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란 시인>>
<<박소란 시인의 양력>>
* 1981년 서울 출생, 경남 마산에서 성장.
*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 2009년 《문학수첩》으로 등단.
* 시집『심장에 가까운 말』.
<<박소란 시인의 대표 시>>
무서운 이야기/박소란
귀신 영화를 보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너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너무 무서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잖아 꼭 누가 숨어 있는 것 같잖아 언제 불쑥 눈앞에 나타나
날 찾았니? 속삭이기라도 한다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지하철 승강장에선 헛것을 보았고 회사 엘리베이터가 잠시 작동을 멈췄을 땐 비명을 지를 뻔했다고 한다
전화기 속 너의 목소리는 점점 떨리고 나는 괜히 뒤를 한번 돌아본다
아무도 없어, 아무도
빈집에 돌아와 불을 켰을 땐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고 한다
알지?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의 그런 분위기
실은 좀 울었다고 한다
늘어진 몸을 간신히 일으켜 노트북 전원 버튼을 누르는 너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귀신 생각을 하고 귀신 꿈을 꾸고
마지막까지 죽지 않는 자는 누구일까
귀신일까 사람일까 너는 언제부터 혼자 영화를 본 거야?
넷플릭스를 보며 맥주를 마신다는 너는
벌써 취한 듯 킬킬거린다
오늘은 칼퇴 했으니!
어서 자야 하는데 내일 아침 일찍 중요한 회의가 있는데
근데 이 영화 재밌다
정말 재밌어
괴상한 웃음소리
밤의 긴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넘기는
네가 웃는 게 좋아서 전화를 끊지 못하는 나는
그래서 말인데,
인터넷에서 찾은 무서운 이야기를 불쑥 시작한다
생일/박소란
작은 상자를 본다
버스 옆자리에 앉은 이가 무릎 위에 반듯이 놓은
상자에는 뭐가 들었을까 케이크 같은 게 들었을까
어쩌면 그보다
달콤한 것? 행복한 것?
버스는 재빨리 달려간다
꼭 누가 기다리는 것처럼 식탁에 모여 앉은 식구들이 어서 어서 재촉하는 것처럼
빨간불,
빨간불,
굵은 촛농이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비가 온다
순식간에 젖어드는 거리를 본다
짓눌린 비닐에서 죽은 비둘기를, 플라타너스 찢긴 이파리에서 죽은 개를 고양이를
엄마를 본다 뭐해? 어서 불지 않고?
꼭 그렇게 얘기하는 것 같아서
옆자리에 앉은 이를 본다
그는 머리를 끄덕이며 졸고 이따금씩 흐린 창을 두드린다, 창을
축축이 휘감은 포장을 벗긴다
순식간에 젖어드는 상자를 본다
상자에 스민 물기를 살며시 훔치면
무른 모서리를 뚫고 퍼드덕, 퍼드덕거리는
무언가
나는 재빨리 달려간다
후우- 불면 폭죽처럼 터져 나올 얼굴이 있는 것처럼
나의 고양이가 되어주렴/박소란
검정 비닐봉지 하나 담장 너머로 펄렁
날아갈 때 텅 빈 마음이
여기에 있지 않고 저기로
자꾸만 저기로 향하려 할 때
정처 없이 헤매는 마음아
이리 온,
한번쯤 나의 고양이가 되어주렴
뜻 모를 젖은 손이 가슴을 두드리는 새벽
슬픔을 입에 문 젖내기처럼 골목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주지 않을래?
집집마다의 비극을 모조리 깨워 성대한 잔치를 벌이자
꼬리가 잘린 채 버려진 것들의 잔치를
그러니 이리 온,
나의 고양이야
사나운 발자국이 겁주듯 찾아든 아침
우연히 바닥에 뭉개진 비닐봉지를 맞닥뜨린 행인이 아아악!
