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미당문학상에 김혜순의 시가 선정되었다. 잘 이해하기 힘든 시로 통상 알려진 시인의 시가 미당 문학상에 선정된 이유가 무엇일까, 김헤순의 시를 대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생경의 사상이다. 즉 날아 다니는 상상의 이념과 현상이라는 것이다.시가 살아서 돌아 다닌다.시가 육중하되 움직인다. 시가 가볍되 무겁기고도 하고 무겁되 가볍기도 하다. 시의 냄새가 향기처럼 다가 오는 미련을 은연중 같게한다. 무엇인가 그것은 치밀한 조음일 것이다. 그리고 이미 지난날 박주택등의 수상작에 보듯 알 수 없는 미련이 잔잔하게 남겨 준다는 것이 이작품의 특성을 알려준다. 난 그렇게 본다. 지속적으로 일관 되게 언제나 뛰어 넘어 가려는 약동의 언어가 도처에 숨쉬고 있다. 그것은 삶의 도처를 음미로 정제하려는 문학적 고민이 이 작품의 貴함을 말해 준다고 할것이고 미당상 수상작의 이유이기도 할것이다...이민영
모래 여자
김혜순
모래 속에서 여자를 들어올렸다
여자는 머리털 하나 상한 데가 없이 깨끗했다
여자는 그가 떠난 후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고 전해졌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숨을 쉬지도 않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와서 여자를 데려갔다
옷을 벗기고 소금물에 담그고 가랑이를 벌리고
머리털을 자르고 가슴을 열었다고 했다
여자의 그가 전장에서 죽고
나라마저 멀리멀리 떠나버렸다고 했건만
여자는 목숨을 삼킨 채
세상에다 제 숨을 풀어놓진 않았다
몸속으로 칼날이 들락거려도 감은 눈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자를 다시 꿰매 유리관 속에 뉘었다
기다리는 그는 오지 않고 사방에서 손가락들이 몰려왔다
모래 속에 숨은 여자를 끌어올려
종이 위에 부려놓은 두 손을 날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낙타를 타고 이곳을 떠나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꿈마다 여자가 따라와서
감은 눈 번쩍 떴다
여자의 눈꺼풀 속이 사막의 밤하늘보다 깊고 넓었다
모래여자, 그렇다,
"微視한 모래의 自我가 속설의 전설을 안고 돌아온다.
비로서 그 전설의 여인은 한 여인으로 환유된 어느 모래여자다.
본성과 본체를 지닌 속성이 여자이기에, 이를 陰陽에서 俗性의 여자라고 한다.
겉은 언제나 속성의 통제아래서 行해지고 말하여 진다, 이를 本能的인
회귀라고도 하고, 본능의 자연적인 방향性이라고한다.
본체의 음미를, 본체가 다하게 밀리 듯 오고, 다하게 읽게하는 듯 하고,
다하게 가게하는 듯한 운율적인 장치가
여성의 본능적인 사변으로, 도도히,그리고 굵게 흐른다.
김혜순 詩人의 말로 치환되어 흐른다.
여성적인 여성의 반항을, 여성적인 여성의 강인함으로,
절규한 것이 흐드러짐으로 가는 길목인데도, 결코 흔하거나, 쉬이하지 아니하고,
흐드러지지 않는, 정서로, 녹아 있다. 모든 심사원원님들의 秀作으로 추천 된 것이
삶이 지닌 정서적인 魂과 詩의 "함유량이 지닌 [뜻의 가치]를 곱게 지니고 있었음"이리라,
우리들이 안고 있었을, 前의 세계와, 21세기 的인 정서성과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리라. 자유와 방만에게서 오히려 탈피하려는
음미가 한 아름 안의 관용으로 안아가려는, 한국적인 탐미의 整形이라고
나는 소슬하게 이야기하려는 것이다"-李旻影(시인)의 話頭에서
김혜순의 詩作이야기
제 시가 너무 어렵다고요 ? `여자들은 함께 울고 웃어요` 중앙일보
바리데기 전설이란 게 있다. 버려진 한 여자아이가 남의 손에 자란 뒤 저승에서 약수를 구해와 죽은 아버지를 살려낸다는 얘기다. 효를 강조하는 빤한 옛날 얘기 중 하나다. 그러나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여자아이는, 버려졌다 하여 바리데기라 불렸다. 원래는 이름도 없었던 것이다. 버려진 이유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버림을 받는다. 잘못이라면 여자로 태어난 것뿐이다. 저승에서 약수를 구하는 과정도 의미심장하다. 그녀가 저승에서 밥 짓던 물이 훗날 약수로 밝혀진다. 바리데기는 그 물로 아비를 살린다.
