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수가 알려주는 茶와 동아시아]
영화감독이자 차 칼럼니스트인 서영수 씨가 국내 월간지(이코노미조선)에 [서영수가 알려주는 茶와 동아시아]란 제목으로
2015년 6월부터 연재하고 있는 글을 몇 차례(5회분) 모아보았다.
글쓴이
1956년 부산 태생의 서영수 씨는 유현목, 이두용 감독 밑에서 영화를 배운 뒤 1984년에 데뷔한
대한민국 최연소 감독 출신으로 미국 시나리오 작가조합 정회원이다.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해 중국 운남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차 문화에 조예가 깊은데
동국대 영어영문과 출신으로 영어는 물론 중국어도 능숙해서 보이차 공부를 깊이 할 수 있었다고 하며,
보유 중인 보이차 관련 사진 중 쓸 만한 것만 해도 1만장이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2015년 중국 CCTV의 특집 다큐멘터리 [하늘이 내린 선물 보이차]에 출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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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차 생산의 최북단 전진기지 칭다오에 넘치는 茶香(차향)
지난해 10월17일 중국 칭다오에서 열린 제3회 중국추계국제차산업박람회.
“흐차(喝茶, 차 드세요).”
치파오(旗袍 : 몸에 달라붙는 전통 중국의상)를 입은 중국 꾸냥(姑娘 : 아가씨)의 매혹적인 소리가 커다란 홀 여기저기서 울리며 메아리쳤다. 지난해 10월17일부터 닷새 동안 중국 칭다오(靑島) 국제회의센터에서 [제3회 중국추계국제차산업박람회(中國秋季國際茶産業博覽會)]가 열렸다. 박람회는 중국 전역과 세계 각지에서 방문한 외빈과 더불어 칭다오 시민의 열렬한 참여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산동성(山東省) 칭다오는 중국 차재배지의 북방한계선이다. 동경 124도, 북위 36도에 위치한 칭다오는 한국 군산의 기후와 비슷하다. 칭다오의 차 재배지는 라오산을 중심으로 펼쳐져있다. 도교의 성지로 유명한 칭다오의 라오산(?山)은 ‘해상제일명산(海上第一名山)’으로 불린다. 칭다오 동북쪽 라오산구(?山區)에 있는 라오산에 오르면 곳곳에서 푸른 차밭과 바다를 동시에 만나게 된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란 라오산의 찻잎은 독특한 풍미가 있다. 라오산의 녹차는 은근한 중독성이 있는 쌉쌀한 맛으로 유명하다.
라오산차는 라오산에 머물던 도교 도사들이 2,000여 년 전부터 차를 직접 재배해 마셨다는 데서 유래한다. 오래된 차나무인 고차수(古茶樹)가 더러 있기도 하다. 1950년대 남방의 녹차를 들여와 라오산에 심었지만 기후 부적응과 기술부족으로 실패했다. 5만 그루의 차나무를 심었는데 2년 만에 1만 그루도 안 남고 다 죽었다. 냉해에 견디는 품종개발과 지구온난화 덕분에 1990년대 와서야 대량재배에 성공하면서 라오산의 녹차는 유명해졌다.
해풍(海風)을 머금은 라오산의 찻잎으로 만든 녹차와 홍차는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명차가 됐다. 이제는 시중에서 수많은 가짜 틈에서 진품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칭다오의 특산품이 된 라오산차를 차박람회장에서 구입하는 것도 현명해 보인다. 그런데 차박람회장의 주차장과 입구에서 차를 사라는 호객행위가 눈에 띄었다. 그들이 파는 차는 대부분 짝퉁이거나 진품이어도 장물일 확률이 높다.
명차가 된 라오산차
차박람회장 입구에는 신라시대의 포석정(鮑石亭)을 연상하게 하는 곡수거(曲水渠 : 구불구불하고 굴곡진 물도랑)가 설치돼 있었다. 곡수거 뒤편에는 '곡수유상(曲水流觴)'과 '금도차운(琴島茶韻)'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적혀 있다. 곡수유상은 서기 353년 3월3일 중국의 절강성 회계산(會稽山) 북쪽에 란정(蘭亭)이란 정자에 당시 명필로 유명한 중국 동진(東晉)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 등 명사 41인이 모여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잔이 자신의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읊는 놀이를 했다는 데서 출발하였다. 원래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라고 불렀는데 잔이 자기 자리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석 잔의 벌주를 마셨다 한다. 술잔 대신 찻잔이 흘러왔지만 차를 색다르게 즐겨보자는 발상이 흥미로웠다.
곡수유상과 나란히 쓰여 있는 금도차운에서 금도(琴島)는 칭다오 앞바다의 섬 샤오칭다오(小島)와 관련 있다. 섬이 아닌 칭다오가 지명에 섬을 뜻하는 도(島)자를 쓰게 된 것은 샤오칭다오(小島)가 있기 때문이다. 샤오칭다오는 비파 모양을 닮은 까닭에 비파 금(琴)자를 써서 칭다오의 애칭으로 금도를 쓴 것이다. 10여분이면 섬 전체를 둘러볼 수 있는 샤오칭다오는 해안에서 불과 720m 떨어져 있다. 금도의 중국어 발음도 칭다오와 비슷한 ‘친다오’로 읽힌다.