비명을 지를 때, 정말이지 비닐봉지가
밤사이 웅크려 죽은 한 마리 고양이로 보일 때
아무렇지 않은 척 피를 닦고 일어나 다시
저기로 잠잠히 멀어져갈
나의 마음아
제발 이리 온
용산을 추억함/박소란
폐수종의 애인을 사랑했네 중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용산우체국까지 대설주의보가 발효된 한강로 거리를 쿨럭이며 걸었네
재개발지구 언저리 함부로 사생된 먼지처럼 풀풀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시의 몸 구석구석에선 고질의 수포음이 새어나왔
네 엑스선이 짙게 드리워진 마천루 사이 위태롭게 선 담벼락들은 저마다 붉은 객담을 쏟아내고 그 아래 무거운 날개를 들썩
이던 익명의 새들은 남김없이 철거되었네 핏기 없는 몇 그루 은행나무만이 간신히 버텨 서 있었네 지난 계절 채 여물지 못한
은행알들이 대진여관 냉골에 앉아 깔깔거리던 우리의 얼굴들이 보도블록 위로 황망히 으깨어져갔네 빈 거리를 머리에 이고
잠든 밤이면 자주 가위에 눌렸네 홀로 남겨진 애인이 흉만(胸滿)의 몸을 이끌고 남일당 망루에 올라 오, 기어이 날개를 빼앗
긴 한 마리 새처럼 지옥불 일렁이는 아스팔트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쳐가는 불온의 미몽이 사이렌처럼 머릿속을 낭자하게 물
들였네 상복을 입은 먹구름 떼가 순식간에 몰려들었네 깨진 유리창 너머 파편 같은 눈발이 점점이 가슴팍에 박혀왔네 한숨
으로 피워낸 시간 앞에 제를 올리듯 길고 긴 편지를 썼으나 아무도 돌아올 줄 모르고 봄은 답장이 없었네 애인을, 잃어버린
애인만을 나는 사랑했네
참 따뜻한 주머니/박소란
길바닥에 떨어진 십 원 짜리
십원으로 무엇을 살 수 있나요
아무 것도 너는 살 수 없어 말하듯
단호한 표정으로 흩어지는 풍경들,
겨울
언젠가
한 닢의 십 원 짜리를 위해 잠시
걸음을 멈출 사람
허름한 전구를 만지작거리는 것처럼
조심스레 눈동자를 밝혀 들고
값싼 화장이 뭉개진 작고 동그란
얼굴을 넌지시 들여다 볼 사람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겠지 나는
곁에 누웠던 누군가 황망히 떠난
새벽 한때의 여관방 같은 보도블록 위
십 원 짜리
십 원 짜리를 주워 살그머니 제 주머니
속으로 들일 사람
주머니는 참 따뜻할 텐데
붉은 담요를 두른 손이 있어
찬 등을 가만가만 쓸어줄 텐데
기다릴 수밖에 없겠지
기다림이 기다림의 잃어버린 모양을
문득 알아볼 때까지
별수 없으니까, 바닥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상추/박소란
퇴근길에 상추를 산다
야채를 먹어보려고
좀 건강해지려고
슈퍼에서 한 봉지 천 오 백 원
회원 가입을 하고 포인트를 적립한다
남들처럼 잘 살아보려고
어떤 이는 화분에 상추를 기른다는데
아 예뻐라 정성으로 물을 주면서
때가 되면 그것을 솎아 먹겠지
상추를 먹으면
단잠에 들 수 있다는데
상추가 피를 맑게 한다는데
나는 건강해질 것인가
상추로 인해
행복해질 것인가
밥을 데운다
냉장고에서 묵은 쌈장을 끄집어낸다
상추가 포장된 비닐을 사정없이 찢는다
찢은 비닐을 쓰레기통에 내동댕이치는 나는
행복해질 것인가
상추는 나를 사랑할 것인가
감상/박소란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쓸려갈 것 같았네
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
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
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
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공연한 파문을 일으킬 때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고장 난 저녁/박소란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끓지 않는다
고장이다
이것 좀 먹어봐요
옆집에서 삶은 감자를 한 바구니 내민다