모든 언어는 여성에 의해 재해석될 수 있다. 아니 여성에 의해 발설됐을 때 언어는 비로소 평등해진다. 올해 미당문학상 수상자 김혜순 시인을 이해하기 위해선 바리데기 전설의 이면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은 여성적 글쓰기의 전범으로 이 무속신화를 삼는다.
바리데기 전설은 여러모로 김혜순을 설명한다. 시인에겐 바리데기처럼 이름에 읽힌 사연이 있다. 1978년 그가 평론으로 등단하고서 얼마 안 됐을 때 한 남성평론가가 막말을 한다. "식모이름으로 어떻게 평론을 해먹어?" 지금도 종종 회자 되는 소위 '식모사건'이다. 어쨌든 시인은 이후로 비평을 삼갔다. 대신 식모 이름으로 식모의 시를 썼다.
김혜순의 시 세계도 바리데기 전설을 닮았다. 남성이 찾아내지 못하는 속뜻을 여성 독자는 용케 읽어낸다. 시인은 서른 해 가까이 한국의 여성시를 대표했다. "김혜순 시인에게 와서 우리 시의 여성성은 비로소 착근을 한 느낌이다"(안도현)라는 찬사가 있었을 정도다. 반면에 '문제의식은 첨예하지만 너무 난해하다'란 지적도 있었다. 시인의 생각은 물론 달랐다.
"내 시가 어렵다는 건 남자들 얘기예요. 문학을 몰라도 여자라면 제 시를 느껴요. 함께 웃고, 함께 울어요. 문단에서 난해하다고 부른 작품도 마찬가지예요."
최근 시 시계의 변모가 읽힌다는 시각에도 시인은 동의하지 않았다. 어미의 품처럼 넉넉해졌다는 해석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에 하나 그렇다면, 이제야 내 언어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시인은 자신했다. 미당문학상 수상작 '모래 여자'에 대한 의견도 엇갈렸다. 심사위원들은 수상작에서 "갖은 소외와 수모의 삶을 조용히 견뎌온 한 여성의 삶을 알게 된다"고 평가했지만, 정작 시인은 "여행시"라고 잘라 말했다. 지난해 여름 고비사막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거기서 옛 공주의 미라를 목격했단다. 그래서 감상을 적었을 뿐이란다.
중앙일보 66년 지면에서 당시 울진국민학교 6학년 4반 김혜순 양의 동시 한 편을 찾아냈다. 폐병을 앓던, 그래서 학교도 제대로 못 가고 홀로 문학을 꿈꾸던 소녀는 '부채는 강바람 싣고 왔을거야'라고 노래했다. 시인에게 40년 전 일을 물었다. "세상에, 그게 아직도 있어요?" 그러고선 한참을 웃었다. 그 웃음은 여성전사의 날 선 냉소도, 어미의 푸근한 미소도 아니었다. 시인은 40년 전 소녀처럼 깔깔대고 웃었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미당 문학상 심사평-미라 같은 '여성의 삶' 깊고 조용하게 응시
최종심에 오른 250여 편의 시 가운데서 오직 한 편을 뽑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이라면 점과 취향에 따른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고, 그런 만큼 일렬로 순위를 매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250여 편의 시 속을 조심스레 헤집고 들어가 오랜 시간 의견을 조율하였다.