보잘것없는 어촌이었던 칭다오는 청나라 때 세관이 세워지면서 무역이 발전하였다. 칭다오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한 청나라는 1871년부터 북양함대(北洋艦隊)를 창설하면서 이곳에 해군 보급기지와 요새를 설치했다. 그 역사와 전통 속에 오늘도 칭다오에는 중국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는 북해함대 사령부가 있으며, 칭다오는 중국의 유일한 항공모함인 랴오닝함의 모항(母港)이기도 하다.
국력이 쇠한 청나라 말기에는 독일 정부가 자국 선교사 피살사건을 구실로 1897년 군대를 급파해 샤오칭다오를 교두보로 삼아 칭다오를 점령했으며, 그들이 가장 먼저 지은 것이 맥주 공장이었다. 칭다오에 눈독을 들여온 일본은 1914년 11월 독일을 몰아내고 칭다오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독일이 세운 맥주 공장에 일본 맥주공법을 더해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그 공장에서 생산된 맥주가 바로 칭다오맥주다.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한 칭다오의 차보다 칭다오맥주의 고향으로 이미 유명한 칭다오의 근대사는 맥주거품처럼 마냥 가벼운 것만은 아니었다.
차박람회장은 26,200㎡에 1,500개가 넘는 부스가 운영되고 있었다. 칭다오에 있는 차생산자를 비롯해 중국 전역에서 참여한 차창(茶廠)과 차상(茶商)들이 전시한 차를 보러온 관람객으로 주전시관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으며, 대만과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국가의 참가도 눈에 띄었다. 또 다른 층의 전시장에는 자사호(紫沙壺)와 홍목(紅木)으로 만든 차탁과 대·소도구들이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한국 부스에는 도자기로 만든 찻잔과 다구를 전시한 청봉요가 있었다. 중국인 부인의 이름으로 참석한 한국인 1명을 제외하고 순수 한국팀은 아쉽게도 청봉요뿐이었다.
(상) 관람객들이 구불구불한 물도랑을 따라 흐르는 찻잔을 바라보고 있다.
(하) 라오산의 차밭은 바다와 인접해 있어 해풍을 맞고 자라 쓴맛이 특징이다.
건창보관 창시자 천궈이 선생도 만나
차박람회 이벤트홀에는 주최측이 무대와 대형 LED 스크린을 설치해 다양한 차 관련 행사를 수시로 열어 관람객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차를 상시 시음할 수 있게 해 입과 몸을 즐겁게 해줬다.
마침 이벤트 홀에서는 보이차 건창(乾倉)보관의 창시자인 천궈이(陳國義) 선생이 자사호를 다루는 효율적인 방법에 대한 설명과 시연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지인을 낯선 칭다오에서 보니 무척 반가웠다. 천궈이 선생은 홍콩에 거주하는 중국인으로 보이차 보관에 있어 혁명적인 발상과 기법인 건창보관을 처음으로 고안해내 이를 통해 거부가 된 사람이다.
천궈이는 1948년 광동성 차오산(潮汕) 출생으로 외항선원인 아버지를 따라 일찌감치 홍콩으로 건너와 살았다. 140년 전통의 윤활유 전문회사인 영국 로콜(ROCOL)의 홍콩지역 독점대리상을 하면서 제법 큰돈을 만졌다. 돈벌이는 좋았지만 평생 할 수 있는 사업아이템을 찾다가 내린 결론이 차(茶)였다. 생태계를 오염시키지 않고 환경을 보호하면서 할 수 있다는 점이 그에게는 가장 큰 매력이었다.
1988년 다예낙원(茶藝樂園) 차판매점을 설립해 차 세계에 첫발을 디딘 천궈이에게 1993년 행운의 여신이 찾아왔다. 보이생차를 팔지 못하고 애태우던 맹해차창 영업대표인 천장(陳江)을 만나 윈난(雲南)에서 보관 중인 30톤가량의 보이생차를 헐값에 구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천궈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습한 창고에 보이차를 보관하지 않고 건조한 환경에서 보관하며 팔기 시작했다.
지금은 과학적으로 보이차를 익히고 숙성시키는 선진기법이 다양하게 개발됐지만 1990년대의 보이차는 후덥지근한 창고에 쌓아놓았다. 이렇듯 자연스럽게 습기에 노출되는 습창(濕倉)이 대세였다. 습창에 보관된 차에 비해 깔끔하고 맑은 차에 매료당한 차상과 소비자의 주문이 천궈이에게 밀려들었다.
건창보관의 창시자가 된 천궈이는 자신이 구매한 보이차에 ‘88청병’이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88은 중국어 발음으로 돈을 번다는 뜻과 유사해 중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숫자이며, 게다가 1988년은 천궈이가 처음 차 사업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88청병’의 등장으로 보이차 업계에서 보관방법의 혁신이 일어났다. 습창보관에 익숙한 상인들이 가격에서 우대를 받는 건창보관을 한 보이차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보이차의 품질과 맛을 결정하는 3대 요소 중 하나인 보관법은 건창보관인 ‘88청병’ 이전과 이후로 나눠질 정도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차 중에서도 ‘88청병’이 훨씬 높은 가격에 거래되며 귀하신 몸으로 대접을 받는 이유는 건창에서 보관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천궈이가 구매한 ‘88청병’은 대략 8만4000편으로 구입가격이 편당 1,000원도 안 된 ‘88청병’의 요즘 가격은 600만원 이상이다. 23년 동안 가격이 6,000배 이상 올랐으니 그가 거부가 안 됐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보이차 건창보관의 창시자인 천궈이 선생이 88청병 시음회를 열고 있다.
