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판소리 5대 명창 중 한 사람인 정정렬(丁貞烈, 1876~1938)은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판소리에 재능이 있어 그의 아버지는 그가 7살이 되자 서편제의 대가인 정창업(丁昌業)에게 판소리를 배우게
한다.
그러나 정정렬이 14세가 되던 해에 불행히도 첫 스승은 세상을 뜨고 만다.
그 후 새로운 스승을 찾아 나섰고 이날치(李捺致) 명창을 만나 다시 소리를 배우게 되지만 그가 16세가 되던 해에 두 번째 스승마저도 타계하고
말았다.
잇따른 스승의 타계로 말미암아 정정렬은 만사를 잊고 익산의 심곡사(深谷寺),
홍산의 무량사(無量寺), 공주의 갑사(甲寺) 등을 떠돌며 독공(獨工)에 들어갔다. 자신과의 싸움이라 그만큼 힘든 독공을 그는 25년간, 즉
40세가 될 때까지 지속했다.
정정렬의 독공기간이 유난히 길었던 이유는 스승과의 짧은 인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의 목이 문제였다. 정정렬의 목소리는 고음을 내지 못하는 탁한 수리성(쉰 목소리처럼 껄껄하게
내는 목소리, 떡목.)으로 소리를 하면 금세 목이 쉬어버렸다. 게다가 성량마저 부족했다. 그는 천재적 음악성은 타고났지만 가장 중요한 목은
타고나지 못했던 것이다. 소리에 미친 그가 이런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그래서 정정렬은 좌절감에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정정렬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오랜 수련을 거쳐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를
개발하게 된다. 40대에 경남 마산에서 소리 선생으로 활동하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서 1924년 50대가 되어서야 뒤늦게 서울의 중앙
무대로 진출했다. 1926년에는 다시 금강산에 들어가 3년 정도 김여란에게 판소리를 가르쳤고, 1930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사망할 때까지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판소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명창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결성해서 판소리의 창극화를 연구하였고, 판소리 창극을 정형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현대 창극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한다.
정정렬은 중고제 소리를 물려받았는데, 그는 자신의 소리에 신식 소리를
도입해서 정정렬제 <춘향가>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춘향가를 만들겠다는 분명한 의지가 담긴 정정렬제 <춘향가>는 당시
“정정렬 나고 <춘향가>가 새로 났다.”란 평가를 받을 정도였으며,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이에 많은 제자가 그에게
<춘향가>를 배우게 되었는데, 김여란, 김연구, 이기권, 조진영, 김소희, 홍정택, 최승희 등 한국을 대표하는 이들 소리꾼들이 모두
정정렬에게 사사했다.
일화로, 1930년 8월에는 조선일보 서부지국이 주최한 ‘조선팔도명창대회’가
있었다. 여기에서 정정렬의 인기는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으며, 그는 <춘향가>의 ‘몽중가’를 불러 커튼콜을 무려 5번이나 받았다는
후문이 있다.
정정렬은 음반 취입도 왕성하게 했는데, 이 중 임방울, 박녹주 등과 함께 낸
<춘향가> 음반은 당대 최고로 꼽혔다. “춘향가는 정정렬이 판을 막아 버렸다.”라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예술성을 인정받은 명반이었다.
또한, 1935년에는 <춘향가>와 <심청전>을 창극으로 편곡해 무대에 올렸는데, 이는 당시 창극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배비장전>, <옹고집전> 등과 같은 전승되지 않은 판소리를 창극화하여 되살렸다.
정정렬제 <춘향가>는 김여란에서 최승희로 이어져 오늘날 전주
지역의 판소리를 형성했으며 익산시에서는 정정렬의 소리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국창 정정렬 추모 전국 판소리 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가 취입한 음반 중 <춘향가> 의 ‘신년맞이’, ‘어사출두’, ‘광한루 경치’ 대목 등이 걸작으로 꼽힌다.
정정렬은 일명 수리성이라 하는 고음을 내지 못하는 거친 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약점을 이겨내기 위해 독특한 발성법과 기교, 음악적 구성을 치밀하게 연구함으로써 당대 최고의 소리꾼이 되었다.