지나치게 감사한다 여러 번 머리를 조아린다
어디가 고장인 건지
가스레인지도 보일러도 켜지지 않는 저녁
멀거니 앉아 감자를 먹는다
설익어 설컹거리는 감자를
맛있게 먹는다
먹고 밤새 잔병이나 앓을 것
빈 바구니에 사과 몇 알을 가져다 담는다
군데군데 멍이 든 사과를
아무도 먹지 않겠지
다행이다, 빈 바구니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목이 메어
캑캑거리며 물을 마신다 끓지 않는 물을
김밥천국/박소란
연인이 밥을 먹네
헝클어진 머리통을 맞대고 늦은 저녁을 먹네
주방 아줌마 구함 벽보에서 한걸음 물러나 정수기가 놓인 맨 구석 자리에 앉아
푸한 김밥 두어줄 앞에 놓고 소꿉을 살 듯
여자가 콧물을 훌쩍이자 그 앞으로 쥐고 있던 냅킨 조각을 포개어 내미는
남자의 부르튼 손이 여자의 붉어진 얼굴이
가만가만 허기를 달래네
때마침 식당 앞 정류장에 당도한 파주행 막차
연인은 김밥처럼 동그란 눈으로 젓가락질을 멈추네
12월의 매서운 바람이 잠복 중인 바깥
버스 뒤뚱한 꽁무니를 넋없이 훔쳐보다 이내 버스가 떠나자
그제야 혓바닥 위에 올려둔 김과 밥의 부스러기를 내어 재차 오물거리네
흰머리가 희끗한 주인은 싸다 만 김밥 옆에서 설핏 풋잠에 들고
옆구리가 미어지도록
연인은 밥을 먹네 김밥을 먹네
노래는 아무것도/박소란
폐품 리어카 위 바랜 통기타 한 채 실려간다
한 시절 누군가의 노래
심장 가장 가까운 곳을 맴돌던 말
아랑곳없이 바퀴는 구른다
길이 덜컹일 때마다 악보에 없는 엇박의 탄식이 새어나온다
노래는 구원이 아니어라
영원이 아니어라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어라
다만 흉터였으니
어설픈 흉터를 후벼대는 무딘 칼이었으니
칼이 실려간다 버려진 것들의 리어카 위에
나를 실어보낸 당신이 오래오래 아프면 좋겠다
기어이 비집고 나와 찬바람에 속절없이 날아오르는 오리 털처럼,
가끔 저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다.
아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문득문득 되돌아오는 것이고,
우리는 덜컹거리는 시간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악보 같은
전철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제법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차산역을 지날 때,
나는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노래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칼에 찔린 채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처럼,
마음의 흉터에서 피가 번지는 저녁이었다.
모든 몸은 버려진 악기였다.
다음에/박소란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서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 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히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 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독감/박소란
죽은 엄마를 생각했어요
또다시 저는 울었어요 죄송해요
고작 감기일 뿐인데
어디야? 꿈속에서
응, 집이야, 수화기 저편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데
내가 모르는 거기 어딘가 엄마의 집이 있구나 생각했어요
엄마의 집은 아프지 않겠구나
병원에는 가지 않았어요
고작 감기일 뿐인데
식후 삼십분 같은 말을 생각했어요 약을 먹기 위해
밥을 먹는 사람을
마스크를 쓰기 위해 얼굴이 돋아난 사람을
오, 이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일어나주지 않았어요
