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생명의 네 단계 -
네 단계의 영적 생명
간단히 말해서 믿는이와 사역자의 영적 생명에는 네 단계가 있다. 첫째 단계는 「복음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거듭남 곧 그리스도 안에 영생 얻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영혼을 구원하고 구원을 전파하며 사람들을 죄의 형벌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쓰임받도록 그리스도께로 이끈다. 이 단계에서의 목적은 완전히 그리스도를 위해 영혼을 구원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그의 복음을 충성되이 전파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두번째 단계는 「부흥의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믿는이는 성령의 충만을 체험한다. 또한 그분을 알고 좇으며 그분을 신뢰하고 앙망하는 자세로 그분을 위해 일하며 그분과 동역하여 하나님에 의해 성령 충만의 체험 안으로 이끌리도록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배운다.
그 다음 세번째 단계는 「십자가의 길의 단계」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단계에 있는 믿는이는 체험에서 자기가 로마서 6장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으므로」(빌 3:10) 주와 함께 고난받는 것을 배운다. 이들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십자가의 길을 가고, 사람들을 체험 가운데에서 로마서 6장과 고린도 후서 4장 10절부터 12절 까지의 말씀을 인식하도록 이끈다.
마지막 네번째 단계는 「영적 전쟁의 단계」로서 사실은 「승천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믿는이는 자기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으며 「정사와 권세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안다. 그가 하는 일은 흑암의 권세를 침공하고 정복하며 영적 분별력을 기르며, 이로써 마귀의 일을 꿰뚫고 그리스도의 권위를 깊이 알며 원수의 능력을 넉넉히 이기는 것이다(눅 10:19).
결론적으로 말해서 첫째는 구원받음 곧 새 생명의 단계이고, 두번째는 성령의 단계이며, 세번째는 죄를 이기는 단계이고, 네번째는 흑암의 권세를 이기는 단계이다.
만일 믿는이가 그의 그리스도인 생활 안에서 앞을 향해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그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순서대로 인도될 것이다. 1) 구원을 받고, 2) 성령을 얻으며, 3)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4) 싸움에서 승리한다.
결국은 원수의 모든 능력을 이길 수 있는 권위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사역자에게도 다음 네 단계의 일이 있다. 1)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함, 2) 성령 충만을 얻도록 사람을 인도함, 3)십자가의 도를 전파함, 4)마귀의 궤계와 일을 분별하고 보좌 위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원수의 모든 능력을 이길 수 있는 권위를 얻음이다.
귀용 여사(Madame Guyon)는, 영적 생명의 각 단계에 하나의 시작과 나타남과 결과가 있어야 그 다음 단계로 인도될 수 있다고 했다. 그 단계에서는 또 하나의 시작과 나타남과 결과가 있게 된다. 모든 단계에서 당신이 배운 것은 다 같은 것 같지만 실지로 다시 배운 것은 더 깊은 것들이다. 예를 들어, 첫 단계에서 당신이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믿는 것을 배운다면 그 다음 단계에서는 믿음을 사용하는 것을 배우게 되며 또 다음 단계에서는 다시 믿음을 사용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네번째 단계에서 당신이 배운 믿음의 공과는 첫 단계에서 당신이 배운 것보다 그 어려움의 정도가 크게 다르다. 그럴지라도 당신은 첫 단계의 어려운 공과를 돌이켜 보며 현재 배우고 있는 모든 공과에 비교해 볼 때 현재의 공과가 일반적인 것이고 용이한 것임을 느낄 것이다.