그는 소리를 할 때 ‘엇붙이는 방법’ 즉, 본래의 장단보다 길게 늘이거나,
또는 앞당겨 붙이는 방법을 구사해서 음악적인 재미를 더했다. 이는 부족한 성량과 좋지 않은 성대를 극복하는 방편에서 나온 것으로, 복잡한
장단구조를 지니고 있어 서툰 고수는 북을 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또한 방울목(판소리 창법의 하나로 둥글둥글 굴려 내는 소리)을 써서 소리에
매력을 더했다. 이런 면에서 정정렬의 판소리는 화려하고 정교하며 세련된 표현이 넘친다는 평을 받는다.
여기에 그는 계면조(슬프고 애타는 느낌을 주는 음조로, 서양 음악의 단조와
비슷함.)를 확대해 암울한 시대의 슬픔을 소리로 표현했다. 전라도 지역의 나이 지긋한 판소리 애호가들이 판소리 5대 명창 중에서도 정정렬의
소리를 유독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정정렬의 소리에는 서민의 애환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김여란의 수양딸이자 정정렬의 수제자인 최승희는 정정렬을 이렇게 회고한다.
“선생님은 사고방식이 매우 창의적이고 진취적이셨다.
임방울 선생님의 소리는 조약돌을 톡 던져 놓은 것 같다면, 정정렬 선생님의 소리는 바위 덩어리를 쾅 던져 놓은 것 같았다. 정정렬제 판소리는
바늘 끝으로 소리의 구석구석을 파내는 것처럼 기교가 다양하다. 그래서 배우기가 무척 어려웠다.”
정정렬은 다른 소리도 잘했지만, 특히 <춘향가>로는 판을 압도해 버린다. 구제에 신제를 접목해 새롭게 만든
정정렬제 <춘향가>는 오늘날 <춘향가>의 기초가 되고 있다. 김소희, 박동진, 김연수 등이 정정렬제 <춘향가>를
기본으로 삼고 있어, 가히 현대 <춘향가>는 정정렬제 <춘향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정정렬제
<춘향가>는 소리뿐만 아니라 극적 구성과 사설의 표현이 뛰어나다. 기존의 주요 소리를 뺀 자리에 새로운 소리를 집어넣은 그의 소리는
독창적이며 음악적, 문학적 완성도가 매우 높다.
이처럼 정정렬이 판소리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여, 오늘날 판소리 연구에
그는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정정렬은 판소리 5명창 가운데 제일 나중에 데뷔했지만,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치밀한 음악성을 구사하여 당당하게 5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좋지 못한 목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여 방울목이라는
특이한 목구성을 구사하였고, 부침새가 정교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춘향가>를 그의 절륜한 목구성과 부침새로 치밀하게 짰는데,
‘어사출도’ 대목의 복잡한 부침새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가 다른 바탕에도 능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춘향가> 위주로 전할
뿐이다. 그래서 그가 취입한 대부분의 음반 중 현재 남아 있는 것도 <춘향가> 대목을 담은 것이다.
다만 <적벽가> 앨범과 <심청가> 앨범에 극소수의 그의
소리가 취입 되어 있다. 마침, <적벽가>의 ‘삼고초려’ 대목을 독립하여 취입한 것이 있어 - 게다가, 전승이 끊어진 대목이므로 -
나는 이것을 그의 대표작으로 골랐다. ‘삼고초려’는 적벽가에서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데리고 가서 공명을 포섭하는 장면을 그린 대목이다. 정정렬은
이 대목을 박진감 있게 소화했으며, 진양 우조로 위엄있게 불렀다. ‘삼고초려’ 대목만 들어보더라도 정정렬은 가히 대단한
명창이다.
• 이보형(李輔亨) : 음악인, 민속학자, 한국고음반연구회 및 한국퉁소연구회
회장
첫댓글 이보형 동문은 우리보다 세살 연상이고,
한국의 독보적인 분야를 개척한 명인으로
우리의 자랑이고 긍지라고 생각...
又耕은 명색이 외국에 산다고
자주 들리지 못해 동문 여러분께 죄송합니다.
도대체 지금 먹고 자는 자리가 어디냐, 궁금해서 그런다,
보형이는 이제 다 털어 버리고 서울에서도 가장 중심 지역이긴 한데
조용한데서 쉬고 있다, 보고 싶다면 알려줄 수 있긴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