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에서 계속
재인마을 길산의 깨복쟁이 친구인 갑송이는 마누라 도화의 패악행에 마누라를 살해하고 머리를 깎고 월정사로 들어간다. 대성법주 스님이 된 이갑송은 가까운 덕고(태기)산 봉복사 금점굴에서 철을 채취하고 엽전을 만들어 조정을 뒤엎을 거사자금을 만들며 승병도 키운다. 그 무대가 오대산 월정사와 덕고산 봉복사였다. (기억이 가물가물해 내용이 조금 틀릴 수 있습니다. 책을 다시 한번 보고 수정하지요.)
실제로 태기산에 가면 신라 자장율사가 세웠던 봉복사가 있고 주전골이 있다. 주전골이면 엽전을 만든골짜기란 뜻인데 어디가 소설이고 어디가 현실인지 헷갈린다.
오대산을 들어서기도 전에 서론이 너무 길어졌다. 이유없이 길어질리 있겠는가? 전에 강원도의 산줄기와 물줄기를 소개하면서 한강기맥의 중요성을 말씀드린 바 있다. 백두대간 오대산 두로봉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갈리는 산맥이 뻗어 나오는데 이 산줄기가 오대산 비로봉과 계방산을 거쳐 회령봉, 흥정산 옆으로 해서 삼계봉, 덕고산으로 해서 운무산으로 이어지며 경기도 용문산을 거쳐 양수리로 떨어진다. 삼계봉에서 태기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영춘지맥인데 이 산들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대산 비로봉에서 산줄기로 태기산까지 50km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전설과 소설속의 산들이 이 산맥속에 펼쳐져 호령장군이 머물렀던 산이 현재는 회령봉이라 불리고, 태기왕과 관련된 산이 태기산이며 맥국의 태기가 도망치며 몸을 던졌던 곳이 흥정산에서 발원한 흥정천이며, 횡성쪽의 전설중에 태기왕이 도망쳤던 성이 율무성인데 이는 운무산에 실제로 있다. 물론 태기(덕고)산성도 실제로 무너진 상태로 있다.
평창에 봉평, 장평, 용평, 후평, 평촌, 창리 등 평(平)자가 들어가는 곳이 유독 많은데 이유는 평탄한 땅을 원해 그렇게 지었는 지, 산악지대지만 넓은 들이 있어 그렇게 지었는 지 알 길이 없지만 이렇게 이름 붙인 곳들이 꽤 평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봉평은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고 용평은 스키장이 있는 곳이고, 장평은 우리가 올 때 버스가 국도로 나갔다 가 다시 고속도로로 들어온 곳이다.
실학자이자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의 방문기에 따르면 ‘대관령 넘는 길을 나흘 동안 걸어도 하늘과 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원시림이 빼곡이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화전을 일구느라 숲에 잦은 방화(放火)로 인구는 늘어 임금의 덕은 대단하나 국토가 망가지는 걸 한탄했다.’라고 쓰고 있다. 이중환이 1700년대 중반 사람이니 그때까지 우리가 지금 고속도로로 지나는 곳이 미개척지였를는지 모를 일이다. 1700년대 프론티어는 미국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화전민이 프론티어를 잠식하는 개척자였던 것이다. 영조후대에 쓰여진 여도지서에 따르면 조선 전체 인구가 6백만명을 조금 넘었다고 한다.
196,70년대 산림녹화란 이름으로 강원도의 수많은 사람들이 산에서 쫒겨났고 화전민촌은 사라졌다. 우리나라 인구이동의 분포를 보면 그때 인구가 가장 많이 감소한 곳이 화전민이 많이 살던 평창이었다. 평창의 인구통계를 본적이 없지만 횡성도 예외가 아니였는데 인구가 가장 많았을 때가 10만명이었던 것이 지금은 4만명을 조금 웃돌고 있다. 가진 것이라곤 도끼자루, 낫자루, 호미 몇 개가 전부였던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와 갈 수 있던 곳이 어디였겠는가? 서울과 대도시로 흩어져 도시빈민으로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인천에 강원도 사람들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강원도 출신이 5%를 넘는다고 한다. 경상도 출신과 비슷한 분포라고 한다. 부산에도 강원도 출신이 많다.
평창은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군이다. 서울의 2.7배 정도 된다. 해피 700 평창이라고 해발 700m가 가장 건강과 삶에 좋다고 선전하는데 평창읍쪽은 해발이 그의 절반도 안된다. 우리가 지금 달리고 있는 진부쪽은 500m를 넘는다.
오대산 월정사는 행정구역상으로 평창군 진부면에 속한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인 5일장의 순서가 봉평장, 대화장 진부장(소설에는 조금 다름) 순서였다. 봉평에서 대화까지 50리, 대화에서 진부까지 대략 50리길이다. 장을 마친 장돌배기들은 매일 밤 50리길을 걸어 다음장으로 향했다. 진부장은 옛부터 평창군 인근에서는 가장 큰 장으로 유명하며 동대문 밖에서 진부장을 못보면 굶어 죽을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로 규모면에서도 만만치 않았다. 산나물, 당귀, 황기, 메밀묵 등이 유명하며 현재도, 없을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물건들이 장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진부장이 포괄하는 범위는 상당히 넓다. 대화, 봉평, 평창, 횡계, 미탄 등 평창군 일대와 정선과 홍천의 내면 등에서도 진부장을 보기 위해 모여든다고 한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 밭 게로 흘러간다.’ ‘메밀꽃 필 무렵’의 한 부분이다. 음풍농월 시적 풍경을 수채화를 이리 그리라면 누가 그릴 수 있을까? 우리 장화가님한테 한번 부탁해 봐야 하겠다. 이효석은 강원도 봉평에서 출생하여 서울로 유학을 가기까지 평창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봉평면장으로 와서 강원도에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면에서 그의 소설은 다소 모던 적이다.