「산 굴(터널)」의 체험
일반적으로 믿는 이들 중에 한 단계의 체험을 갖는 데 수년 을 거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새로운 단계로 옮겨질 때마다 새롭고 만질 수 있는 축복들, 곧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풍성한 체험들을 얻게 된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그 단계를 미리 「맛보도록」당신을 위해 예비하신 것들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승천의 생명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것에 관한 새로운 계시를 얻었다면 그 기쁨과 영광은 아주 확실한 것이다. 그때 당신은 당신이 결코 그 전 단계로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몇 주 혹은 몇 개월 후에 소위 만져졌던 축복이 사라져 버린다면 당신은 당신이 잃었던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되찾으려고 분투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처할 때 당신은 절대적인 믿음으로 싸워 당신이 얻은 위치에 굳게 서 있어야 한다. 「산 굴」의 체험, 즉 한 번의 부흥과 한 번의 시험을 거칠때 당신은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겪은 후에 당신은 자신이 더 진보했음을 느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영적 생명의 결과에 이를 때 당신은 비로서 그 안에 머무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이는 「산 굴」의 체험 안에서 당신으로 하여금 그분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롬 5:2~5, 참조).
하나님이 어떤 메시지를 당신에게 주기 원하시고 또 실제로 당신에게 그것을 주셨다면 당신이 그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그분은 반드시 당신을 붙잡을 것이고 또한 당신에게 주신 말씀이 당신을 붙잡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주님이 하신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명령과 능력이 있어서 그것은 당신을 견고하게 붙잡을 수 있으며 당신으로 그분을 가까이하게 할 것이다. 자연히 하나님은 당신의 동역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당신은 마땅히 믿음으로써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실 때 그 능력은 그 말씀안에 들어 있다. 만일 주님께서 당신에게, 『원수의 능력을 이길 권위를 주노라』는 말씀을 주셨다면 당신은 마땅히 주님과동역하므로 그분께 『제가 이 말씀을 취하고 받겠습니다. 주여 내게는 이러한 말씀을 붙잡을 힘이 없으니 이 말씀으로 나를 붙잡아 주소서』라고 답해야 한다.
그렇다. 만일 당신이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에게서 멀리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믿음으로 전진 한다면 결국 당신은 하나님의 산 굴의 역사로 말미암은 결과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에게 빛을 주신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보게 될 것이고, 당신이 이미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이 이미 당신의 생명의 일부가 되었고 당신의 영적 생명 안에서 깊이 조성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믿는이가 모든 단계에 충성을 다하여 하나님과 동행하고 전진하므로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 싸워서 이기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면, 그는 그가 마땅히 들어가야 할 단계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영적 생명의 완전한 결과에 이르지 않고 다만 어느 단계에 도달했는데도 같은 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의 상태와 체험을 말해 줄 수 있다. 최종 결과에 이르지 않은 믿는이가 이미 겪은 몇 단계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기가 쉽지않다. 모든 단계마다 하나의 과도기가 있다. 이 과도기에서 당신은 당신이 본 것으로 사람들에게 알려 줄 수 있을 뿐이다. 당신의 일은 오로지 당신과 같은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일 뿐이다. 당신은 그들에게 당신이 현재 체험한 것을 알려 줄 수 있을 뿐이다. 당신은 오직 당신이 겪은 그 단계로써 모든 사람을 섬길 수 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당신은 그들을 섬길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의 전한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로 인해 근심할 것은 없다. 이는 당신의 메시지가 너무 높거나 깊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당신이 다른 메시지를 전할 수 없고 그 메시지를 전해야 하므로 전했겠지만 당신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적을 수도 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도울 방법이 없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설령 당신이 이 모든 단계를 다 거친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울 수는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영적 생명에 있어서는 완전히 성숙한 사람만이 빛과 진리로 모든 성도를 도울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청지기
만일 믿는이가 여러 단계를 통과했다면(수년의 시간이 필요함), 그는 흑암의 군병들을 이길 권세를 가진 단계의 최고봉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믿는이는 이미 충분한 공급과 지식과 자유함과 의의 말씀의 체험이 있는 사도들의 단계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의 청지기가 된 것이다(히 5:14). 사람이 어떤 수준에 이르렀든지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다. 당신이 이미 성숙하였다면 당신이 말을 전할 때 체험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혼에 전달하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이미 성경의 진리로 무장되고 그것으로 완전히 구비된 사람일 것이다. 이것이 참된 예비요, 성숙중의 성숙이다. 이러한 사람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주님의 일을 하기에 합당한 사람이다. 또 한가지 영적 생명의 모든 단계와 체험의 모든 단계에서 깨달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골고다가 흑암의 권세를 이긴다는 것이다.