바닷가에 인접한 라오산차밭
천궈이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차박람회장의 규모와 행사내용을 파악한 필자는 칭다오 현지 다원(茶園)의 생태환경과 차창 운영이 궁금해 라오산으로 향했다. 차박람회장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샤오양춘(曉陽春)차창을 방문했다.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잘 포장된 산길은 윈난의 차산 탐방에 비하면 안락함 그 자체였다.
칭다오 차산업단지에 있는 차창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보이차를 제외한 백차, 녹차, 황차, 청차, 홍차를 모두 만든다. 가을 차를 소량만 가공하고 있는 차창은 다소 썰렁했다. 해지기 전에 다원을 보기 위해 서둘러 차창을 나와 라오산을 향했다. 진시황(秦始皇)이 불로초를 구하러 라오산에 보낸 서복(徐福)처럼 부지런히 산길을 올랐다.
산등성이에 올라서자 흙보다 바위가 많은 라오산의 기암괴석 사이로 차밭이 보였다. 차밭은 바닷가에 인접해 라오산차의 강하고 쓴맛의 원인이 되는 서해의 드센 해풍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 바다와 바로 이어지는 산자락에 펼쳐진 차밭은 신선한 볼거리였다. 라오산의 차밭은 밭고랑 사이에 배추를 심어 함께 경작하는 곳이 많다. 시원하게 펼쳐진 다른 지역의 대규모 다원과는 달리 라오산의 차밭은 척박한 화전처럼 짧은 차밭이 올망졸망 흩어져 있다. 드넓은 차밭을 기대한 사람에게는 실망일수도 있겠지만 산자락과 해안선을 따라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푸른 차밭의 색다른 풍광은 차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다음 날 다시 찾은 차박람회장은 주말답게 더욱 많아진 인파로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한국과의 접근성이 좋아서인지 한국에서 온 관람객도 의외로 많았다. 차 박람회가 열린 칭다오는 인천에서 비행기로 1시간이면 칭다오류팅국제공항(청島流亭國際機場)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또 하루 60편에 이르는 편리한 비행기 스케줄 덕에 당일치기도 가능하다.
칭다오국제차박람회를 3년째 주관하는 양원바오(楊文標) 총재는 40대 초반의 젊고 패기에 찬 경영인으로 중국에서 연간 10개의 국제차박람회를 총괄하는 그는 한국 차와 차 도구를 차박람회를 통해 적극 알리고 싶은 포부를 밝혔다. 한류의 열풍과 더불어 한국의 차 산업이 대륙에서도 꽃피우기를 기대한다.
<2015년 6월호>
茶의 영원한 동반자, 자사호의 고향 이싱(宜興) ①
4,000년 동안 밴 은은한 차향기 가득
- 이싱도자박물관 모습
알파벳 대문자로 시작하는 ‘차이나(China)’는 중국을 의미하고, 소문자인 ‘차이나(china)’는 도자기(陶瓷器)를 뜻한다. 일본을 영문으로 표기하는 재팬(Japan)도 칠기(漆器)를 의미한다. 코리아(Korea)가 유래된 고려는 청자로 유명하다. 한·중·일 삼국은 일찍이 서양인이 선망하는 ‘도자기의 나라’였다. 예전부터 흙을 빚어 고온으로 양질의 도자기를 구워내는 것은 공예예술인 동시에 최첨단 기술이었다. 가까운 미래에는 연비 높고 탄소배출량이 적은 초경량의 자동차 엔진을 세라믹기술로 생산하게 된다고 한다.
최고급 전통차호로 유명
중국은 특색 있는 도자기와 다양한 다구(茶具)를 전국각지에서 생산하고 있는데 그 중 자사호(紫砂壺)는 차를 우려내는 차호(茶壺) 중에서 으뜸이며, 오색토(五色土)라고 불리는 자사(紫砂)로 만든 자그마한 주전자가 자사호다. 자사는 장쑤성(江蘇省) 남쪽에 있는 이싱(宜興)의 딩수진(丁蜀鎭) 일대에서 나오는 철분이 많은 점토질의 분사암(粉砂巖)으로 국가에서 통제하는 희토류의 일종이다. 자사호는 유약을 바르지 않고 1,200도의 고온에서 소성(燒成)돼 통기성과 보온성이 뛰어난 무독성 차호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이싱의 자사(紫砂)제품은 2014년 1월24일 ‘중국국가지리표지보호산품’으로 등재돼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차호는 자사호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다.
4,000년의 역사를 가진 자사호의 고향 이싱시는 장쑤성 성도인 난징(南京)에서 120㎞ 떨어진 태호(太湖)와 인접해 있다. 태호(太湖)는 서울 면적의 4배만한 호수로 중국 제일의 경제권인 상하이와 난징 사이에 있으며, 40여개 다국적 기업이 내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몰려 있는 전진기지이기도 하다. 한국이 의료시스템을 수출한 곳인 이싱 세브란스검진센터가 개관을 앞두고 있다. 도자기의 중심이라는 뜻으로 '도도(陶都)'라고 불리는 이싱은 인구 200만명 중 26만명이 자사 관련 일에 종사한다. 자사를 만드는 작가 중에 중국정부에서 정한 13개의 등급에 속한 작가는 중국공예미술대사(中國工藝美術大師)를 필두로 2,300여명에 불과하다. 중국공예미술대사는 중국국무원에서 4년마다 엄선해 임명하는 명예직으로 우리로 보면 무형문화재보유자에 해당한다.
