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에 토대를 둔 너희의 문화 이야기
(너희가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너희의 자화상)
진정으로 열린 대화를 하기 위한 첫 단계는
자신이 듣고 있는 것을 불신하길 잠시 유보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부탁하건대, 신과 삶에 대해 가지고 있는 너희의 관념들을 잠시 내던져라.
자신의 예전 생각으로 돌아가는 건 언제라도 가능하다.
너희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잠시 옆으로 제쳐두라는 것뿐이다.
너희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그것을 알면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는 앎이 존재할 가능성을 허용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
신이 지금 이 순간 너희와 대화하고 있다는 생각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라.
과거에 너희는
실제로 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 온갖 이유들을 찾아냈다.
내가 부탁하는 건
생각들을 잠시 옆으로 밀어두고,
나한테서 직접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걸로 여겨달라는 것이다.
너희가 좀 더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이 대화의 많은 부분에서 나는 나 자신을 삼인칭으로 지칭할 것이다.
내가 일인칭 단수를 사용해서 말하면
너희가 약간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가끔씩만 일인칭 단수로 이야기하고
(그런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 누구인지 상기시키기 위해서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나 자신을 그냥 ‘신’으로 지칭할 작정이다.
신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것이
처음에는 진짜 같아 보이지 않겠지만,
너희는 ‘참된 자신’과 너희가 만들어낸 환상을 기억하기 위해 여기로 왔다는 걸 이해해라.
얼마 안 가서 이 책을 자신에게로 이끈 것이
사실상 자기 자신임을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너희가 삶의 대부분을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는 내 이야기를 그냥 듣기만 해라.
‘인간의 열 가지 환상’은
지구에서의 너희 체험의 초창기에 만들어낸 것으로
대단히 엄청나고 대단히 강력하다.
또 너희는 그보다 작은 환상 몇백 개씩을
날마다 만들어내고 있다.
너희는 환상들을 믿기 때문에,
환상에 따라 살 수 있게 해주고
그럼으로써 그 환상을 현실로 만드는 문화 이야기cultural history도 만들어냈다.
물론 그것이 진짜로 진짜인 건 아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환상이 흡사 진짜처럼 보이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세상을 실제로 만들어냈다.
이러다가는 ‘허구’는 거짓이고 ‘실재’는 참이라는 것까지 부정하게 될 것이다.
사실 너희는 아주 오랫동안 이렇게 해왔다.
문화 이야기는 세대에서 세대로
몇백 년, 몇천 년을 거치면서 전해 내려온 이야기다.
그것은 너희가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너희의 자화상이다.
너희의 문화 이야기는 환상에 토대를 두고 있어서,
실재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신화를 낳는다.
인간의 문화 이야기는 이러하다.
1. 신은 숨겨진 계획an agenda을 가지고 있다.(필요가 존재한다)
2. 삶의 결과는 불확실하다. (실패가 존재한다)
3. 인간은 신에게서 분리되어 있다. (분리가 존재한다)
4. 충분히 있지 않다. (부족이 존재한다)
5. 너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요구가 존재한다)
6. 그것을 하지 않으면 너희는 벌받을 것이다. (심판이 존재한다)
7. 그것은 영원히 계속되는 천벌이다. (처벌이 존재한다)
8. 따라서 사랑은 조건부다. (조건이 존재한다)
9. 그 조건을 알고 따르는 사람은 우월하다. (우월이 존재한다)
10. 너희는 이것이 환상임을 알지 못한다. (무지가 존재한다)
이 문화 이야기는 너희 속에 워낙 깊이 배어 있어서,
이제 너희는 너무나도 완전하게 이에 따라 살고 있다.
그리고 서로에게 말한다.
이건 “원래 그래.”라고.
여러 세기 동안, 아니 몇천 년 동안 서로에게 그렇게 이야기해 왔다.
사실 이런 환상과 이야기들 주위에서 신화가 자라난 것은 참으로 오래전부터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 몇 가지를 개념화하면,
• 인간은 누구나 결국 죽는다.
•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 전리품은 승자의 것이다.
• 인간은 원죄를 지니고 태어났다.
•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 모르는 게 약이다.
• 신만이 아신다.
이 외에도 똑같이 파괴적이고
도움 되지 않는 많은 것들이 있다.
많은 인간들이 ‘궁극의 실재’와는 관계가 없는
이런 환상과 이야기, 신화에 기초하여 삶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는지 보라.
“우리가 태어난 세상은 적대적인 세상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신에게는
우리가 하기를 바라는 일과 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이 있다.
우리가 그 두 가지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신은 영원한 고통으로 우리를 벌하실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서 최초로 체험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께서 분리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현실 전체의 맥락을 창조하니,
우리는 모든 생명의 근원에서 분리되는 것의 하나로서 그것을 체험한다.
우리는 모든 생명과 분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삶의 다른 모든 것들과도 분리되어 있다.
모든 것이 우리와 분리되어 존재한다.
우리는 이런 걸 원하지 않지만,
그것은 원래가 이런 식이다.
우리는 그것이 다른 식이길 바라고,
사실 그것이 다른 식이 되도록 애쓴다.
우리는, 다시 한번 모든 것과,
특히 남들과 하나 되는 체험을 추구한다.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추구는 거의 본능 같아서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유일한 문제는, 우리를 만족시킬 만큼
남들이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다른 모든 것들
또한 충분히 가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우리는 사랑을 충분히 가질 수 없고,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없으며,
돈을 충분히 가질 수 없다.