(1) 전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사람의 혼을 결박하는 마귀를 처리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언급된 흑암의 권세에 관한 진리는 전도인이 마땅히 구비해야 할 군복과 군수 물자의 일부이다.
(2) 성령의 침례를 받은 자는 흑암의 권세를 이겨야만 무엇이 거짓된 것인지를 구분하고 그것을 거절 할 수 있다.
(3) 무릇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은 사람을 속이는 악한 영의 궤계를 인식해야 한다. 이는 속이는 영의 단계적인 저지는 당신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완전한 지식을 얻지 못하게 하고 또한 최선을 다하여 자기의 일을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섞어 놓기 때문이다. 흑암의 권세에 대한 진리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 영적 생명의 각 단계와 수준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가 안 것은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에 따른 것이다.
오늘날 한 가지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일은 앞선 분들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영적인 필요를 공급하는 것이다. 이로써 교회의 선진들은 영적인 느낌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하고 「단단한 음식」을 소화시켜 강건한 이들을 위해 예비해야 하며, 영적 음식을 「젖」과 같이 하여 어린아이들을 양육해야 한다.
남을 돕는 것에 관하여 만일 믿는이가 기도로 싸우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면 당신은 그에게 십자가를 알고 있는지, 로마서 6장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그 의미를 알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는 믿는이는 먼저 십자가의 능력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모른다면 당신은 그에게 성령의 침례를 아느냐고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체험하는 데 필요한 능력은 오직 성령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성령의 침례를 아직 모른다면 다시 한 걸음 물러나서 그에게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얻었느냐고 물어야 한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가 그의 구주이심을 모르고 그가 위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을 모른다면 어찌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사역하는 우리들은 어떻게 한 방면에서 다른 면으로 인도하여 그의 필요함을 채우는지를 알아야 한다. 또한 그가 자신이 속해 있는 단계를 알도록 도와야 한다.
성령의 침례와 십자가의 길을 아는 믿는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탄과 싸우는 법을 아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성령의 침례에 대한 지식이다. 많은 믿는이들이 아직 이것을 모르고 십자가의 두 방면을 모르기 때문에 싸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영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해야 하는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다. 흑암의 권세를 이겨야 한다는 것을 전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마땅히 십자가와 믿는이의 관계를 알도록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도해 주어야 한다. 에베소서 6장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다. 그러므로 먼저 십자가의 죽음이 있어야만 믿는이가 영적 세계에 들어갈 수 있고 영적 싸움을 할 수도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영접하는 것에 많은 근심과 답답함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성령을 영접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성령을 받은 후에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외적인 표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이들은 이에 대해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성경은 우리가 밖의 느낌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았다고 말한다.(갈 3:2~3). 그러나 우리는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시도록 모든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온전히 순종한 후에도 계속적으로 순종이 필요하다. 우리는 성령이 믿는이들 위에 역사할 수 있도록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의 생명 안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한걸음씩 그분의 지시하심을 받게 될 것이다.
어느 때라야 우리가 흑암의 권세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가?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얻는다고 전적으로 전파하는 믿는이들이 적지 않다. 또한 많은 믿는이들은 참으로 성령의 침례를 알고 「부흥의 단계」에 속해 있다. 즉 성령을 알고 성령과 동역하는 단계에 있다. 또 한 무리(인수가 많지 않음)가 있는데 그들은 성령을 알고 그 능력을 의지해 골고다의 어린양을 따르기 위해 힘차게 전진하며 십자가의 길 가운데 행하는 사람들이다.