우선 전체적인 느낌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발표작품이 너무 많아서인지 몰라도 긴장이 풀어진 작품이 비교적 많았다는 점, 그리고 너무 사적인 세계에 빠져있는 경향이 지적되었다. 그래서 우선 시적 긴장과 공공성이라는 관점에서 좀더 신뢰감을 준 몇 분의 시인으로 좁혔고, 그들의 작품 가운데서 10여 편이 최종 후보작으로 선별되었다.
이후 논의는 작품의 어떤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시인의 전체적 성향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전개되었고, 한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지적과 그에 대한 동의가 있으면 해당 작품은 제외되었다. 가령 어떤 작품은 강력한 추천을 받았으나, 최근 우리 시단에 유행이 되고 있는 '선(禪)적인 모호성'이 지적되어 제외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김혜순의 '모래 여자'가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 시력 20여 년의 김혜순은 우리 시단에서 가장 개성적인 시 세계를 구축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개성이 워낙 강하다 보니 그의 시에 대해 호감을 갖지 않은 이도 있지만, 그런 이들조차 김혜순의 시가 고수의 경지인 것은 인정하는 편이다.
'모래 여자'는 차분하게 정제된 언어를 보여주는 시다. 미라의 발굴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마치 미라의 발굴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모래 여자의 존재를 조금씩 펼쳐 보여준다. 독자들은 숨을 죽이고 모래 여자가 어떻게 존재했고 어떤 취급을 받았으며 이제 어떤 모습으로 남았는지를 비밀의 베일을 펼치듯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 모든 모습이 드러났을 때, 독자들은 그 모래 여자가 결국은 갖은 소외와 수모의 삶을 조용히 견뎌온 한 여성의 삶의 환유임을 알게 된다.
'모래 여자'는 어떤 면에서는 김혜순적이고, 다른 면에서는 김혜순적이 아니다. 김혜순의 깊고 조용한 응시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고, 우리 시대 여성성의 한 기호가 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심사위원들은,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다채로움보다는 조용함이라는 생각에서 '모래 여자' 쪽을 조용히 선택했다.
[심사위원=정현종.김주연.황현산.최승호.이남호(대표집필 이남호)
당신 눈동자 속의 물
김혜순
내가 아침에 일어나 슬픈 노래를 부르면
컵의 물도 슬퍼지고 변기의 물도 슬퍼지고
꽃 대궁 속으로 쿨럭거리며 올라가던 꽃병의
물도 슬퍼지고
목구멍 속에 물을 가득 품은 채 참고 있는
수도꼭지 속의 물도 슬퍼지고
창밖으로 날아가는 새들을 보고 날아오른다고
하지마라 그건 내가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한없이 떨어지고만 있는 것이니
천공(天空) 만공(滿空)에 떨어질 줄밖에 모르는
대지를 타고 가는 것이니
흐르는 물은 흐르면서 몸을 씻지만
이렇게 슬픈 노래는 내 몸에 고여서
흘러나가지도 못하네 배수구 마개가 울고
그 아래 파이프가 우네
나는 흘러가려고 태어난 몸
흘러가 당신 몸 속의 물이 되려고 태어난 몸
지평선이 없어도 좋다 딛고 설 땅이 없어도 좋다
나는 오직 가기만 하면 돼
나는 당신 몸 깊은 곳에서 쉬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고
속삭이지도 않고 당신 눈동자 속의 물처럼
물끄러미 있으려고 태어난 몸
이 슬픈 노래는 어디서 흘러왔는가
내 썩는 몸 위로 왜 자꾸 오는가 어느 곳에
숨었다가
내 컵의 물을, 내 꽃병의 물을 울리는가
한강 고수부지에 물 가득 차올라
도로 표지판 하나 보이지 않고
그 아래, 그 강바닥 깊은 아래
땅속 동굴을 흐르는 차가운 물소리
천장이 흔들리고 기둥이 습지에 젖어들고
솥들이 녹스네 두 눈을 크게 뜨고 앞가슴을 내밀고
숨을 참고 나가야지 썩지 않으려면
나프탈렌이라도 먹어둬야 할까
열쇠를 찾아 이곳을 나가야지
장마
김혜순
귀신들은 언제나 투덜투덜, 그래요
그중에서도 억울하게 죽은 여자들이 제일 시끄럽죠
첫사랑에 빠진 귀신은 의외로 추적추적 조용하게 오고요
미친 여자 귀신은 조금 무섭게 오죠
머리칼에 번개가 붙어오니까요
호수는 그렇게 세게 두들기면 안 돼요
두드린 자리마다 핏물이 올라와요
입에서 지렁이가 나오는 저 여자
너무 두들기진 마세요
매일매일 두들겨 맞으니까 입에서
지렁이 한 가마니 두 가마니 쏟아지잖아요
나중엔 제 내장까지 꺼이꺼이 다 토하고
빈 몸으로 뭉개지네요
냄새 한번 요란하네요
숲 속에서 산귀신에게 당해보았나요?