고작 감기일 뿐인데 죄송해요
울먹이면서
멀쩡히 잘 살아갑니다, 실없는 꿈속에서
어디야? 전화를 받지 않는 엄마
거기 먼 집
닫지 못한 문이 있고 여태
늦된 겨울을 건너다보고 있을 엄마, 감기 조심해
벽제화원/박소란
죽어 가는 꽃 곁에
살아요
긴긴낮
그늘 속에 못 박혀
어떤 혼자를 연습하듯이
아무도 예쁘다 말하지 못해요
최선을 다해
병들 테니까 꽃은
사람을 묻은 사람처럼
사람을 묻고도 미처 울지 못한 사람처럼
쉼 없이 공중을 휘도는 나비 한 마리
그 주린 입에
상한 씨앗 같은 모이나 던져주어요
죽은 자를 위하여
나는 살아요 나를 죽이고
또 시간을 죽여요
비닐봉지/박소란
알 수 없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또 그리워하는지
퇴근길에 김밥 한 줄을 사서
묵묵한 걸음을 걷는
묵묵한 표정을 짓는
입가에 묻은 참기름 깨소금을 가만히 혀로 쓸 때마다
알 수 없는,
참 알 수 없는 맛이다
밥을 먹을 때면 늘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어째서
그것은 죽은 사람의 얼굴인가
쉽게 구멍이 나는
버리면 된다, 이런 밤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검게 읊조리는
자정도 지난 골목을 혼자 서성이는
까닭도 없이
달리는
내처 나는, 날아보는, 제 더러운 날개를 찢어버리려는 새처럼
어디로든
언제든
도무지 썩지 않는
선물/박소란
상자를 열 수 없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상자는 방 가운데 있다 잠자코 있다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는
상자를 궁리하다 하루가 갔다
무언가 들었다면 깨진 것, 분명 깨지고 말 것
아무 이름도 적혀 있지 않은
상자를 열 수 없다
상자를 알 수 없다
안다면 놀랄 것인가 무서워 울음을 터뜨릴 것인가
나는 잠들 수 없다
상자를 궁리하다 밤이 다 갔다 희고 무미한 낯빛이 되어갔다
상자는 다만
상자
찢기고 뭉개질 것 버려진 것들 속에 묻혀 썩고 말 것
잊으면 그만인 것
잊을 수 없다
상자는 있는지 아직 여기 있는지, 죽은 엄마라면
알 것 같다 상자의 안과 밖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 하고 부르자
상자의 방 가운데 내가 있다
소요/박소란
사람이 있는 풍경,
그 한 장의 사진을 본다
눈이 오고 있으므로
사람은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눈은 쌓이고
사람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휘청거린다
풍경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한 사람의 걸음으로 인해
풍경은 두근거림을 피하지 못한다
나는 본다
반쯤 녹아버린 눈사람과 같은 표정으로
왜 이런 사진을 찍었나
왜 이런 사진을 들여다보나
눈이 오고 있으므로
눈 속 몸부림치는 한 사람으로 인해
눈은 쌓이고
쌓일수록 거세고
사람은 기어코 넘어진다 강마른 무릎을 짓찧는다
풍경 저 바깥 어딘가
손을 흔드는 또 다른 사람이 있는가 어쩌면
넘어진 사람은 일어선다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사람은 걷는다
저 바깥 어딘가
그러나 결코 당도하지 못할 한 사람을
나는 본다
눈이 오고 있으므로
눈이 그치지 않고 있으므로
시 쓰는 남자/박소란
노트 위에 평생을 골몰했네
힘겹게 써 내려간 다열종대의 행과 행 사이에서
그는 자주 길을 잃었네 어쩌면
마흔 일곱 혹은 여덟 번째로 향하는 급커브에서는
펜을 꺾었어야 했는지도 돌연
야근이 끝나고 돌아갈 곳이 떠오르지 않던 부랑의 밤
어둠 쪽으로 한껏 몸을 낮춘 옥상 난간에 서서
그는 실로 오랜만에 휘파람을 불었네
쇳 쇳 쇳소리가 자맥질치는 허공을 응시하다 그대로 풍덩
어둠 속에 온몸을 찔러 넣었네, 넣을 것이었네 그 순간
그가 본 건 한때 꾸었던 푸른 꿈의 심상들
누구나 한번쯤 노래했던 별, 별 같은 것 우수수
아무렇게나 떨어져 야윈 꽁지를 파닥이고 있었네