일반적으로 마지막 무리는 대게 저지를 당하는데, 이는 그들 앞에 그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이 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어린양의 정신을 가지고서 십자가의 길의 종착지에 이르기만 하면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때 흑암의 권세는 홍수처럼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범람하여 여러모로 하나님의 역사를 저지하고 지체되게 할 것이다. 흑암의 권세는 십자가의 교통(못박힌 생명)을 소유한 사람에게 부족한 것을 알고 있다. 즉 흑암의권세에 대해 공격하고 정복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새 생명과 성령(당신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성령)의 공급하심 안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붙들고 원수에 대해 공격하는 태도를 취하는 데서 일어난 것이다」 활동하는 옛 육체의 생명에 대하여 죽고, 자고하는 혼 생명에 대하여 죽으며, 그리스도로 인해「분별」되고 세상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은 마땅히 그들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승천하여 주님의 권위 안에서 원수의 세력을 다스릴 수 있는 생명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자 - 어린양
십자가의 길을 아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위험은, 그들이 성령의 능력과 십자가의 길을 알고 마땅히 어린양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여 영적 노정에서 성실히 전진하고 있을 때 부지불식간에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서 그들의 순종이 소극적인 것으로 변해 버린다는 것이다. 즉 생각 속에서 피동적인 상태가 된다.(때로는 생각 뿐 아니라 온 존재가 피동적이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육신 안에서 대적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피동적으로」순종하게 된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그들은 사탄의 뜻을 순종하고(그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는 영 안에서 악한 영을 대적한 것임) 그를 대적하는 일에 완전히 실패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들의 순종은 (부지불식간에) 소극적으로 사탄을 순종하는 것이 된다. 오늘날 교회는 흑암의 권세에 큰 압박을 받고 있다. 많은 믿는이들이 십자가를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마귀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앞에 있는 원수를 대적하지 않고「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결국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점차「소극적으로」변하고 혹은 모든 것을 피동적으로 견디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들은 어린양을 알 뿐「사자-어린양」을 모른다. 어린양은 죽기까지 순종했지만 「사자-어린양」은 마귀를 이기셨다.
이러한 믿는이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소극적인 상태에서 나와 흑암의 권세를 공격하기 위해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 그들은 새롭게 된 생각(판단력)으로 하나님과 적극적으로 동역하여 공격하고 정복하는 태도를 취하고 승리의 기도로써 마귀의 모든 저지를 대적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서 십자가의 승리로 원수의 세력을 이기도록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죽음에 잠기므로 육신과 혼에 속한 모든 기력(氣力)이 중지되었기 때문에 능히 성령의 은사를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싸움에서 그들은 어떤 은사든지 다 사용할 수 있는데 그러한 필요는 성령이 공급해 준다.
또한 믿는이가 어떤 단계에 있든지 그들 뒤에 있는 사람들을 인도하고 도와줄 수는 있지만 결코 자신들이 들어가지 못한 더 높은 단계에 들어가도록 사람들을 인도해 줄 수 없을 뿐더러 그 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판단할 수도 없음을 주의해야 한다. 모든 단계는 그 단계에 따른 속한 사람만이 알 뿐 그 전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볼 수가 없고 알 수도 없다. 원수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앞의 두 단계에 속한 어린 믿는이들로 하여금 자기보다 전진된 단계의 진리를 대적하게 한다. 사실 셋째와 넷째 단계의 진리는 그러한 것들이 필요한 셋째와 넷째 단계의 사람을 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메시지에서 말한 믿는이의 영적 생명의 수준, 단계는 실체와 체험적인 면에서 말하는 것이지 결코 심사하는 면과 위치적인 면에서 표현한 것이 아니다. 심사하는 면과 위치적인 면의 진리에 있어서 회개의 날에「그리스도 안의 갓난아이」는 「그리스도 안의 완전한 자」로 불리워질 것이다. 사람은 어린아이에서 점점 자라 성인이 되는 법이다.『내가...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