34도가 넘는 6월의 무더위 속에 난징까지 필자를 마중 나온 다이준제(戴俊傑, 42)는 21년 경력의 국가급공예미술원(國家級工藝美術員)이다. 국가급공예미술원은 자사명인 13개 등급 중 끝에서 2번째다. 경력에 비해 높은 급수는 아니지만 탄탄한 실력을 인정받아 칭화대학(淸華大學) 미술학부 수석사범으로 근무한다. 부부가 함께 공예작업을 하는데 부인의 직급이 2단계나 높다. 상위등급작가의 작품이 늘 우수하진 않지만 작품가격은 직급별로 비교적 엄격한 차등이 있다.
그와 함께 7,000년이 넘어가는 이 지역의 도자(陶瓷)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이싱도자박물관을 찾았다. 한적한 신시가지에 위치한 박물관은 고대 도자의 파편에서부터 역대 명장들의 작품을 시대별로 잘 전시해놓았으며, 전통에서 벗어난 현대 작가들의 파격적인 작품도 눈여겨볼만했다. 전문지식을 갖춘 해설사의 설명 중에 자사호의 창제자로 알려진 공춘(供春, 1506~1566)에 대한 소개는 재미났다. 해설사는 “16세기 명나라 때 금사사(金砂寺)의 스님이 차호 만들기를 즐겼다. 절에 공부하러 온 선비의 어린 노비였던 공춘이 스님의 차호를 흉내내어 만들었다. 이를 본 스님이 공춘에게 자사호 만드는 기술을 가르쳤다. 스님은 차호에 낙관을 찍지 않았지만 공춘은 차호 밑바닥에 서명을 남긴 덕에 스님 대신 자사호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고 했다.
600여 년 전 명나라 때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사용하는 용요(龍窯)를 보러 이싱의 구시가지인 수산(蜀山)의 옛 마을로 향했다. 청말 때 지어진 주택이 모여 있어 마을 전체가 문물보호단지로 보호되고 있다. 특별한 안내간판이 없어 이싱에 사는 지인도 한참을 헤매다가 용요를 발견했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는 형태로 만들어진 장작 가마는 48.6m의 길이를 자랑한다. 원래는 7개의 용요가 있었는데 현재는 유일하게 이곳만 남아 있다. 용요 입구는 커다란 문으로 막아놓아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용요 맞은편에 관리인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데 약간의 용돈을 쥐어주면 미소와 함께 출입문을 열어준다.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가마에 불을 지피고 평상시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요즘의 자사호 작가들은 실패율이 적고 불조절하기 쉬운 전기가마와 가스가마를 쓴다고 한다.
1. 수십년에서 수백년 동안 자연 풍화를 거친 자사를 이용해 자사호를 만든다.
2. 600여 년 전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용요(龍窯).
3. 청나라 시절 만들어진 자사호.
최고의 紫砂 제공하던 황룡산은 이제 채굴 금지
보이차가 세월과 함께 익어가듯이 자사호를 만드는 자사도 채굴해 짧게는 1년, 길게는 수십 년을 쌓아놓고 자연 풍화(風化)시킨 후에 제련해 다시 숙성시켜 점성을 증가시킨 다음 사용한다. 가공된 자사를 ‘니(泥)’라고 하는데 색상에 따라 자니(紫泥), 녹니(綠泥), 홍니(紅泥) 등으로 나뉘게 된다. 최고의 자사를 제공하던 황룡산은 지금은 채굴이 금지돼 입구를 막아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자사 채굴로 피폐해진 청룡산은 움푹 파여 호수로 변했다. 호수 입구에 수영금지팻말이 커다랗게 붙어있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영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유료 샤워실과 탈의실도 있는 것이 의아해서 관리인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수영금지 경고문은 얼마 전 시에서 만든 것이고, 수영하는 사람들은 그 이전부터 오랫동안 이곳에서 수영을 하던 사람이어서 막을 수가 없다”며 말은 되지만 이해하기 힘든 말을 했다.
해질 무렵 자사 작가들의 성지로 불리는 자사 1창에 있는 다이준제의 공방을 찾았다. 공방은 작품을 전시 판매하는 공간과 작업실로 이뤄져 있다. 1954년 국영기업으로 출발한 자사 1창의 정식 명칭은 '이싱자사공예창'이다. 자사의 수요가 한창일 때 1부터 5창까지 설립됐는데 1창의 작가들이 가장 우수해 예술품을 창작하는 명인들이 1창에서 배출됐다. 민영화된 지금도 이곳에 입주한 공예가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2015년 7월호>
茶의 영원한 동반자, 자사호의 고향 이싱(宜興) ②
일대종사(一代宗師)로 추앙받는 구징저우
모방에서 시작, 자사호의 ‘정점’이 되다
1. 자사공예 대가로 추앙받는 구징저우.
2. 중국 베이징의 자사호 경매에서 2450만 위안(약 44억5000만원)에 낙찰된 구징저우의 ‘석표호’.
3, 4. 구징저우 작품들
신경숙 작가의 표절시비 중심에 일본의 유명작가가 있다. 광복 70주년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96주년인 올해도 문화 전반에서 일본 베끼기는 아직도 유효한 모양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출처를 없애거나 속인다면 그것은 사기다. 모방으로 출발했지만 진품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아 온 도자공예의 세계적 명인이 있으니 자사공예 일대종사(一代宗師)로 추앙받는 구징저우(顧景舟, 1915~96)다.
