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5일은 제가 평소 존경하는 분의 팔순잔치가 명동의 어느 호텔에서 있었습니다. 여흥시간에 이재민의「골목길」을 한 곡조 뽑은 나는, 바쁜 일이 없지만 서둘러 자리를 빠져 나왔습니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당고개행 열차를 탔는데, 시각은 오후 3시 10분쯤 되었습니다. 소주와 맥주를 곁들여 약간은 고조되었을 나의 얼굴은 누군가 뚫어지게 봤다면 아마「메밀꽃 필 무렵」에서 동이를 아들로 알았을 때의 흐뭇하여 불그스레한 허생원의 얼굴과 같았을 것입니다.
마침 빈자리가 있어 앉아가지고 답례품으로 받은 우산의 포장지에 있는 글자들, 대강「산수연(傘壽宴)에 오셔서 고맙습니다.」를 보면서「사람이 80까지 사는 것은 복되고. 거기에다 잔치까지 하는 것은 축복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가 옆자리에서「산수연은 몇 살에 하고. 한문으로 산자는 무슨 산자를 쓰는 것이지요?」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내 옆자리에 누가 앉았는지도 몰랐는데 그 소리는 여성의 목소리였고. 힐끗 옆을 보니 미모에다 그것도 지적으로 보이는 여인이었습니다. 약간 당황한 나는 그래도 물었으면 대답을 해야 하는 것.「예, 산수연은 연세 80을 기리는 잔치이고. 한문을 조금 안다는 저도 산수란 단어를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라고 궁색하게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고로 산자는 우산(雨傘) 산자을 파자한 것입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는 한문에서 시작하여 정치. 역사. 문학. 철학 등 인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고. 오늘의 모든 문제는 인문학이 못나서 그런 것이라며 나직나직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근년 들어 이전에 알던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경우도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작가 신상웅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심야의 정담」이란 이름으로 발표했는데, 이건「지하철의 정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이윽고 나는 쌍문역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그 여인이「저는 창동역 부근이 집인데 실례가 안 된다면 한 30분 쯤 더 이야기를 할 수 없을까요?」하는 것 아닌가. 이건 중국의「탁문군」이나 고구려의 평강공주 또는 프랑스의「잔다르크」같은 당찬 여성의 기상이었습니다.「말 탄 김에 경마한다.」고 우리는 창동역에서 내려 어느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리는 그때 통셩명을 하였는데 그녀는 58세이고. 전주이씨이며 이름은 ○○이었습니다. 고향은 충북 충주였고. 전업주부였습니다. 30분 안에 이야기를 끝마쳐야 하는 우리는 시간이 되자 일어섰습니다.「오늘 커피 값은 제가 내겠습니다.」라고 내가 말하니까 그녀는「아닙니다. 제가 오시자고 했으니 제게 내겠습니다.」라며 한사코 우기는 것이었습니다.「그렇다면 오늘은 여사님이 내시고. 우리가 또 만난다면 그것은 운명적인 것이니 그때에는 제가 근사한 저녁을 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정중하게「안녕히 가십시오.」라는 말을 하고 돌아서는 나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경쾌했습니다. 그것은 오늘 또 내가 이 세상 살아갈 동안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은 나와 이야기를 섞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기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딱 한 가지「우리는 모두 흐르는 별 같은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만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따라왔습니다.
2013 1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