입속에서 한없이 뻗어나오는 넝쿨을 꺼내
넝쿨마다 푸른 혓바닷 주렁주렁 매달아
그 혀들이 밤새도록 떠들게 하더라니까요
귀신들은 참 질기게 시끄러워요
갔다가 돌아오고 쫓아내도 찾아오고
제삿날 온 집 안에 퍼지는 연기처럼
투덜투덜 침방울 천지에 튀긴다니까요
호수가 수천 개의 입을 벌려 떠들기 시작했어요
이제 누가 저 벌건 입술들을 틀어막지요?
아이구 천지사방이 호수네요 벌겋네요
칼과 칼
김혜순
칼이 칼을 사랑한다
발이 없는 것처럼 공중에서 사랑한다
사랑에 빠진 칼은 칼이 아니다 자석이다
서로를 끌어당기며 맴도는 저 집요한 눈빛!
흩어지는 땀방울 내뱉는 신음
두개의 칼이 잠시 공중에 엇갈려 눕는가 했더니
번쩍이는 두 눈빛으로 저 멀리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도 한다
서로 몸을 내리치며 은밀하게 숨긴 곳을 겨냥하는 순간
그 눈빛 속에서 4월마다 벚꽃 모가지 다 베어지기를 그 몇 번!
누군가 하나 바닥에 몸을 내려놓아야 끝이 나는 칼의 사랑
분홍신을 신은 무희처럼 쉬지 않고 사랑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랑을 멈출 수는 없는
시퍼런 몸 힘껏 껴안고 버틸 수는 있어도
끝내 헤어져 돌아갈 수는 없는
공중에서 내려올 수도 그렇다고 넘어질 수도 없는
꼿꼿한 네 개의 무릎에서 피가 솟는다
저 몸도 내 몸처럼 구멍이다 저 검은 구멍을 베어버려라
거기서 솟는 따뜻한 피로 얼굴을 씻어라
아무리 소리쳐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저 끔찍한 사랑
그러기에 이제 내 사랑은 몸을 공중에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고
한번도 발을 땅에 붙이지 못한 것이었다고 말해야 하나?