지난 5월19일 중국 베이징의 자사호(紫砂壺) 경매에서 구징저우가 1948년에 만든 ‘석표호(石瓢壺)’가 2,450만 위안(약 44억5000만원)에 거래됐다. 지난해에는 인민폐 1,700만 위안(약 30억원)이 구징저우 작품의 최고 낙찰가였다. 중국의 공예미술품 중에서 제일 잘나가는 이싱(宜興) 자사호(紫砂壺)의 경우 생존 작가의 작품도 억대를 넘어가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하지만 시진핑(習近平)정부의 반부패 정책으로 고가품 시장이 꽁꽁 얼어붙은 상황에서 나온 초고가 낙찰소식에 중국 전역이 술렁였다.
때마침 6월6일 이싱에서 구징저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 ‘고경주(顧景舟)’가 크랭크인 했다. 현장에는 영화관계자는 물론 장쑤성(江蘇省) 서기 등 고위관료가 대거 참석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구징저우의 지도 아래 성장한 대가들이 영화제작을 축하하러 간만에 모두 모였다. 출연배우들보다 더 화려한 조명을 받은 자사명인들은 대부분 자사1창 출신이다.
이싱을 빛나게 한 주인공
1954년 중국정부가 설립한 자사1창은 근대 자사의 살아 숨쉬는 역사로서 오늘날 자사공예 예술과 산업이 절묘하게 공존하며 작지만 강한 소도시, 이싱을 빛나게 한 본령이다. 자사(紫沙)의 유일한 원산지인 이싱에서 자사1창이 갖는 위상은 크고 깊다. 그 초석에 자사공예의 정신적 지주인 구징저우가 있으며, 그를 기리는 영화는 구징저우의 생일인 오는 10월에 맞춰 중국 전역에서 개봉한다고 한다.
영화 속 실존인물인 구징저우는 조상 대대로 자사공예 고수들이 활약하는 이싱 촨부(川埠)에서 태어났다. 그는 18살부터 부모의 가업을 이어받아 자사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명·청 시대의 자사호 도록을 보며 연구했다. 그는 1930년대 말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골동상인의 주문으로 명·청 시대의 모방품을 수없이 만들었다. 그가 재현한 용파봉취(龍把鳳嘴) 등 모방품은 진품을 앞선다고 평가받아 베이징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그는 작가정신 없이 모방품을 재현한다는 비판 속에서도 명·청 시대의 제조 방식을 묵묵히 연구했다. 상하이에서 모방품을 만들며 생긴 돈과 여유로 화가·서예가와 친분을 쌓아갔으며, 그들과 나눈 교감을 작품에 조금씩 반영하기 시작했다. 모방에 그치지 않고 고전을 바탕으로 한 구징저우의 독창적 예술세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54년 이싱자사1창의 제작책임자로 부임한 구징저우는 후배들에게 똑같은 자사를 1년 이상 반복해서 만들게 했으며, 자사호를 만들 때마다 제작후기를 쓰도록 했다. 그는 직계제자가 아닌 다른 문파의 후학들에게도 가르침에 인색하지 않았다.
자사 작가들의 성지로 불리는 자사1창.
유명작가 작품 베끼기에 혈안
구징저우는 1958년부터 시작한 대약진운동의 최대 목표인 생산량 증대에 연연하지 않고 제자들이 창작을 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었다. 이러한 그도 지식인뿐 아니라 전문가를 폭행하거나 피살하는 일이 다반사인 문화대혁명의 광폭한 소용돌이 속에서는 자신의 작품에 낙관도 남기지 못하는 창작의 시련을 겪었다. 다른 작가들도 낙관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시나 그림을 자사호에 새겨 자신의 작품임을 아는 사람만 알게 만들었다. 때로는 죽은 작가의 낙관을 사용하기도 해 나중에 진위논란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 시절이었다. 어느덧 대가가 된 구징저우는 1988년 자사 역사상 최초로 중국공예미술대사가 된다.
베끼기에서 출발해 정점에 오른 그를 흠모하는 집단이 생기며 부작용도 생겼다. 제2의 구징저우를 꿈꾸는 수많은 자사 작가지망생들이 유명작가의 작품 베끼기에 혈안이 되었으며, 모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낙관도 아예 유명작가의 이름으로 찍어 진짜 짝퉁을 만들어 시장에 유통시켰다. 반면에 일부 유명작가는 제자를 지도한다는 미명 아래 제자들에게 작품을 만들게 한 후 자신의 낙관만 찍어 터무니없는 고가로 세상에 내놓았다. 작품의 질보다는 작가의 유명세와 직급이 가격을 만드는 자사호 유통의 허점을 악용하는 행위가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었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제자를 이용하는 스승보다 똑똑한 제자는 어려운 자사기술을 배우기보다 스승의 낙관만을 흉내내거나 아예 인장을 훔쳐 스승 몰래 사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흉흉한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중국 관영 CCTV에서 장기간 잠입취재를 해 2010년 5월23일 이를 심층 보도하였다.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과 제자가 대신 만드는 대공(代工), 순수한 자사 원료 대신 화공약품을 사용하는 사례가 밝혀졌으며, 그 파장은 중국을 넘어 한국에까지 전해졌다. 자사호에 대한 불신은 자사호 시장의 심각한 침체를 가져왔으며, 국내외 소비자의 불신과 외면은 중국공예미술학회작가들의 자정결의를 이끌어냈다. 공멸의 위기를 인지한 이싱시 인민정부가 앞장서서 도자협회와 함께 관리감독에 나섰지만 TV보도폭탄이 지나간 후 자정노력은 구호로만 그치고 원료가격만 폭등했다는 후문이다.