행복하고 만족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뭐든 충분히 가질 수 없다.
충분히 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원하기로 마음먹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가능한 한 많이 가지려면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한다.
신의 사랑에서 삶의 자연스러운 하사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그 대가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
그냥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러므로 삶 전체가 그러하듯 우리도 충분하지 않다.
그냥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에 경쟁이 시작된다.
세상에,충분히 있지 않다면
있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우리는 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놓고 경쟁해야 한다.
이 경쟁은 치열하다.
그것은 생존이 달린 문제다.
이 시합에서는 가장 잘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승자는 모든 전리품을 차지하지만
패배하는 자는 지상의 지옥에서 살게 된다.
그리고 죽은 후에
신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서도 패하면,
다시 한번 지옥을 맛본다. 이번에는 영원히.
사실, 죽음은
우리 선조들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해서
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 동산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브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화가 난 신은 이브와 아담을 동산에서 쫓아냈다.
이 신은 그들과 그들의 모든 자손들에게 최초의 벌로 죽음을 선고했다.
그 후로 몸의 삶은 유한한 것이 되어 더 이상 영생하지 않게 되었으며, 삶의 소재들 또한 그러해졌다.
그러나, 우리가 신의 율법을 다시는 어기지 않는다면,
신은 우리에게 다시 영생을 줄 것이다.
신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지만,
신이 주는 보상만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영원한 벌을 내릴 때조차도 신은 우리는 사랑한다.
그것은,우리보다 신에게 더 큰 괴로움이 된다.
신은 우리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참으로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릇된 행동을 한다면 신도 어쩔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우리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그러므로 비결은 그릇되게 행동하지 않는 데 있다.
우리는 선한 삶을 살 필요가 있고, 그런 삶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이 우리에게서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옳고 그른 걸 구별할 수 없다면,
신을 기쁘게 할 수도 없고 화나지 않게 할 수도 없다.
그러니 우리는 그에 대한 진실을 알아야 한다.
진리는, 이해하기 쉽고 알기 쉽다.
우리는 예언자와 교사, 현자,
그리고 종교의 창시자의 말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만약 종교가 여러 개 있다면,
우리가 옳은 것을 골랐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잘못된 것을 골랐다가는 패배자가 될 수도 있다.
옳은 종교를 골랐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해지고 나아진다.
진리가 우리 편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이 상태는
다른 사람들과 실제로 겨루지 않고도
시합에 걸린 상의 대부분을 우리 것으로 주장할 수 있게 해준다.
경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우리를 승자로 선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만 유리하고
다른 사람들은 큰 상을 타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도록
‘삶의 규칙’들을 정하는 건 이런 자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하는 건,우리가 비열해서가 아니라,
그냥 승리가 우리 것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고, 따라서 승자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우리 교도와, 우리 민족, 우리 인종, 우리 성(性), 우리 정파(政派)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승자가 될 자격이 있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서라면 남들을 위협하고,
그들과 싸우고, 필요하면 죽이기까지 할 권리가 있다.
또 다른 삶의 방식,
신이 생각하는 또 다른 것,
더 큰 진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이 있다 해도 우리는 알 수 없다.
사실 우리가 그런 것을 알기로 되어 있는지조차 분명치 않다.
심지어 애쓰기로 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신을 진정으로 알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도 주제넘은 짓인데,
하물며 실제로 신을 알고 이해한다고 선언하는 건 그야말로 불경이 아니겠는가.
신은 알 수 없는 지자(智者)이고,
부동(不動)의 동인(動因)이며
위대한 불가시자(不可視者)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에 가졌던
영생을 우리가 얻으려면,
처벌을 애써 피해야 하고,
처벌을 애써 피하려면 사랑을 받아야 하고,
사랑을 받으려면 조건을 따라야 하고,
조건을 따르려면 진리를 알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우리의 무지는 불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
즉 우리의 문화 이야기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계속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사실 우리는 각자의 믿음에 따라
이렇게 하려고 애써 왔고,
그렇게 해서 현재의 삶과 우리가 창조 중인 지상의 현실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대부분의 인류가
문화 이야기를 짜 맞춘 방식이다.
약간씩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너희가 삶을 살고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고
그 결과를 합리화하는 기본 방식이 이것이다.
너희 중 일부는
이 모두를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너희 모두가 그 중 일부는 받아들일 것이다.
너희가 이런 이야기를
현실의 작용원리로 받아들인 건
그것이 너희 내면의 지혜를 반영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너희에게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너희는 자신에게 그것을 억지로 믿게 해야 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체하기’다.
그러나 이제 믿는 체하는 데서 벗어나
실재인 것으로 옮겨 가야 할 때가 왔다.
이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궁극의 실재’는 지금 세상 사람들이
실재라고 동의하는 것과는 많이 다를 테니 말이다.
너희는 말 그대로
“이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의 일부여서는 안 된다. ”
그런데 너희 삶이 만족스럽다면
그렇게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없다.
그럴 이유가 없을 것이다.
만약 자신의 삶과 지금의 세상에 만족한다면,
너희로서는 현실을 바꾸고 이 모든 ‘체하기’를 그만둘 이유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메시지( ※ 신이 Neale을 통하여 주는...)는 지금 그대로의 세상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 신과 나눈 이야기