다행인가? 우리 사랑이 아직 저렇게 공중에 떠 있다는 것
잘 익은 사과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함박눈 다음
김혜순
마다 성탄절 아침이면
어느 집 한 집 빼놓지 않고
새 아기 한 분씩 방문해 오듯이
해마다 겨울날 어느 아침이면
어느 집 한 집 빼놓지 않고
첫눈송이들이 방문해온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눈이불 아래 누워서
강을 묶어놓은 얼음
얼음짱 밑의 물고기들
그 겨울 물고기들의
조용하고 조용할 밀실을 생각한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눈사태가 뺨을 치고 지나간 산머리
그 아래 숨죽인 도토리
눈뜨고 잠든 뱀
네 활개를 쫙 벌린 개구리
눈뜨고 기다리는 수많은 눈동자, 눈동자
그 조용하고 조용할 흰눈이불 속을 생각한다
나는 오늘 아침 눈 이불 속에서
아이구 저 아기를 어쩌나
아장거리며 내려오는 내 어린 시절
옹알이하며 다가오는 아기를 맞이한다
눈뜨고 꾸는 꿈속에서처럼
내 품으로 다가오는가 팔 벌리면
어느새 사뿐히 스러지고 없는 아기를
해마다 겨울날 어느 아침이면
어느 집 한 집 빼놓지 않고
사라져버린 어린 시절이
옹알이 소리 지우며 하얗게 방문해 온다
그러면 모두 흰눈이불 아래 누워
그 소리 귀 기울여 듣는다
[문화일보 2003/01/07 ]
흐느낌
그럴 때가 있다 갑자기
느닷없이 내가 내 몸 속으로 깊이 깊이 숨어들 때가
그러면 또 내가 그걸 못 견뎌서
내 몸 속에서 춤추는 사람 천 명이 쏟아져 나온다
여름비가 오열하는 파도처럼
춤추는 사람 천 명을 때린다
격정적으로 때린다
숲의 천 그루 나무들이
전신으로 물방울을 튀기며
쏴아 쏴아 군무에 빠져 있다
그럴 때가 있다 갑자기
느닷없이 내가 내 몸 속으로 깊이 깊이 숨어들 때가
들어가선 못 빠져나와 안간힘 쓸 때가
그러면 또 내가 그걸 못 견뎌서
내 몸 속에서 북 치는 사람 천 명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도 아직 몸통 속에 갇힌
미친 멜로디가 다 풀리지 않았는지
내 눈물이 한 방울 몸 속으로 떨어지고
나비
김혜순
내 왼쪽 귀와 네 오른쪽 귀로 만든 나비 한 마리
두 날개가 파닥이면 맞잡은 전신으로 파문진다
환한 날개 가루들로 네 꿈을 채워줄게
네 꿈속에 내 꿈을 메아리처럼 울리게 할게
귓바퀴 속 두 소용돌이가 환하게 공명한다
어쩌면 귀먹은 사람이 잠결에 들은 것 같은
그런 편지를 내 왼쪽 귀를 다하여 쓸게
네 꿈속으로 들어가 혈액을 다정히 흔들어줄게
이 세상 끝까지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만큼
그렇게 가볍게 날개를 파닥일 수 있겠니
문드러진 꽃처럼 피어난 우리 입술의 암술 수술로
우리가 키우는 이 나비 한 마리
나중에 나중에 우리없는 세상에 뭐가 남을까
우리 몸을 버리고 날아오를 저 나비 한 마리
우리 몸속에서 아직도 팔딱거리는 어둠처럼
아직 생기지도 않은 저 멀고먼 쌍둥이 태아처럼
두 손을 맞잡고 누운 침대 위
우리는 두 귀를 맞댄 채 생생히 썩어가네
우리 무덤 위로 바스라질 듯 두 귀를 팔딱거리는 저
나비 한 마리!
신지혜시인의 감상평
여기 눈부신 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다.
마치 미세한 레이저망으로 빚어낸 아름다운 나비 한 마리를 보는 것처럼, 우리를 전혀 다른 환상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그 나비는, 내 왼쪽 귀와 네 오른 쪽 귀로 만든 팽팽한 나비 한 마리다.
시인은 은근한 귓속말처럼 다정하게 네 존재와 나비 한 마리를 만들며 끊임없이 교신하고 있다. 내 귀와 네 귀가 만든 이 나비 한 마리가, 더욱 더 머언 상상의 공간 속으로 파닥이며 날아가기를, 마침내 이 세상 끝까지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만큼 그렇게, 가볍게 날개를 파닥이게 되기를 시인은 열망한다.
시인의 섬세한 의식과 상상이 빚어낸 이 나비 한 마리는 두 존재가 서로 맞잡고 당기어서 만든 나비인 것이며, 두 소용돌이가 서로 환하게 공명하고 있다.