상당수 작가들이 작품에 열중하기보다는 손님접대에 더 공을 들이는 이유는 돈이다. 실력으로 직급을 높이기보다는 돈으로 지위를 사고 높아진 지위에 걸맞은 고가에 작품을 팔 수 있기 때문이다. 모방이 목표가 아닌 수련 과정이었던 구징저우의 작가정신이 퇴색되고 있어 아쉽다.
<2015년 8월호>
茶의 영원한 동반자, 자사호의 고향 이싱(宜興) ③
자사(紫砂)의 명장 만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
(상) 양선차 다원, (하)죽해
한낮의 무더위를 피해 새벽 6시에 안내인 없이 혼자 호텔을 나섰다. 세계에서 제일 규모가 큰 차도구시장이 새로 형성된 ‘중국도도 도자성(中國陶都 陶瓷城)’을 승용차가 아닌 두 발로 돌아보고 싶었다. 중국전역에서 생산되는 모든 차도구와 유명 도자기가 산지별로 잘 전시돼 있는 ‘중국도도 도자예술센터’를 비롯해 25만㎡에 달하는 신시가지에 펼쳐진 자사공예작가들의 개인작업장과 상품화된 자사호가게들을 자유롭게 보고 싶었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일찌감치 문을 연 도매상들은 중국각지와 해외로 보낼 상품들을 포장하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안면이 있는 사장들과 가벼운 인사만 주고받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의 작업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나도 보고 싶은 곳이 많았다.
중국도도 도자성의 상징물
우연히 만난 자사작가
안면 있는 작가와 상점을 피해 평소에 안 가본 구역을 열심히 탐방하고 있었는데 승용차가 옆에 와 멈춰 섰다. 지난해 사귄 자사작가가 아들을 등교시켜주고 자신의 작업장으로 가는 길에 나를 본 것이다. ‘딱 걸렸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마침 다리도 힘들고 목도 말랐다. 이싱의 자사공예는 예전에는 자사1창과 같은 대규모 공장에서 생산했지만 요즘에는 작가의 개인공방 위주로 작품과 상품이 만들어진다. 지금은 쌍교촌으로 이름이 바뀐 윤가촌과 서망촌이 대표적인 가내수공업지역이며, 도제시스템으로 운영된다. 안타깝지만 이곳에도 열정페이는 존재하는데 다만 꿈을 안고 중국각지에서 찾아온 청춘들에게 숙식은 기본으로 제공한다.
신시가지인 중국도자성은 1층에는 전시장과 작업실로 돼 있어 작가의 작업 모습과 작품을 외부에서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다. 2층은 전시실을 겸한 응접실과 사무실로 사용하며, 3층은 주거 공간 또는 창고로 활용한다. 부부 작가인 이들은 남편은 주로 상담과 손님접대를 하고 아내는 작품 만들기와 가정을 살핀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나를 차에 태우고 온 여류작가가 아침부터 음식 솜씨를 발휘하겠다며 주방에 들어갔다. 남편은 30년째 보관해온 술을 가져와 권했다. 진퇴양난이었다. 이싱의 산해진미 중에 빠지지 않는 ‘3백’과 ‘1흑’이 있는데 면적이 제주도만한 태호(太湖)에서 나오는 흰색 새우와 은빛 생선 그리고 대나무로 가득한 4,000만㎡ 면적의 죽해(竹海)에서 나오는 하얀 죽순이 이싱의 대표음식 중에서도 ‘잇 아이템(it item)’이다. 넓은 중국에서도 오로지 이싱의 산속에서만 나온다는 검은 쌀이 약성을 가진 흑색특산음식이다.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만들어내겠다는 정성에 나의 탐방계획은 깨끗이 물 건너갔다.
아침부터 정성이 가득 담긴 식사를 하고 지난 겨울에 만난 리창홍(李昌) 대사의 공방을 찾아갔다. 중국공예미술대사(中國工藝美術大師)인 그는 언덕위에 커다란 건물을 지어놓고 아내, 딸과 함께 공예작업을 한다. 그의 공방은 대형트럭이 출입 가능한 커다란 철문에 경비실까지 갖춘 기업형 공방이다. 출타중인 그 대신에 장쑤성 공예미술대사(江蘇省工藝美術大師)인 부인과 담소를 나누며 그의 작품전시실을 구경했다. 대다수의 작가들이 자사호의 형태만 만들고 호에 새기는 글과 그림은 다른 작가에게 의뢰하는데 리창홍 대사는 서(書)와 각(刻)을 모두 직접 하는 몇 안 되는 귀한 작가다.
호텔로 돌아오니 국가급공예미술원(國家級工藝美術員) 다이준제(戴俊傑, 42)가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마트폰 없이 산책삼아 나갔던 외출이 오전을 지나 오후로 향하고 있었다. 다이준제가 “사부님인 리준지에(呂俊傑)가 베이징에서 당신을 만나러 오고 있는 중”이라고 전했다. 리준지에는 ‘자사공예의 피카소’로 불리며 살아 있는 전설로 인정받는 리야오첸(呂堯臣)의 둘째아들이다.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시안(西安)포병학교로 가버렸다가 돌아온 장남과 달리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어려서부터 재능을 키워온 리준지에를 편애하는 리야오첸 대사는 장남 대신 리준지에와 함께 살며 리씨호예(呂氏壺藝)를 이끌고 있다. 리야오첸 대사의 자사호는 중국의 유명 박물관뿐만 아니라 영국의 대영박물관에도 전시되어 있다. 케임브리지 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라 있는 그의 자사호는 한 점에 평균 3억원을 넘어간다. 장쑤성 공예미술대사로 활동하는 리준지에는 장쑤성 정무위원이기도 하다. 2014년 5월20~21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CICA)에 참석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중국예술인을 대표해 자신이 만든 자사호를 선물하기도 했다.