둔내쯤에는 눈이 내릴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갔다. 속사를 지나는 데도 여전히 비는 계속되었다. 속사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이승복 기념관이 있고 계방산 자락에 운두령이 있다. 예전 고속도로가 뚤리기전에 양양을 가려면 운두령을 넘어 홍천 내면을 거처 구룡령을 넘어 다녔다고 한다. 홍천 내면은 계방산과 오대산의 북쪽이다. 지금은 봉평에서 내면으로 보래령 터널이 뚫렸다.
운두령은 1089m로 강원도에서 자동차로 넘는 고개중 두 번째로 높고 국도상에 위치한 고개로는 제일 높다. 정선 고한에서 태백으로 함백산을 넘어가는 민향재는 1330m에 이른다. 계방산과 운두령은 우리에게 일찍이 알려졌다 1968년 11월초 북한군 민족보위성 소속 124부대원들은 3회에 걸쳐 120여명이 울진 삼척에 침투해 주민들을 상대로 북한찬양 선전활동을 벌이다가 신고로 쫒기게 되자, 게릴라활동을 전개하며 군경에 맞섰다. 군경은 이들의 소탕작전에 나섰고 많은 사장자를 내면서 북상하던 일부 북한 공산게릴라들은 계방산 자락 이승복군 집으로 들어와 북한찬양활동에 동조하지 않은 가족들을 살해하였다. 이 와중에 이승복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고 알려지면서 북한군 만행에 국민들은 치를 떨게 했다. 당시 이승복은 진부 계방산 자락에 있는 속사초등학교 계방분교 2학년 9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신문사와 기자들이 현장에 있었는지 몇몇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이로 인해 논란이 있었으나 법원은 당시 신문사 손을 들어줬다. 계방분교 자리에는 이승복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초등학교 3학년인지 4학년인지 기억은 없지만 이승복 장례식에 같은 학교 학생이 낭독했던 조사부분이 국어책에 실렸었다. ‘구름도 울고 넘는 운두령.... 너의 목소리 쟁쟁한데 너는 어디로 갔느냐!....’라는 것이었는데 이때부터 운두령은 내게 낯설지 않았다.
1968년은 내가 겨우 4살때이다. 울진삼척지구에 간첩이 침투했다고 알려진 것은 11월 4일이다. 가을걷이를 막 끝내고 찬바람이 시작되던 논에서 무엇인가 마무리 작업을 하던 동네사람들이 무엇인가 수근대며 공포감에 젖어 집으로 향하던 기억이 생생한데 나는 이때의 기억이 이 사건이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운두령에서 내고향까지 실제로 한강기맥을 통해서 오면 30km에 불과하다. 내 고향은 앞에서 이야기한 태기산 서쪽에 있다. 30km는 잘 훈련된 사람들은 산에서 5-6시간이면 달릴 수 있다고 한다. 내 동생이 산악마라톤의 국내 1인자이다. 태백산에서 소백산 고치령 백두대간길이 대략 50km 정도 되는데 높은 곳이 1500m 낮은 곳이 대략 600m 정도 되는 능선을 수없이 오르락내리락 하여야 한다. 이 친구가 이 곳을 대략 8시간에 뛰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지 3학년쯤이었느지 기억이 없지만 어느날 저녁 학교 운동장에서 영화를 상영했다. 영화를 보여준다는 말에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는지 모르지만 학교 운동장은 인산인해였다. 할아버지를 따라 운동장 가운데에 앉아 영화를 보았다. 줄거리는 다 잊었지만 북한게릴라들의 침투를 신고하려는 10살 안팎의 어린 학생을 쫓아가는 긴박한 상황과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 또한 이승복과 관련된 영화가 아니였나 싶다.
이십수년전 나는 무슨운동을 한다고 인천, 부천지역에서 집도 절도 없이 떠돌다가 완전 폐인이 되어 고향으로 낙향해 요양해야 했다. 약을 먹고 몸을 조금 추스리니 좀이 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작정 횡성읍내에 나와 막 창간했던 한겨레 지국을 찾았는데 그 곳이 횡성농민운동의 소굴이었다. 횡성은 원주의 영향으로 카톨릭 농민운동의 영향으로 강원도에서 농민운동이 제일 강했었다. 그때부터 서울물 먹었다고 받들어 주는 통에 홍천, 평창 각지역으로 농민운동 전파에 나섰는데 본업보다는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래도 뜻이 통하는 사람들이라고 가는 곳마다 돼지 잡고, 닭잡고 해서 매일 잔치날이 따로 없었다. 1989년 횡성농민회를 결성한 때가 어제 같이 느껴진다. 최근 그 때 고향에 남았서야 한다고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후회라는 것을 해 보았다.
인천서 오대산 월정사에 차로 3시간여 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나의 이야기는 도대체 언제 도착한단 말인가?
첫댓글 천천히 도착해도 되니까 열심히 풀어보쇼
저 길을... 저 고개를....이몸은 아무 생각없이 졸고만 있었으니.... 나중에 다시 갑시다. 교통정체에 사고차량으로 길 왕창 밀려버리면 좋겠다. 이야기가 월정사에 도착하지 못하게.
뿜어져 나오는 얘기의 포스들이 Never ending story 를 예감, 잼나요~^^
제목이 어째 전나무길을 걷다가 아니라' 월정사 가는 길에...' 같네요. ㅎㅎ
걷는 걸음마다 추억이 가득하네요...
잘못 바로잡습니다. 이효석의 생가는 봉평에 있습니다. 평창에 있는 보통학교를 다녔고 그후 서울로 유학했습니다. 내용을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