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나비야말로 이미 우리가 없는 세상에도 파닥거리며 혼자 날아오를 것이라 시인은 말한다.
즉 시인은 ‘두 손을 맞잡고 누운 침대 위, 우리는 두 귀를 맞댄 채 생생히 썩어가네 우리 무덤 위로 바스라질 듯 두 귀를 팔딱거리는 저 나비 한 마리!’ 라고 나비의 영구불변성을 묘파한다. 시인의 자유로운 심층적 구도의 상상과 열망이 만들어 낸, 이 나비는 두 존재가 만든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게 빛나는 공유물로서 결국,우리의 만남이란, 존재와 존재의 단순한 만남뿐만이 아닌, 영속적인 나비 한 마리를 빚어내게 되는 것이라 암시하고 있다.
이 시는 가히 독특한 시적 이미지를 형상화한다. 이미 획일화된 현대시적 독해의 경향과 천편일률적으로 고착화된 시적 틀에서 과감히 탈피한 독보적인 시로써,
그 상상력의 무한 경지 속으로 우리를 단숨에 매혹시킨다.
김혜순(51)의 일곱 번째 시집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2000년,소개와 해설--중앙
가
세 번째 천년의 들머리에 나온 것은 우연이겠지만, 그것은 맵시 있는 우연이다.
시집 표제로 내세운 시의 열쇠말이라 할 ‘달력’의 연도가 이 해에 우수리 없이 딱 떨어졌으니 말이다. 새로운 세기나 새로운 천년은 무차별적인 시간의 흐름에 인간이 자의적으로 새겨놓은 눈금에 지나지 않지만, 이런 인위적 눈금에 효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눈금은 우리들의 삶에 리듬을 부여하고, 그 삶을 성찰할 기회를 베푼다. 이런 눈금으로서, 세기의 전환기만 한 것은 흔치 않다. 거기선 꼭 채워진 숫자의 매력이 솟아 나오기 때문이다. 세기의 전환기가 천년대의 전환기와 포개져 있다면 더욱 더 그렇다.
표제시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의 화자는 밍밍하게 되풀이되는 삶의 진부함과 비루함을 참아내지 못한다. 달력이란, 그 달력으로 표상되는 시간과 그 시간 속의 삶이란, “열두 곡이 다 흐른 다음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음악과 다를 바 없음을 그는 이미 알아버렸다.
“귀에 못이 박일 정도로” 그 음악을 들은 탓에, 그는 “어느쯤에서 태양이 타오르고/ 어느쯤에서 장마가 시작되는지”도 다 외우고 있다. 그래서 그는 달력 공장 공장장에게 푸념한다. “왜, 이 윤전기 앞에선 한 번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요?/ 왜, 나는 매일 아침 새로운 형량을 시작해야 하나요?”
그러나 공장장은 화자의 항의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윤전기는 멈추는 법 없이 해마다 똑같은 달력을 찍어낼 것이고, 화자는 그 달력의 밋밋하고 억압적인 스케줄에 따라 컨베이어벨트 위의 삶을, 시시포스의 노역을 계속할 것이다. 달력 공장의 공장장은 누굴까? 근원적으로, 신(神)이나 섭리라는 이름의 무제약적 존재나 이법(理法)일 것이다. 그 신이나 이법은 천체의 운행을 주관함으로써 시간을 주무른다.
그리고 이 시의 화자는 시간 속에 갇혀 어찌할 바 모르는 제 몸뚱이를 서러워한다. 이 시집의 또 다른 화자들도 “시간이란 이름의 사냥개들은/ 방책 밖에서 으르렁거리고”(‘SPACE OPERA’)라거나, “윤회의 소용돌이에 끼여 오도 가도 못 하는 한 영혼”(‘메아리가 갔다가 오는 만큼, 그만큼’)이라는 말로 수인(囚人)의 처지를 한탄한다. 최승자의 ‘내 무덤, 푸르고’라는 시집 한 권을 통째로 적신 시간 속의 절망을 ‘달력 공장’의 김혜순도 더러 내비치고 있다.
