁니다.
짐승은 법을 바꾸는 것을 넘어서서 사실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만드는 무법을 만들려 하는 겁니다.
때와 법을 바꾸려 하는 것이 이 넷째 나라, 특히 작은 뿔로 상징되는 적그리스도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앞으로 점점 더 그런 방향으로 갈 것입니다.
각 나라의 입법기관에는 하나님의 법을 바꾸려는 법안들이 계속 상정될 것입니다.
너무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왜 성경이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냐면,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라.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지금 세계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우리는 시대를 분별해야 합니다.
세상 마지막으로 가면 갈수록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주를 따르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이들은 소수입니다. 핍박은 더욱 거세집니다.
그러므로 더욱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여러분, 누가 성도입니까? 성도는 실수하지도 않고 넘어지지도 않는 자가 아닙니다.
성도도 쓰러질 수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진보의 길이라고 속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란 비록 이 세속 도시에서는 소수이지만, 깨닫고 돌아서서 좁은 문으로 가는 자들입니다.
그 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든지 개의치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자들,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훗날 성도들이 “세상을 바꾸었느냐”고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너희가 이 세속 도시 안에서도 신실하게 나와 동행하였느냐, 나의 말에 순종하였느냐?”
그것을 물으실 것입니다.
세속 도시 안에서 선교적 소수의 성도들은 괴롭힘을 당하고 조롱을 당할 겁니다.
다니엘이 간직한 영원한 소망
과연 이러한 짐승의 시대, 우리에게 어떤 소망이 있을까요? 2가지가 있습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첫 번째 이유는 넷째 짐승의 통치는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25절 뒤에 보면 작은 뿔의 통치는 한 때, 두 때와 반 때라고 했습니다.
한 때를 1년이라고 해석하면, 두 때는 2년, 반 때는 6개월입니다. 총 42개월입니다.
요한계시록 13:5에도 짐승이 일할 기간은 마흔두 달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모독을 포함하여 안티오코스 4세에 의한 유대인의 박해는 대략 이 정도 기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한, 두 때, 반 때가 의미하는 것은 7이라는 완전수의 절반입니다.
즉, 짐승의 승리는 제한적이며 일시적이라는 겁니다.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짐승의 권세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포기하지 마십시오. 악의 권세는 영원에 비하면 잠깐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두 번째 이유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와 “인자”가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9절을 보세요.
[단 7:9] 내가 바라보니, 옥좌들이 놓이고, 한 옥좌에 옛적부터 계신 분이 앉으셨는데, 옷은 눈과 같이 희고, 머리카락은 양 털과 같이 깨끗하였다
왕좌에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보좌에 앉아계십니다. 그 말은 이 세상을 통치하는 주권자는 바로 항상 계셨던 이, 만들어진 적이 없는 태초부터 계셨던 이, 즉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세상으로부터 핍박이 있습니까? 믿음대로 살기가 어렵습니까?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11절에 보면 그가 넷째 짐승을 죽입니다. 타는 불에 던집니다. 짐승의 권세가 이 땅에서 아무리 강해보여도 하나님의 영원한 권세 앞에 그저 지옥 불에 태워질 장작일 뿐입니다. 또한 13절에 인자가 등장합니다.
[단 7:13]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인자, 즉 사람같이 생긴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등장합니다. 그가 누굴까요?
인자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우리와 같은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 하나님과 같은 분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80번 넘게 자신이 바로 그 “인자”라고 칭하셨습니다. 이 인자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인자라는 말은 고유명사입니다. 인자도 보좌에 앉으십니다. 그래서 보좌들, 옥좌들 복수에요. 짐승들을 심판합니다. 권세를 빼앗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와 권세가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갑니다.
[단 7:26-27] 26 그러나 심판이 내려서,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멸망하여 없어질 것이다 27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력이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다.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
인자이신 예수님이 다시 오면, 재림하면 그렇게 강력하던 나라, 하나님의 때와 법을 고쳐왔던 그 나라와 적그리스도는 권세를 빼앗기고 완전히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갑자기 정신착란으로 죽었습니다. 히틀러는 자결했습니다.