리준지에가 이싱에 오기 전에 여유시간이 있어 이싱의 차밭과 죽해를 가보기로 했다. 이싱의 차는 양선차(陽茶)라고 하여 당나라 때부터 황실공차로 유명한데 그 맥을 이어받은 양선차산업원은 3,600만㎡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다. 끝없이 펼쳐진 다원과 어우러진 대나무 숲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됐다. 천 년 고찰 부용사 옆에 있는 부용차창에 잠시 들렀다. 유기농 차와 야생 상태로 차나무를 방치해 채취한 차를 생산하는 곳이다. 차를 만드는 시즌은 아니었지만 제다시설을 잠시 관찰했다. 회사벽에 붙어 있는 난징(南京)농업대학과 연계한 산학협력 간판이 인상적이었다.
1. 양선차산업원 표지석, 2. 리창홍 대사의 자사작품
3. 리준지에와 필자, 4. 좌로부터 후즈룽 세계중국인협회 주석,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리준지에
예술품과 예술인이 살아 있는 이싱
부용차창에서 30분 정도 차로 달려가니 죽해공원(竹海公園)이 나타났다. 대만 출신의 이안(李安) 감독이 연출한 무협영화 ‘와호장룡’의 촬영지다. 이곳의 대나무 숲은 개혁·개방 이전의 중국을 왜 죽의 장막이라고 불렀는지 실감하게 해줬다. 바다처럼 드넓은 죽해에서 길을 잃지 말라고 곳곳에 세워둔 안내문에는 반가운 한글이 적혀 있었지만 내용은 생뚱맞은 구글 번역기 수준이었다. 정상까지 오르는 케이블카도 있었지만 일부러 걸어 올랐다. 몸은 힘들었지만 행복지수는 마구 치솟았다.
여유로운 산행을 만끽하고 리준지에를 그의 공방에서 만났다. 그의 첫인상은 중국CCTV에서 자사호를 주제로 한 대하 역사드라마의 주인공답게 멋졌다. 두 편의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도 출연한 그는 실제로 무술의 달인이다. 드라마 주제가를 부를 정도로 노래도 잘하는 그가 자신의 작품도록을 나에게 주기 위해 서명을 했는데 그 필체에 힘이 넘쳤다. 그는 “부친이 이틀 후에 돌아오면 집으로 초대하겠다”고 했지만 다른 일정 때문에 이싱에 더 머물 수 없었다. 이싱에서의 즐거움은 자사호 작품 감상과 구매도 매력 있지만 자사작가와의 교류는 그 중 으뜸인 것 같다. 명승지 관광은 한 번이면 족하지만 예술품과 예술인이 살아 있는 곳은 올 때마다 새로운 자극과 감흥이 생긴다.
<2015년 9월호>
쓰촨(四川) 국제문화관광 축제서 만난 차
눈과 코를 마비시키는 치명적 유혹 ‘이빈자오차(宜賓早茶)’
2015년 8월 22일부터 26일까지 중국 사천성 이빈(宜賓)에서 ‘산수이빈(山水宜賓)’이라는 주제로 열린 [2015 쓰촨국제문화관광 축제]에 팸 투어를 다녀왔다. '만리장강제일성(萬裏長江第一城)'으로 불리는 이빈은 쓰촨성 성도인 청두(成都)에서 서남방향으로 352㎞ 떨어져 있으며, 인구 76만명의 소도시이지만 8개현이 속한 450만명의 행정중심도시로 양쯔장(揚子江)이라 불리기도 하는 창장(長江) 6,300㎞가 시작되는 첫 항구도시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칭짱고원靑藏高原)에서 발원한 진사장(金沙江)과 민장(岷江)이 이빈에서 만나 비로소 중국에서 제일 긴 창장이 돼 상하이(上海)까지 흘러간다.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풍부한 이빈은 예로부터 차와 술이 유명하다.
이빈자오차에 물을 부으면 찻잎이 춤을 추듯 수면 위로 떠오른다.
술과 차의 도시, 이빈
이빈의 남쪽 강변에는 3,000년 전 춘추전국시대부터 형성된 리장구쩐(李莊古鎭)이 있다. 미로처럼 뻗은 골목상점마다 세월에 농익은 독특한 술을 빚어 팔고 있다. 돼지수육을 백지장처럼 얇게 저며 새우젓 대신 매운 양념을 얹어 술안주로 내놓는 바이로우(白肉)는 리장구쩐의 ‘잇 아이템(it item)’이다. 강이 보이는 경치가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찻집이 있었다.
다음 날 첫 일정은 쯔궁(自貢) 세계지질공원 안에 있는 공룡박물관 방문이었다. 1915년 공룡 화석이 처음 발견된 후 40여 곳에서 대규모 발굴이 이루어졌다. 1972년 쯔궁 외곽 7㎞ 지점에서 100마리 이상의 공룡화석이 반경 0.5㎞ 안에서 대거 발굴되었다. 그 위에 세워진 공룡박물관은 발굴 당시의 공룡화석을 그대로 전시해 관람객이 직접 만져볼 수 있는데 ‘촉수엄금(觸手嚴禁)’이 상식이 된 박물관 전시관행에 비춰 볼 때 신선한 충격이었다.
