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황당(城隍堂)과 서낭당(西娘堂)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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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城隍)의 첫 기록은 다음과 같은 부도지 14장에서 시작된다.
“그 뒤에 천년 사이에 성황이 전역에 널리 퍼지더라. (爾來千年之間 城隍 遍滿於全域)” 성황과 서낭(西娘)의 차이를 역사적 관점에서 풀어 보면, 성황의 표기는 모화사상(慕華思想)에 기인된 것으로 서낭(西娘)의 오기로 보인다.
서낭의 낭(娘)은 아가씨의 뜻 외에 ‘어머니’의 뜻도 갖고 있다. 어머니 쪽을 중심으로 혈통이나 상속이 이루어지는 사회, 즉 모계 사회(母系社會)로 서녘에서 오신 어머니 즉 마고이시며 삼신할미로 계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부도지 1장에서 “마고(麻姑)는 희노의 감정이 없으므로 선천(先天)을 남자로 하고 후천(後天)을 여자로 하여 배우자 없이 궁희(穹姬)와 소희(巢姬)를 낳고 궁희는 황궁(黃穹)과 청궁(靑穹)을, 소희(巢姬)는 백소(白巢)와 흑소(黑巢)를 마고의 정을 받아서 배우자 없이 각기 두 천인과 천녀를 낳았다.” 하여 인류 최초 모계사회의 태동을 알리고 있다.
그 곳이 마고성(麻姑城)이며, 동이족이 웅거하던 대륙의 서녘지역이니 그 곳에서 오신 어머니인 삼신할머니가 아닌가. 생명을 잉태(孕胎)하는 모체(母體)가 여자였으며, 여자를 생명의 뿌리로 보았던 것이다.
▲ 금문의 城자 ©편집부
참고로 城과 隍의 글꼴 변천과정을 살펴보자.
금문의 城자는 성을 지키는 무기(戊)와 성의 망루를 뜻(금문1)했는데 망루를 그리기 번거러워(금문2) 흙(土)으로 대치된 글자이다. 금문은 상주시대(商周時代) 청동기에 주조(鑄造)되어 있거나 새겨진 글자로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부른다.
▲ 소전의 皇자 ©
隍자의 소전을 보면 성 밖을 둘러 싼 못(垓子), 즉 城池라고 설문은 풀이했다. 토성을 쌓기위해 파인 구덩이에 물을 채워 적의 접근을 차단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 해자이며 皇은 독음, 부(阜)로 뜻을 나타낸 것으로 진나라 때 만들어진 글자이다.
성황은 마을 뒷산에 쌓아 적군을 방비하던 축성(築城)의 뜻이며, 서낭은 마을 어귀에 지어져 마을의 안녕과 만민의 안녕을 기원하던 기도의 터이다.
城의 고대어는 ‘잣’이다. '잣'은 순수 고유어지만 그 어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잣의 ‘자’는 “물체가 있거나 그것을 둘 수 있는 공간”을 뜻하는 말이니, 공간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풀이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757년 신라 경덕왕 때 지명을 개칭하면서 이전에 사용하던 ‘자, 지’와 '재'의 뜻이 들어간 행정지명을 중국식으로 거의 모두 '성(城)'자로 바꾸었다. '잣'의 원말은 '위'의 뜻으로 지형을 나타낼 때는 '산꼭대기'나 '등성마루'의 뜻으로 뒤에 표준말로 정착되고, 잣 →자, 지 →재로 변하여 한재, 갈재, 새재 처럼 산이나, '고개'의 뜻으로 변하였다.
예를 들면, 1428년(세종 10) 우의정으로 물러난 유관(柳寬 1346-1433)이 삼성사(三聖祠)에 관한 상서(上書)한 내용에, ‘단군 조선 때는 아사달산(阿斯達山)이며, 신라 때에 궐산(闕山)이라고 고쳐 불렀다’하여 그 유래를 밝혔다. 단군시대 도성이었던 ‘아사달’ 말미 山은 원말인 ‘잣’에서 ‘성’과 ‘산’으로 변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잣’이 쓰인 옛 지명에 ‘잣안ㆍ잣미ㆍ잣골ㆍ잣실’ 등이 있음을 볼 수 있고, 성안(城內)을 뜻하는 ‘잣안’은 ‘장안’으로 쓰고 있다. 흔히 ‘잣’을 ‘잣(栢)’과 연관 짓기도 하나, 실제로는 단순히 '산(山)’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많음을 유념해야 하겠다.