표제시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를 사회학적으로 읽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를테면, 화자가 달력 속의 여성 모델들과 일본 대사관 앞의 (위안부) 할머니들과 일상의 노동에 치인 자신을 중첩ㆍ대조시킨 것은 노동ㆍ여성 사회학적 상상력에 이끌린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 달력 공장의 공장장은 기존 체제를 지탱하는 세력이나 힘의 은유로 읽힐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가파른 읽기는, 저도 모르게 내던져진 인간 존재의 근원적 수동성을 직시하는 화자의 비극적 세계인식을 너무 좁혀놓거나 휘어놓는 일이 될 것이다.
달력 속의 여성 모델이나 소복 입은 위안부 할머니는, “어느 부분에선가 경건하게 완전 군장하시고/ 낚시질 떠나시는 우리 아버지/ 아버진 이제 정년 지나서 시장 바구니 들고 엄마 따라 다녀요”라는 시행의 (화자) 가족처럼, 달력의 특정 시기와 화자를 자동적으로 묶는 연상 목록이라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기는 하나, 표제시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는 이렇게 해석의 지평을 확장시켰을 때 시집 ‘달력 공장’의 구성적 표본에 가까워진다. ‘달력 공장’에 묶인 작품들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가족을 등장시킨 시다. 이 시들 가운덴, ‘어머니 달이 눈동자 만드시는 밤’처럼 신화적 분위기에 휘감겨 있는 것이 많다.
둘째는 얼마쯤의 사회학적 상상력에 감염된 시다. 여성주의 맥락이 또렷이 읽히는 ‘또 하나의 타이타닉호’나 ‘물 속에 잠긴 TV’가 그 예다. 이 시집에 묶인 작품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세 번째 유형은 화자 개인의 고통과 절망이 토로되는 시다. 물론 이 분류는 매우 거칠고 도식적이다. 많은 경우, 이 유형들은 서로 스며들어 있어서 그것들을 또렷이 갈라내기는 어렵다.
어떤 유형에 속하든, ‘달력 공장’의 시들은 시공간적으로 광대무변하다.
‘애처로운 목탑’이라는 작품에서는 ‘천년 넘게’ ‘천년 내내’ ‘천년 전의 검은 활촉들’ ‘천년 묵은 목계단’ ‘천년 전쟁의 병사들’ ‘천년 묵은 몸’ 등 천년 세월이 되풀이 발설되고 있고, ‘유화(柳花)’는 그 제목이 가리키듯 상상력의 실마리를 고구려 건국 신화에서 끌어내고 있다. 공간적으로도 시인의 상상력은 몽골과 남아메리카를 거쳐 태양계의 변두리 명왕성에까지 이른다. 그 시공간은 확장하면서 수축한다.
‘SPACE OPERA’에서는 인체 속의 미시 세계와 우주 공간이 포개지고, ‘태양의 축제’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분위기)가 겹친다. 말하자면 ‘달력공장’의 세계는 자주 환상적이고 환각적이다. 그것은 더러 약물 사용자의 ‘하이(high)’ 상태를 연상시킨다. “내 머리채는 이제 마악 떠오르는/ 달에 휘익 빨려들었다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Spoonful Blues’) 같은 극초감각적 진술이 그 전형적 예다.
이런 몽환적 진술에서는 시인의, 더 정확히는 화자의 무기(巫氣) 같은 것이 읽힌다. 그러니까 ‘달력 공장’의 공간은 초현대적 샤머니즘의 세계다. “한 번도 녹아본 적이 없는 머나먼 눈 나라”에서 “시리디시린 얼음 비단 치마저고리 만들어 입고” 사는 “얼음아씨들”(이상 ‘얼음 비단, 얼음 아씨’)을 비롯해 이 시집에 얼음 이미지가 잦은 것도 그 무기의 뜨거움을, 신열을 식히려는 시인의 내밀한 욕망 탓이 아닐까?