그는 왜 마침표를 찍지 못했나 이토록 오래 주저해야 했나
어떤 비유로도 건널 수 없는 나날들을 수없이 쓰고 지우며
절망의 습작만을 되풀이하며
그는 살았네 산다는 건 정체불명의 메타포
조악한 모음과 자음으로 띄엄띄엄 써 내려간
비문투성이 시, 아무도 읽은 적이 없는
그는
아직 노트를 덮지 않고 있네
심야 식당/박소란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이 싱거운 궁금증이 오래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
충무로 진양상가 뒤편
국수를 잘하는 집이 한군데 있었는데
우리는 약속도 없이 자주 왁자한 문 앞에 줄을 서곤 했는데
그곳 작다란 입간판을 떠올리자니 더운 침이 도네요 아직
거기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맛은 그대로인지
모르겠어요
실은 우리가 국수를 좋아하기는 했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귀퉁이가 해진 테이블처럼 잠자코 마주한 우리
그만 어쩌다 엎질러버린 김치의 국물 같은 것
좀처럼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 새금하니 혀끝이 아린 순간
순간의 맛
이제 더는
배고프다 말하지 않기로 해요 허기란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지
혼자 밥 먹는 사람, 그 구부정한 등을 등지고
혼자 밥 먹는 일
형광등 거무추레한 불빛 아래
불어 선득해진 면발을 묵묵히 건져 올리며
혼자 밥 먹는 일
그래서
요즘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아아/박소란
담장 저편 희부연 밥 냄새가 솟구치는 저녁
아아,
몸의 어느 동굴에서 기어 나오는 한줄기 신음
과일가게에서 사과 몇 알을 집어들고 얼마예요 묻는다는 게 그만
아파요 중얼거리는 나는 엄살이 심하군요
단골 치과에선 종종 야단을 맞고 천진을 가장한 표정으로
송곳니는 자꾸만 뾰족해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아직
아침이면 무심코 출근을 하고 한 달에 한두 번 누군가를 찾아 밤을 보내고
그러면서도 수시로 아아,
입을 틀어막는 일이란
남몰래 동굴 속 한 마리 이름 모를 짐승을 기르는 일이란
조금 외로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언젠가 동물도감 흐릿한 주석에 밑줄을 긋던 기억
아니요 말한다는 게 또다시 아파요
나는 아파요
신경쇠약의 달은 일그러진 얼굴을 좀체 감추지 못하고
집이 숨어든 골목은 캄캄해 어김없이 주린 짐승이 뒤를 따르고
아아,
간신히 사과 몇 알을 산다 붉은 살 곳곳에 멍이 든 사과
짐승은 허겁지겁 생육을 씹어 삼키고는 번득이는 눈으로
나를 본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아이스크림/박소란
이 속에도 사람이 묻혔을까
이 달콤한 봉분 속에 초코로 덮인 조그만 무덤 속에
사람이
배스킨라빈스 언 컵을 놓고 마주 앉아
정신 없이 퍼먹다 우리는
플라스틱 스푼을 놓는다 그만
놓고 만다
으 갑자기 춥네
과장되게 웅크리면서 애들처럼 괜히 킥킥거리면서
유리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깥은 겨울
패딩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뒤뚱뒤뚱 걷는다
걷다가 빙판 위에 철퍼덕 넘어지는 한 사람
야 저거 봐 봐 가리키자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너는 습관처럼 입술을 비빈다 혀로 핥는다
이 속에도 사람이 묻혔을까
손끝으로 무덤 가장자리를 톡톡 건드리면서 진득한 흙을 헤집으면서
재차 입술을 핥는다
아직 단데
사방은 온통 핑크로 장식돼 있고 우리는 너무도 멀쩡한데
언 것은 녹기 마련이라지만
그런 장면은 왠지 께름칙해서
왠지 서글퍼서
슬그머니 문을 나선 우리는
검은 발자국이 무수한 빙판 앞에 서서