태초에 소리〔音〕가 있었고, 소리 값이 뜻글인 한자로 변화, 정립했다. 한자는 분명 우리의 뜻글이기는 하나 결코 한자에만 너무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머니 마고의 역사를 전해주던 신성지역 서낭당, 크고 넓은 세상을 아우르던 여신〔姑〕과 자재율 속에서 살았던 하늘나라 마고성의 축약지인 기도터가 아닌가.
이능화(李能和·1869~1943)는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에, “모엄이란 자가 자기의 일을 도와 달라고 성황에게 빌었으며, 당나라 장설과 장구령의 성황에 대한 제문이 있고, 송나라 이후에는 성황신사가 천하에 퍼졌다. 명나라 초기에는 경도의 군현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으며, 청나라도 이에 따랐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문종 때 신성진에 성황사를 두었으며 위엄 있게 숭배했다.”라 하고,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이르기를, 본 조의 성황당은 바람 ․구름 ․우뢰 ․비를 함께 하고 성황신을 받들었다. 바람․ 구름 ․우뢰 ․비의 신을 오른쪽에 정좌시켜 남향으로 하고, 풍우단(風雨壇)에 신사를 행했다. 여제(厲祭)를 먼저 행한 다음 성황단에 제사를 드렸는데 이것을 여제일이라 했다. 또한 성황신은 곳곳에 있으며, 무격이 기축하는데 반드시 신이 있다 하였다. 모든 성황신은 국도를 비롯한 팔도를 편안하게 하는 신이므로 나라를 보호하는 신이라 부른다.”했다.
윗 글에서 이능화는 조선무속고라는 연구 논문을 통해 민속에 대해 관심을 불러 주었다. 참고한 문헌비고(文獻備考)는 1770년(영조46) 홍봉한 등이 왕명을 받아 100권으로 만들어 <동국문헌비고>라 했다. 최초의 편찬 기록이다. 전통문화에 관한 백과사전으로 제도, 문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모화사상기에 만들어진 자료의 언어 구성 문제인 성황의 뜻 말을 재 검토해야 할 것으로 본다.
조선의 실록과 고전 또한 ‘성황’의 표기를 고수, 사대에 충실했다.
기원전 1891년 11세 도해 단군에 이르러 ‘오가에 명을 내려 열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였다. 많은 박달나무를 심고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한웅의 상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를 지내며 웅상이라고 이름 했다‘는 단군세기 기록을 성황당의 시원으로 둔갑시키는 일도 삼가해야 할 것으로 본다.
성황은 춘추필법의 관습에 의해 써진 낱말일 뿐이다. 이로 미루어 성황당(城隍堂)은 서낭당(西娘堂)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성황당에 대한 화하의 사초 첫 기록은 239년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안휘성 (安徽省) 무호(蕪湖)에 사당(성황당)을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전쟁과 재해, 전염병 등이 발생할 때마다 각지에서 토지신에 대한 제사를 드림으로써 신앙으로 발전했다.
성황은 남북조(南北朝) 시대를 거쳐 당(唐)대에 이르러 그 믿음이 더욱 보편화되었다. 후대 도교(道敎)에서도 성황을 그들의 체제에 끌어들여 ‘흉악한 것을 물리치고 국가의 안전을 보우하는 신이며 한 지방의 망령들을 관활 한다’고 주장했다.
송(宋)대에는 전역에 걸쳐 모든 부현(府縣)에 있는 성지에 사당을 세워 성황신을 모셔 제사를 지냈으며, 원(元)대에 이르러 성황신을 한 단계 높여 나라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명(明)대에는 주원장(朱元璋)이 토지신(土地神)의 사당(祠堂)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토지신에 대한 숭배와 존경이 최고조에 달했다. 도(都)의 성황신을 필두로 부, 주, 현 순으로 공식적인 토지신의 서열을 정해주었다고 한다
하화족의 민간 신앙을 춘추필법(春秋筆法)에 끼워 맞춰 서낭(西娘)을 성황(城隍)으로 덮어 씌웠는데도 사대(事大)에 충성을 다했다. 구월산 삼성사를 부숴버리고 아부에 급급했던 사대부들의 행태와 고사서(古史書)를 수거, 분서하고 위작 고려사를 만들어 역사를 호도한 증빙이 밝혀지고 있음에랴.
당파에 의한 계층간 반목과 질시, 불신과 분노, 역사를 외면하고 사대에 맹종한 사대부들의 일신 안녕만을 추구한 복지부동이 남긴 유산이리라. 이제 선인(先人)의 기록에 후대의 왜곡과 곡필은 반드시 고쳐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제 그만 마고의 역사를 우롱하는 처사는 그만 두자.