물론 한 화자는 “이 우주의 너무나도 차갑거나/ 너무나도 뜨거웠던 온갖 행성들로부터 고통이 밀려온다”(‘명왕성에서 온 그녀’)며 뜨거움과 차가움을 동시에 아파하지만, 대체로 ‘달력 공장’의 서정적 자아들은 얼음으로 제 신열을 식히는 뜨거운 존재다. 그들은 “낮이나 밤이나 살 속 깊숙이/ 얼음의 칼날을 꽂은 채 살아가”(‘성에 꽃다발’)야 하는 얼음아씨들이다. 속이 너무 뜨거운 얼음인간들이다.
두 주 전 신현림의 ‘해질녘에 아픈 사람’을 읽은 독자에게 김혜순의 ‘달력 공장’은 쉬이 읽히지 않는다. 온갖 감각들을 자유자재로 교차시키는 김혜순 특유의 섬세한 묘사가 시 읽기의 훈련을 미리 요구해서만은 아니다. ‘달력 공장’에는 너무 많은 풍경들과 사물들, 너무 많은 감상들과 증상들, 너무 많은 말들이 버무려져 있다.
신현림의 시가 따뜻한 멜로물이라면 김혜순의 시는 차가운 컬트물이다. 이 컬트를 구성하고 있는 강렬한, 검붉은 언어들은 형식적으로는 가지런하나 내용적으로는 어지럽다.
그것들은 알쏭달쏭하고, 밑도 끝도 없고, 지극히 사적이고, 산만하고, 시끄럽고, 잡다하다. 그것들이 그려내는 “피를 뚝뚝 흘리는 밤의 풍경”(‘풍경 중독자’) 속에선, 병적이리만큼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그러나 그 만큼이나 또 기가 센 화자들의 신음과 한탄과 비명과 짜증과 울음이 쉼 없이 울려 퍼진다. 김혜순의 언어들은 화자가 얼마나 아픈지는 친절히 알려주지만, 왜 아픈지는 좀처럼 알려주지 않는다.
화자들은 왜 아플까? 여성이어서? 그런 것 같진 않다. 김혜순은 여성주의 라벨을 제 몸에 붙이고 있는 시인이지만, 이 시집은 극히 부분적으로만, 그리고 표피적으로만 여성주의적이다. 그들에게 무기가 있어서? 글쎄. 늘 아프기만 하다면 무당 노릇을 어떻게 하겠는가? 화자의 (영혼의) 살갗에 통점(痛點)이 너무 많아서? 하나마나한 대답처럼 보이긴 하지만, 사실 이게 제일 그럴 듯하다.
위에서 한 행을 인용한 ‘풍경중독자’라는 작품은 시집 ‘달력 공장’의 핵심 비밀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이 시의 화자는 스스로 묻는다. “왜 풍경은 몸 속으로 들어와 고통이 되고 싶은 걸까?” 그 말투는, 종일 두통 복통과 인후 카타르에 시달리다가도 땅거미가 내리면 주점을 찾아 줄담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셔대는 알코올-니코틴 중독자의 말투를 닮았다. 그러니까 이 질문의 답은, 시의 제목대로, 화자가 풍경중독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묻는다. “왜 고통이 몸밖으로 나가면/ 한낱 고물 집하장이 되어버리는 걸까?” 그것은 풍경(이 야기하는 고통)의 재현이, 그러니까 언어를 통한 세계의 미적 감각적 재현이 그만큼 만만찮은 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물론 이 시행은 겸손의 맥락에서 발설된 것이겠으나, 김혜순처럼 말의 기교가 넉넉한 시인에게도 언어가 고물집하장이 되는 것을 막는 일이 늘 순조롭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이 질문은 시 속에서 답변되지 않았지만, 가능한 답 가운데 하나는 시인의 지나친 다변 욕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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旻影의 시에 대한 시평과 감상후기/ 습작실의 창작해설에 對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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