이 속에도 사람이 묻혔을까
못 들은 척
겨울도 곧 끝이 나겠지 중얼거린다
천천히 걷는다
불 꺼진 간판 같은 서로의 옆얼굴을 흘깃거리면서
초코일까 흙일까
아니면 그냥 얼음일까
이명(耳鳴)/박소란
그의 귓속에 작은 집 한 채 짓고 싶었네
꽃 피고 잎 돋아 무성한 한때
몇 마리 이름 없는 새들 약속처럼 날아와
알을 품고 기르듯
우묵한 둥지 하나 틀고 싶었네
긴 한숨이 그의 몸을 들고 날 때마다 더욱 아득해지던
어느 기슭, 꿈꾸듯 홀로 누워
검게 충혈된 천장을 올려다보면
이내 바스러져 내릴 듯한 마음의 지푸라기들
그를 지탱해온 시간의 여린 어깨들
가만가만 토닥여주고 싶었네
그의 바깥을 맴돌던 노래 죄다 불러들여 놀아도 좋을
다정한 집 한 채
나는 그 속 헛것처럼 앉아 오래오래
알을 품고 싶었네
빛을 문 새들이 하나둘 알을 깨고 일어나
축포처럼 환한 울음 터뜨릴 때
나도 따라 울고 싶었네
언젠가 닿지 못한 말, 그 한마디
오랜 잠을 떨치고 와 마침내 훨훨 날아오를 때까지
끝없는 환열로 먹먹히 차 오를 때까지
오래오래 울고 싶었네
주소/박소란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
늘
안간힘으로
바퀴를 굴려야 겨우 가닿는 꼭데기
그러니 모두
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
통속적 하루/박소란
전화를 걸지 못했다
9층 사무실 창으로 내려다본 바깥 풍경이 탄식하듯 저무는
이 저녁의 낙막을 나는 그저 방관하기로 한다
눈 주는 곳마다 노을은 무너지고 순하던 잎사귀 화염처럼 치솟아
죄는 깊어 가는데 사랑의 죄 사랑할 수 없는
한 그루 은행나무
제 바로 곁에 병든 짝을 세워둔 저 맥목한 사내를
뿌리째 흔든다 한들 우리 계절은 너무나 뻔하고 뻔한 것이어서 결국
구린 열매 몇알 빈 가슴을 탕진하고 말 뿐
거리는 온통 멀어지는 뒷모습들로 가득해
누구든 어디든 붙잡고만 싶어
퇴근을 놓치고 선 하늘의 망연한 얼굴만 들여다볼 때
이대로 잠시 앓기로 한다
단지 오늘만, 끝으로
보고 싶다 한마디가 몰고 온 이 하루의 고약한 병증
휴일/박소란
전화를 기다린다
약속을 취소하고 초록이 뛰노는 한낮의 거리를
취소하고 잘 지내요?
환한 인사와 악수와 까닭 없이 들뜬
웃음을 취소한다
울음을 취소한다
티브이를 끄려다 그만둔다 비밀한 습관처럼
재방송되는 한 사람이
공들여 만든 상념의 자세와 기꺼이 암막커튼을 드리운
어느 하루,
기다린다
한 통의 전화를
기다리는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요 한 마디 대사만을 반복하며
좀처럼 퇴장하지 않는
알 듯 말 듯 묵묵한 표정을 짓는
점차 몰두하며
퍽 자연스러운 연기다 고개를 끄덕이는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취소한다
드라마는 끝나지 않고
전화를 기다린다
여보세요
퍽 자연스러운 대사다 고개를 끄덕이는 한 사람이
미역/박소란
미역이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밤 이끌리듯 불 앞에 서서 한 냄비 미역국을 끓였을 뿐인데
허겁지겁 한 덩이 찬밥을 말았을 뿐인데
사라지지 않는다
이불 속으로 손을 뻗으면 한 줌 미역이 무섭게 엉긴 한 다발 머리칼이
빈 몸을 휘감고
빈 방을 넘실거리고, 살려줘 애걸하는 모양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미역은,
대체 무엇일까 책장 가장자리 크고 두꺼운 책을 찾아 펼치자
미역은 있다 어김없이
핏기를 잃은 종이 위에 목이 꺾인 활자 위에
입가에 마른 미역 부스러기를 묻힌 채 떠도는 창 밖의 사람을 바라보다가
당신도 미역국을 먹었습니까
한 마디 건넸을 뿐인데
한 차례 눈을 마주 보았을 뿐인데
그는 몹시 운다
갈 곳을 모르는 귀신같이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뜨거운 물 속에 잠긴다
미역은 순식간에 불어나 짭조름한 살 냄새를 피우고
누구의 생일입니까 오늘은
누구를 위해 미역국은 끓고 있습니까
사라질 듯 사라질 듯
한 그릇 밤이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