한국의 민속 신앙에서 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솟대, 장승, 무당(무속 신앙) 등 한국 민속 신앙의 일종이다.
서낭당의 이름에 대해서는 선왕당(仙王堂)에서 나왔다고 보아 고대 한민족 고유의 선도 신앙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중국의 성황당(城隍堂)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존재한다. 조선 시대의 오주연문장전산고 화동음사변증설(華東淫祀辨證說)에는 고대 마한의 소도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 동방 팔로(八路)의 고갯마루 곳곳에 선왕당(仙王堂)이 있는데 이건 성황(城隍)의 오기다. 옛 총사(叢社)의 남은 흔적으로써 중국에서 고개 위에 세운 관색묘(關索廟)와 같다. 건물을 지어서 사당으로 삼거나 숲의 오래된 나무 밑에 흙이나 돌을 무더기로 쌓아서 제사터로 삼기도 한다. 지나는 사람들은 꼭 절을 하고 침 뱉고 지나간다. 실이나 천을 매달아놓거나 종이조각이나 머리카락을 묶어서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돌무더기를 쌓아서 제사지내는 것은 어쩌면 《통전(通典)》에 "마한에서는 귀신을 제사지내는데 소도(蘇塗)를 지었다"고 한 것이 남은 풍속일지도 모른다.【《연번로(演繁露)》에는 《통전》의 '마한에서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소도(蘇塗)를 지어서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매달아두었다'는 기록에 주석을 달아 "소도는 부도(浮塗)와 닮았는데 곧 부도(浮圖)로써 부도는 곧 탑이다."라고 하였다.】
대부분은 영험한 기운을 가졌다는 나무에 장식을 달아 돌을 쌓아놓거나 사당을 지어서 신의 영역임을 표시하고, 신에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로 조성된 일종의 토템이다. 그래서인지 서낭당의 나무를 베면 저주를 받는다는 등의 묘사가 자주 나온다. 근데 지난 세월 동안 도시개발이나 도로건설 등으로 숱하게 베어나갔다.
서낭당의 유래에 대해서는 삼한 시대의 소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북방 민족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중국의 성황묘 신앙이 한국에 전래되어 토착화된 결과라는 설도 있다. 어느 하나를 집어서 그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애초에 같은 뿌리를 가진 민간 신앙이 상호간 교류를 통해서 이래저래 섞인 결과가 서낭당이라고 볼 수 있다. 서낭당이 마한의 소도와 뿌리가 닿아 있다는 것은 이미 조선 시대에 제기된 설로 오주연문장전산고가 편찬되었던 시기에 이미 현재 알려진 모습과 같은 서낭당의 모습이 확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몽골에 가면 '오보'라고 해서 위 사진과 똑같이 생긴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서낭당의 기원이 북방 초원의 유목민족 문화와도 어느 정도 닿아있는 것이 아니냐는 추정이 나왔는데, 이 오보는 초원에서 일종의 이정표 내지 경계 표시선 역할도 하고 있는데, 서낭당의 위치도 대부분 마을 어귀나 입구 혹은 고갯길의 길목으로, "여기서부터는 신의 영역이고 신이 보우하는 곳이니 다가오지 마라"는 일종의 관문지기 같은 의미가 있었다. 어떤 영역의 경계선에 위치해서 그 경계선을 오가는 자들을 감시하고 그 영역을 관장한다는 신격 덕분에 주로 어떤 지역의 수호신과 같은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서낭당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일각에서 제시되고 있는 중국의 성황묘 역시 성황(城隍) 즉 성벽과 해자를 관장한다고 여겨져 왔는데, 실제로 고려 시대 몽골의 침공을 막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여겨진 성황신에게 관작을 하사한 일도 있다.
서낭당(성황당)의 신으로 모셔지는 신들은 단순히 '서낭(성황)님'이라고 부르지만, 신격을 보면 한국이나 중국이나 모두 실존인물들이 대부분인 경우가 꽤 많다. 유명한 강릉단오제의 경우 '대관령국사성황'으로 모셔지는 신이 신라 시대의 김유신 내지 고승 범일 스님이었다고 하고, 부여군 임천면에 소재한 가림성의 성황신이 고려 시대의 명장 유금필이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순천에서도 고려 초기의 인물인 김총을 '순천진례산성황'으로 모셨다. 의성에서는 견훤을 막아 싸우다 전사한 의성부의 성주장군 김홍술을 성황신으로 모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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