지난 역사 속 짐승처럼 성도들을 핍박했던 이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 나라의 권세가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지역 교회는 닫을 수 있으나 주님의 몸된 교회the Church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경의 결론입니다. 다니엘은 이것을 보았어요.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환상 때문에 고민도 되었고 얼굴색도 변하였지요.
하나님은 벨사살 왕 원년, 국내외 정세가 혼란스러울 때에 다니엘에게 용기와 담대함을 주고 싶으셨던 겁니다. 다니엘은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합니다. 28절입니다.
[단 7:28] 이것이 그 환상의 끝이다. 나 다니엘은 이 생각 때문에 고민하여, 얼굴색이 변하였지만,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다니엘도 고민하고 번민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다니엘이 다리우스 왕 시절, 사자 굴에 던져져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벨사살 시대에 이미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시고 통치하시는 이 환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오실 것이고 그 분이 짐승의 나라를 멸하시고 심판하실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최후 승리는 하나님께 있고 그 나라는 그분의 성도들에게 주어진다!
이것이 다니엘이 간직한 영원한 소망입니다. 오직 그의 영원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한 목사님께서 연차를 내고 아이 둘과 함께 극장에 가서 아이들 영화를 같이 보셨대요.
피곤하셨는지 졸다가 깨다가 하면서 스토리를 잠깐 놓쳤는데, 글쎄 다섯 살짜리 둘째 딸이 울고 있더랍니다.
“왜 그래?” “흑흑... 악당이 너무 무서워..”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 주인공이 이겨.”
그랬더니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아빠 이거 봤어?" 하더랍니다.
넘 귀엽지요. “아빠는 안 봐도 다 알아” 말해주니 아이가 안심하고 영화를 끝까지 봤대요.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가 다 아십니다. 다 아시는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지난주 한 집사님이 기도를 받으러 오셨어요. 희귀성 폐암 3기였습니다.
작년 완치 판정을 받았다가 재발하였어요. 그녀에게 찾아온 죽음의 짐승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낙심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너무 환한 얼굴로 계시기에 암환자처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옆에 계시던 남편 분이 상대적으로 아파 보일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그 남편이 기도 받으러 오신 줄 알았습니다.
이 분이 이미 완치 되었다고 떡도 돌렸는데 왜 재발했을까? 이런 뜻 같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한 번 더 떡 돌리라고 이 상황을 주신 것 같아요.”
이 무슨 믿음이죠? 이 무슨 소망입니까? 이 분이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 집사님이 간직한 영원한 소망,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영원한 권세와 나라를 가진 분. 영원한 생명. 변치 않는 소망. 예수 그리스도!
제가 그 분의 믿음대로 될 것을 선포하며 기도했습니다. “딸의 믿음대로 될지어다!”
여러분, 여행과 같은 인생,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운전대를 예수님께서 꼭 잡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이 가혹한 짐승의 시대, “다니엘이 간직한 영원한 소망”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봤습니다. 여행이 보였습니다.
7장의 핵심은 짐승의 활동이 아닙니다. 짐승의 시대 속 오히려 우리의 눈을 하늘의 보좌에, 우리의 시선을 인자이신 예수님께 고정하라! 주 안에서 너희는 안전하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신실하시다!
그러므로 비록 이 포악한 짐승의 시대, 험한 세상은 현실이지만, 두려워하지 마세요.
“딸아, 두려워하지 마, 아빠는 다 알아. 아들아 염려하지 마, 아빠가 운전대를 쥐고 있어.”
그러니 염려하지 마. 걱정하지 마. 이 영원한 소망을 여러분들도 마음에 깊이 간직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여정에 항상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항상 주목하십시오.
이 소망 가운데 평강을 누리며, 최후 승리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