24,000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이빈 우량예(五粮液) 공장에 도착하니 정문에서 브라스밴드가 흥겨운 연주로 우리 일행을 맞이했으며, 상설공연장에서는 이빈의 술 역사와 우량예 제조과정에 대한 화려한 공연이 펼쳐졌다. 우량예는 가내수공업 형태로 발달한 이빈의 다양한 향토 술 가운데 600여 년 전부터 두각을 나타냈는데 1959년 중국 정부로부터 ‘쓰촨이빈우량예’라는 브랜드로 공식인정을 받을 때만 해도 조그만 향토기업에 불과했다. 1979년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쓰촨성 광안(廣安)시 출신의 덩샤오핑(鄧小平)이 환영만찬장에서 우량예를 선보인 후 국빈전용주(國賓專用酒)로 위상을 높였다. 장쩌민(江澤民) 주석과 후진타오(胡錦濤) 주석도 우량예 공장을 방문해 격려했다고 하는데 '십리주성(十里酒城)'이라는 애칭답게 공장의 규모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셋째 날에는 먀오(苗)족이 모여 사는 싱원(興文)에 도착했다. 커다란 광장 가운데 먀오족이 선조로 모시는 치우제(蚩尤帝) 동상이 서있었다. 동상을 중심으로 먀오족 200여명이 집단가무로 반기며 성대한 환영의식을 베풀었다. 먀오족민속촌에서 이빈의 자랑거리인 이빈자오차(宜賓早茶)를 만났다.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이빈자오차(宜賓早茶)는 이름처럼 매년 제일 먼저 차를 생산하는데 녹차의 주생산지인 장쑤성(江蘇省)과 저장(浙江)성보다 20~30일 정도 빠르다. 2010년 3월 10일부터 베이징에 있는 댜오위타이(釣魚臺, 영빈관)에서 국빈전용차로 사용하고 있다. 차를 만들 시기는 아니지만 신선한 찻잎으로 차를 만드는 과정을 거리에서 시연하고 있었다. 이른 봄 찻잎으로 펼쳐지기 전의 어린 싹 상태에서 채취한 자오차에 더운 물을 더하면 바닥에 가라앉아있던 찻잎이 하나 둘 춤을 추듯 공중부양을 하며 수면 위로 떠올랐다. 녹색의 안무를 눈으로 즐기는 사이에 봄의 체취가 코를 마비시켰다. 먀오족 차예사(茶藝師)가 따라주는 향긋한 찻물은 치명적 유혹이었다.
자오차를 텀블러에 가득 채우고 다음 행선지인 싱원스하이(興文石海)로 향했다. 약 5억년 전 지각변동으로 생긴 아시아 최대의 카르스트(Karst) 지형은 윈난(雲南)성의 스린(石林)과는 또 다른 풍광이다. 스린이 돌기둥의 향연이라면 스하이는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의 잔치다. 기암괴석 사이를 누비다보니 출출하던 차에 식당으로 이동했다.
버스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천연동굴을 빠져나오니 뻥 뚫린 하늘과 축구장만한 광장이 나타났다. 10.5㎞에 달하는 텐취앤동(天泉洞)의 입구였다. 동굴입구에 가설된 무대에서는 먀오족과 보족의 민속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식탁을 길게 연이어 놓은 70m에 달하는 창제옌(長街宴) 위에 토속요리가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화려한 전통의상을 입고 대기 중이던 복무원이 모든 테이블로 와서 웰컴드링크로 찹쌀로 담근 토속주를 권했다.
(좌) 먀오족 200여명이 집단 가무로 반기며 성대한 환영의식을 베풀었다.
(우) 이빈의 대표적인 고량주인 우량예를 만드는 공장.
대나무의 첫 잎으로 만든 주신차 발견
항일전쟁 당시에 국민당 군대가 무기고와 화약고로 썼다는 천연의 요새는 배로 이동하는 구간이 있었다. 인공분수터널과 길이 200m의 3단 미끄럼틀구간도 있어 재미를 더했다. 동굴탐사를 끝내고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보족 마을로 갔다.
보족은 사람이 죽으면 절벽에 관을 매달아 풍화시키는 현관(懸棺)풍속을 지키는 소수민족이다. 명(明)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 때부터 공차(貢茶)로 진상돼 온 루밍차(鹿鳴茶)는 보족이 만드는 녹차로 지금도 중국차산업박람회에서 여러 차례 금상을 받으며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팸투어 마지막 날을 축하하듯 가랑비가 흩뿌렸다. 중국에서 가장 크다는 대나무의 바다, 쑤난쭈하이(蜀南竹海)를 보러 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날씨였다. 축구장 3만개 넓이의 대나무 숲 가운데 18,000개 넓이를 개방해 도보와 케이블카로 관람이 가능하다. 무협영화의 신세계를 연 ‘와호장룡’의 촬영지로도 알려진 쑤난쭈하이에는 하이중하이(海中海)로 불리는 커다란 호수가 있어 대나무뗏목을 타고 유람을 할 수 있다. 우중산책 중에 뗏목선착장 옆에 있는 찻집에서 재미난 대용차(代用茶)를 발견했다. 아주 어린 대나무에서 처음 돋는 잎을 봄에 채취해 만든 주신차(竹心茶)의 향과 맛은 비릿한 날씨를 한방에 날려줬다. 새로운 차의 발견은 오늘도 즐거웠다.
<2015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